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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00000淸白吏(청백리) 배출 많은 名門(명문)
※ 청고근졸(淸高謹拙) : '심지는 청백하고 고상하게 하며,
처신은 삼가고 겸손하게 하라'
▣ 임씨(林氏) 득성(得姓)의 유래
임씨(林氏) 성(姓)의 유래는 BC10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은나라 왕자 비간(比干)이 당대의 폭군 주왕(紂王)의 숙부로서 주왕의 폭정을 만류하자, “예로부터 충신의 염통에는 구멍이 아홉 개가 있다고 했는데, 진실로 충신이라면 아홉 개가 있겠다”하면서 주왕이 비간을 죽였다.
비간은 은나라 태정대왕(太丁大王)의 둘째 아들이고 주왕의 숙부(叔父)이시다. 비간공이 은 말에 주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정부인 진씨(正夫人 陳氏)는 임신 중에 장림산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아들을 낳으시니 천(泉)이라 하였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건국되자 무왕(武王)이 비간공의 아들 천을 찾아 임씨(林氏) 성과 견(堅)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로부터 임씨가 발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나주(羅州) 임씨(林氏) 본관(本貫)의 유래
우리나라에서 나주임씨의 역사는 고려 충렬왕 때의 임비(林庇)로부터 시작한다. 고려 충렬왕 7년에 왕을 따라 원(元)나라까지 시종보좌(侍從輔佐)한 공으로 보좌공신(輔佐功臣) 2등이 되어 철권(鐵券)을 하사 받은 인물이다.
훗날 대장군이 되고 충청도도지휘사(忠淸道都指揮使) 겸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주 임씨는『임 비(林庇)』를 시조(始祖)라 하지 않고 ‘원조(遠祖)’로 모시고 있다.원조(遠祖) 임 비 이전 상계의 세대가 너무 멀고 문적을 증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통상적인 족보 예규에는 비조(鼻祖) 또는 시조(始祖)라는 표현보다 원조(遠祖)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보는 것이다.
나주(羅州)가 관향이 된 것은 원조이신 대장군공(임비)의 9세손인 감무공이 고려말(高麗末)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 가운데 한분이신데 감무공(監務公) 휘(諱) 탁(卓)이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굳게 지키시고 동지들과 함께 괘관현(掛冠峴)에 올라 뜻을 밝히시며 관복을 걸고 부조현(不朝賢)을 넘어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셨다. 그후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으시고 드디어 낙남(落南)하시어 회진(會津)에 은둔하시고 종신(終身)토록 나오시지 않으셨다.
이로부터 자손들이 세거(世居)하게 되어 본관(本貫)을『회진(會津)』으로 하였다. 조선후기 대학자인 21세손 악정공 임상정께서 회진현이 나주(羅州)에 속하게되자 관명을 나주로 고쳐야 한다고 하여 문중의 결의를 얻어 본관을 나주로 개칭하였고, 1800년에 발간한 경신보(庚申譜)부터 본관을 나주로 사용하였다.
▣ 나주(羅州) 임씨(林氏) 대종가(금은당 : 錦隱堂)의 유래
나주임씨 세거지 회진은 신라 경덕왕 때 회진현이었으며 마한, 백제 시절의 유적을 간직한 유서 깊은 옛 고장이다.
나주임씨는 원조 휘 비의 9세손인 감무공 휘 탁(卓)이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던 해에 회진에 터를 잡은 이래 현재의 종손(임정렬)에 이르기까지 24대 615년 동안 이 터에서 종통(宗統)을 유지하며 한 대(代)도 양자를 들인 사실이 없이 장자 장손으로만 대를 이어왔던 것으로 세인의 칭송을 받고 있다. 종손이 본관지에 아직 거주하고 있어 전통과 가문의 긍지를 드높이고 있다.
풍수설에 의하면 갈마음수(渴馬飮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심)의 형국으로 난훈계복 (蘭훈桂馥 :가문이 번영하고 자손이 훌륭함)의 명당이라 한다.
나주임씨는 이 대종가에서 자손이 전국으로 퍼졌다. 특히 15세에 이르러 귀래정공 휘 붕이 태어나 문호를 크게 일으켜서 명문거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청고근졸(淸高謹拙 : 심지는 청백하고 고상하게 하며, 처신은 삼가고 겸손하게 하라)의 세전 종훈(宗訓)을 바탕삼아 높은 벼슬과 학덕 높은 선조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대대로 청백리가 많았고 역신과 탐관오리가 없는 전통을 이어오는 것을 나주임씨 가문의 긍지로 삼고 있다.
나주임씨의 파명록에 따르면 원래 장수공파, 정자공파, 절도공파, 첨지공파, 도정공파, 진사공파, 생원공파, 동지공파 등으로 분류되었으나 후에 금수공파, 가의공파 등 10개 파로 나뉘고 있다.
한편 본향인 회진(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나주임씨 대종가(금은당:錦隱堂)가 이어지고 있다. 종손(임정렬)이 본관지에 아직 거주하고 있어 전통과 가문의 긍지를 드높이고 있다.
▣ 부조묘의 유래
본관지 회진에 있는 나주임씨 부조묘는 특히 유서 깊은 가문의 명예로운 역사를 오늘날까지 증거하고 있다. 부조묘는 14세 참판공 임 평(枰)을 모신 사당이다. 공의 자는 균보 이시며 1462년에 태어나서 무관으로 진출하여, 종3품직인 병마우후를 역임하고 중종 17년(1522)에 돌아가신 분이시다. 부조묘란 불천위(不遷位) 사당을 뜻한다. 원래 돌아가신 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묘를 설치하는데 5대가 되면 묘제로 바꾸게 된다. 그런데 공적이 크거나 도덕이 높은 분에 대해서는 영구히 신위를 모시는 관행이 있었다.
부조묘로 정한 것은 바로 참판공의 아들 귀래정공의 발의에 의해서다. "공(公)은 나주임씨 가문으로 보면 공(功)이 조종(朝宗)을 빛내고 업(業)이 후손에 드리웠으니, 마땅히 영세불천(永世不遷)의 주(主)로 삼아서 그 거룩한 업적을 길이 잊지 말도록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장묘우문(藏廟宇文 :사당에 보관한 글)』을 지어 유훈으로 남기셨다. 이 후로 자손들은 유훈을 지켜서 오늘에 이르도록, 참판공의 기일인 음력 12월 5일과 참판공의 배위 언양김씨의 기일인 음력 1월 12일에는 여기 모여 제사를 성대하게 모시고 있다.
▲ 귀래정공의 '영모정'(지방문화재 제112호, 나주임씨의 상징)
▲ 영모정(2005년 중건하기 전의 모습)
▲ 감무공 휘 탁의 묘소(전남 나주시 문평면 옥당리) ▲ 대종가 부조묘 사당 전경(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 창계서원(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나주시 회진리와 월송리, 경남 함양 등 집성촌 이뤄
♣ 나주임씨의 분파와 주요 세거지의 변천
원조 임 비(庇)로부터 8세 임 선(宣)까지의 묘롱(墓壟)이 실전(失傳)되어 그 세거지를 알 수 없으나, 그 후대는 전국에 분포하는 지파 종회의 묘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대종가(大宗家)는 관향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한 곳에 25대에 걸쳐 600 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나주임씨의 분파는 1800년 ‘경신보’ 때부터 본관지 회진을 근거지로하여 귀래정 임붕의 아들 4형제로 하여, 장자 장수공 임 익(益)을 파조로 한 나주임씨 중 가장 많은 자손을 거느린【장수공파(長水公派】, 차자 정자공 임 복(復)을 파조로하여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정자공파(正字公派】, 3자 절도공 임 진(晉)을 파조로 한【절도공파(節度公派】, 4자 첨지공 임 몽(蒙)을 파조로 한【첨지공파(僉知公派】까지의 4파로 이루어 졌다.
6세 휘 돈세의 차자 금수공 임광수(光秀)를 파조로한【금수공파(錦繡公派】와 10세 소윤공 임 봉(鳳)의 차자 도정공 임유소(有巢)를 파조로 하여 경남 함양일대에 뿌리를 내린【도정공파(都正公派】, 3자 주서공 임수소(遂巢)를 파조로 한【가의공파(嘉儀公派】, 12세 시정공 임석주(碩柱)의 차자 진사공 임귀량(貴樑)을 파조로 한【진사공파(進士公派】, 14세 참판공 임 평(枰)의 차자 생원공 임 학(鶴)을 파조로 한【생원공파(生員公派】, 14세 참판공 임 평(枰)의 3자 동지공 임 안()을 파조로 한【동지공파(同知公派】의 10개 파로 분파 되었으며 인구는 30여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주 회진의 관향에서 세거지의 이동은 영산강변에 있는 회진의 특성상 예로부터 많은 배를 소유 하였으며 임진 정유 왜란을 겪으면서 수로를 이용 영산강을 따라 이동하여 주로 영산강변에 많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장수공파(16세 임 익)는 익(益)의 장자 17세 감역공 임 개(愷)의 자손들이 영산강변의 동강 월송리와 엄다, 완도 망석리, 강진, 금산, 예산과 전북 부안, 광주·무안·해남·경남 의령 등지로 세거지를 이동했다. 차자 17세 참의공 임 경(憬)의 후손들은 나주 왕곡, 무안, 진도, 경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3자 17세 감역공 임 황(愰)의 자손들은 21세 임방(芳)이 나주에서 경기도 양주로 옮겨가 살기 시작한 것을 비롯하여 충남 서천·부여, 황해도 해주 등지에 산거하였다고 믿어진다. 이들 지역에 여러 대에 걸쳐 나주임씨의 묘롱이 있다. 4자 17세 집의공 임 척(惕)의 자손들은 장성 삼도와 서태 , 논산의 은진을 비롯하여 경기도 연천 등지에 살았고, 5자 17세 후정공 임 각(恪)의 자손들은 무안, 무주, 고창, 구미, 김해, 울주, 서천 등지에 나누어 자리 잡았다. 6자 17세 주서공 임 열(悅)의 자손들은 함평 손불 등지에 세거의 터를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공파(16세 임 복)는 복(復)의 장자 17세 석촌공 임 서()의 자손들이 전남 무안에, 전북 진안의 용담과 충남 논산, 경남 통영, 포천의 영평, 평택의 진위, 양주, 충남 공주에 등지에 살았다. 차자 17세 유호공 임 협(悏)의 자손들은 전남 무안, 여수, 전북 진안에 옮겨가 각기 정착하였고, 해남과 충남 서천에도 일부가 자리잡았다. 3자 17세 첨추공 임 계()와 4자 주부공 임 오(懊)의 자손들은 전북 남원, 경남 남해 일대와 거제 통영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절도공파(16세 임 진)는 임 진(晉)의 장자 17세 백호공 임 제(悌)의 자손들은 전남 여수, 화양 일대와 전북 진안, 용담, 경남 창녕, 충남 서천 일대에 자리 잡았고. 차자 17세 백화정공 임 선(愃)의 자손은 전남 곡성군 고달에 큰집성촌을 이루었고 순창 동계면과 남원 대강면 일대, 경북 포항과 영천, 경남 산청 등지에 세거하였고. 3자 17세 강계공 임 순(恂)의 자손들은 강진과 영암 일대에. 4자 17세 습정공 임 환(懽)의 자손들은 무안, 영암 일대에. 5자 17세 창랑정공 임 탁()의 자손들은 전북 고창과 전남 순천, 경기도 수원 등에 세거하였다.
*도정공파는 감무공의 둘째손자인 11세 도정공 임유소(有巢)는 경주 화산(花山) 도정(都正)을 지내시다가 아들 셋을 데리고 경남 함양으로 세거지를 이동하여 도정공파로 분파하였다. 12세 교수공 임상재(尙榟)와 생원공 임상지(尙智)의 자손들은 경남 함양, 산청, 거창, 합천, 진양, 진주, 경북 영일 등에 거대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12세 집의공 임상기(尙杞) 자손들은 16세 호은공 임 백(栢) 이래로 전남 노안으로 세거지를 옮겨 영광, 부안 등지에 살고 있다.
*진사공파는 12세 시정공 임석주(碩柱)의 차자인 임귀량(貴樑)을 파조로 한 자손들은 황해도 장연 일대와 충남 당진군 석문에 세거하고 있고.
*생원공파는 14세 참판공 임 평(枰)의 차자 생원공 임 학(鶴)을 파조로 한 생원공파는 남원과 경북 칠곡 등지에 세거하고,
*동지공파는 14세 참판공 임 평의 3자 동지공 임 안()을 파조로 한 자손들은 충남 청양에 집성을 이루었다.
남북이 분단되어 알 수 없으나 황해도 장연, 해주 등지에 많은 집성촌이 있는 것으로 전해짐.
나주임씨는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만, 특히 본향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와 동강면 월송리에 각각 200 여호가 살고 있는 집성촌이 있다.
임 붕(鵬)의 아들 임 복(復), 거북선 설계해 큰 공(功)
♣나주임씨 역사 인물
나주임씨의 원조(遠祖)는 고려시대에 대장군을 지낸 임 비(林庇)이다.
♣고려시대 인물
시조 임 비, 임영발, 임량간, 임 박, 임영문, 임돈세, 임 수, 임 선, 임 탁, 임 봉, 임시소, 임유소, 임수소 등이 있다.
♣조선시대 인물
나주 임씨의 인물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에 활약한 15세손 임 붕(林鵬)대(代) 부터이다. 고려의 충신인 감무공의 유언에 따라 조선에 벼슬을 나아가지 않아 가문이 한미하여지자 14세 참판공 휘 평께서 처음 관직에 나아가 문호를 열어, 중흥조이신 15세 귀래정공이 승지 등을 거처 경주부윤에 오르신 후 조선시대에 문과 54분, 호당 2분, 무과급제 73분, 진사와 생원이 165분이며, 음직으로는 282분이고 우의정이 한분, 판서가 7분, 문자시호 1분, 은일 1분, 공신 6분, 시호 7분이시며, 부조묘사당 1곳, 서원이 4곳, 영당이 2곳에 있다.
임붕의 아들 정자공 임 복(復)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설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임 붕의 손자 감사공 임 서()는 조선조 인조 때 황해도 관찰사로 이괄의 난을 평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조선조 제일의 선비”이라 극찬한 ‘백호공 임제(林悌)’를 들 수 있다. 백호공은 병마절도사 임진(晉)의 아들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 겸 지제교를 지냈고 특히 절의가 있는 시로 많은 이들로부터 숭앙을 받았다. 그 후대에는 이런 선대의 후광과 나주 임씨 가문의 전통을 이어 각 파별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공을 세운 충신, 지사, 현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개황을 살펴본다.
*나림에서 한분의 정승인 22세 임한호(漢浩)의 자는 경소요,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1792년에 식년 병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 대사헌 등을 거처,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우빈객을 지냈으며, 1821년 우의정에 올랐다. 1823년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어 서얼들의 등용을 주청하여 서자도 벼슬을 할 수 있게 했다.
*18세 충익공(忠翼公) 임 담()의 호는 청구()로 1635년 증광 병과에 급제. 1639년 좌승지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대사간 도승지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52년 우참찬 예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에 승진,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로 의주에 갔을 때 정승으로 낙점 받았으나 돌아오는 도중 가산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25세 임긍수(肯洙)의 호는 현거이고, 1825년에 진사, 1837년에 식년갑과에 급제, 이조참판, 전라관찰사를 역임, 이조판서에 오르시고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21세 임상덕(象德)의 호는 노촌(老村)이며, 역사학자로 저서에 노촌집 4권, 역사서인 ≪동사회강≫ 27권이 있다.
*23세 임시철(蓍喆)의 자는 성종이고, 1766년에 생원, 1771년 식년병과에 급제, 경기관찰사, 강화유수에 이르고 시호는 ‘간헌공(簡憲公)’이다.
*25세 임영수(永洙)의 자는 영지이며, 1825년 식년을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효정공(孝靖公)’이다.
*25세 임한수(翰洙)의 호는 송석이고, 1846년 식년병과에 급제 공조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효정공(孝靖公)’이다.
*25세 임최수(最洙)의 호는 동양이며, 1895년 국모시역의 변을 당하여 시종으로서 의분을 참지 못하고, 격문을 내외에 발하고 정부관료 및 동이 수백과 군관 천 여 명을 규합, 지휘하여 역적괴수와 친일당을 소탕하고 왜인을 축출하여 내각을 혁신하려고 하였는데, 밀고로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칙명으로 관작이 복귀되고 ‘충민공(忠愍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26세 임용상(龍相)의 자는 충서(忠瑞)이고 호는 중호(中虎)이다. 1882년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이 되고, 성품이 강직하고 병서(兵書)에 조예가 깊었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 후 창의군(倡義軍)을 편성하였다. 1907년 유격장 좌포장이 되었고 후에 보현산(普賢山)을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하였다. 동지 우재용(禹在龍)과 광복단체(光復團體)인 대동단(大同團)을 조직 대구연락책(大邱連絡責)을 맡았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고, 대구 대명동 앞산공원에 공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특히 임득명(得明)은 정선(鄭敾)의 문인이며, 시·서·화(詩書畵)에서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하였으고 전서, 주서에 뛰어났다.
*또 습정공 임 환(懽)은 임진·정유 양란에 공을 세워 소의장군 칭호로 이등 록권을 받고 증좌승지에 올랐다.
♣ 특히 자랑스러운 선조는
학문적으로는 호당 벼슬을 지낸 두 분 학자 창계공과 노촌공을 들 수 있다. *20세 창계공 임 영(泳 : 임 협의 현손)은 조선 현종12년(1607)에 정시을과에 급제하여 호당 대사헌 부제학에 이르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고 특히 성리학에 밝아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편 대석학으로 나주 창계서원(滄溪書院)과 함평 수산사에 제향되었다.
*21세 노촌공 임상덕은 역사학자로 역사서≪동사회강≫을 남겼다.
유호공, 상주공(몽촌공), 동리공 3부자의 문집이 현재 준비 중에 있다.
6·25전란 시 땅에 묻어두어 화를 피한 인조반정 원정공신 상주공의 열두 가지 항목의 상소문 필사본을 현재 보관 중인데, 그 내용이 얼마나 훌륭한 문적인지 임금께서 국책에 활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60년 동안 진행된 족보(경신보)를 출간하면서 관향을 회진에서 나주로 정리한 대학자 악정공(강화유수, 임상정)은 자랑스럽다.
그밖에도 화산서원(華山書院 : 함양군), 옥산서원(玉山書院 :진주시), 백호공 기념비, 정려 등 많은 나주임씨 인물들을 기리는 사우, 사원이 있다.
임채정 국회의장 등 정치, 교육, 언론계 등 다수
♣나주임씨 현대 인물
현대에 두드러지게 활약을 한 인물로는 27세 소죽공 임병직(炳稷) 대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부터 1951년까지 2대 외무부장관을 역임하고, 1951년부터 1960년까지 10년간 UN대사를 역임하였으며, 우리나라 GNP가 74불밖에 안 되는 어려운 시대에 UN무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신 분으로 세계 서열 10위 전후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시대 외교업적을 쌓으신 분으로 외교관들의 모범이요, 현세 외교계의 거성이었다. 그리고 화수회를 창립한 임병직과 초기 대종회 활동을 활발히 한 임혁규 등이 있다.
남북교류에 획기적인 물고를 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임인택 전 건교부장관, 임채정 국회의장, 명창 임방울, 영화감독 임권택 등이 있다. 기업가로는 임인규 중앙화수회장을 비롯하여 임광행, 임건우(광행 아들) 보해양조 회장, 솔로몬 임 석 회장, 동성산업 임동준 회장, 씨엔그룹 임병석 회장 등이 있으며 정계, 법조계, 교육계, 언론계, 군 등에 고루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정계 : 임병직(2대 외무부장관, 주 UN대사), 임동원(전 통일부 장관) 임인택(전 건교부장관), 임채정(현 국회의장)
국회의원 : 임갑수, 임종기, 임인채, 임덕규, 임재정, 임채홍, 임인규, 임무웅, 임채정
장군 : 임부택, 임재문, 임인조, 임창규, 임광택, 임종천, 임운택, 임병국, 임치규 임종린, 임경섭, 임상섭
기타 : 임권택(영화감독), 임춘성(전북도지사), 임성규(논산시장), 임채진(서울 중앙검찰청 검사장), 임종협(전북도의회의장)
(정·관·재·교육·언·예 등 다양한 분야에 인물이 있으나 생략함)
회관건립·유적보감 발간 위해 온 힘
■인터뷰 - 나주임씨 임인규 중앙화수회 회장
"든든한 후원자들 종인의 자랑 자부심
자발적 참여 친목 다지며 즐겁게 살자"
임인규(69 사진) 나주임씨 중앙화수회 회장은 생가 쪽으로 보면 금부도사를 역임한 세공의 아들 상덕과 호당 벼슬을 지낸 상극(상덕의 셋째 아우)의 후손이고, 양가로는 악정공(상정, 강화유수)의 직계손이다.
임 회장은 1968년에 동화출판사를 창업하여 한국사상전집 등 수백종의 문학전집과 단행본을 출간한 명실상부한 출판업계의 선두주자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장과 제13대 국회의원,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 정책조사 보좌관을 역임했다.
올해로 나주임씨 중앙화수회장을 6년째 역임하고 있고, 귀래정공 유허비와 나주임씨의 상징인 영모정 정화사업에도 토지 등을 기증했으며, 백호공 400주기 행사 기금 전액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백호공기념관 건립시 동분서주하면서 재원을 마련했던 일은 두고두고 나주임문 모두의 자랑거리로 남아있다. 산업포장, 국민훈장모란장, 황조근정훈장, 서울시문화상 등 많은 훈·포장을 수상했다. 원효로 입구 동화출판사 사옥 회장실에서 만나본 임인규 회장은 정정하고 유머감각이 있었다.
나주임씨 중앙화수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 배경이 무엇일까. 임균택 상임고문에 의하면 임인규 회장이 중앙화수회 사무실 운영기금을 많이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나주임문을 실질적으로 지탱해주는 임 회장이 있어 관계자들이 든든한 마음으로 대종회 일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주임씨 대종회와 화수회에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우리 임고문이 하도 꼬셔서….”
임균택 상임고문을 가리키며 말하자 배석한 종회원들의 폭소가 터졌다. 그렇다고 해도 문중 일을 위해 매번 거금을 선뜻 내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저 후손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조금씩 실천에 옮기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뿐입니다.”
겸손한 가운데에도 임 회장의 애족심이 엿보인다.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가 보자.
△ 나주임씨 대종중과 중앙화수회의 창립 배경과 역할은 무엇인가
대종중은 선조를 존숭하고 분묘와 유적, 그리고 종중 재산을 관리하고 족의를 돈독히 하여 정진함을 위함이고, 대종손은 상징적 존재로 모든 회의에 참석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대종중 산하기구로 중앙화수회를 두고 그 산하에 각 지역 조직을 두어 친목조직으로 자율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
중앙화수회는 임병직 대사가 40여 년 전 창립하였고, 종원 관리와 유적의 개보수비 등 재원을 마련하며 전체 종중 일을 주관, 추진하고 있다.
현재 대종손은 정렬(35歲)이고 2005년 아들이 태어나서 32세손(世孫)을 이어오면서 25대째 한 집에서 한 번도 양자를 들인 적 없이 현손으로 대를 이어오고 있음이 나주임문의 자랑거리다.
현재 ‘회관건립’과 ‘유적보감’ 발간을 준비 중에 있다. 회관건립에 소요되는 예산은 회장인 나를 비롯하여, 보해양조 임건우 회장, 솔로몬 임석 회장, 동성산업 임동준 회장, 씨앤그룹 임병석 회장 등이 각각 1억원씩 출연하여 마련할 계획이다.
출연하시는 이분들은 지금까지 모든 유적의 유지, 관리비 등에 재정적 뒷받침을 하고 있어서 무엇보다 든든한 후원자로 전체 종인들의 자랑이고 자부심이다. 유적보감은 현재 70% 정도 진행되고 있다. 이를 완성, 판매하여 화수회 운영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다.
△ 종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더 많은 종원들이 참여하여 혈족 간에 더욱 돈독한 친목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러자면 운영하는 입장에서 운영의 묘를 살려야 할 것이다. 참여하는 사람 모두에게 기쁨을 주어서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갖도록 했으면 한다. 종인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참여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1980년대 말 영국의 한 유명 매체에 나온 얘기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21세기에는 동양 사회가 세계를 주도한다, 특히 한국의 가족제도나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풍습은 굉장한 경쟁력이 된다’라고 했다.
이처럼 조상에 제사 지내는 법도는 피를 나눈 가족의 확인과 또 모임의 자리이고, 결속의 자리이다. 나주임문의 화수회에 참여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후손들이 만나서 자랑스런 조상을 추모하고 기리고, 서로의 족의를 쌓다보면 그것이 곧 넓은 의미로는 국가나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셈이 될 것이다.
▲회장단. 좌로부터 임종국 사무총장, 임균택 상임고문, 임인규 회장, 임광순 상임부회장.
지난 달 나주임씨 중앙화수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일이 있다. 그 날 임종국 사무총장은 경과보고에서, 현재 나주시 주관으로 백호공원 조성을 추진 중에 있고, 공원 안에 ‘백호마을’과 ‘백호공문학관’이 건립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느낀 것은 나주임씨 화수회가 타 문중에서 볼 수 없는 젊은 회원들의 참여율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청장년회’가 활성화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배석한 임종국 사무총장이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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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 최종동 노년시대신문 편집위원
※자료 고증 및 교정 : 임채하(대종중 홈페이지 관리자), 임채남(화수회 부회장)
※신문 스크랩 및 교정 :임점택(다음 나주임씨공식카페 운영자 겸 대종중 홈피부운영자)
★『노년시대신문』에 실린 내용은 신문사 기자가 인터뷰 후에 내용 정리를 하는 과정에 착오가 생기고, 큰 오류도 있으며 오,탈자가 많아 고증을 하고 수정하였습니다. 신문은 이미 발행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게시판에 다시 수정 보완하여 게재함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