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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협동조합운동(2011)
민주주의사회연구소편, (사)부산민주할쟁기념사업회, 대성, 2011, 393.
지은이: 고정석, 김균식, 김현주, 김형기, 김희욱, 박진해, 석원호, 오균현, 유동민, 장두석, 진영우, 차성환, 한경호, 황일봉.
목차
축사: 이흥록 4
머리말: 김하원 6
양서협동조합운동의 재조명: 차성환 17
경남양서보급회를 돌아보다: 박진해 47
광주양서협동조합: 장두석, 황일봉, 김현주. 83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운동을 회고가며: 김균식, 석원호 111
부산양서조합: 김희욱 131
양서조합운동을 회고 한다: 김형기 175
서울양서협동조합의 역사와 의의: 오균현, 차성환 197
수원양서협동조합의 역사와 의의: 고정석, 유동민, 한경호
수원협동조합에 대한 단상: 한경호
울산지역의 양서협동조합운동: 진영우
부록 277
- 양서협동조합관련 자료 및 해설
- 저자 소개
- ‘기억총서’를 내면서
복사물과 책의 전달과 전승에서 중요한 시대가 있었다. 영향이 줄었다기보다는 다른 매체가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지, 여전히 책의 출판은 그리 줄지 않았으리라. 전자북이 있다고 하더라도, 또는 유트부를 통해서 “전기수(傳奇叟)”를 실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책은 소중하고 중요하다.
요즈음 반도체의 사용 70년 이래로 일인미디어 시대로서, 블로그와 카페, 페이스북과 유투브, 카카오툭으로 사회 소통이 점들로서 연계되어 작동하는 시대이다. 이뭣꼬를 지나서, 언제,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를 때에 맞추어야 하는 카이로스(kairos)도 중요하다.
추억의 단편들이란, 옛 사진에서 경계가 흐려져 희미한 그림판들과 같다. 그 그림과 그 다음 추억들과 연결에서, 그 내용에 관한 부분으로 남아있을 때 유사성에 의해 습관적 기억처럼 남는다. 그럼에도 당시 만나지 못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으면서 추억의 흐린 장면의 주변에서 아우성치는 듯한 이야기들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유사성에 의한 추억들의 중첩과 달리 인접성들이 공간적 확장과 시간적으로 연속성에서, 알았던 대로가 아닌, 또는 알고 싶었던 대로가 아닌, 살아서 움직이는 기억의 형식도 있다는 것이다. 추억들에 의한 유사성과 인접성을 넘어서, 살아 움직이는 기억의 충력과 도약은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과 같은 것일 것이다.
노력과 수련과 학습은 살아있는 한 필요하다. 흐릿한 사진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때는 그 실재성이 현실에서 살아서 접해있고, 그 살아서 움직임의 생생함은, 게다가 벩송 표현으로, 미래를 갈아먹으면서 아제에 예상참여 즉 예참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영혼의 활동성인 어제-이제-아제처럼 살아있는 것이다.
추억의 단면들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경계가 흐려지고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여기는 흔적 또는 트라우마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흐릿함이 그 다음과 유사성에 의해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같이 솟아날 수도 있고, 또한 인접성에 의해 현실에서 첨점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다. 현재 상태에서 균열을 내면서 자신의 모습을 또는 주체화를 점점 더 강도있게 확장해 나갈 때, 그의 인격성이 보살처럼 이루어질 것이다. 그 때를 싯달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했을 것이다. 생명은 존귀하다.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운동의 박명규는 유사성과 인접성을 통한 추억의 한 형식으로 또는 단편들의 조합으로서 한 형식으로 남아있기 보다, 기억을 통한 능력의 확장으로 어제도 이제도 아제도 연속성을 생성하고 창안해 나가는 중일 것이다. 그와 또한 그와 더불어 활동했던 여러 동지들이 누군가의 머리속에 흔적이나 추억들로 남아있기보다, 가슴 속에 기억의 능력으로 흘러가며 이어가고 확장되리라. (55PMI, Q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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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서협동조합운동(2011)
*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운동을 회고하며: 김균식, 석원호 111-129
1. 들어가면서. 113
1978년 9월 22일 오후 대구 중구 소재 가톨릭문화회관 강당에 14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을 창립한 그 때부터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이다. (113)
2.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의 결성과 그 전개. 114-
1) 배경
- 75년 5월 인혁당 8인의 사형집행에 대한 사법살인규탄 시위로 한풍회와 현대사상연구회 회원이 주도
- 78년 11월 1.2차 구국선언문 사건과 가두시위
2)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의 결성과정 116
대구 양협은 70년대 후반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모색을 하던 경북대 한풍회 출신의 박명규 주도로 1978년부터 시작된다. 1975년 4월 경북대 시위사건으로 학교에서 제명처분을 받은 박명규는 1977년 계명대학교 상경계열에 입학하여 시국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학생운동 조직 재건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향성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직접 부산, 광주, 서울 등을 방문하여 활동상황과 구체적 조건을 청취하였다. 그 후 황철식, 권용원, 이윤기, 박태주, 권약환, 서정렬 성명 미상의 구세군 사과, 김균식, 권오국 등과 상의하여 대구양서협도조합을 출범시킨다는 목표를 정하고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116)
1978년 7월 14일 황철식 외 11명이 모여서 대구 양협 발기인 총회를 개최한다. “1인당 5천원의 입회지를 받은 조합원이 2백명 정도가 되었을 때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여기에서 창립대외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계명대 부근 한양서점을 인수하여 경영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임시조합장에 박명규, 임시전무에 박태주를 선출하였다. (117)
1978년 9월 22일 대구 중구 소재 가톨릭문화회관에서 대구양협창립총회를 개최하고 .. (117)
조합장에 경북대학생운동 선배이자 팔공재건학교 교장인 서훈씨를, 부조합장에 박명규, 전무이사에 박태주, 총무이상에 이윤기를 선임하고 본격적으로 개시한다. (118)
그 당시 재정현황은 1878년 9월 22일 기준 출자금이 369,500원이고 부채는 60,000원이었다. .. 서훈 조합장 50만원, 황철식 조합원이 30만원을 지원하여 큰 도움이 되었다. (118)
3.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의 주요사업118
① 회의 운영
② 조직사업: 대학별, 조직별 소그룹과 스터디 그룹 리더들에 대한 조언과 지원....
③ 교육사업
④ 홍보사업
⑤ 금서 보급, 복사집 운영
“광주양서조합과는 긴밀히 교류하였고, 1979년 9월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3개대 연합시위를 계기로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이상화가 78년 하반기부터 서점의 판매원으로 일했고, 판금도서를 아는 지인들에게 배달하거나 보급하면서 회계업무를 담당했다.” (119)
4. 대구양서협동조합, 한양서점과 노동야학운동120
구미 도시산업선교회(도시선교위원회)의 실무자였던 전점석(인하대학rt 71)은 78년 봄에 고향이 대구로 내려와서 원대동과 이현공단에 취업하고 노동하고 있었다. (120)
1978년 9월 21일 1기 입학식을 한 원대동 ‘메아리야학’에는 경북대 석원호, 장대수, 김지숙, 문명녀, 최상림, 계명대 박경수, 권오국, 영남대 박언령, 효성여대 김난경 등 대구지역의 여러 대학이 골고루 참여하였고, .. (120)
5. 양서조합과 농민, 기타 운동과의 관계121
안동가톨릭 농민회 회원 오원춘(吳元春,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거주)은 1978년 정부가 권장한 씨감자가 불량으로 싹이 트지 않자 ‘감자피해보상운동’을 주도했다. 그러자 1979년 5월 중앙정보부와 경찰은 약 2주간 그를 납치 감금하여 울릉도 강제 납치하는 중 테러도 가하면 위협 후 돌려보냈다. (121)
가톨릭 안동교구는 목성동 성당[주교좌성당]에서 회합을 가지며 [1979] 7월 30일의 1차 기도회를 개최했고, 전국적 차원의 집회를 준비했다. 8월 6일 목성동 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 및 농민회원, 신도 약 900명이 기도회를 개최했다. .. 그 중에 20명 내외가 연행되었으며, 이 집회에 대구학생 3-4명이 참가하였고, 이윤기, 장명숙 등 7명이 구류처분을 받았다. 8월 10일 오원춘, 8월 25일 정호경 신부와 정재돈이 구속되자 사건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후에도 최병욱, 서경원, 함세웅 신부 등이 구속되었다. (122)
광주 무등산 농민투쟁과 영양 오원춘 농민투쟁의 연결은 그 후 전국적 농민운동발전의 주요한 발판이 되었다. ..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엇던 것은 광주의 김상집과 그의 형님인 당시 녹두서점 사장(김상윤)과 계산성당 신부님, 서경원씨의 적극적인 참여로 가능했다. (122-123)
또 다른 사건은 남민전 사건의 발표 전에 일어난 박명규를 비롯한 서점 관련자의 강제연행 및 불법구금 사건이다. 1979년 11월 8일 박명규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는 이미 남민전 관련자 검거가 진행되었고, 남민전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사람(경찰은 김균식이라 주장)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광주의 남민전 관련자로 구속된 김영이 대구양서조합으로 도피해 오자, 경찰은 그와의 관계조사를 위해 박명규를 11월 2일 연행하였다. 경찰은 20여 일간 그에게 불법구금과 가혹행위를 하였다. (23)
대구에 내려온 박태주, 김부겸 등 서울대 출신 활동가들의 활동은 향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과의 연대에 도움이 되었다. (124)
6.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 소식지에 소개된 주요 양서124
이상의 책들은 당시 대구의 대학가의 이념서클(경북대 복현독서반, 계명대 정통문화연구회, 영남대 전통문화연구회 등)과 전통 있는 학습 서클(KSCF, 4H, 탈춤반)의 학습용으로 배포 판매되었다. (125)
7. 조합의 주요 구성원과 활동125
1978년 10월 1일 197명으로 출발하여 한 때 1천여 명에 다다를 정도로 급성장하였으나, 경찰과 정보기관의 방해 공작으로 탈퇴하는 조합원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특히 FM방송에 조합이 소개되고, 양서가 알려졌을 때와 회지 ‘달구벌’ 창간호가 지역 내의 대학교와 고교 등에 다량 배포되었을 때, 당국이 회지 발행을 중지시키고 배포된 회지를 모두 수거하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126)
하지만 양서조합이 당국의 탄압을 더욱 크게 받게 되는 계기는 남민전 사건의 발생 때부터이다. “남민전 사건이 발생하여 경찰의 한양서점 감시가 강화되지 조합원과 학생들의 서점 출입이 줄어들어 경영이 어려워졌다.” (126)
8.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의 해산과 그 이후127
대구 양협은 1978년 9월에 공식 출범하여 1980년 9월 경에 해산하게 되는데 ... / 특히 부조합장이자 실질적 서점 경영자인 박명규가 5.18비상계엄으로 구금 투옥되어 대구 양협 및 서점의 일상적 업무가 추진되지 않아서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127)
한편 대구양협의 활동과 그 정신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운동으로는 지역에서 농민운동을 중심에 두고 활동하려고 했던 두레양서조합(두레서정)이 있었다. 이 조합은 대학에서 4H 운동을 매개로 한 활동가들이 두레양서조합을 결성하여 경북대 후문 앞에서 두레서점을 운영하였다. (127)
9. 글을 마치면서128
긴급조치 9호 시대에 나는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을 통해 많은 선배, 동지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했던 기억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참으로 많은 선배들로부터 과분한 사랑과 가르침을 얻었다. 그 중에서도 박명규 부조합장는 삶의 큰 좌표로 각인되어 가슴 속에 살아있다. (128) [여기서 나는 김균식을 지칭할 것이다.]
양서이용협동조합과 같은 방식의 운동을 다시 할 수는 없겠지만, .. 21세기형 상상력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역사는 끈질기게 버텨내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글을 마친다. (129, 마지막 문단)
주 30: 이윤기의 의견에 의하면 대구 양서조합의 활동 중 두 부분의 보완이 필요하다. 현장노동운동 및 서울운동권과의 관계는 박태주의 증언을 청취할 필요가 있고, 광주운동권과의 연계된 사업내용(오원춘 사건의 전국화를 위한 광주무등산타잔사건 운동 방법의 오입과 연결)은 김상집(현 5.18 공추위 상임위원장)의 증언을 청취하여 보완할 필요가 있다. (129) - [이 30번 주는 마지막 문단의 주인데, 보완 사항을 지적한 것이지만, 중요성으로 보아 우리는 본문으로 올려놓는다.]
(55P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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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인(宋基寅, 베드로, 1938-) 카톨릭 신부, 부산민주항쟁 기념사업회 명예이사.
이흥록(李興祿, 1939-) 39년 경북 울주 출생으로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 67년 제8회 사법시험, 2003 대통령 지명 국가인권위원으로 선임됐다.
정호경(1941-2012) 봉화출생, 가톨릭 신부,
황일봉(1957-), 전광주양서협동조합 간사, 1986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김현주(1958-) 전남 장성 출생, 전광주양서협동조합 총무 : 녹두서점의 오월: 80년 광주, 항쟁의 기억(2019)(김상윤, 정현애, 김상집 공저, 한겨레출판, 2019, 352쪽)에서 김상윤과 김상집 형제의 여동생.
김하원(민주주의사회연구소)
박진해, 연세대 국문과 졸, 전경남양서보급회 홍보부장
차성환,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 부산대 정치학 박사.
장두석, 전광주양서협동조합 집행위원장,
김균식, 계명대 경제학과(77)
석원호, 경북대 철학과.
Jeunesse Ouvrière Chrétienne, JOC. 국제선교협의회 Créée en Belgique en 1925 par le père Joseph Cardijn (1882-1967) ,
가톨릭노동청년회(JOC) / 광주 계산 성당(?) 광주에는 카카오 지도상으로 계산 성당이 없습니다.
두레양서조합(두레서점):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면서, 대구지역에서도 두레양서조합원을 중심으로 광주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광주지역 뜻에 동참하며 군사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준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민주농정실현전남농민대회 준비차 광주에 갔다가 5월18일 탈출한 A(69)씨(당시 가톨릭농민회 홍보부장) 등은 5월20일 경북대 후문에 위치한 두레서점에서 광주의 상황을 고(故) B(2011년 사망 당시 59세)씨, C(66)씨 등에게 전했다. B씨와 C씨는 같은 날 반월당의 한 다방에서 고교 동기생들에게 이를 전파했다. 이후 두레양서조합원을 중심으로 학생권과 연계해 대구지역 활동 대책을 수립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고, 5월22일에는 대구 동성로에서 '민주시민에게 고함'이라는 유인물을 살포하기도 했다. / 피해자 서원배씨는 무죄 선고 직후 기자들과 만나 “42년 만에, 특히 5월 18일에 무죄를 선고 받은 의미가 크다. 광주의 슬픔과 아픔이 광주인만의 것이 아니고 대구에서 같이 함께 하려 한 77명이 있고 100여명 이상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는 점을 알아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 두레사건 피해자 김영석 씨가 당시 사건 기록, 가족의 편지 등을 묶어 출간한 책 <내가 겪은 5.18과 두레사건> .. 정상용( -2011, 59세)
/ 5.18; “광주 5·18항쟁 전 전국의 민주화 투쟁 열기는 서울-대구-광주 순서였다. 전두환은 자신의 고향도 제압하지 못하고 어떻게 정권을 찬탈할 수 있겠느냐며 대구·경북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 이상술 상임대표, 경북대 선배 이형건과 이윤기, 후배 권순형 4명이 조를 이뤄 대구 시내 자취방에 숨어 지냈다.
김희욱, 동국대 대학원 사학과 불교미술사 수료. 전 부산양서협동조합 전무
김형기, 성산여중 교사. 전 부산양서협동조합 이사
오균현, 전 서울양서협동조합 초대 전무. 기독교 청년협의회(EYC) 회장.
고정석, 전 수원양서협동조합 초대 전무, 서울 농대 입학(77)과 졸업
유동민, 전 수원양서협동조합 초대 2대 전무, 노동운동가.
한경호, 수원양서협동조합장, 서울농대 축산과 졸업, 현 횡성영락교회 목사. 횡성환경운동연합 의장
장두석, 전 울산양서협동조합 전무. 민자통 설립참가. 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 공동대표.
박진해(1954-) 경북 포항, 연세대 국문과. 창원MBC 대표이사
진영우, 울산양서협동조합 전무
[정재돈(-2022),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이사장,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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