오늘날 각종 문헌자료에 백씨의 본관이 수원으로
통합되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수원을 제외한 33개 다른 백씨들은 통합에 합의한 일이
없다.
1997년 정축대동보를 간행하면서 백씨화수회 중앙본부에서
수원백씨 여러명이 모여서 전국의 백씨 본관을 수원으로
통합한다며 회의록을 작성하고 날인 한 바는 있으나
대흥백씨를 비롯하여 여러 다른 본관을 사용하는 파들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동의하지 않았다.
수원백씨는 조선조 말기까지
려말 선초에 보성현감(진보현감)을 지낸
백회(白繪)의 자손 즉 백효삼(白效參), 백효옹(白效雍),
백효연(白效淵)의 자손을 수원백씨라고 하였는데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수원이라는 본관을 사용 하였으니
청주백씨나 경주백씨, 대흥백씨, 남포백씨, 직산백씨,
공주, 부여, 평산, 진성, 대구, 적성백씨에 비하여
역사적으로도 비교가 못되며 오히려 수원백씨가 그곳에서
분파한 것으로 보여진다.
수원백씨의 본관 유래를 중시조 증손인 백휘(白揮)가
대사마대장군의 관직에 오르고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으며 백천장(白天藏)이 원나라에 가서 이부상서에
오르고 본국에 와서 정당문학을 지냈는데 수원백(水原伯)에
봉해져 백씨의 본관을 수원이라고 하였다고 하지만
두가지 설 모두 전혀 근거 없는 후손들의 조작이다.
백휘는 1857년 정사대동보 당시에만 하더라도 관직이
국자진사였고 백천장은 1635년 경기도 화성의 야산에서
백효민(白孝民)과 백홍원(白弘源)이 묘를 발견했을 때
조그만 표석에 천사백천장(天使白天臧)이란
다섯글자만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천사는 원나라 천자의 사신이란 뜻이니 우리 고려의
사람이 아니며 오늘날 족보의 행장 기록인
원나라 관직 이부상서와 고려의 정당문학, 시호 문익,
봉호 수원백, 백이정 문하생 등의 기록은
어떠한 문헌에도 없는 것이며 상식 밖의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서기1857년 최초 백씨대동보 간행 당시의 기록 원문>
白天藏 : 政堂文學水原伯 墓水原後坪龍鳳里旗田酉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