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고종의 시대는 외국인들의 자원 수탈과 노동자의 착취가 끊임없이 이루어진 가슴 아픈 때이다. 강경도 다른 지역과 다르지 않다.
오카쥬사쿠의 필두로 수많은 일본 상인이 몰려 들어와 일제의 자본과 서양식 기술을 접목한 근대물질 문명을 앞세워 주민들의 오랜 전통의 유교, 불교를 일제 식민지 교육으로 변질 시켰다. 그 하나로 1905년 4월2일 일본인자녀들을 위한 사립 보명학교 2년제 개교는 1907년 4월 7일 공립 강경보통학교 교명개칭 4년제로 연한을 늘리고 1920년 3월1일은 수업 연한을 6년으로 그러다 1937년 6월 30일 강당 준공 1938년 4월1일 강경중정 공립심상소학교 교명 개칭 1941년9월1일 강경중정 공립국민학교로 교명 개칭 1946년 3월1일 강경제일공립국민학교로 개명 개칭 현재의 강경중앙 초등학교는1949년 4월1일 교명으로 바뀌었다.
황산리의 임이정, 죽림서원, 덕유정, 용암사, 용왕제 등은 주민들의 사고와 마음의 안식 근본 임을 옥녀봉 신사 준공과 일본식 공원 조성으로 봉화대와 수운정의 파괴로 이어졌다.
여기에 강경 상권을 빼앗기 위해 어업보호취체규칙(漁業保護取締規則 1935년)을 만들어 강경 객주들의 결속된 노동조합을 무너트리려 하였다. 어업보호취체규칙은 어획물은 한 장소에서만 판매하도록 하는 즉 해상에서 고기를 다른 배로 옮겨 싣지 못한다는 것으로 강경주민, 객주의 상권을 일제의 손안에 쥐려는 술책으로 강경과 마산에서만 적용한 법이다.
1-2 한국침례교회의 씨앗
말콤펜윅(MALCOMC. FENWICK 한국이름 편위익1863~1935년)캐나다 대학 기독청년회에서 독립 선교사로 1889년 12월8일 한국에 파견 인천에 도착해 선교 할동을 하다 1893년 캐나다로 귀국해 미국으로 건너가 1896년 보스톤 클라렌드(clarendonst) 침례교회에서 씽(S>Bting)을 만나 대한제국의 나라를 설명해 씽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씽의 외동딸 이름의 엘라씽 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를 조직해 1895년 보스톤 클라렌드 교회에서 선교사 교육을 마치고 안수한 폴링(E.C.PAULLING) 부부와 아만다 가네린(AMANDA GARDELINE)양의 3인이 제1진 한국 선교단으로 파송 하였다. 인천에서 강경으로 배를 타고 오가며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씨를 만나 전도하여 1896년 2월9일 강경 북옥동 136번지 지병석씨 자택에 강경침례교회를 대한제국 최초로 세우고 지병선씨와 부인 천성녀씨 그리고 폴링부부, 아만다 가데린 다섯 명이 예배를 드림으로 한국 침례교회의 첫 번째 교회예배가 되었다. 그 후 옥녀봉 정상부분에 약 4261평의 대지에 교회가 위치했는데 일제치하에서 일본인의 신사를 지으려고 교회건물을 강제적으로 철거 했다 그래서 교회가 폐쇄된 것이다. 이때 전1943년 까지는 교회가 있었다 한다.
1-3
강경주민과 상인들의 지켜온 터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기 전부터 강경의 상권과 지역의 토지에 관심히 유난히 많았다. 그 후 강제 한일 합병 후 일본의 근대문명과 막대한 자본 정치적 권력까지 동원한 일본인은 강경주민과 상권을 빼앗기 위한 일들을 무수히 하였는데 그중에 수산물 유통 분야만큼은 일제의 욕심대로 순순히 빼앗아 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오래 동안 강경의 수산물 유통에 대한 강경지역 주민과 객주(客主)라는 영업의 독특한 전통방식이 똘똘 뭉쳐진 단합된 힘이 일제가 만든 어업조합의 결과적 산물을 이겼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러한 강경의 힘을 무너트리기 위해 기존 객주 체계를 바꾸려고 일본에 동참하는 상인과 지역 몇몇의 유지와 협력하여 수산물을 위판장 거래라는 법을 만들고 한 장소에서 판매하려는 술책을 하였지만 강경의 주민, 객주의 단합된 힘이 어부와, 상인들 그리고 억울한 법에 대한 신판인 행정소송 승소에서 강경의 상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을 동원한 억압적 통제는 강경주민과 객주들에게는 고통의 나날 이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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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에 저항
강경지역은 논산평야와 김제평야의 사이의 곡창지역과 금강의 좋은 자연적 지리가 어우리는 살기 좋은 곳으로 얕은 봉우리가 있다. 옥녀봉, 채운산이 바로 그곳이다.
금강을 내려다보는 옥녀봉은 채운산에 비해 더 작은 규모의 봉우리지만 역사적으로 전설적으로 강경지역민의 사랑을 받는 장소로 각인되어 있다.
옥황상제, 선녀를 이야기하는 곳.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알리는 봉화대. 풍류를 즐기는 수운대 기원을 알리는 용왕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절, 기독교(침례교회)의 첫 교회 등 강경주민과 강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옥녀봉에 일본제국은 신사를 지으며 많은 건물과 상징성을 훼손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에 충성하는 황국시민이라는 사상을 심어 일본 왕에게 인사하는 미신적인 행동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였지만 의로운 강경주민, 성결 교인이 참배 거부라는 행동을 일제침략기에 목숨을 걸고 전국 최초로 하는 결단을 한일도 강경주민의 나라사랑과 불의에 대항하는 용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