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에 다니고 있는 현성이가 나와 사귀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얼마 전
헤어진 그의 옛 연인을 잊지 못해서란 것을 알고 있다. 우연히 그의 방
에 처음 들어가 보았을 때 아직도 그의 책상에 그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
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
만, 오랜만에 찾아온 날 보면서도 그는 하루종일 볕이 쬐는 베란다에 앉
아 앞에 놓인 비너스 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서 나는 왈칵 화가 치솟았다.
속상한 마음에 발로 마루를 통통 구르고 있는데, 현진 언니가 현성이 대
신 음료수 잔을 가져오면서 내게 방긋 웃어보였다.
“저건 왠 거래요?”
그 상은, 아주 옛날에 한 농부에게 발견된 후로 아프로디테의 신상이라
내려오는 동상이었다. 어깨에서 잘려진 팔, 팔뚝에서 잘려진 팔과, 균형
잡힌 몸매. 짧은 고수머리를 하고 있는 그 동상은 아주 예전에도 내게 그
다지 좋지 않은 기억만 남기고 있는 상이었다.
어렸을 때, 우리집에도 그와 똑 같은 동상이 있었다. 분명히 잘 만들어
진 상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팔이 없는 동상이 무서웠다. 사라진
팔이 내 목을 조르지는 않을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도 많았고 흰자위
와 검은자위가 구별되지 않는 커다란 눈이 날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동상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래서, 호시
탐탐 그 동상을 치워버릴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꽤나 흘러 어느 날, 공을 우연히 베란다 쪽으로 던졌다
가 우당탕 하며 동상이 균형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동상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쪼개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 동상
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엄마는 깨져버린 그 동상조각을 버리셨다.
하지만 그것을 난 몇 년이나 지난 지금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현성이가 얼마 전에 길에서 주워왔어. 마음에 드는지, 하루종일 보고
만 있는거 있지? 주현이가 좀 화가 나도 참아줘라. 쟤가 원래 저런데 집
착은 좀 많잖아.”
현진언니의 위로에도, 쉽사리 기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원체 바쁜 언니
가 곧 집을 비웠고, 집에는 나와 현성이만 남아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현성이는 아직도 비너스 상만 애타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동상에
게까지 질투를 느껴야 한다니, 내 신세 역시 비참하긴 마찬가지였다.
“네가 피그말리온이라도 돼니?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살아날까봐 그
래?”
흠칫, 현성이가 뒤를 돌아 본다. 눈빛이 살짝 떨렸다.
“음. 살아있으면 좋겠어.”
“미안하네. 동상보다 못생겨서 말야.”
내가 동상보다 키도 더 큰데……내가 동상보다 머리도 더 좋은데……내
가 동상보다 더 날씬한데. 이제는, 동상에게까지 나를 비교하다가 결국
나는 한마디 톡 쏘아 붙였다.
“대체 난 뭐냐. 도대체가 사귀는 사이 같지도 않잖아.”
여자를 사랑할 수 없었던 피그말리온. 그는 자신이 창조한 상아처녀를
사랑했다. 그런 그의 정성에 못이겨 아프로디테는 상아처녀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안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단
지 신화의.
햇볓을 받아 하얀 동상이 반짝반짝 빛난다.
“……닮았어. 네가 예전에 사귀었던 그 사람.”
그랬다. 묘하게 동상과 그 여자는 닮아 있었다. 이름은 말해주지 않았지
만, 묘하게 그녀 역시 이 동상 같은 느낌을 풍기는 여자였다. 아마도 그
래서 현성이가 그렇게 비너스상에 집착하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솔직
히 나와 사귄다는 것은 말만이었고 나와 함께 있을때는 그녀에 대한 이야
기로 하루를 지새웠던 현성이니까. 그런 그의 태도에 많이 섭섭하기는 했
어도 함부로 헤어지자고 말을 꺼내지 못할만큼 내가 사랑했던 게 사실이
다. 씁쓰레한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결국 핸드백을 집어들고 나와버렸다.
“너희 사귀는 사이는 맞니?”
친구와 함께 찾아간 음식점에서 음식을 시키고 넋놓고 앉아 있는데 그애
가 물었다.
“도대체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일주일에 한번 볼까말까 해서 말
야. 니가 너무 일방적으로 매달린거 아냐?”
“그렇지만 먼저 사귀자고 말한 사람은 현성이란 말야.”
나도 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어떻게 내가 처음 사귀게
된 남자친구가 이렇게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지. ‘그녀’와 사귀었을 때
는 전혀 아니었으면서 정말 내겐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사실을 온 마음으
로 느꼈다.
“니가 얼마나 못하면 비너스상한테 사랑을 쏟겠냐. 제 2의 피그말리온
을 만들어서야 되겠어?”
그렇게 말하며 친구는 내 등을 탁 치고 깔깔 웃었다. 하지만, 내 기분
은 또다시 급속도로 망가져 버렸다.
“현성아.”
오늘은, 현진언니도 없었다. 하지만 현진언니가 항상 집 옆의 화분 아래
에 키를 두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열쇠를 찾아 문
을 열었다. 날 데리러 온 적 역시 한번도 없었다. 이렇게 일찍 끝나는
날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도 현성이는 그게 아니
었다.
그래도 내 딴에는 예의를 차린답시고 케이크까지 한 상자 들고 있었다.
하지만 현성이는 내가 들어오자 ‘어, 왔어?’ 이 한마디만 했을 뿐 비너
스 상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물기가 아직도 바닥에 똑 똑 떨어지는 물
수건까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그 비너스 상을 향해 중얼거리고 있던 현성이의 목소리였다.
-사랑해, 사랑해.
“뭐해.”
케이크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물었다. 묻는다고 말한 목소리였는
데, 아직도 비너스 상 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봐서 그런지 목소리가
깔려서 나왔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현성의 눈동자였다. 어쩌다 내가 졸
라서 나와 함께 길거리를 다닐 때면 까맣게 죽어있던 그 눈동자 빛에, 생
생함이 살아있었다. 작은 동앗줄, 희망의 비상구를 찾은 것처럼 반짝이
는 눈동자를 한 채 현성이는 ‘동상 닦는거야.’ 하고 말했다. 그래? 그
런눈으로,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잘도 말할 수 있구나. 나한테는, 한번
이라도 말한 적 있니.
“왜 하는데?”
저벅 저벅 걸어가서, 나는 물걸레를 휙 빼앗았다. 얼마나 닦았는지, 안
그래도 광택이 나던 표면이 물기를 가득 머금고 반짝였다.
“나 오랜만에 왔잖아.”
“넌 앞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잖아.”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대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축
축한 물걸레를 결국 거실바닥에 던져버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넌 앞으
로 얼마든지 볼 수 있잖아라고 말을 할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당장 차
에 뛰어들어 볼까. 그래서, 언제든지 볼 수 있잖아라는 말을 한 널 후회
하게 만들어 줄까? 악이 받쳤다.
“가져와.”
“싫어.”
물이 가득 담겨있던 대야마저, 발로 팍 차서 물을 쏟아버렸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세차게 물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회오리가 크게 일었
다.
“왜그러는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뺨이 축축해져 오는 것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왜 그러냐구.”
독촉하는 그의 낮은 질문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문다.
“넌 나 대신 이것만 항상 보고 있잖아.”
……나, 질투하는 거야. 네가 자꾸만 나를 외면하려 하니까- 나는 네가
처음에 사귀자고 말을 했을 때 너무 좋아했었는데 네 표정은 그게 아니었
어. 하지만 이왕 그렇게 된 사이라면 적어도 서로에게 최선은 다해야 하
잖아. 하지만 넌 날 봐주지도 않아. 내가 뭘 원하는지 한번도 물어 본 적
이 없어. 기념일같은거 챙기는 건 바라지도 않았지. 그렇지만 적어도 내
생일만큼은 기억해 주길 바랬어. 선물같은건 없어도 생일 축하해 이 한마
디는 해줄줄 알았다구.
“너랑 사귀는 사람은 나야. 제발 좀 기억해! 넌 내 생일이 언젠지두 모
르잖아.”
“……앞으로 수없이 챙기게 될 것 아냐. 너 갑자기 찾아와서 대체 왜
이래?”
“수없이 챙길거라서, 이제까지는 그냥 무시했니? 내 생일이 언젠지조
차 물어보지도 않았어? 이제부턴 챙길 거니까? 니가 챙겨줄 생일이 과연
찾아오기나 할련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화가 나서 결국 물걸레를 집어들어 세게 던져버렸다. 집
을 나왔다. 짤랑이는 열쇠는 아직도 내 손에 든 채로였다.
얼마나 속상해서 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좋아하지만, 나도 한번
악세게 참아 보리라. 나도 너 안보고도 살수 있다는거 똑똑히 보여주겠
어. 그렇게 마음먹고 난 현성이를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았다. 눈 앞에, 비
너스 상과 옛 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솔직히 같은 여자로도 그 ‘옛 애
인’이었던 여자가 부러웠다. 지금은 나와 사귄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 뿐이다. 너무나도 형식적인 사이였다. 아니, 그런 형식조차 지키질 않
았다. 내가 뭐가 모자라서 그렇게 매달리는 걸까. 한동안 안보자고 굳게
결심했던 내가 또다시 현성일 찾아가게 된 것은 어제 걸려온 현진언니의
전화 한통이었다.
“현성이가 사과하겠대. 어제 어렵게 설득했어. 한번 찾아와 줄래?”
처음으로 내게 굽히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찾아갔을 때 현성이
는 쇼파에 앉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 비너스 상도 가장
볕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서서 거실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소지으
며 반겨주는 사람은 오로지 현진언니뿐이었다.
“현성아, 주현이 왔어.”
그는 날 바라보며 ‘오랜만이네’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사과할 마음이 있기는 했었는지 그저 땅만을 푹 내려보고 있었다.
“사과하겠다며?”
내 말에도 한동안 말이 없언 현성이를, 현진언니가 얼른 눈치를 준다.
“어쨌든, 그건 미안했다. 너한테 괜히 화를 냈던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서도 미안이라는 말을 잘만 하는구나. 왠
지 성의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는 자꾸만 날 화나게 하기 충분했다.
“나한테 정말 미안하면 저 상, 버려.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다 놔.”
그리고, 나는 가장 하고 싶었던 요구를 말했다. 언제나 저 비너스 상 앞
에만 서서 비너스 상을 바라보던 현성의 모습이 더 이상 보고싶지 않았
다.
“넌 네게 가장 소중한 물건을 버릴 수 있어?”
“……왜 묻는거야?”
“저건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물건이야.”
그깟 비너스 상이 뭐라고, 현성이는 뻣뻣한 태도로 말했다.
“저 비너스 상이랑, 나랑 둘 중 누가 더 소중한데?”
정말이지, 물건과 나를 비교할 날이 올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책상 위
에 놓여있던 그 여자의 사진을 보며 울먹울먹 간신히 넘어오는 눈물을 삼
켜내던 기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언제나 양보만 하고 살아왔잖아.
지금까지 그 여자 사진을 그대로 두게 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은 것 역
시 내 양보였어.
“난 널 그저 좋은 친구로서 생각하지만 저 비너스 상은 달라. 내가 사
랑하는 물건이야.”
! 아릿한 충격이었다.
“무슨 뜻이……야?”
충격 때문인지, 내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것이 귓가에 잡혔다. 서늘한 목
소리로 현성은 금방 답을 내렸다.
“말했잖아. 난 너 없이는 살 수 있겠지만, 저 비너스 상 없인 살지 못
해.”
한동안, 머릿속에 잡히지 않던 말을 마구 퍼부어 댔다. 적어도, 그게 나
에게 할 말이냐고- 너랑은 이제 끝이라고 쏟아부었다. 그동안 참고 참아
왔던 말들을 하면서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래, 난 더 이상 널 안봐. 안 볼거야. 하지만 네가 내게 상처를 준
만큼, 나 역시 똑같이 행동할거야.”
그리고, 현진언니도 현성이도 잡을 새가 없이 나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화병을 들어 비너스 상에게 던져버렸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부서
진 화병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미친듯이 광기에 사로잡혀 비너스 상
에 대고 발길질을 퍼부었다. 주먹으로도 내리쳤다. 딱딱한 표면과 부딪
친 손과 발등이 매우 아려왔지만,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현진
언니가 놀라서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일어섰고, 현성은 어느새 달려와 날
붙잡으려 했다. 그리고, 내 손에서 밀쳐진 비너스 상에 커다란 금이 가더
니, 결국은 머리 한 쪽이 부서져 내렸다.
그 순간, 나는 나를 확 밀치는 매서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악!”
현진언니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린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찾고
눈가에 고여있던 희부연 눈물을 흘려보냈다. 나는 비너스 상과 마주보게
끔 쓰러져 있었다. 세게 맞았는지, 머릿속이 그저 윙윙 울려왔다. 그리
고, 틀림없이 내가 잘못 안 것만 아니라면 비너스 상의 안쪽은 비워져 있
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게 느껴졌다. 오슬오슬-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한기가 나를 덮친다.
“아…….아악!”
비너스상 안쪽에는 이미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그의 그녀가, 아직 채
다 문드러지지 않은 퀭한 눈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첫댓글 와아 반전이 멋집니다! 정말정말 멋있어요. 근데 동상안에 시체가 있던건 실화가 아니겠죠? aa
그게 실화였다면 전 심장마비로 죽었을 거예요^-^;;; 이상하게 제 주변 사람들이 무서운 일을 겪었다는...; 그것만으로도 무서운데;;;
조금 섬뜩하네요. 그래도 재밌어요!!
마지막 부분...정말이지 너무나도 큰 반전입니다 태성이(맞나?)가 재발했다는 그런 내용과는 다르게 재미있는 반전이군요
와아, 감사해요...>_<
진짜 재밌었어요! 오옷;;; 무섭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