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섬진강을 떠나 영산강으로 U턴
내가 묵은 곳은 마을 게이트볼(gateball) 경기장 부속 정자다.
13c경 프랑스 남부의 농민들이 즐기던 크로케(croquet)가 17c에 영국으로 전해졌는데
일본에서 발전하여 게이트볼이 되었다는 구기(球技)다.
나는 해본 적 없으나 전국 농촌의 상당수 마을에 경기장이 있으며 고령남녀들이 즐기는
것을 목도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학령기아동의 감소로 폐교된 초등학교건물은 순창군노인복지센터(노인전문요양원)로,
운동장은 게이트볼경기장으로 탈바꿈한 듯.
48년간 2.60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면 연평균 54명 이상이 졸업하였으며 학생 총수가
320명을 상회하는 학교였다.
1970년대 이후 격감현상을 보였으므로 전성기에는 2배 이상이었을 것이다.
시골학교는 젊은이의 도시집중으로 속속 강등, 폐교의 길을 달려가고 도시학교는 산아
제한, 출산기피 현상으로 콩나물시루라는 불명예가 절로 해결되었다.
섬진강을 떠나 영산강으로 U턴하는 날이다.
당초의 일정은 임실 섬진강생활체육공원에 도착한 후 유풍교로 되돌아와서 영산강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포기하려 했으나 화개장터에 도착하게 됨으로서 수정하게 된 것.
"앞에는 섬진강물이 흐르고 뒤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흘러내려와 행가리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향가리라 하였다"는 마을.
향기로운 섬진강물과 아름다운 옥출산/佳山)을 합성해 향가(香佳)라 했다는 안내판은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
섬진강길 향가유원지구간은 공사중이므로 논길을 이용해야 하며 대풍교를 지난 후에는
경천과의 합류지점에서 경천을 따라가 유풍교에서 P턴한다.
나는 유풍교에서 경천둑을 따르는 영산강길을 택했다.
경천(鏡川)은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의 산성산(호남정맥)에서 발원해 순창읍을 관통하는
섬진강의 첫 지류 하천(20.53km)이다.
전곡교를 건넘으로서 풍산면(두승리)에서 유등면(건곡리)의 둑길을 걷게 되었다.
메타세쿼이어길까지 25.5km.
영산강으로 가려면 얼마 후에 경천을 떠나 사천을 따라야 한다.
상촌교에서 다리를 건너 사천(沙川)의 왼쪽 둑을 따르게 되며 풍산면으로 회귀한다.
가잠교(상촌리), 성자교(성자리), 용내교(용내리)를 지나서 27번국도를 지하통로로 P턴
하면 반월쉼터다.
곡순로(순창 대정교차로~곡성 옥과면) 반월교 옆 쉼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
서쪽에 있던 풍산면 소재지가 북쪽으로 위치를 바꾼 지점이다.
섬진강 합류지점에서 7.7km라면 보행자에게는 도중에 쉼터 하나쯤 필요한 거리라 하겠
건만 자전거길이므로 할 말이 없다.
고담교, 반월1교 지나 '범죄없는마을' 표석의 주인 덕산마을 정자의 인력에 끌려갔다.
바람목인지 시원한 바람에 졸음이 와서 벌렁 누워 잠시 오수에 빠져있었던가.
땡볕 논에서 일하던 초로남이 새참으로 커피를 마시러 나왔나.
부인이 내온 커피를 마시며 나를 깨웠다.
"이 더위에 어디를 가시는지요? 영감님도 한잔 하시지요"
고맙지만 못한다고 정중히 사양했으나 군침이 돌았는데 매우 드문 일이다.
한번 입에 대면 예전으로 돌아가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안마시는 것 뿐인 커피.
카페인 중독에서 탈출하는 투쟁이 얼마나 격렬했던가.
전에는, 농촌의 새참은 으레 밥과 막걸리였으나 지금은 커피로 대체되었다.
밥과 막걸리 힘으로 일한다던 그 시절은 과거완료형이 되어버린 것.
지방질 분해에 특효가 있는 커피, 우리의 식생활에 과연 바람직한 변화인가.
백두대간을 북상하고 남하할 때마다 내게 맥주는 1병 이상 주지 않고 막걸리를 내놓던
매요리(지리산) 구멍가게의 쭈그렁 노파 생각이 수시로 간절하다.
맥주의 이문이 더 많은데도.막걸리 마셔야 고남산(남하),시리봉(북상)을 넘을수 있다며.
지(知)는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으나 감동시키는 힘은 덕(德)이다
덕이 산같은 덕산(德山)마을의 덕산정 정수기에서 찬물을 가득 받아가란다.
이런 마음씀이 우리네의 전통적 인심이건만 왜 돋보일까.
정자 사용료를 받거나 외지인의 정자 사용을 금지하는 마을이 생겨나기 때문일 것이다.
덕산마을 덕산교, 호성교(호성리), 안곡교(안곡리), 독보교(송두리), 유정교(소촌, 함촌),
도치교(도치리), 순정교(순정리)를 지나면 금과면(金果) 수양리다.
고산교(수양리) 지나 수양교(수양리) 건너편에 자전거길 쉼터가 있으나 피서에는 마을
정자, 대봉정(大鳳亭)에 비해 열악하다.
마을 터가 유지앵소(柳枝鶯巢/버드나무 가지에 지은 꾀꼬리집으로 명당을 뜻함)라 마을
이름을 수앵정리(垂鶯亭里)라 했는데 일제의 행정개편때 수양리(水楊里)가 되었단다.
가가호호 공무원과 많은 인재를 사회에 배출해 마을을 더욱 빛내고 있으므로 수앵리(垂
鶯里)로 환원해야 할 것이란다.(碑文記요약)
인재를 많이 배출한 것은 경하할 일이지만 그 많은 인재들이 우리 글에는 취약한가.
2007년 3월부터 6년 이상 '인제'로 서있으니 말이다.
가가호호 다음에는 '마다'가 뒤따라서도 안되고 문법도 맞지 않은데.
문장구조는 개성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문법은 통일되어 있으며 오자(誤字)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교정을 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고령자들도 내외를 하는지 할머니경로당과 할아버지경로당이 따로 있단다.
그렇다면 정자도 그래야 할 텐데 정자는 합동이다.
그보다, 놀라운 점은 면이 다르다 해도 이웃마을에 다름 아닌데도 덕산마을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데 까닭이 무엇일까.
인재도 많고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면 금상첨화라 하겠으나 인재는 많으나 냉랭한 마을
보다 인재가 없어도 인정 많은 마을이 살기 좋은 마을일 것이다.
지(知)는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으나 감동시키는 힘은 덕(德)이니까.
무정한 지식보다 무지한 덕이 더 강하다는 뜻이다.
여러 노파가 모인 정자에서 라면을 끓여먹을까 했으나 냉기가 감돌아 일어섰다.
내가 밉보였나.
도로(730번지방도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식당이 있다 해서 가보았으나 금과면 소재지
한하고 가야 한다니 이럴 수가.
발산리 입구에서 자전거길인 사천둑으로 돌아갔다.
사천둑변에 있는 동전마을(銅田)정자 '모의정(慕義亭)'에서 라면을 끓여 간밤에 대가리
에서 싸준 반찬과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더위에 지쳐가는가 오토바이가 안쓰러운지 포스트맨도 시동을 끄고 올라왔다.
시비하러 왔나 했던, 자전거를 몰고 온 영감은 라면먹는 늙은이에 대한 연배의식인가.
반찬은 없어도 자기 집에 가서 밥을 먹지 않겠느냔다.
고맙게 먹은 걸로 하자고 사양하고 일어섰다.
마을 길가에는 설진영 서실(薛鎭永書室1869~1940/전라북도 기념물 제96호)이 있다.
1991년, 뒤늦게 건국훈장(애국장)을 받은 애국지사다.
의병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하다가 한일합방 이후에는 아미산 남쪽인 여기에 이 서실을
열고(1910년) 학문연구와 애국지사 배출에 온 힘을 다 바쳤다는 설진영.
일제가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내린 1940년의 창씨개명령에 항거,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성을 고칠 수 없다며 투신 자결했단다.
의를 사모한다는 모의정은 그와 관련된 듯하며 물 얻으러 간 집에서 자진해서 냉장고의
찬물을 주기도 했는데 '국가유공자의 집 설진원' 문패로 보아 가족관계인 듯.
이른바, 뼈대있는 집의 다른 점인가.
마을이 설씨를 비롯해 박(朴), 김(金), 가(加) 등 4씨의 집성촌이란다.
예전엔 부촌이었다지만 지금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맘에 든 것은 마을찬가 '천년의 땅'.
<막힌 물은 예서 흐르고 / 끊어진 길은 마침내 이어지고
떨어진 씨앗은 숲을 이루며 / 천년 고목에 꽃은 활짝 피나니
샘물은 천년을 마르지 않아서 / 어머니로 천지만물이 다 배부른 땅
여기에 사람의 길이 비로소 열리며 / 우주만믈의 이치가 참으로 섰으니
천년에 천년을 더하여도 / 무변무궁할 신화(神化)의 땅이여 / 온 사람이
너로 고루 살리라.>(설정환)
너절하게 늘어놓는 것보다 간결하고 깨끗한 기분이다.
하마터면 잊고 지날 뻔한 호남정맥
호남정맥을 탈 때도 순창은 오지중 오지라 생각되었다.
복흥과 쌍치, 추월산, 가마골, 영산강 발원지 용추봉 등 동족상잔의 상흔이 깊은 곳이다.
순창땅에 들어선 후 설산, 서암산, 봉황산을 지날 때도 사천이 봉황산에서 발원해 금과
풍산 양면 곡창의 물줄기인 것을 몰랐다.
교량이 유난히 많은 경천과 사천을 걸으면서 비로소 알았으니까.
동전교(동전리), 만촌교(만촌리), 남계1교와 남계교(남계리)를 지날 때 친환경 무농약
파란 들판이 정겨웠다.
사천을 벗어나 지방도로를 빌리는 자전거길이 호치마을 앞을 지나 장장리에 이르렀을
때 조금 전에 내 앞을 거슬러 갔던 쌍용자동차 코란도가 다가왔다.
금성면(전남 담양군) '방범순찰' 업무용차인 듯 비상등을 장치한 차의 운전자가 금성면
소재지까지 간다며 타란다.
늙은이에게 봉사하겠다는 마음씨겠거니 하고 자전거 전용길 앞까지만 부탁했건만 그는
길을 모르는 나를 영산강 대곡교 앞에 내려놓았다.
메타세쿼이어길이다.
그의 지나친 서비스가 또 늙은 길손을 더 힘들게 했다.
나를 알 리 없는 그는 늙은이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그랬을 뿐인데 원망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이 구간을 생략하고 메타세쿼이어길을 걸을 수 있는가.
즉시, 대곡교 앞에서 영산강 발 섬진강 행 역방향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영산강을 거슬러 와룡교 앞에서 이정표 따라 와룡마을로 들어섰다.
영산강 자전거길 방향 화살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섬진강방향 화살표를 주시하며 걷게
된 어이없는 길이 되었다.
비내동 버스길이다.
버스길에서 벗어나 공사중인 담양~순창간 도로의 교각 밑을 통과해 대나무테마공원을
향해 오르는 길이 계속된다.
공원 입구에서도 오름은 계속되고 봉서리 느티나무(보호수)를 지나서도 88올림픽고속
국도 밑까지 올라가야 한다.
대나무테마공원에 청소년야영장과 수련원 등의 시설이 있는 까닭인지 공원입구까지는
도로의 폭이 제법 넓지만 이후의 길은 자전거길이라 하나 좁은 농로다.
농사 차량과 경운기가 오르내리는 비탈지고 넓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해야
할 길이다.
좀 더 올라가면 봉서리(鳳棲里/담양군 금성면)와 이목리(二木里/순창군 금과면), 전라
남도와 북도를 가르는 고갯마루다.
올라오는 동안 비내동, 봉서리 마을 이름과 대나무공원, 88올림픽도로, 금성면(담양)과
금과면(순창) 경계, 봉황산과 서암산을 비롯해 낯설지 않은 능선이 기억을 더듬게 했다.
아뿔싸, 하마터면 잊고 지나칠 뻔 했다.
여기가 바로 곡성 옥과에서 담양과 순창을 지나는 호남정맥이다.(메뉴'백두대간과 아홉
정맥 72, 73번글 참조)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힘써서 올라왔으나 감개무량하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미 이 고개를 넘어 영산강(담양) 둑에 진출했을 시간에 이러고 있는 것이 한심하다고
했던 자책이 싹 사라졌다.
게다가 후회할 소지를 없앴으므로 더욱 상쾌한 기분으로 이목마을을 향해 내려섰다.
제주산(産) 이영삼이 불러온 추억
마을 가운데에 정자가 있다.
잠시 쉬어갈 요량이었는데 고맙게도 남녀들이 한 목소리로 불렀다.
궁금한 것이 많은지 중구난방으로 물으면서도 부침개를 내놓았다.
먹으며 말하라는 것인가 말하면서 먹으라는 건가.
가장 궁금한 점은 나이다.
한창 나이에는 간첩으로 오인받기도 했으나 나같은 행색의 간첩이 있겠나.
만덕선원 법장의 말대로 만행하는 이유가 나이 다음으로 궁금한 것 같다.
내가 몹시 주린 늙은이로 보였나.
누가 만들어 온 간식거리인 듯 한데 많이 잡수고 싸가지고 가라다가 아예 이 정자에서
편히 1박 하라고 붙들 듯 했다.
고개를 넘어오게 된 사연을 들은 영감이 담양으로 넘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는데 내가
벌로 들은 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이목리를 거쳐 전남북 경계를 넘어가는 자전거길 초입은 내가 코란도에 오른 지점에서
500m도 되지 않는다.
한데, 무슨 생각에 골돌하여 그 승차지점을 지나 호치마을 한하고 걷다가 소스라쳤을까.
다시 이목리 입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넘어가고 여광의 시간.
영산강변에 도착하고도 남을 거리를 무의미하게 걷느라 이렇게 된 것이다.
섬진강과 영산강의 연결로는 완벽하게 걷고 불필요한 덤까지 걸었으므로 지금이야말로
편승이 필요한 시점이며 무리하게 강행한 탓인지 다리에 이상이 왔다.
행동으로 옮기자 마자 한 트럭이 서주었다.
자기 집(일목리)에 들렀다가 메타세쿼이어 광장 학동교 앞에 내려주고 간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성만 다르다는 이영삼.
제주산(産)이 각처를 전전하다가 순창군 금과면 현주소에 정착하게 된 사연은 모르지만
메론과 딸기 재배가 생업인 그의 집짓기 방식이 내 30대 초반을 불러왔다.
학동교 옆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담양읍 찜질방길 3km는 46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정신적 공황(panic)상태가 잠시 있었던 1967년초,
나는 강북구 수유동, 우이동 일대의 주택단지 조성 토목공사장에서 질통을 메거나 철근
운반 잡부노릇을 밤낮 없이 했다.
지하 하수로 작업을 올빼미처럼 밤새워 하는 까닭은 감독관이 없는 틈을 이용해 철근을
빼돌리고 덮어버리기 위해서 였다.
조가 편성되어 있기 때문에 게으를 수 없고 빠져서도 안된다.
내가 녹아웃(KO)될 것으로 예측했다가 거뜬히 나타난데 놀란 힘세고 숙련된 장정들은
나를 의아하게 보면서도 내게 호의적이었고 마침내 우리는 원활한 팀이 되었다.
주택 신축열이 뜨거운 때라 우리는 함께 움직였다.
나는 토목과 건축 분야에서 판을 치는 일본 용어와 자재활용 요령 등을 익힌 후 친지와
합작해 주택 건축에 뛰어들었다.
그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내가 현장을 맡았는데 함께 일했던 우리 팀의 동지적 유대감이
발휘되어 적은 지출로 효과의 극대화가 이루어졌다.
목수들의 근성을 달래어 목재 구입에서도 많은 지출 경감효과를 얻었다.
1. 21 김신조 사건으로 주택의 신축열이 위축되지 않았다면 우리 팀은 계속해서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고 나 또한 이 일을 한동안 계속했을 것이다.
우연히 현장 옆을 지나시다가 나를 보신 은사(長空)가 "오래 하지는 말라" 당부하셨는데
오래는커녕 1회로 끝났지만 경제적 건축술을 실험으로 끝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영삼이 내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건축현장에서 일하며 익히고 사람을 규합해 적은 비용으로 바라던 내집 짓기를 곧
시작할 것이라 했는데 이 글을 쓰다가 전화했더니 어느새 80%나 진척되었단다.
짧은 시간에 나눈 이야기만으로도 그는 인생을 덧셈공식으로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고
성실한 그를 격려하기 위해 나도 어떤 집들이 선물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