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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봉변당할 뻔 했다
뇌성벽력에 이은 소나기에 놀라 달아난 잠이 돌아오지 않아서 불러오느라 애를 먹었다.
새벽잠이 달콤했으나 주인네 오기 전에 집 비워주는 예의는 차려야 하지 않은가.
남은 먹거리를 데워먹고 말끔히 정리하는 등 출발 준비를 완료하고 주위를 살폈다.
휴전선 접경 경기도 4개시군(김포, 고양, 파주, 연천)이 공동으로 개발한(?) 평화누리길
중 파주의 마지막 길(넷째길)이 끝나는 지점이 황포돛배의 두지나루다.
황포돛배는 임진강 두지나루의 전유물은 아니다.
웬만한 강에는 황포돛배의 추억이 어려있다.
옛 주요 운송수단이며 교통수단의 하나였으니까.
다만, 파주시가 타지역에 비해 재빠르게 선수를 친 것이다.
조선시대의 원형을 그대로 복원했다는 황포돛배를 임진강에 띄운 것.
"분단 50년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던 임진강에서 60만년 전 형성된 높이20m 임진강
적벽의 수려한 절경을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며.
두지나루에서 자장리까지 돌아오는 코스다.
서둘렀지만 8시가 임박해서 출발했다.
작년 9월에 공사중 상판이 무너져 2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는 신장남교.
우여곡절 끝에 개통되었다는 다리를 거의 건너갔을 때 달리던 차량 2대가 저만치 앞에
멈춰섰고 앞차에서 내린, 안전모를 쓴 한 중년남이 길을 건너서 내게로 다가왔다.
찔끔하는 몸짓이 있은 후 공손하게 말을 걸어왔다.
"어르신, 어디를 사진찍으셨어요?"
두지나루를 나선 후 높은 위치에서 황포돛배 나루 일대를 디카에 담으려 했으나 자욱한
물안개에 덮혀서 포기하고 배터리를 교환하느라 좀 지체했다.
그 때 나루 옆 강가의 동산에서 한 남자가 나를 응시하는 듯 했는데 그가 자기였단다.
"공사 현장이라면 지워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내 경위 설명을 들은 그는 굽실거리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한 후 일행을 끌고 사라졌다.
내가 젊은이였다면 떼로 몰려들어 윽박지르고 카메라를 빼앗아 검색했을 것이다.
그러려고 여럿이 달려왔는데 늙은이라 찔끔했고 공손해졌을 것이다.
두지나루 일대에서 어수선하게 벌리고 있는 공사판은 구 장남교의 철거작업장이라는데
시공회사가 상판 붕괴사고로 인해 지나치게 예민해진 때문 아닌지.
하마터면 이른 아침부터 봉변당할 뻔 했다.
실은, 신장남교 중간쯤에서 공사현장을 찍었는데.
고랑포구와 경순왕릉
연천길은 경순왕릉에서 남방한계선 아래 78번도를 따라 상승전망대까지가 1차 목표다.
간밤에 안내받으며 신바람 내면서 정한 코스다.
경순왕릉으로 가는 길이 확.포장공사로 인하여 혼란스러운데 이 길을 피하고 유적지를
경유하는 일석이조의 길이 열렸다.
사적 제467호 연천 호로고루(漣川瓠蘆古壘) 성지(城址)를 거쳐 가는 임진강 둑, 농로다.
도상(圖上) 계획보다 현장학습이 중요함을 다시 확인하며 한가롭게 농로를 걸었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 대지 위에 독특한 강안평지성(江岸平
地城)이 축성되어 있다.
당포성(사적 제468호/미산면),은대리성(사적 제469호/전곡읍)과 함께 연천땅의 고구려
3대성중 하나라는 호로고루성이다.
"임진강이 국경하천역할을 했던 삼국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학술적 가치가 높은 귀
중한 문화유적"이라는 것이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호로고루는 일대의 임진강을 삼국시대부터 호로하(瓠蘆河)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나.
성에 올라 어제 경유했던 강 건너 남쪽의 초원마을을 살펴보았다.
경순왕릉이 보인다는 전망대 위치도 가늠되었다.
삼엄해도 황포돛배 관광객에게는 주상절리라는 저 돌출부에 접근하는 특혜를 준다.
DMZ 안보관광이라는 이름으로 묘하게 장사하는 기술도 개발되었다.
나같은 짠돌이(?) 늙은 길손은 당연히 찬밥이다.
지뢰 공포심을 자극한 경흥로 비무장지대 이후 또 지뢰밭 조심로를 걷는다.
어제 지나온 장좌리(파주 적성면)와 연결되었던, 명성 높던 고랑포구(高浪渡,皐浪渡)가
격리 수용되어 있다.
임진강에서 가장 번성한 포구의 하나였다는 고랑포.
서해안에서 조류를 타고 거슬러 올라온 조기, 새우젓, 소금배들이 장단의 특산물인 콩을
비롯해 곡물, 땔감과 교역하던 곳,
교통 편리한 지리적 이점으로 경기북부지역 농특산물의 집하장이었던 곳이 지금은 영어
(囹圄)의 몸처럼 되었다.
오호 통재로다, 남북 분단이여.
옛 나루의 명성은 간 데 없고 갈대숲만 무성하게 우거지다니.
외진 곳에 자리잡은 경순왕릉.
당당하지 못하게 고구려를 정복했으나 하필 그 고구려땅에 묻혀있는 신라 최후의 임금.
경주땅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라니까 더욱 아이러니 같기만 하다.
개경에서 세상 뜬 경순왕을 경주로 운구중 고랑포에 당도했을 때 경주의 민심을 우려한
고려왕실의 저지(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로 고랑포 북쪽 언덕에 묻히게 되었다나.
정립(鼎立) 관계였던 백제의 흔적은 연천땅에 없는가.
민족의 통일은 오직 가슴으로만 가능하다
여기까지는 150% 목표 달성이다.
그러나, 연천의 1차 목표도 여기에서 끝났다.
고집 센 늙은이가 78번 길 찾아 헤매다 황금시간 다 버렸다.
지역인들의 설명은 외면하고 지도에만 있을 뿐 없는 도로를 찾느라 헛고생만 실컷 했고,
백주에 링반데룽(Ringwanderung/環狀彷徨)에 걸린 사람처럼 맴돌았으니까.
파주의 그 사람은 왜 그런 황당한 안내를 했을까.
그의 안내가 황당한 것이 아니고 내가 자의적으로 오버한 것이리라.
연천의 안내도를 찬찬히 들여다 보며 내린 결론이다.
멀찍이 떨어진 곳곳의'민간인통제구역' 표시는 보지 못하고 남방한계선 따라서 그려진
도로만 따라다녔으니.
고랑포 저지선 앞에서 다시 시작했다.
당장에는 백학으로 가는 372번지방도로가 가장 인접한 길이다.
사미천(사미천교)을 건널 때 강변 백사장에는 야유객들의 흥이 무르익어 갔다.
어느새 정오를 훌쩍 넘겼으니 한나절을 공친 것이다.
전동리를 지나다가 옥호 '개성가는길'에 이끌렸다.
'가정식백반'이 이즈음의 시골음식 치고는 드물게 맛깔스러워 신나게 먹었을 뿐인데 밥
한 그릇을 더 내놓는 인심 후한 집이다.
개성은 전동리의 북쪽이 아니고 서서남이다.
내가 걷는 길의 반대 방향, 경순왕릉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이다.
'개성가는길' 옥호의 내력은 내 모르나 개성길이 열리기를 바라거나 열리리라 기대하는
뜻이 담긴 것 아닐까.
서울의 반절 길이며 통일이 되면 잠시 다녀오는 짧은 나들이길에 불과할 길이다.
민족의 통일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며 머리에서는 통일이 결코 나올 수 없다.
오직, 가슴으로만 가능한 통일을 머리로 하겠다는 것은 반(反)통일의 다른 표현이다.
이북으로 넘어가려 하느냐
주인의 설명을 다시 듣고, 마음 비우고(터무니없는 욕심 버리고) 새 기분으로 일어섰다.
석장천을 건넌 후 박진장군(朴晉/1560~1597)의 묘소에 들렀다.
박진은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지만 어이없게 죽은 장수라 기억하는데 그의 묘소가
걷는 길의 지근에 있어서.
경기도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된 문화재인데 옛 고관대작들의 공동묘지같은 느낌이다.
그는 정유재란때(1597/선조30년) 명나라 장수(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당해 그 후유증
으로 사망했는데 명예롭지 못한 일이기 때문인지 언급이 거의 없다.
명군의 행패가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입증하는 중대한 사건인데.
삼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명군 장수로 부터 당한 수모로 미루어 그 정도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박진장군은 일본 장수 사야카(沙也可)를 귀순하게 한 주인공이다.
임진왜란때(1592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이었던 사야카는 높은 수준의
우리 문물을 흠모하여 박진(당시慶尙道兵馬節度使)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귀순 후 많은 전공을 세운 조선이름 김충선(金忠善)이다.
백학면소재지에서 371번도로 이정표 따라 마냥 올라갔으나 이번에는 민간인이 막았다.
이북으로 넘어가려 하느냐고 겁을 주었다.
이 길이야 말로 외지의 보행자를 용납하지 않는 삼엄한 길이라는 것.
군부대 주변에 민간인 집이 더러 있기는 하나 주거용 주택이 아니고 모두 축사들이다.
되돌아 나와 또 걸었으나 보람도 없이 민통선이다.
상승전망대 길은 걸어서는 얼씬도 할 수 없다.
월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걸어서 철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은 3번국도 외에는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종일 헤맨 꼴이다.
정류장이 아닌 군남면의 어느 지점에서 탄 버스가 긴 시간 돌고 돌아 전곡까지 갔다.
결국 연천군 전곡읍 진곡리의 '전곡 금강산 보석 불가마 사우나', 찜질방에서 마감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