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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한하운 평론 - 르뽀타쥬 ***
아야! 문딩이 자슥아! 니 할 말 다하고 갔나?
영혼의 귀족이여!
저동(苧童) 권 녕 하
* 공동묘지에 묻힌 한하운
필자가 받은 원고청탁 제목은 ‘한하운 시인 문학평론’이다. 그런데~ 평소 문학평론이란 장르에 대해 “저명인사의 문학적 성과물을 놓고, 서구문학 이론이란 잣대로 타인의 감성에 흠을 잡는 것---.” 정도로 치부하던 필자인데, “씁시다!” 하고 답변했다. 에고~ 왜 그랬는지, 그 직후, 밀려드는 자괴감이라니. 내 손으로 평론을 쓰는 순간, 자가당착(自家撞着) 아닌가. 생각 끝에 르뽀-타쥬에 가까운 다큐시스템(?)으로 작성하기로 맘 먹고, 데스크를 책임지고 있는 시인 한승욱 님에게 의사타진을 했다. 결과는 “오케이”다. 이제부턴 결과에 대한 반응은 치지도외시 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기로 작정한다.
1. 파랑새는 죽어서야
그의 행적을 찾아 출발한 첫 날은 아열대성으로 변질해버린 우리나라 여름 장마철 한 복판인 8월 초순경이다. 하늘이 마치 진국 곰탕국물처럼 뿌연 회백색이다. 필자의 첫걸음은 시인 한하운 선생이 잠들어 있는 김포 장릉공원묘지. 묘역은 김포의 진산격인 장릉산의 줄기가 남쪽으로 흘러내리다 작은 언덕과 습곡을 불편하게(?) 뒤섞어 놓은 구릉지대, 그 곳에서도 끝자락 도로변이다.
안내판이 붙은 공동묘지 입구에 서서 그가 생전 살았던 인천 십정동 방향을 조망해 본다. 순간, 노~란 번개가 동시에 3개씩이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듯 내리꽂힌다. 낙뢰다! 버릇처럼 시계를 본다. 현재 시각 8월 6일 오후 3시.
비 오기 직전, 습도가 갑자기 높아진 공동묘지를 헐떡이며 들어가니, 한하운 선생의 유택이 보인다. 유택은 한마디로 지저분하다. 한 컷의 사진을 위해, 독자를 위해, 묘역 주변과 상석 주변의 오물을 대강 치우고 나서 촬영한다. 남서해안에서부터 어두운 구름이 밀려오더니 기어이 빗방울을 뿌려댄다.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묘역 주변 땅의 축축한 느낌과 풀밭에서 피어오르는 습기가 숨을 턱턱 막는다. 땀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고, 공동묘지 한 복판에서 비 맞는 기분이라니.
도로변에 김포장례식장이 있다. 화장터다. 누가, 유언에 따라 한하운 선생을 모셨다고 주장하는가. 이곳은 분명 공동묘지다. 미리 준비돼 있었거나 급히 마련했거나 해야 “모신다”는 표현을 쓰는 것 아닌가? 따라서 한하운 선생은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그가 생존 당시, 활동(나환자 구제활동)하던 <신명보육원>이 있는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은 한하운 선생의 유택이 있는 장릉공원묘지에서 정남쪽 방향이다. 어른 발걸음으로 걸어서 반나절 정도의 거리, 몇 십리 상거다. 옛적엔 상여가 움직여도 될 정도로 지근거리다. 그렇다고 상여로 이곳까지 왔다는 말은 아니다. 유가족도 몇 안되는 그의 시신을 운구했을 몸 성한 인원도 의심스럽고, 여지껏 홀대한 것을 보면 번듯한 장례행렬은 상상도 못하기 때문인데~ “죽으면, 북쪽 고향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살아 생전의, 유언이 쑥스럽게(!) 전해질뿐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고향이 보인다고? 그 말(유언)을 곰씹을수록 필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고향? 북쪽이 보이는 곳? 가소로운 인간들---. 그 당시 인천시가 외면하고 내다버린 시신을 김포가 받아들여 껴안은 형국인데~ 유언을 지켰다니! 단독 유택도 아니고, 그의 고향이 함경남도 함주일진대~ 제대로 대접을 했다친다면, 경기도 강원도를 가릴것 없다 쳐도 임진강변이나, 한탄강 상류나 동해 바다라도 보이는 곳에 묻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겨우 인천 밖 몇 십리 북쪽, 공동묘지에다 묻어놓고는 이제 와서 생색이라도 내겠다는 것인가! 문둥병 환자 시신 처리하듯 해놓고---. 이제 그의 영혼은 그의 염원처럼 “파랑새” 되어, 고향 하늘을 날아다닐 밖에.
2. 하늘에 대고 욕을 해도 시원찮을, 지옥같은 이 세상
월남 이후 병이 도져 인천의 성계원이란 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시인 한하운. 1951년 문둥병 환자들의 부모와 자녀들을 격리시키기 위해(이때부터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고 봐야겠다), <신명보육원(1951년 설립)>을 직접 설립한다. 기본적인 자료라도 확인할 겸 현재의 신명보육원으로 문의를 해 본다. 그런데, 신명보육원의 설립연도가 1952년 5월로 돼 있다.
1년이 어디로 갔나? 문둥이 손가락 떨어지듯 없어져 버렸나? 그 당시는 6.25 전쟁 중이라지만, 365일이 어디로 증발했나? 신명보육원 이름과 장소는 그대로인데, 사라진 1년은 무슨 연유일까. 시인 한하운의 행적이 남아 있을 “소중한 1년”은 어디로 갔나. 저절로 사라진 것인가. 아님, 일부러 없앤 것인가.
그 당시 인천 부평 십정동 지역 일대는 나환자 자활촌이 여럿 들어서고 정부는 이들을 격리치료 차원에서 국공유지 무상불하 등 약간의 혜택을 준 기록이 있다.
한하운은 기독교에 귀의한 흔적이 없다. 죽고 나서도 마치 동물의 회귀본능처럼 떠나온 고향 하늘 그리워, 고향 보이는 곳에 시신을 묻어달라고 했다지 않은가. 현재의 신명보육원은 재단법인으로 돼 있다. 설립취지에는 “기독교 사상”을 분명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 한국문단은 별스러울 줄 아셨나요
한국 문단인들 별스러울 줄 알았나. 천형(天刑)의 나병(癩病)을 앓고 있으면서, 살아 있는 것이 서럽고도 더러운 이 세상에서, 통분(痛忿)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시(詩)”였고, 시 몇 줄 써서 세상에 이름 알리고(얼굴 내밀고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인의 동정도 받고 환자 구제사업 하는데 도움도 되고 하려 했는데, 결과는 문단족벌, 문단계보, 일부 원로급의 귀족주의라는 높은 문턱을 넘지 못하고(한국문단에 정상인처럼, 합류하지 못하고), 절필한다. 1960대 이후부터 문단과 관계를 스스로 끊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몇 없는 한하운 평론 중에 그의 서정(抒情)시가, 서정적 표현에 있어서, 직정(直情)적이라서, 마치 흠결이 있는 것처럼 쓴 논조를 본 기억이 있다.
격(格)이 떨어진다고 본 것일까. 폼 좀 내고 에둘러서 꾸미지 않아서일까. 혹시 문둥병 환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공개석상에서 공식적으로 교류하는데 문제가 있었겠지만, 격리 수용상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의 현실이 그를 소외되게 만들고, 그의 문학적 성과와 철학을 진작시키는데 장애요소가 됐겠지만, 즉 누가 한하운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혐오스러운 문둥이였기에, 그의 진가를 평하는데 암묵적으로 인색했던 것은 아닐까.
한국문단이, 나환자를 대하는 보건소 보다 거지 취급하는 병원보다 거렁뱅이 행려병자 더러운 짐승처럼 몰아대던 파출소보다 문턱이 더 높지는 않았겠지만, 문둥병 걸려봤어요? 저주받은 천형(天刑)으로 낙인(烙印) 찍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격리되고 수용되고 길가는 아이들 돌팔매에 머리 터지고---, 겪어 봤나요? 하느님인지~ 하나님인지~ 하늘에 대고 욕을 해도 시원찮을 정도인데~ 뭐 직정적이라서! 덜 서정적이라고? 살아서 두 눈 뜬 채, 지옥을 겪는 사람, 한하운에게 감성이 정리가 안 돼 있다고?
여기 <아리랑>을 소개한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또 <공무도하가>를 소개한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그예 물을 건너고 말았네/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임이여 이를 어이할꼬”
수 천 만 년간 이어져갈, 민족혼이 서려있는 노래 가락는 이렇게 다 직정적인걸, 그 연유를 깨달아야 한다. 한하운 선생이 한국문단과 결별한 까닭을 알 것 같다.
인간의 감성, 특히 서정성을 론(論)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서정성을 감성의 장식품으로 보는 몰염치(沒廉恥)다. 서정성은 관습과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일상생활 중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감성을 “서로 주고받는 심성의 미적 표현”일진대, 이 세상살이가 지옥같은 사람에게, 서푼어치도 못되는 서구문학 이론의 잣대를 들이대는 몰염치라니!. 이런 몰염치를 학교에서 정답이라고 가르칠까봐, 민족의 미래가 걱정스럽고 기가막힐 노릇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데.
3. 문둥이를 껴 앉은 아름다운 김포
문화관광부, 예술원, 한국문인협회, 예술인총연합회, 인천광역시 등 그 흔한 기관과 문화 예술단체, 지자체들을 탓 할 생각 없다. 문둥이 챙기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았을 터이니. 다만, 여지껏 기피하다 김포가 시작하니까, 이제 와서 생색내는 민, 관, 단체들이 사뭇 밉살스럽다. “늦었지만~ 챙기겠다”는 김포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의식과 때늦은 회억(回憶)이 ‘그래도 문화예술인의 자긍심을 지켜’ 줘서 고맙고, 스스로 위로가 될 뿐만 아니라 그나마 다행스럽다. 따라서 시인 한하운 선생을 다시 기억하기 시작한 김포는, 그동안 외면하고 몰염치하고 못 본척 하고 모른 척 하느라 마음 깊이 그늘이 졌던, 대한민국 문화예술인들의 마음을 ‘눈물나도록’ 다독여 줬고, 한하운 선생을 통하여 문화예술인들의 혼(魂)에 불을 지펴줬기에, 매우 소중한 것이다.
*지면을 통해 김포신문 곽종규기자(2011-05-26)의 기사를 일부 인용, 이해를 돕고자 한다.
김포문인단체, 제1회 김포한하운문학축전 열어
김포에서 ‘보리피리’되살리자 김포문인들 염원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려있는 `보리피리'와 `파랑새'의 작가 한하운은 지난 75년 김포시청 뒤 장능인근 김포공원묘지에 잠들었다. 한하운 시인이 김포공원묘지에 잠든 것은 한센병 환자로 그의 인생이 인천 부평구를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고향인 함경남도 함주와 가까운 점이 유택으로 선택된 듯하다.
한하운의 아내이자 경미한 나환자였던 유임수는 한하운이 죽자 부천으로 이사했고, 김포 묘지를 매일 찾아 애도할 정도로 부부의 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포에 잠든 위대한 시인을 기리자’는 분위기가 문학인들 사이에 일고 있는 가운데 지난 21일 김포한하운문학축전위원회(공동대표 김동진 고광만)가 ‘제1회 김포한하운문학축전’을 김포시내 홍도형 보리들판에서 가졌다.
김포한하운문학축전위원회(공동대표 김동진 고광만)가 주최하고 5개 시 동인단체들이 공동주관한 이번 행사는 80여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인의 문학정신을 계승 발전시키자는 의미로 ‘보리가 다시 핀다’를 주제로 진행됐다.
이명진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김동진 공동대표의 내빈소개와 김두안 시인의 연보소개, 노수은 김포예총지부장의 승무와 참석자들의 시낭송으로 이어졌다.
행사장까지 이어지는 500여 미터의 보리밭 사이의 길에는 시인의 주옥같은 시들이 깃발로 나부꼈고, 시인의 얼굴 판화를 현장에서 제작해 선물로 나눠주기도 했다. ---중략--- 파랑새 시집 최초 본을 이상범 원로시인이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하영이 준비위원은 취지문 낭독에서 “김포문인들은 한잔 술을 곁들이며 시인(한하운)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보고 시적 영감과 용기를 얻곤 했다”며 “외로웠던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그 안의 방치한 부끄러움을 딛고 문화 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 무형의 에너지, 영혼의 귀족
김포에서, 일면식이 없던 하영이님을 김포 출신 이정희 시인의 안내로 만났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한하운 선생의 자료와 함께 그의 영혼(靈魂)을 만났다.
그리고, 세상이 기피하는 문둥이, 한하운 시인의 유택을 할양해 준 그 당시 김포군수의 존함도 밝혀야 한다. 제25대 김포 군수. 그리고 힘에 부쳤겠지만, 무하출판사를 유지하며 나환자 구제사업 등 고인의 정신을 이어온 양녀 혹은 제자 이복실님도 함께.
또 하나, 미망인 유임수 선생의 이후 행적을 살펴야겠다. 아울러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대표시를 낭송하지 않고- 불러달라고 했다는 “솔베이지 송”에 얽힌 스토리도 알려져야겠다.
이 세상을 향해 원망과 통분을 억누르고 지옥같은 한 세상을 살다 간 시인 한하운. 할 말이 얼마나 많았을 터인데 어찌 한 마디 말도 없이 갔단 말인가. 필자가 동년배였다면, 장례식장에서 큰 소리로 한 마디 했을 것이다. 아야! 문딩이 자슥아! 와, 니 할 말 다 안하고 가버렸나? 영혼의 귀족이여!
4. 문둥이 박수치는 소리 들어봤나?
문둥이가, 무에 기쁜 일이 있어서 박수를 칠까. 박수 칠 일도 없겠지만, 박수 칠 때마다 떨어져 나가는 손가락 끝마디---. 문둥병 환자 격리 수용소에 유명인사 방문하는 날이면, 뙤악볕 운동장에 반나절씩 앉혀놓고 지루한 환영사, 답사, 축사, 격려사~. 그때마다 박수치라는 험상궂은 표정. 그때마다, 손가락 마디 툭 툭 떨어져 나가는 소리. 마사토 운동장 흙바닥에 떨어진 손가락 마디. 아프지도 아깝지도 않은 징그러운 내 뼈와 살. 선거철, 하루걸러 박수 칠 일 생기는 날엔, 다 떨어져 나간 손가락 마디, 겨우 붙어 있는 둘째 마디부터 손가락을 오무리고, 위 아래로 서로 비비고 부딪치며 겨우 ‘바각바각’ 소리를 낸다.
박수 소리가 작으면~ 지원금이 줄어들까. 문둥이 손가락이야 떨어지든지 말든지 ‘박수’치라는 구령에 맞추어, 어제 오늘 또 어제 오늘---, 날이면 날마다 박수소리를 내려니, 문둥이 수백 명이 내는 박수소리는 개구리 울음소리---. ‘바각빠각바각빠각---.’ 처량한 소리.
다음은 한하운 시인의 시 “손가락 한 마디”다.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손가락 한마디-전문>
말초신경 다 문드러져 가는데 박수치라니 쥑일 것들. 머리 긁다 떨어지질 정도의 손가락 가지고---. 그러니 <손가락 한 마디>라는 시를 썼지.
5. 한 번 감상해 볼까나
평(評)은 감상이 먼저다. 읽을 줄 알아야, 볼 줄 알아야, 평을 한다. 그의 연보나 뒤적거리고 다다이즘이니, 아방가르뜨니, 모던이니 포스트모던이니~ 하는 서구의 잣대로 재는 것이 진정한 평은 아닐 것이다. 한국인의 감성은 우리 민족정서가 배어 있는 잣대, 몇 십리, 한 치, 두 되--- 로 재야 치수가 잘 맛을 것 아닌가. 아리랑 잣대나, 공무도하가 잣대로.
시(詩), <파랑새>는 <보리피리>와 함께 시인 한하운 선생의 대표작으로 애송되는 절창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되리.“ <파랑새-전문>
파랑새는 실존하는 ‘새’ 임에도 불구하고 전설처럼, 우리민족에게 상징성이 강한 새다. 파랑새의 상징성은 염원(念願) 그 자체다. 새 이름 파랑새처럼 파란 색(色)은 하늘, 자유, 해방 등 인간세상살이의 신산고초를 시원스럽게 씻어 줄 수 있는 푸른 하늘, 푸른 바다 등 고통 받는 인간의 염원이 처절하게 물든 칼라다. 그 칼라를 자재자유로 몸에 입고, 싣고, 안고, 하늘을 자유스럽게 날아다니는 파랑새는 영혼과 육신의 합일체다.
첫 줄과 끝줄의 반복, 단어의 중복 등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한류 K-POP에도 자주 등장한다. 정신없는 노인네, 술 꾼, 잔소리 하는 어른들만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를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그 중요한 만큼 자꾸 강조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리듬감이 충실하면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된 리듬감에 뇌리 깊숙이 각인되는 효과가 있다. 글자 하나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절창 파랑새는 그래서 명시(名詩)다. 노래 불리워져야하는 숙명을 타고나는 시(詩)는 이렇게 간명해야 전달이 잘 돼서 좋다.
산문시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산문과 시는 서로 상반되는 용어를 함께 묶어 조어(造語)처럼 보인다. 너울너울 낭송(朗誦)이 되어야지, 시는 낭독(朗讀)하는 장르가 아니다. 파랑새는 현재,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 실려 있다.
“보리 피리 불며/봄 언덕/고향 그리워/피ㄹ 닐리리.
보리 피리 불며/꽃 청산/어릴 때 그리워/피ㄹ 닐리리.
보리 피리 불며/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피ㄹ 닐리리.
보리 피리 불며/방랑의 기산하(幾山河)/눈물의 언덕을/피ㄹ 늴리리.”
위의 시(詩) <보리피리>에 등장하는 시어(詩語)는 “봄 언덕과 고향, 꽃 청산과 유년시절, 인환의 거리와 인간세상, 방랑의 기산하와 눈물”이 전부일 정도로 간명하게 문둥병 환자의 신세를 그려내고 있다. 청보리 잎새 푸르른 봄 날, 치료비 대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남북이 갈라져 돌아가지도 못하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차별과 모욕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유년시절로 돌아가고픈 시인의 통분(痛憤)이, 고향의 “언덕”과 경기도 일대의 “언덕길”로 대비시키며, 문둥이로 치욕을 견뎌내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세상을 절규하며, 준엄하게 고발하고 있다. 서정적으로---. 도시의 길을 피해, 사람들 눈을 피해 다니는 언덕길로.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전문>
시(詩) <전라도 길>에 필자는 “소록도 가는 길”이라고 부제를 삼는다. 까닭은 손양원 목사가 봉사, 시무하는 소록도는 대표적인 나환자 구제, 수용, 집단시설로 예나 지금이나 유명하기에, 시인 한하운이 나환자 구제사업을 하면서 도움을 요청할 겸, 한 번쯤은 가 봤을 것이라 유추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붉은 황톳길”이 두 번 등장한다. 계절은 “숨 막히는 더위”로 보아 한 여름이다. 걸어서, 경기도 부평에서 출발해 충남 천안 삼거리를 지났는데도 뜨거운 한 여름 해는 질긴 수세미처럼 아무리 밟고 비벼대도 “떨어지질 않는”다. 잘 닦여져 걷기 좋은 포장도로는 “사람들”이 다니고, “문둥이”가 맘 놓고 다닐 수 있는 길은 산길, 들길, 붉은 황톳길 뿐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신발 바닥에 들러붙는 황토 진흙의 무게. 천근만근 무거운 발을 끌고 무딘 말초신경 발가락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걷는 황톳길이다.
어른들은 못본척 피하고, 아이들은 거지, 망태할아버지, 재건대원, 문둥이---, 놀려대며 괴롭힌다. 심지어는 무덤을 파헤쳐 죽은 사람의 뼈를 가루내어 약으로 쓴다는 낭설,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사람의 간을 약으로 쓴다는 헛소문에 괴롭힘을 당한다. 철없는 아이들이 놀려대고 돌팔매질 하며 문둥이 주위를 맴 돌며 히죽거린다. 시인의 눈에서는 불꽃이 일어나다 결국 눈물이 흐른다. 저주에 천형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리 사람 사는 세상이 허망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전라도 길>에서 삶의 회의감을 드러낸다. ‘살아 간다는 것’ 자체가 지루할 뿐이다. 왜 살아야 하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남도 천리 길에서 현기증 날 정도로 지친 시인은 남은 희망도 없다. 문둥병 치료는 요원한 일이다. 이대로 더럽고 다 떨어져 나간 육신을 이끌고 다니다 죽음을 맞을 뿐. 믿을 것 하나 남지 않은 지구 땅에서 ‘살아가는 일 자체가 천리 길’이다. 그래도, 시인을 소록도까지 가게 만드는 동력(動力)은, 시인을 기다리는 부평 신명보육원 식구들 때문이다. 삶을 포기한 불쌍한 문둥이들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 제 몸 망가지는 줄 뻔히 알면서도 멀고 먼 전라도 길을 걷는다. 붉은 황톳길을---.
* 밝혀지고 알려지고 수행되어야 할 것들
가. 나환자 구제시설 운영과 안정적 운용은 종교단체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 한하운의 입에서 신을 찾고 기대거나 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가 세운 신명보육원은 현재, 신명재단이 됐다. 1952년 5월 25일 부평구 십정동에서 보육원을 시작으로 현재 아동복지사업과 노인복지사업, 장학사업을 운영하며 지역 사회복지 서비스를 연구 개발, 지역 사회 문제를 예방, 치료하는 사업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 재단의 사(史)에, 한하운의 기록을 살려내야 할 것이다.
나. 앞에 언급했지만, 한(韓)씨가 분명한데, 단일족보 가계를 뒤져서 한국문단사에 “본관 불명”이라는 기록을 고쳐야 한다.
다. 천재의 등장을 용납하지 못하는 풍토, 한국문단에서 학풍, 예풍을 되살리고 학연, 계보, 지역, 귀족주의를 뛰어 넘는 소통과 교류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불가의 야단법석처럼, 문단 원로급이 참여하는 포럼 및 단체간 정기교류를 시스템화 하여 “소통의 광장”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권의 선동 선전 도구로, 단순 기능인 취급을 당하며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 미밍인 부인 유임수씨의 행적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 김포문인협회의 공로를 실질적으로 기리고, 지자체와 문인단체의 공식적인 행사 지원이 절실하다.
* 시인 한하운 참고자료
-. 본명은 태영(泰永)
-. 1919년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 출생(2남 3녀 중 장남)
-. 17세에 나병 진단, 1945년 나병이 다시 악화, ‘하운’으로 개명
-. 1950년 3월, 북한정권에 의해 재산이 몰수당하면서 부친과 월남, 인천 정착, 부평 나환자 정착촌인 `성계원'으로 이주
-. 성계원 생활 직후 자치회장에 선임, 나환자 구제 사회사업가
-. 1951년 현재, 부평구 십정동 577-4 일대에 나환자 자녀들을 격리, 수용한 ‘신명보육원’을 설립, 초대 원장.
-. 시작(詩作) 활동, “보리피리”, “파랑새” 발표
-. 인천지역 부평구 십정동, 청천동과 남동구 간석동 등에 나환자 치료시설과 격리시설 설치. 나환자들은 국유지를 불하받아 황무지를 개간해 양돈과 양계농장을 만들어냈다.
-. 시인, 사회사업가 한하운, 56세 몰
-. 부인 유임수씨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보육시설에서 봉사, 노후를 보내다가 사망 * 김포신문 곽종규 기자 정리, 일부인용(두산백과는 저작권 문제로 인용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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