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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설교)20140316사순절둘째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창12:1-8, 마4:1-11
노마드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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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지식인들 사이에서 “노마드”(nomad)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유목민,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현대지식인들이 노마드를 자꾸 언급하는 이유는 유목민처럼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도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 자유로운 시대정신이 지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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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다 노마드가 되어서 에덴의 땅을 벗어나 가인처럼 유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까요? 화전민들처럼 자연을 파괴하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겨우겨우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다 버리고 유목민들처럼 텐트치고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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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정신, 노마드의 삶, 유목민의 삶이란 그냥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노마드’란 버려져서 쓸모없는 땅,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불모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바꿔가는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노마드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한 곳에 정착할 수 없고 끊임없이 탈주를 꿈꾸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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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속의 노마드
이런 의미에서 노마드의 정신을 이해하고 세계역사를 뒤돌아보면 아주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경제학자이며 사상가인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20년간 연구 끝에 『호모 노마드』 (웅진닷컴, 2005)라는 역작을 내놓게 되는데, 여기서 인류 역사의 진보와 뿌리를 ‘이동하는 사람들’, 즉 ‘노마드’에서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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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따르면, 인류는 원래 이동하는 노마드였고, 불, 마차, 바퀴, 야금술, 기마술, 도구, 문자, 예술, 시장, 민주주의, 종교 등이 정착민이 아닌 이동하는 사람들, 노마드들이 만든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도시 정착민이 만든 것들도 있는데, ‘국가 감옥 세금’ 같은 것들입니다. 즉 통제와 억압의 수단을 도시 정착민들이 만든 것으로 규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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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보면, 이집트, 바벨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몽고, 미국 등 세계 역사상 대제국들도 말을 타고 이동하거나 메이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야 했던 이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한때 우리나라 브라운관을 점령했던 서부영화들도 알고 보면 모두 일종의 노마드입니다. 황무지를 개척하는 유목 정신의 사람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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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이 세상의 역사는 강자처럼 군림하고 땅을 선점하고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나 새로운 곳, 미지의 땅을 향해 이동하고, 이 땅에서 저 땅으로 꿈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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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노마드
이 점에 있어서 성서의 말씀도 예외는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마드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불모의 땅에 살던 사람들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순서대로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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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에서 창조가 이루어졌고, 무에서 창조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살수 없는 불모의 땅에서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노마드 정신의 하나님이 세상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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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초의 인간은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살기 좋은 땅에서 범죄로 인해 정착하지 못하고 내쫓겨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저주 받은 땅을 이리 저리 유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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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형 가인은 정착생활을 하는 농민이었고, 동생 아벨은 이리 저리 양과 소를 먹이는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착민인 가인이 유목하는 동생을 살해합니다. 이 구절은 분명히 유목하는 인생, 떠도는 인생, 노마드의 인생이 실은 얼마나 고달픈 인생인지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유목민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한 자리에 안주하고 있는 자보다 고달프지만 이동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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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홍수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죠. 방주란 구원의 배입니다. 동시에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채 바람 부는대로 40주야를 떠돌았던 배입니다. 이동하는 노마드의 삶이 이 방주로 표현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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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홍수 다음에 나오는 창11장의 바벨탑 사건 또한 한 곳에 정착하고 모여서 살려고 하는 인간들을 흩어버리고 이동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창세기 11장까지 나오는 모든 사건들이 제각각 다른 주제로 그려졌지만 중요한 것은 ‘이동’ 의 삶이란 데 있고, 하나님은 한 곳에 정착하고 안주하려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흩어서 이동하게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창12장에서 이렇게 하시는 이동시키는 이유를 가르치기 위해 한 인물을 선택하고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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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바로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하란 땅에서 정착해서 살 동안 만큼은 우상조각을 만들어 팔면서 남부러울 것 없이 먹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던 자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불러 아비의 땅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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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총합해보면, 아브라함 이전까지의 이동은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유랑이었다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이동은 약속이 있었고, 축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 하나님은 아비집을 떠라라고 하면서 복을 약속합니다. 자손의 축복과 모든 민족이 이동하는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죠. ‘네가 내 말대로 움직이면 복덩이가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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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브라함의 이동은 아담과 하와, 가인, 노아와 그 후손들, 바벨탑의 민족들이 했던 이동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나 약속을 붙잡고 이동하는 믿음의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 마다 축복이 뚝뚝 떨어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을 붙잡고 가는 길도 가시밭길이었고, 믿음이 있다해도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주변 족속들의 눈치를 피해 누울 곳, 쉴 곳, 잠잘 곳을 정해야 했고, 가축의 물을 먹이기 위해 사막에서 우물을 놓고 목숨 건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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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 모두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그 여정 한 가운데 불모의 땅은 생명의 땅으로 변했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절망은 큰 민족으로 이루는 축복의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약속을 부여잡고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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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오늘 우리의 구약 본문과 관련해서, 창12-13장 아브람과 조카 롯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주 특별합니다. 아브람과 롯 모두 이동합니다. 유목의 삶으로 떠납니다. 그런데 동시에 떠난 이들에게 미세한 차이가 감지됩니다. 창12:4을 보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은 삼촌 아브람과 함께’ 갔다고 알려줍니다. 이 차이가 이제 13장으로 가면 극명하게 갈립니다. 한 사람은 약속의 말씀을 따라갔고, 한 사람은 삼촌을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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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이동합니다. 가다가 일행들이 갈라서야 하는 상황이 13장에서 오자, 처음에 보였던 차이가 결과물을 내기 시작합니다. 삼촌 아브람은 자기 권리주장을 하지 않고 조카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창13:9절 이하를 보면 아브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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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조카 롯은 아주 영민하게 주위를 살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단 지역의 물 좋은 땅을 선택합니다. 이제 롯은 그 땅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 땅의 이름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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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소돔과 고모라의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심판과 저주의 도시가 되지만 롯의 눈에는 그곳이 에덴동산 같다고 합니다. 정착하고 안주하는 것이 편하고 행복한 것으로 알지만 결국 심판의 자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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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장에서 불모의 땅이 생명을 낳는 땅으로 선언되었듯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이동하는 아브라함 이야기 역시 경수가 끊어진 사라가 생명을 낳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의 이동은 새로운 의미로 변합니다. 분명 이동은 불편하고, 고달픕니다. 그러나 그 모진 불모의 땅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이 약속을 믿는 신앙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됩니다. 믿음 안에서 걸어가는 노마드는 복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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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자기 땅을 잃어버린 가장 뼈아픈 시기였던 바벨론 포로기가 노마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도 다 무너지고, 자기 땅은 식민지가 되고, 만리타향으로 포로되어 땅 없이 살아가야 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구약 성경의 3분의 1이 예언서인데, 바로 이 시기에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활동했고, 새로운 정신, 위대한 정신이 나타난 때가 바로 이 땅을 잃어버린 고난의 시대입니다. 야스퍼스라는 철학자는 이 시대를 일컬어 세계사의 기둥뿌리가 되는 “축의 시대”라고 할 만큼 위대한 정신들이 세상에 나타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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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의 정신, 하나님 백성의 정신은 평화기, 정착기가 아니라 유리한 삶, 이동하는 삶, 고난의 삶, 땅 없이 사는 괴로운 삶의 여정 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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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예수
신약으로 넘어와 볼까요? 아브라함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산 노마드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노마드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당연히 한 곳에 머물수 없었고, 불모지의 땅을 찾아 이동하는 노마드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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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정을 우리는 십자가의 여정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그 십자가 길을 가셨습니다. 그 길에는 복음서에서 ‘무리’라고 번역된 ‘오클로스’가 항상 함께 했습니다. 오클로스는 힘 있는 군중이 아니라, 힘없고 연약한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일자리가 정해져 있거나 먹고 살 걱정 없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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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한 가운데로 걸어들어 간 오클로스들의 삶은 그 자체가 십자가였고, 세상으로부터 정죄당하고 손가락질 당하던 사람들이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도 삶 자체가 십자가의 극형을 받고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류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사람들, 죄인들, 몸 파는 사람들,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 홀로 사는 여인들, 사마리아 사람들, 이방인이라는 이름으로 소외당하고 핍박당하던 자들이 모두 예수님 주변에 있던 오클로스, 무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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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제대로 살고 싶어도 그럴 기회조차 박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행복이나 생명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버린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사는 자리는 모두가 침을 뱉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희망이 움틀 수 없는 불모지, 바로 오클로스들의 삶 한 가운데로 이동하는 노마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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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창1장에 나오는 혼돈 한 가운데서 창조하시고, 무에서 창조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오클로스 안으로 들어가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참 노마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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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예수님의 대적자들이었던 성전 중심으로 살던 유대인들, 권세있고, 부유하고, 잘 배운 기득권자들이 보기에 예루살렘이란 도시는 정착해 살기 좋은 에덴동산 같은 곳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분명 아브라함과 헤어져 소돔과 고모라로 향하던 롯의 눈과 같습니다. 하지만 평생 떠돌이 아브라함의 눈, 예수의 눈에는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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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예루살렘 성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였고, 회칠한 무덤이나 매 한가지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이고 이동해야할 축복의 자리는 잘 먹고 잘 사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죽지 못해 사는 고달픈 인생 한 가운데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곳으로 이동하시고 그들을 만나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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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과 니고데모
오늘 복음서 본문으로 읽은 요4장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와 그 바로 앞장인 요3장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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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퍽 대조적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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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어떤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니데모는 도덕적으로 높은 지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을 정도로 부도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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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는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말 그대로 여자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자기의 입장도 있고 해서 밤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여인은 대낮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찾아갔고, 여인은 예수님이 찾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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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너무나 대조적인 이 두 사건의 말미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요3:20에서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 누구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까? 어둠 속에 찾아온 니고데모, 직장 좋고, 반듯하고, 뭐하나 부족함 없는 정착민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빛을 미워하는 밤이라고 정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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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요4:26을 보시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바로 자신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알려 주시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는 구절들이 여러 곳에서 나오지만 모두 제3자를 통한 증언이거나 간접적인 해명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대일로 ‘내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정체를 직접 밝히는 구절은 바로 이곳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나타내주십니다. 이 일은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떠 있는 정오에 일어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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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삶 자체가 너무 고달프고 아파서 남들의 눈을 피하고, 자기 마음 문까지도 닫고 살아야 하는 여인.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괴로워서 어디 정착하지도 못하고 십자가 처형당하듯이 이리 저리 방황하고 떠돌며 살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런 자들을 찾아가시고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인생의 주인공이 되도록 역사를 ‘재창조’해나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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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육체의 갈증을 때문에 물동이를 가지고 왔지만 노마드 예수를 만난 후로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갑니다. 그리고는 소리칩니다.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다!” 이후 사람들은 모두 예수 앞에 나와 영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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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간단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사마리아 여인처럼 인생이 고달프고 아픈 사람, 오클로스를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인생을 변화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된 인생은 다시 노마드가 되어 자기 자리를 떠나 불모지로 나가고 그 곳을 생명으로 바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노마드이십니다. 그분은 포기한 인생, 절망 한 가운데로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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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같은 우리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참 노마드였다면, 우리도 죽어가는 세상, 영혼의 불모지로 찾아가는 노마드가 되어야 합니다. 내 육신의 갈증을 해소할 내 소유의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이웃의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노마드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부활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라기는 부활의 말씀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복된 노마드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