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공과 대학 시절
부산대 조선과에 실패하고 부전역에서 동해 남부선 기차타고 울산으로 향했다.
동해 남부선 기차는 생전 처음으로 타보는 기차였다.
해은대-송정-기장-좌천-월래- - - 울산.
울산역에 내리니 아주 한가 했다.
울산 공대 가는 길을 물으니
태화강 다리 옆으로 가서 기다리라 한다.
시내버스가 30분에 한대 올 정도 이었다.
버스타고 가서 원서 적어서 접수 시켰다.
본고사는 따로 없고
영어, 수학, 과학 3 개 점수로 뽑았다.
얼마 후 합격 자 발표 보러 갔었다.
그 당시에는 고향에서 당일에 울산까지 갔다 올 수가 없었다.
중간에 대구나 김천의 여인숙에서 한 밤 자야 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집에 도착하나 아부지가 어떻게 되었나 묻길래 이번에는 됐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등록금 이었다
입학금 교복 합해서 16 만원 정도 되었는데
소 한마리 값이 었다.
그런데 그 돈을 며칠 안에 구해야 했다.
엄마가 8 킬로 떨어진 외가집에 갔다가 안되고
여모 이모집에 가서 겨우 구했다.
그 다음날 울산으로 그 돈 가지고 가서 등록했다.
입학식 때는 고무신 신고 두루마기 입고 아부지가 따라 오셨다.
입학식 끝나고 부산에서 사시는 작은 아버지 집에 들렸다가 신입생 공단 견학 하는 날
따라 갔다가 돌 아 가셨다.
울산은 바닷가라 거의 항상 바람이 분다.
처음 방을 얻은 삼호 에서 태화교 까지 유명한 왕대나무 대밭이 10리 가까이 펼쳐 진다.
태화강에서 준설한 모래들이 밤새도록 부산으로 다녔다.
태화강은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몸살을 앓고 있었다.
태화강 폭은 김천의 감천과 비슷하거나 조금 넓지만
감천 처럼 백사장이 없고 돌맹이 뿐이고
물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항상 흘러 간다.
그 태화강 상류에서 목욕도 하고 수영도 하였다.
태화강에는 봄날 비온 후에는 가무치만한 황어가 일품이다.
봄비 나리고 큰 물 지나고 나면 팔뚝 만하 황어가 바다에서 올라 온다.
주로 투망으로 잡고 가끔 낚시로도 잡는다.
회로도 먹고 매운탕도 해먹지만 나는 별로 먹어 보지 못햇다.
가을철이 가까이 되면 은어가 올라 온다.
은어 낚시는 가짜 낚시이다.
울긋불긋한 낚시 바늘에 미기를 달지 얺는다.
은어는 크다란 번찍이 만하다.
이것도 회로 먹으마 좋다.
투망으로 잡아야 많이 잡는다.
태화강의 울산대학 근처 삼호에서 자취 생활을 했다.
그 근처의 태화강은 굽이치는 곳은 주인 집 할머니 말로
명주실 한타래가 들어 간다는 소가 있다.
내 생각으로는 깊이가 5- 6 미터 되는 곳을 과장 표현한 것이라 생각 된다.
태화강 상류에는 대암댐과 사연댐이라는 커다란 댐이 2개 있다.
1960년대 공단 만들면서 공업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댐이었다.
그 공업용수관이 매설된 비포장된 길을 여러번 걸어 다녔다.
도록 폭은 약 5미터 정도 이고 다니는 차량도 없어서 한가 했지만
비오는 날은 도로의 도로의 흙이 도자기 원료인 쪼대라는 진흙으로
고무신 바닥에 쩍쩍 들어 붙어서 다니기 힘든 길이었다.
책은 개인으로 학교 서점에서 사는데
1학년 때는 Integral(미분), Differential(적분), Phyical , 그리고 화학이 주된 과목이고
양념으로 국사, 국어 주 1시간, 영어 2시간, 교련 2시간 합계 21 시간 정도 된다.
실험 대학 이라 해서 졸업학점 140 학점에 주 5일 수업이다.
2학년 때는 Material(재료역학), Thermdynamics(열역학), 미분 방정식 등을 배웠다.
재료역학, 열역학은 단위가 fps 단위가 되어 있다.
전자 계산기도 없는 시절에 로그를 응용하여 계산하는 계산자가 있었다.
그러니 책은 영어로 되어 있는것 외에
단위가 인치, 피트 로 되어 있으니 머리가 핑핑 돌 지경들 이었다.
1인치는 2.54 센치, 1 피트는 12인치.
외국책을 해적판으로 사용하다가 보니.
열량도 칼로리가 아니라 BTU 단위이다.
많은 학생들이 혀를 껄껄 찬다.
그 해 기계 조선 합해서 120 명 정도 되는데 열역학은 듣기로 30 명 정도 F 맞은거 같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75년 2학년 때는 전국적으로 데모를 마이 하니까
1학년 때는 출석도 부르지 않았는데
출석도 부르고 수시로 역학은 시험을 쳤다.
2학기 한학기에 재료역학은 5번인가 쳤길래 마지막 시험은 누군가
거부하자고 선동해서 시험을 치지 않았다.
고향에서 성적표를 받아보니 "E"가 떳다.
집에서 형님이 야단이다.
없는 돈 들여 공부 시켜 놓으니 낙제 하였다고.
방학동안에 공부하여 방학 끝나고 재시험으로 마무리 했다.
그 과목은 못받아도 비인데 좀 아까왔다.
재시험은 C 이상 주질 않는다.
공대에 갈것 같았더라면 고등학교 때 물리 화학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공대에서는 필요도 없는 사회, 국사 같은 과목을 좋아하고 시간도 마이 투자 했으니.
가이드 없이 무식하게 공부하면 그럴수 밖에 없다.
3학년 때는 조금 나았다.
유체역학 말고 어려운 것은 2학년 때 거의 했으니.
그리고 기계, 조선 분리하니
조선은 우리가 2회로 11 명이다.
샌드위치 시스템 이라고 우리 선배들은
3학년 2학기는 학교에 오지 않고
울산 근처의 회사로 6개월간 출퇴근 한다.
우리 때는 그런게 없어지고 우리 과만
현대중공업에 3학년 2학기 동안
매주 목요일 하루씩 현대중공업으로 출근했다.
학교 서울대 출신 교수님 선배님이 우리가 해야할 과제와
일들을 지시한다.
레포트 제출하여 3 학점을 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쉽게 공부하고 학점만 좋은 것 받기 바란다.
그것은 큰 오산이다.
성실히 해야 졸업하고 필요할 때 써먹을 수 있다.
가령 공과대학에는 많은 실험 시설들이 있다.
과제만 던져주고 결과 제출 하라는 지시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 지나간 레포트를 빼껴서 내고 빨리 갈 준비만 한다.
값비싼 장비들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빼껴서 낸 것은 살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험한 것은 머리속에 오래간다.
그리고 직장에서 설계하면서 요령 피우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특히 신앙 생활을 하는 자들은.
설계를 하는 사람들은 도면에 잘못 된게 있으면 당장 들통난다.
도면은 80점, 90점도 아니고 항상 100점이 되어야 한다.
머리속에 외워 가지고 하는 것도 있지만 항상 다른 자료들과 비교하여 검증해야만 한다.
거짓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설계부서에 적당치 않다.
설계부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거짓말 하지 않고 사는 습성을 길러야만 한다.
숨쉬는 소리도 믿지 못할 사람은 설계부서에 절대 가서는 안됩니다.
못 베겨납니다.
3학년 당시 학교는 울산 시내에서 4 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나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잘 몰라도 토요일에는 수업이 없으니 금요일 저녁에 시내에 갔었다.
다니다가 보니까 울산제일교회에서 여전도회 연합회 주최로 부흥회를 하고 있었다.
그기에 참석 했다가
성경 읽기 작정 시간이 있었다.
여러장 읽기는 안될 것 같아서 하루 3장 주일날 5장에 손을 들었다.
1976년의 일이 었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켜 오고 있다.
주로 아침에 일어 나자 마자 읽는 습관이다.
군대 있을 때에는 단체 생활을 하니
어려울것 같았다.
하지만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다.
일단 중학교 때 어렵게 구입한 포켓용 성경을 윗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괜찮았다.
훈련소 입대가 5월 달 이었으니
아침 기상 시간이 6시이다.
군대는 늦게 잘수도 없지만 또 일찍 일어나 다닐 수도 없었다.
보통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성이어서 5 시쯤 눈이 떠 지면
날이 밝아서 성경을 불 켜지 않아도 읽을 수 있었다.
자대 배치 되고는 어디서 이든지 맘만 먹으면 읽을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정 시간이 없으면 화장실 안에서도.
내무반에서는 읽을 분위기가 못된다 여기 저기서 잔소리들이 많으니.
1 년 쯤 후에는 휴가 갔다가 오면서
서울의 종로 서적에 들러서 조그만 신약 영어 성경을 구입해서 제대할 때가지 사용했다.
그런 것은 글자가 작아서 이제는 읽을려면 눈이 아프다.
그렇게 군대에서는 신약만 읽다가 제대하고 그 만큼 구약만 읽었다.
4 학년이 가고
졸업이 가까이 온다.
우리는 졸업 논문 대신에 도면을 그려서 제출하여 심사를 받았다.
처음에는 3개월을 우습게 봤는데 그게 아니다.
그 당시 제출한 도면을 요즈음도 생각하면 너무 유치한 수준이다.
졸업 논문을 대신할 도면 설계는 다른 공부 안하고
2-3 개월은 잡아야 제대로 될 것 같은데
다른 공부 하면서 2-3 개월은 너무 짧은 기간이다.
그것도 길다고 농땡이 부린다면 그것은 사회에서도
별로 필요없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만다.
1978년 2 월
새로지은 본관에서.
지난해에 울산 갔다가 모교 가보니
우리가 공부했던 건물 3 동은 해체는 않고 골동품처럼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고
졸업식 했던 그 당시 신관 6층도 늙은 건물 이더군요.
학생들이 한학년 360 명에서 3000 명 가까이로 늘었으니.
이제는 아기 자기한 맛이 없어요.
우리때는 공과 계통만 거의 없는게 손꼽을 정도로 다 있었는데.
2년제 울산전문 학교도 같은 곳에 있었고.
재단 이사장이 이후락에서 정주영으로 바뀐 후
졸업식을 하였다.
군대 가고 약 300 명 정도
정주영과 처음이자 마지막 악수를 하였다.
아부지도 까막 고무신 신고 오셨다.
같이 찍은 사진 고향에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