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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무용수에서 일본 국수주의 불교의 주직으로 변신한 한국여인
밤새 많은 비가 내렸다.
때와 장소 불문하고 비가 실컷 내린 뒤의 날씨는 대개 청명하기 마련이다.
맑게 갠 이른 아침에 바로 옆에 자리한 13번 다이니치지에 들렀다.
4번에 이어 2번째 동명의 영장이며 토쿠시마시에 있는 5개영장 중 첫번째(一宮町)다.
니시오가 납경절차를 밟는 동안 사찰을 둘러보고 있을 때 문득 어제 저녁때 떠오르지
않았던 이름의 주인이 한국인이 주직(住職)이라는 이 사찰의 승려?
즉시 납경소 직원의 확인을 받았다.
한국 전통무용에 반한 소녀 김진선은 훗날 예명이 '묘선(昴先)'인 유명 무용수가 되고
전통무용단을 거느린다.
'아와오도리'(阿波踊/아와는 시코쿠시대 토쿠시마의 옛이름)라는 일본춤판에 초청된
김묘선 무용단은 나루토에서 춤을 춘다.
이후, 김묘선은 13번영장 다이니치지의 주직 오구리코에이(大栗弘榮)와 결혼한다.
아마도, 무용단을 초청한 것도 그녀에 반한 그(오구리)의 구애작전이었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남편 오구리가 사망하고 노다지판 다이니치지는 아내가 세습한다.
(한국 종교의 현실도 닮아가고 있지만)
승려가 되고 주직이 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했음은 물론이겠지만 한국여인이 삭발
하지 않고 속세의 예명을 법명으로 하는 등 특혜를 받고.
한국의 여무용수가 일본 시코쿠헨로 한 영장의 주직이 된 사연이지만 메이치 시대의
억불정책의 수혜자가 한국의 한 여인이 될 줄이야.
한국의 얼이 담긴 춤을 추는 춤꾼에서 일본 국수주의의 불교,일본의 안정을 수호하며
재앙을 없애고 복을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진언종의 주직으로 변신한 그녀.
남편의 사망은 그녀가 한국춤꾼으로 회귀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이 기회를 버리고.
전통춤에 반했던 건가 춤을 수단으로 일본 영장의 주직이 되는 것이 숙명인가.
축하를 해야 옳은지 애석해 해야 할 것인지는 각자의 일이지만 나는 후자에 속한다.
국제결혼으로 일본 승려의 아내가 되었으나 결국 한민족의 얼이 배인 춤꾼으로 돌아
오는 것이 더욱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이며 존경받을 만한 결단이겠기에.
한국인 헨로상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현 위상에 경의를 표하며 그녀와의 면담이라도
하게 되는 것을 행운이며 영광으로 생각하는 듯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신사(神社)에는 좀처럼 눈을 빼앗기지 않는다.
일본신사에 대해서는 겪은 것 만으로도 충분하며 더 알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연구가 목적이 아니라면 일본신에 대해 알려고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찰을 살펴볼 때에도 경내에 신사가 함께 있으면 관찰을 적잖이 생략한다.
일본신에 대한 거부감이라 할 수도 있다.
13번영장도 그랬다.
살찐 말 1필이 서있는 이치노미야신사와 한 경내를 이루고 부처와 일본신이 융합된
대표적인 사찰이라 할까.
아쿠이강(鮎喰川) 지근의 평지, 차량의 왕래가 심한 21번도로변에 있는 다이니치지는
동명인 4번영장과 판박이 유래를 가지고 있다.
경내의 고목들이 밀교 사찰 분위기를 풍기고 한국 여인이 주직이라는 것과 춤꾼 경력
때문인지 사찰 인근에 자기 이름의 전통무용연구소를 차려놓은 것이 다를 뿐.
작으나 화려한 색상을 한 이색적인 관음상이 현세의 행복 담당 보살인가.
젠콘야도 벽에 걸린 성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찰을 나와 14번 조라꾸지(常樂寺/國府町) 길에 들었다.
3km 안팎의 이 길도 지도와 가이드북, 푯말의 거리표기가 부실하다.
하나같이 모두 제각각이니.
이같은 현상은 마치 약정이라도 맺은 듯 선.후진국 불문, 지구촌의 고질인가.
동으로 가다가 아쿠이강의 이치노미야교(一の宮橋)를 건너 북북동으로 얼마쯤
가면 조라꾸지가 운영하는 전재고아들을 위한 사회복지시설 상낙원이다.
전체 시코쿠영장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이 양호시설을 지나면 조라꾸지다.
여러 보살을 거느리고 화신한 미륵보살을 본 코보대사가 영목(靈木)에 미륵의 존상을
조각해 본존으로 하여 창건했다는 사찰이다.
관음보살이 현세라면 56억7천만년 후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온다는 미륵.
조라꾸지는 시코쿠의 88영장에서 미륵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단 하나의 영장이라고.
본당 우측에 있는 둘레 8m, 높이가 10m인 거목이 '아라라기(朱木?)대사' 란다.
당뇨병환자가 이 나무잎을 달여먹고 나았는데 코보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코보대사를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데 당뇨병과 안질 환자가 빌면 낫는다고 믿는다나.
2번고쿠라쿠지에서는 '안산대사'로 불리는데.
본당 앞의 어린 아이가 잠들어 있는 지장보살상도 밤에 자지 않고 보채는 아이, 치통,
다리통증 등의 치유에 영험이 있다나.
병 고치는 절?
부지런한 단체(버스) 헨로상들로 북적대기 시작한 조라꾸지를 나와 북쪽 800m전방,
같은 타운(國府町)의 코쿠분지(國分寺/15번)로 갔다.
시코쿠의 관립사찰(金光明四天王護國之寺) 중 하나로 쇼무천황(聖武/재위724~49)의
칙명에 따라 교키대사(行基大師)가 세웠다는 사찰이다.
천황의 칙명으로 건립한 코쿠분지와 코쿠분니지(尼寺/여승방)는 전국에 68개소인데
국가의 평온과 오곡풍요, 정교일치, 지방문화의 향상 등을 비는 것이 건립 목적이란다.
창건당시의 종파는 법상종(法相宗)이었는데 코보대사가 시코쿠영장을 개창하기 위해
순교(巡敎)할 때 진언종으로 바뀌었으나 현재는 선종 조동종(禪宗 曺洞宗)이란다.
시코쿠헨로88영장 중 유일한 종파로 병화(兵火)로 전소된 후 재건 과정에서 바뀐 듯.
11번 후지이테라 처럼?
본래의 아와코쿠분지(阿波) 터(跡)는 토쿠시마현의 문화재(사적)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당 좌우의 비공개(담 너머로 조금씩 보임) 정원은 국가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단다.
본당에는 쇼무천황과 코묘황후(光明皇后)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데 정원과 위패를
사찰의 볼거리로 내세우는 것 같다.
남으로 2km쯤 떨어진 16번 칸온지(觀音寺)로 가는 길은 농촌의 골목길로 시작된다.
수로(水路)를 사이에 둔 농로에 붙은 '시코쿠순례 무료휴게소'(四國めぐり無料休憩所)
간판에 우리는 걷기를 중단하고 찾아갔다.
야숙 리스트에도, 길라잡이 지도에도 없는 젠콘야도라 더 관심이 갔기 때문이다.
길에서 조금 들어간 주택 사이에 따로 지은 헥사곤(hexagon/육각형) 너른 방이다.
지은지 꽤 된 듯 한데 왜 누락되어 있을까.
한데, 이 방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벽에 걸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わたしは道であり 眞理であり いのちである)"
긴 나무판에 세로로 음각해서 건 이 글은 불경도 금언도 아니고 기독교신약성서 요한
복음 14장 6절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말을 까미노의 알베르게가 아니고 불교성지 길인 헨로미찌의 젠콘
야도에서 읽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다.
크리스마스와 석탄일에 상호 축하하고 대화하는 등 종교간의 교류가 활발한 시대라
하나 불교의 포용력을 보여주는 경이로운 파격이다.
알베르게에서도 불교 경전의 한 구절을 읽을 수 있을까.
어느 불교도가 알베르게 벽에 불경의 한 구를 부착해 놓았다면 얼마나 오래 유지될까.
알베르게(프랑스길의 사아군)의 외벽에 시코쿠헨로의 홍보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작금의 가톨릭교회의 표용력도 인정할만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라면 어떨까.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를 섬멸의 대상으로 보는, 유별나게 배타와 독선의 독에 갇혀
있는 보수라는 미명의 수구집단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 사건이다.
오, 존경스런 불교도들이어!
16번 칸온지와 17번 이도지
아침 10시 남짓 된 때라 바로 떠나 칸온지로 갔다.
쇼무천황의 칙명으로 전국에 68개소의 코쿠분지,코쿠분니지를 창건할 때 교키대사가
황명을 받아 세웠다는 사찰이다.
코보대사가 시코쿠를 순교할 때 유서깊은 이 고찰에 머물며 천수관음상을 조각, 본존
으로 하는 등 사찰의 재흥을 도모함으로서 신콘슈 칸온지로 바뀌었다는 것.
맹인 아들이 부모 따라 참배중에 본존의 영검으로 개안했으며, 모닥불에 젖은 백의를
말리다가 불의의 화상을 입은 여 헨로상이 전일 어느 날 타다 만 막대기로 시어머니를
때린 업보라고 참회했다.
본당에 봉납한 지팡이, 본당 안에 걸려있는 불길에 쉽싸인 여인의 그림 등의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으며 경내에는 '요나키지조'(夜泣き地藏)도 있다.
밤에 보채는 아이를 고치는 지장으로 빌면 병이 낫고 건강하게 자란다고 믿으며 지장
보살의 턱받이들은 은혜를 받은 답례로 시주한 것들이라나.
동진과 북상을 거듭하며 192번국도와 JR토쿠시마선 철로를 건너 한참 북상하면 17번
이도지(井戶寺)다.
까미노 토말길(피스테라~묵시아)에서는 말고삐를 잡고 말을 끌며 밭을 가는 20c초의
농부가 있었는데 쟁기를 끌어 논의 골을 파는, 19c에 있었던 힘센 농부에 눈이 팔렸다.
첨단 농기구를 외면하고 힘을 자랑하는 별난 장사 바라보느라 갈길을 잊고 있었던 것.
칸온지를 지나 국도변 왼쪽에 있는 젠콘야도 사카에(榮)택시도 아직 오전이기 때문에
통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도지는 텐무천황(天武/재위673~86)의 기원도량으로 건립하고 당초의 이름은 묘쇼
지(妙照寺)라 했다는 사찰이다
815년(弘仁6),시코쿠영장의 개창을 위해 이 사찰에 온 코보대사가 노송나무(檜)에 키
1.9m의 11면관음상을 조각해 안치했는데 현재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단다.
이 시기에 마을 우물이 탁하고 부족하여 고생이 이만저만 아닌 마을주민들.
코보대사는 이들을 위해 하룻밤 새에 자신의 석장으로 우물을 팠는데 맑은 물이 솟아
나서 마을 이름을 이도촌(井戶村)이라 하고 사찰은 이도지로 개명했단다.
코보대사가 판 이 전설의 우물을 들여다봐서 자신의 모습이 비치면 무병 장수하지만
비치지 않으면 3년 이내의 재액에 주의해야 한다나.
대사당 외에도 '히카기리대사당(日限大師堂)'이 경내에 있으며 코보대사를 히카기리
대사라고 부르게 된 사연의 사당이다.
석조(石造) 대사상을 '물대사(水大師)' 라고도 부르며 5일,7일 등 기한을 정하고 매일
참배하면 효험이 있다고 믿고.
아와의 10대(代) 영주 하치스카시게키(蜂須賀重喜)가 오타니(大谷) 별저에서 이축해
기부했다는 산문도 이도지의 볼거리 중 하나?
쇼산지에서 헤어진 후 묘연했던 헨로히로인 일행을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후지이테라를 떠난 후 곧 사라졌던 카모지마 젠콘야도 동숙 팀도 만났다.
카모지마 팀이야 이미 잊혀진 사람들이지만 시코쿠산맥을 당당하게 넘어서 쇼산지에
오른 히로인에 대해서는 기대가 컸는데 실망스럽게도 버스정류장으로 간단다.
이들도 까미노의 한국인들처럼 순례의 새로운 패턴이라고 믿는가.
산수(8순)를 시코쿠헨로미치에서 일본청년과 자축
토쿠시마시의 마지막 영장인 이도지(國府町)를 나온 우리는 식당으로 갔다.
어제 니시오에게 공표한 대로 점심을 먹기 위해서.
80 생일을 일본 시코쿠헨로미치에서 맞는데 나홀로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더구나 이 나이되도록 가슴을 열지 못하는 늙은이에게 용일의 동기를 준 일본 청년의
전야제에 이어 그와 함께 식사하는 것은 더욱 다행한 일 아닌가.
그러나, 내가 일본의 식당문화에 백지라 그에게 안내를 일임했을 뿐인데 검박한 그가
선택한 차이나식당이 내 의중에 많이 미흡해 유감이었다.
아무튼, 갈길 바쁜 늙은 헨로상의 산수(傘壽)잔치는 간단하나마 이렇게 끝났다.
내가 국내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애들이 자기네의 바람보다 내 뜻을 따랐을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 뜻은 무엇이었을까.
남들이 7순, 8순 잔치들을 벌여도 나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도 모르겠다.
다만, 내 어머니는 이즘으로 보면 요절에 다름아닌 60대 중반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겨우 고희를 넘기셨으며 자식 도리를 다하지 못한 아들이 그 자식들에게 뭘 바란다?
소위 잔치를 피하는 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해도 순례자가 된 것은 잘한 선택
이었다고 자찬하며 걷기를 재개했다.
한데, 동행이인의 문제점이 동행 4일째에 드러났다.
내가 먼동틀 때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걷는 스타일인데 반해 장거리 걷기에 적응되지
않은 니시오는 34세 청년이지만 하루에 20km이상 걷는데 두려움을 갖고 있다.
숙소에 개의치 않고 걷다가 어두워지면 그지역 어느 곳이 잠자리가 되는 나와 숙소가
예약되어야 안심하고 걷는 일본인 간의 문화적 상이점이라 할까.
나는 18번 온잔지(恩山寺)를 향하여 계속 걷고 싶었으나 이미 17번과 18번 사이 토쿠
시마시 다운타운에 있는 여관에 전화예약을 한 니시오.
어차피 수일 내에 헤어지게 되어 있는데(그가 귀가한다니까) 이 작은 일로 결별한다?
홀로 서기가 어렵잖게 되니까 하찮은 이유로?
보행 패턴이 다르기 때문에 오래 함께 할 수는 없으며 당장에도 지연되는 것이 사실이
지만 아직은 내 전체 일정에 차질이 올 것 같지 않아서 그를 따르기로 했다.
이 구간의 헨로미치는 동진하여 남하하는 토쿠시마시가(市街)루트와 남하하다가 동
남진하는 해발140m 지조고개(地藏峠)루트로 나뉜다.
우리의 길은 예약한 여관이 있는 시가지 루트.
아쿠이강과 JR토쿠시마선 건널목을 건너서 시가지를 걷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노파가 앞에 가는 니시오를 불러 세웠다.
니시오가 '하이(예) 하는 것으로 보아 오헨로상이냐고 물은 것 같다.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더니 얼음 오차 500ml패트병 2개를 들고 나왔다.
오겡키(元氣/기운내라는 격려)를 비는 오셋다이(接待)!
나이 든 이들에게는 헨로상을 대접하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단다.
시가지를 한참 걸어서 당도한 나카토리마치(德島市 中通町 二丁目)의 여관(비지네스
菊乃)은 토쿠시마역에서 도보로 약7분 거리에 있다.
5일 전(9월 2일) 오후에 경유했던 역인데 돌고 돌아 다시 그 지역에 왔다면 영장 순방
순서에 지리적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1, 2, 3번 영장이 가까이 있으니까.
닷새에 17개영장을 방문하며 110km쯤을 걸었는데 성적이 저조한 편이며 이것이 동행
이인의 문제점일 것이다.
오늘도 해가 중천에 있는데도 내게 문제되지 않는 숙소 때문에 일찍 마쳤으니까.
이 여관은 야숙 리스트에 올라있으며 헨로상 1인은 3천엔인데 2인이면 5천엔이다.
반분하여 각기 2.500엔을 부담하자는 니시오를 시니어가 많이 부담하는 것이 우리의
도의적 관습이라고 설득해 3 :2로 부담했다.
그를 컬쳐 쇼크(culture shock)에 빠지게 했나.
아무튼 시니어를 대하는 그의 변화는 가속이 붙었으나 물리적 현상에 그치고 말까.
니시오는 오늘도 내 속옷까지 세탁했다.
이제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자기 몫인 듯 자연스러워졌다 할까.
마침 불통이던 스마트폰의 인터넷기능이 살아나서 애들과 카톡을 했는데 직계가족이
모여 주인 없는 8순 잔치를 하는 중이란다.
안팎(국내외)의 모든 일이 바라는 대로 순조롭게 전개되고 있는 것 같다. <계 속>
여관 카도야(위)와 한국여인이 주직인 다이니치지(아래)
조라꾸지 가는 길(위)과 상낙원과 14번 조라꾸지(아래)
15번코구분지(위)와 기독교성경 구절이 걸린 휴게소 코야(아래)
젠콘야도 벽에 걸려있는 성구(위)
16번 칸온지(위)와 이도지 가는 길(아래)
까미노 피스떼라(위)와 시코쿠헨로(아래)
지도에서 버스정류장을 찾고 있는 히로인(위)
17번 이도지(위)와 8순생일을 자축한 식당(아래)
토쿠시마시(위)와 비지네스菊乃여관(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