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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순강진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밝은태양
강진만의 물은 중저앞으로 흘러 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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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의 역사는 윗마을 상저와 함께 농기구나 무기를 만들던 임철지이었으며 입관이 끝나고는 청주김씨 25세인 명오(命오1674~1697)가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칠량 장계리에 살았던 글쟁이의 얘기에 강진만의 물은 중저의 앞으로 흘러 발전할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하였으며 이같은 이야기를 필자는 70년부터 들었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가우도 출렁다리를 가설케 되어 구전이 가능으로 바뀌게 되어 느낌이 더 커진다. 중저 바닷가에서 시 모임을 갖었던 김상준(1869~1929) 그리고 동백출신 김상목(1884~1962) 중저 중매산등 아래 서당산에 살았던 김병복(1867~1923)의 기록에 의해 소문난 경승지이었음을 더 깊게 알아보기로 한다. 장포에 살던 김상준은 초명이 석조, 고쳐서 상준, 자가홍언, 호가 송계(松溪)인데 일찍부터 서울나들이, 자녀 유학등 선구자이다. 그의 시집중 관산에서 한가히 지내던 박대규가 금릉의 많은 인재가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송계의 책상에 시 두수를 올리다 내용에 함께 한 이들이 자세히 적혀있다. 『어느해 5월 4일날 아버지와 치봉(영동 김로원), 난파(해남 옥천 서동포), 은초(동백 김규현), 송정(동백 김상권), 청계(도암 학장 조병주), 호은(가우도 김년술)등 기타 많은 숫자와 사귀어서 유익한 벗들이 대구면 저두리 바닷가 앞에서 간단히 한잔씩 마셨다가 술이 거해지자 시를 읊으면서 서로가 기뻐한다』 라 하다. 시는 2종류 4수인데 두수만 소개한다. 『제비와 꾀꼬리 서로가 찾고 집주인 붉은 얼굴에 흰머리 욕심 버리려 창포주 마시고 시를 지으니 매미 숲 된다. 서쪽에 달뜨니 산은 천층 남쪽의 제주에 마음이 간다. 금릉의 모임에 도리를 깨달아 기쁘게 노니 왕희지 안부럽다.』 두 번째 시는 치옹, 난파, 운호, 송정, 청계, 초은, 호은 등 여러 좋은 친구들이 저두의 바닷가에서 술잔을 나누다란 제목이다.
어부의 피리에 들물과 날물 공적과 명성은 마음에 없다 이치구하니 정신 맑고 지식을 넓히니 시간이 아깝다 』 김상묵은 자가 춘장 호가 계은(溪隱 )이며 1896년 겨울에 지은 시이다. 『저두 물굽이 하늘 비추고 끝없는 물위 안개 끼었다 노젓고 그물쳐 물고기 잡고 바위의 석화는 줄을 이었다 비래도 개이니 햇빛 밝고 가우도 갈매기 나이들었다 현재가 좋아 마음이 맑고 강물에 읊은시 거리낌없다』 중저에 살았던 청주김씨 30세 병복은 아내 김해김씨와 음덕을 쌓아 대구면 9대 면장 민두(1909~1965)를 낳았고 그 아들은 면장 재임 때 5단의 단풍나무를 직접 심어 현재도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사고 있으며 수년전에는 부산 공원으로 옮겨 갈 뻔한 적도 있다. 병복은 자가 채규 호가 신재이다. 타고난 자질이 부모께 효도하고 남에게 따뜻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되 사치를 싫어했다. 자식을 가르치되 올바른 사람이 되는 바른길로 이끄니 살던 면과 마을에서는 선생님이라 불렀다. 또 친족과 화목하고 혼인으로 맺은 외가, 처가의 사돈과 사귀고 사방의 이웃에도 덕행을 베풀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읽어 조상이 쌓은 공덕을 이어받고 자손들의 장래를 위하여 계획을 세웠다고 사람답게 산다간 것을 글로 남겼다. 아내인 김씨(1869~1961)는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자애로웠다. 부녀자가 지녀야할 덕행이 있고 친절하고 극 세상을 떠나자 위아래 살던 마을 주민이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하고 길에 늘어서서 떠나보내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렇듯이 중저마을은 오래되고 기능이 있는 곳인데 옛것을 잊고 있어서 잠시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봉황의 옹기 배는 밤낮없이 지국총 거리며 오갔고 일삼던 선현은 단오절이면 바닷가에서 모여 망중한을 달래던 장소였다. 사는 이들은 바뀌지만 장소는 그대로 있으니 출렁다리, 돛단배, 독 살, 관련 시 등을 정리하고 가꾸어서 다음을 잇는 후손의 삶이 윤택하도록 함께 하면 6세기 때 항구이던 하저와 함께 가우도도 더 발전하리라. -동행취재기- 소에 멍에를 씌우면 소가 벌떡 일어날 것이니... 지금은 강진만에 여기저기 간척지가 들어서 옛 바다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간척지가 없을 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과 사뭇 다른 강진만을 떠올리게 된다. 강진은 북부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해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