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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미학 원문보기 글쓴이: 여세주
제20차 수필쓰기
(1) 양파
흙 위에 올라온 부분을 잡아보니 동그란 것이 한 손 가득 찬다. 다른 손을 받쳐 당겨내자 품었던 흙이 ‘뿌지직’하는 싱싱한 소리를 혼수로 얹어 보내준다. 밭 위에 굴려 놓으니 몸을 말리는 자태가 탐스럽기 그지없다. 노르스름한 겉피부가 창호지 같아 속살의 단단함이 두드러진다. 햇빛을 받으면 매혹적인 붉은빛으로 조금씩 변해 가면서 눈길을 잡을 것이다. 양파다. 쉬는날 모처럼 도운 양파 뽑기에서 그렇게 양파는 생각지도 않은 모습으로 내 눈을 혹하게 했다.
거의 매일 음식재료로 쓰는 채소 양파. 비유 재료로 쓰일 때는 속이 없는, 아니 속을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상상이 되는 곱지 못한 역할이 맡겨져 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하얀 양파 속살을 쌈장에 찍어 먹으며 그 달콤함에 반해 고정된 이미지에 반기를 든다. 갓 뽑아낸 양파를 썰어 물에 헹구어 접시에 소복이 담아내니 매운맛 간곳없어 누가 눈물 바라기라 했나 싶다. 세월에 마음씻듯 설렁설렁 물에 씻어 눈물 나게 하는 맛 빼내면 될 일을.
겹겹이 싸여 까도 까도 껍질만 있어 다 까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고? 인생이 그러할진대 양파 흉잡을 거 뭐 있을까. 탄생부터 겹겹이 세월의 껍질에 싸여 마지막 수의 한 겹으로 마무리하는 인생, 한겹 한겹 벗겨 내면 남을 게 뭐가 있다고. 명예 한 겹 벗겨 내고 사랑 한 겹 벗겨 내고 모래성 같은 재물 한 겹 벗겨 내고 한해가 다르게 퇴색되어가는 지식 한 겹 벗겨 내고 거기에 혈기까지 한 겹 벗겨내면 태어나던 그 모습이 아닐까.
오동통한 양파 한쪽 집어보면 겹마다 두께가 다 다르다. 희한하게 양파도 중간층이 가장 두껍고 수분도 풍부하여 연하고 맛이 달다. 우리 청년 시절 처럼 말이다. 싸는 면이 넓을수록 얇고, 표면에 껍질에 가까울수록 질기다. 세상 풍파 다 겪고 난 노인의 피부색이 꼭 그 색깔이다. 하지만 그 얇은 막이 있어 도타운 속살이 마르지 않음을 속살은 알려는지 모르겠다. 속살 뽀얀 손주에서 바싹 마른 피부에 점점이 검버섯 피어난 조부모까지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내는 가족의 테두리가 둥근 양파와 같다.
날 것 일때는 톡 쏘는 매운맛이 있지만, 각종 잡냄새를 잡아주고 특유의 감칠맛으로 음식 맛을 돋구어 주는 양파. 모든 음식에 다 들어갈 수 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음식재료계의 팔방미인이라 얘기하고 싶다. 그렇게 쓰임새 많은 양파처럼 많은 이에게 인기 있는 사람, 어디든 끼어 있으면 분위기가 달근한 사람, 쓸데없는 잡음 따위는 단번에 없애 버리는 사람, 때로 눈물 찔끔 나게 하는 매운맛도 보여주는 사람, 나도 어떻게 그런 사람 좀 될 수 없나. 욕심이 또 나온다. 종지 같은 마음 그릇 안고 무슨 함지박을 탐하나 그래.
한여름 뙤약볕에 앉아 동글동글한 양파들의 탐스러운 자태에 빠져 잠시 생각이 낯선 길로 빠져들었나 보다. 다 뽑았으면 줄기를 잘라야 한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신다. 가위로 둥근 부분 위쪽을 자르면 되는데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신다. 사실 양파 뽑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밥 해다 나르기 바빠서 농사일을 직접 돕는 건 하지를 못했다.
‘힘들여 뽑는 것도 했는데 이 정도 쯤이야.’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자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하려고 둥근 부분에 최대한 가까이 싹둑싹둑 잘라 나갔다. 해가 늬엇늬엇 져가고 커다란 밭 위에 양파들이 이발 끝낸 아이들처럼 깔끔한 모양새로 뒹굴 때 아버님이 내 곁에 오셨다. “아이구 이 일을 어째. 이렇게 바싹 잘라버리면 마른 후에 틈이 벌어져 그곳으로 균이 들어가 다 썩어버려.” 세상에! 이 일을 어떡하나. 부지런 떠느라 수확한 양파의 밭의 반 정도는 잘랐는데.
너저분한데도 다 이유가 있고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긴 사람도 너무 맑고 알토란 같으면 대하기가 어렵다. 조금 빈듯하고 어수룩한 곳이 있어야 편안하게 마음 들어갈 곳이 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늘 실수투성이로 사는 내게 내 빈 곳을 보여도 덜 부끄러운 사람이 좋은가 보다. 결국, 내가 자른 양파는 생걸로 식당에 헐값으로 넘겼다는 어머님 말씀을 들었다. 양파처럼 팔방미인이 되면 정말 좋겠지만, 따르지 못하는 능력에 바로 체념하며 그저 다른 이 피해 주지 않고 사는 정도만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12, 3)
양파의 모양에서 삶의 모습을 반추하여 해석해낸 비유가 신선하고 설득력도 있다. 양파를 수확하고 다듬으면서 양파와 같은 구실을 하고 싶다고 한 자신의 욕망을 덜어내면서 마무리한 겸손도 소박하다. 문장의 리듬이나 유비관계의 설득력을 더 높일 수 있도록 보다 더 다듬어진다면 더욱 좋은 작품으로 거듭날 것이다.
(2) 빼빼장구
그녀는 혼이 빠져 오는 날이 많았다. 실낱같은 신음은 파도가 되어 용솟음치기도 했다. 무릎뼈에 스며든 통증에 늘 지쳐서 허둥거렸다. 한쪽 다리가 약간 짧고 푹 꺼진 눈망울에 툭툭 불거진 광대뼈, 삭정이 같은 몸은 손만 닿아도 풀썩 주저앉을 것만 같다. 언뜻 스치는 푸르뎅뎅한 얼굴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듣지 않아도 가늠이 된다. 푹 눌러 쓴 모자는 전날의 흔적을 덮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교통사고를 당해서 한쪽 다리가 어눌했다. 중간 기착지에서 한참을 퍼덕거리다 막막한 공간을 비행했다. 전전긍긍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부모는 서둘러 선 자리를 주선했다. 집에서는 장애가 결점이 될 것을 염려해서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아파트를 사줬다. 그녀의 남편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어 긁고 흠집을 냈다.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던 고통이 한恨이 되었던지 고운 젖가슴에 멍울이 생겼다. 여성의 아름다움까지 잃은 그녀의 밋밋한 한쪽 가슴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그녀는 가슴에 가득 찼던 울분보다는 도려낸 것이 외려 시원하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시울이 붉었다. 그 말에 마음이 더 아팠다.
거듭되는 질곡의 연장에서도 유순한 그녀를 보면 화가 났다. 제 몸을 움츠려 삶의 각축장에서 한 자 한 자 기어가는 자벌레가 되는 그녀. 사람들은 그녀가 골이 비어서 그렇게 살고 있다며 속을 헤집었다. 밟히면서 뼈의 줄기가 더 튼튼해진다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귀를 닦아냈다.
그녀는 가혹한 숙명을 타고난 빼빼장구다. 밟히고 찢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할 때, 눈빛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제 상처를 스스로 핥으며 사는 슬픈 여인이다. 혼자 어르고 다독이는 외마디 비명이 가엾을 뿐 안아줄 수 없어서 섧다. 고통도 생략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당사자보다 얼룩진 흔적을 바라보는 내 가슴은 더 아리다. ‘산다’라는 무력한 자동사에 불과한 그녀. 동일한 속성이지만 ‘죽다’의 반대구역에 있다는 것이 과연 위안이 될까. 얼마나 무서운 모순의 공존인가.
여려 보이지만 한없이 당찬 그녀. 슬프다고 말하면 더 슬퍼질 것 같은 삶.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장난만한 무게로도 숨을 곳이 없다고 불평하던 삶이 부끄러워진다. 가끔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를 반복한다. 봇짐 속에 주섬주섬 담아 넣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장롱 속에 깊이 갈무리한 것을 풀어헤쳐서 쓰다듬기도 했다. 빼빼장구의 질긴 줄기가 몸을 보호해 주듯 장롱 속에 숨겨둔 보따리는 그녀가 언젠가는 날게 될 날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보따리에는 실낱같은 더운 피가 퍼덕이지 않을까. 다친 날개가 치유되는 날, 끼룩이며 창공을 박차고 날지도 모르겠다. 자유를 위한 날갯짓이 아닌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희망 보따리일 것이다.
숱하게 밟혀도 질기게 산다고 하여 빼빼장구라고 했던가. 빼빼장구는 부드러운 잎 속에 질긴 다섯 개의 줄기가 있다. 단단한 줄기는 몸의 외곽을 감싼다. 그래서 밟히면서도 몸이 찢기지 않고 버텨내는 것이다. 빼빼장구의 숨겨진 줄기는 어머니의 태반 같은 보호막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도 속을 비워 내서 풍파에도 끄떡 않고 마음을 완화할 수 있는가 보았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것을 보면 짧은 다리에 힘이 불쑥 솟는다고 했다. 아이들과 퍼즐 놀이를 하며 꼭꼭 숨겨둔 보물을 찾았을 때의 희열감은 세상 어떤 아픔도 잊을 수 있는 마약이었다고……. 언젠가는 퍼즐 놀이가 현실로 나타나리라 믿으면서 미소 지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보물이 하루빨리 손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솔베이 S. 멜케로엔의 ‘소풍’이라는 영화를 봤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는 그레고르의 말이 생각났다. ‘때’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해볼 수 없는 막연한 것이지만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에겐 오지 않을까. 그녀에게도 생리통이 지나가면 평온해질 날이 오리라. 자신도 행복해질 때가 있을 거라고 꿈을 그리는 그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자주 밟히는 곳에서는 꽃줄기를 비스듬히 뻗는 빼빼장구. 줄기나 잎을 짧게 만들기 위해서다. 줄기가 길면 꺾이거나 쓰러지기 때문에 키를 낮춰서 자라는 것이다. 살면서 터득한 수비 자세일 것이다. 이른 봄, 고난의 시간을 툴툴 털고 빼빼장구는 풋풋한 새순을 달고 나온다. 그녀도 매몰차게 삶에 반격할 날이 머잖아 오리라.
‘그녀’의 모진 삶을 빼빼장구에 비견하여 관조적으로 잘 드러내었다. 대상인 ‘그녀’의 삶을 읽어내는 통찰력이나 문장의 의미담지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 효과를 가져오고 동원된 언어의 질감이나 문장의 리듬도 부드럽다.
독자로서의 과욕을 드러낸다면, 아쉬운 바가 없지는 않다. 아쉬운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감정이다. 마음이 아팠다,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불평하던 삶이 부끄러워진다, 눈물이 난다 등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연민을 느낀다는 단순한 감정 표출을 뛰어넘어서, 대상을 거울 삼아 한층 더 자신의 내면에 깊이 도달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나설 수는 없을까.
(3) 벌기보다 쓰기
변덕이 심한 날씨다. 아침 출근길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오후에는 고객 방문을 위해 나서려니 장대비가 쏟아 붓는다. 고객을 만나기 위해 길을 빗길을 나선다. 앞 유리의 윈도 브러시가 팔이 아프도록 휘저어도 시야는 금방 흐려진다. 유리창에 떨어진 굵은 빗방울은 차가 속력을 높이자 올챙이처럼 꼬물대며 하늘로 오FMS다. 세속적 욕망을 향해 기를 쓰는 중생들의 아우성을 연상시킨다.
‘딩동,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조급증과 호기심에 우중운전의 위험에도 내용확인을 감행한다. “동기생 G 본인상, K대병원 영안실” 동기회 총무가 보낸 문자메시지다. 동기생 중 가장 많은 재산을 모았다던 그는 부자라고 호기로왔다. 돈을 번 과정은 온당치 못했다고 뒷말이 무성했다. 동기회나 동창 행사 때면 찬조금은 조금내고 생색은 크게 냈다. 그러다, 불의의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미국까지 가서 수술을 받았다. 한동안은 호전되어 필드에 나갈 정도로 가벼운 운동도 한다고 했다. 완치가 어렵고 시한부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커 판에서 꾼들과 밤을 새운다며 그의 아내가 몇몇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다. 친구들이 말려도 내가 번 돈 내가 쓰는데 왠 간섭이냐며 마이동풍이었다.
언젠가는 국제학술지에 논문이 게제 될 정도로 실력 있는 물리학자 친구가 빚 독촉 때문에 연구에 몰두하기 힘들다며 도움을 청했다. 소소한 금액을 몇 차례 도와주었다. 그의 형편이라면 푼돈 수준으로도 완전해결이 가능한 금액이었다. 노벨상 후보를 지원하는 마음으로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그와는 학창시절 한집에서 하숙을 한 사이인지라 어렵사리 부탁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몹시 속이 상했다.
젊은 시절 경주에서 만난 L할머니가 떠오른다. 평양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일제강점기 조선 제일의 무희 최승희로부터 사사받았다. 일사후퇴 때 월남하여 서울에서 무용학원을 운영하며 제법 많은 재산을 모았다. 말년에 경주로 내려왔다. 상당한 재산을 사찰에 시주하고 학교에도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학교 행사 때마다 초대받아 장학금을 전달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머지 재산은 시내의 각 금융기관에 분산 예치해두고 매월 기일에 이자를 받으러 왔다. 자기 돈을 맡아줘서 고마운데 이자까지 주니 그냥 갈 수 있냐며 나를 근처의 식당으로 데려갔다. 여든을 넘겼지만 단아한 체구에 한때는 날렸을 미모가 상기도 남아있는 할머니가 조곤조곤 살아온 내력을 이야기할 때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또 한 분의 노인이 생각난다. 로또 열풍이 한창 불던 때였다. 가운데 창구에 있던 로또발행기를 가장자리 창구로 옮긴 날, 매주 복권을 사시는 노인 한 분이 일찍 창구를 찾았다. 자신이 확인 결과 4개가 맞아 3등이라며 복금지급을 신청했다. 옮긴 발행기가 작동되지 않아 동그라미 쳐진 숫자만 간이번호표로 확인하고 지급했다. 발행기가 작동되어 슬립을 통과시키니 2등에 해당되었다. 뒷면의 연락처로 그 사실을 알렸고 노인은 반신반의하며 달려왔다.
이튿날 부인과 함께 본점에 다녀온 영감님은 1억4천만 원이 든 통장을 들고 찾아왔다. 정직한 직원 덕분에 당첨되었다며 통장에서 200만원을 인출하여 내놓았다. 자기 대신 이 돈으로 직원들 회식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극구 사양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땀과 노력 없이 들어온 돈은 해코지를 하고 나간다며 당첨금은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사용할 것이라 했다.
직원들에게 그분의 뜻을 전하자 우리도 뜻있게 사용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분의 의도대로 간단한 회식을 했다. 남은 돈은 범물사회복지관에 성금으로 기탁하고 일부는 계약직 여직원의 아이 치료비에 보태었다. ‘사랑은 파도를 타고’ 란 말이 있더니 선의의 마음은 또 다른 선의를 유발하였다.
힘들여 벌든 손쉽게 벌든 수중에 들어온 돈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돈은 벌 때보다 쓸 때가 더 어렵다고 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속담도 있지만 돈은 벌기와 쓰기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진다. 포커 판에서 날린 돈의 몇 십분의 일만 도왔어도, 자선단체에 기부했어도, 도움의 결과 여부를 떠나 보람이라도 있었을 텐데...... 돈이 인격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라고 그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젊은 시절 모질지 못한 성격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면 마지못해 내 형편껏 응했다. 상당한 금액을 돌려받지 못했고 관계까지 소원해져 돈 잃고 사람까지 잃은 피해의식에 속상해했다. 어쭙잖은 푼돈으로 생색을 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요청을 미루기도 했다. 다른 곳을 돕느라 여력이 없다고 에둘러 거절하기도 했다. 불확실한 노후에 대한 불안이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도움의 손길을 오그라들게 했다.
가끔씩 사회면에 평생 어렵게 모은 재산을 기부한 독지가의 기사가 우리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같이 거액을 기부하지는 않아도 자신의 형편대로 용처를 정해 슬기롭게 쓸 줄 아는 노인들의 모습이 크게 다가온다.
갑자기 휴대전화가 자주 울린다. “G가 죽었다는데 가 봐야하나?” 정승이 죽었다니 더러는 갈등도 있나보다. 어떻게 벌었든, 생색은 많이 내었지만 우리 동기회에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친구가 마지막 가는 길인데 명복은 빌어주어야지. 그 많은 재산 다 써보지도 못하고 아쉬워서 어찌 떠날까? 수의에는 주머니도 없다는데. 빗줄기는 하염없이 차창 위로 떨어지고 금방 생긴 올챙이는 쉴 새 없이 하늘로 기어오른다. (15)
두 겹의 액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유명을 달리 한 친구의 삶의 자세를 액자의 틀로 삼은 가운데 두 노인이 보여 준 삶의 자세를 삽입시켜 놓고, 다시 이 액자를 자동차 차창을 한사코 기어오르는 빗물에 대한 이미지로 감쌌다. 형식이나 내용에서 큰 무리가 없이 잘 엮어간 수필이다. 그러나 자동차 차창을 기어오르는 빗물을 통해 상상해 낸 욕망의 이미지가 그렇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4) 빈자리
적막이 감돈다. 직원이 그만두는데 배웅해 주는 이 하나 없다. 계약이 끝나면 그만인 계약직 아니었던가. 모두 퇴근한 시간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자리에 앉아 물건을 정리한다. 소모품을 후임자를 위해 두기로 마음먹고 나니 챙길 게 없다. 신고 있던 실내화만 가져가면 되겠다. 사무실 문을 닫는다. ‘쿵’하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손에 들린 실내화가 많이도 닳았다. 흔들릴 때마다 발아래에서 중심을 잡아 주었다. 이 년 동안 시간제 일을 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게 아닌가 싶어도 말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 영혼을 살찌게 했다. 이 년의 경험이 새삼 내 위치를 확인시켜 주었다. 가정에 머무는 사이 정체된 내 삶이 드러났다. 변화무쌍한 세상에 살면서 나는 고인 물이었다.
빈자리는 누군가 와서 채워질 것이다. 그만 둔 지 여러 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연락이 온다. 업무가 익숙지 않은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묻는다. 한번 만났으면 하는 터에 거절하고 말았다.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더는 연락하지 말라는 의도이기도 했다. 지침서 보고 하면 될 터인데 굳이 전임자인 내게 물어온다.
아버님은 까다로우신 분이었다. 아침에 오른 반찬이 점심상에 오르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집에 여자들이 몇이나 있으면서 다시 올리느냐고 했다. 적응하기 어려웠다. 어머님은 큰 살림을 꾸리시다 보니 음식을 늘 많이 하였다. 버릴 수도 없고 먹는 우리도 고역이었다. 그러던 분이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올봄에 먼 길 떠나셨다.
혼자 되신 어머님을 위해 자주 들여다본다. 방문을 열면 ‘오느라 고생했다’는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버님의 빈자리는 추수 끝난 벌판처럼 허허롭다. 함께 한 시간이 꿈처럼 지나가 버렸다. 사는 것이 환상이었나 싶다. 아버님은 허리 수술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조심해야 할 터에 농사일을 무리하게 하시더니 더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내려갈 때마다 아버님의 배웅 인사는 달라졌다. 한 달 전에는 마루에서 잘 가라고 손을 흔드시더니 두 주 후에는 방안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곡기를 끊으셨다는 말씀에 부랴부랴 찾아뵈었더니 몸져누워계셨다.
이별은 익숙해지는 법이 없는 모양이다. 어려서부터 눈물이 많았던 나는 수도꼭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내 감성은 살짝만 건드려도 흔들린다. 아버님의 빈자리는 온기마저 앗아가버렸다. 넓은 방에 어머님 혼자 계시니 냉기가 흐른다.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 엄습해온다. 어머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한다는 핑계로 집에서 둘러앉아 밥 먹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음식 냄새가 나지 않는은 집은 더는 안락한 공간이 아니었다. 아버님의 자리가 새삼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미처 해보지 못한 생각을 이제서야 하게 된다.
먼 훗날 내가 머물렀던 자리는 어떤 모습일까. 내가 떠난 후에 누군가가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지 되돌아보게 된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떠나고 나면 알게 될 터이다. 내 후임으로 온 사람에게 친절하지 못했다. 처음엔 나도 익숙지 않아 좌충우돌하지 않았던가. 마음을 열면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에 괜히 심술을 부렸다. 당사자는 나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마법을 부리는 것일까. 아버님의 빈자리가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어머님이 여행을 가신단다. 바람도 쐴 겸 다녀오시라고 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기운을 받고 돌아올 수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 아닌가. 일자리를 내려놓고 나는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 중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보려 한다. 서걱거리는 글쓰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싶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빈자리는 어떤 형태로든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게다. 서두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해 나갈 것이다. 글쓰기와 동행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욕심내지 않고 글쓰기와 벗이 되어 오래 함께 하고 싶다.
‘빈 자리’라는 이름으로 두 가지 소재를 결합했다. 시간제 근무를 끝낸 후의 상황과 아버님을 떠나보낸 후의 상황이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 자리를 털고 여행을 떠나고, 화자는 자신의 빈 자리를 글쓰기로 채우겠다고 한다.
‘빈 자리’라는 주제 속에 이런 소재들이 통일성 있게 배치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빈 자리라는 기표는 같지만, 이들의 기의는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5) 어머님의 유부 보따리
바람이 차다. 남편이 유부 전골을 찾는다. 내가 만들지 않으리란 걸 을 것을 아는 터라 파는 곳을 넌지시 물어본다. 찬바람이 부니 따뜻한 국물요리가 먹고 싶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걸 잘 끓여 주시던 엄마 생각이 나는 걸까.
꽃샘바람이 불던 날 선을 봤다. 남편의 첫인상은 그가 입은 바지의 날 세운 주름만큼이나 날카롭게 보였다. 그런 인상과 달리 자신은 아들만 다섯 있는 집의 막내이지만 이나 결혼을 하면 분가한 형님들 대신 엄마,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고 말한다. 적은 나이도 아니었건만 미처 그 일의 중함을 헤아릴 줄 몰랐다. 뿐만 아니라 그 말은 한 마디 때문에 오히려 그의 인간성이 돋보여서 그를 인간성 좋은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결혼까지 결심하게 했다. 눈에 뭐가 씌워졌었나보다.
타지에 직장이 있는 남편과는 주말부부로 지내며 시댁에서 살았다. 공무원인 내가 근무처를 옮길 수 없어서였다. 나는 남편보다 시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아버님과는 달리 께 와는 달리 어머님께는 편안하게 다가가지 못했다. 어머님은 고녀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재원에 몸맵시 날렵하고 머리카락 한 올도 함부로 흩뜨리지 않았다. 일흔이 훨씬 넘었지만 등도 허리도 꼿꼿했다. 어머님은 아버님과는 동갑이고 결혼한 후 오십 수년 간 쭉 해로해 왔다. 그럼에도 모르는 사람들은이, 아버님이 젊은 여자와 재혼을 했을 것이라고 수근 거릴 만큼 고우셨다. 그런 (구체적으로 어떤 어머니인가를 생각해 보면 앞뒤 문장 연결이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어머님이 어려웠다. 내가, 똑똑하지도 예쁘지도 못한 탓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늘 엄마라고 친근하게 불렀지만 나는 항상 어머님이라고 깍듯이 불렀다.
어머님께서는 살림살이에 정성을 쏟으셨다. 평소 집안일을 하기 싫은 숙제쯤으로 여기는 나와는 딴판이셨다. 특히, 그 연세에 TV에 출연하는 유명 요리 연구가를 따라 만든 것을 식구들에게 내어놓을 만큼 음식 만들기에 신경을 쓰셨다. 어머님은 젊은 시절부터 살림살이의 자질구레한 것까지는 두량하지 않으셨다. 시동생 식구들과 분가 전의 아들, 며느리와 큰살림 사시느라 일하는 사람을 따로 두었다고 들었다. 내가 너무 게으르고 서툴러 몹시 답답한 탓이었을까. 온갖 것을 당신께서 손수 하셨다. 함께 지내는 동안 김장 한번 거들게 하지 않으셨다. 일이라곤 어머님이 저녁 밥상정리를 다 한 뒤 개수대에 올려주는 그릇 몇 개를 씻는 게 다였다. 그럼에도 속으로 ‘지구라는 별에는 고부가 함께 서 있을 만큼 큰 주방은 없다’며 부엌에 나란히 서 있어야 하는 것에 불평을 쏟아내곤 했었다.
밤에 아이가 울면 내 방으로 얼른 오셔서 안고 달래시며 나더러는 자라고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아이는 내가 없는 낮에 다른 아이들처럼 울며 엄마를 찾는 일은 전혀 없다고 하신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배려였겠지만 내게는 자랑으로 하는 말씀으로 들렸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이는 나보다 제 할머니를 점점 더 따르는 것 같았다.
어머님께서는 주말에 오는 나의 남편을 나보다 더 기다리셨다. 그가 올 시간이면 베란다에 서서 길만 바라보셨다. 그가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면 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길 기다렸다 환한 미소로 수고했다며 등을 두들겨 주셨다. 내 방에도 TV가 있었건만 밤늦게 까지 그는 자신의 엄마와 시청했다. 두 사람이 하도 다정해 그들 사이에 내가 끼어든 것 같았다. 남편이 자신의 아내감보단 부모님, 특히 어머님과 함께 살 적합한 여자를 찾아 나와 결혼했을 것이라는 고약한 짐작을 하며 억울한 마음도 가졌었다.
며느리와 엄마는 물론 내 남편의 아내 역할까지 다 해내시는 것 같은 탓에 내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나는 어머님이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화성에서 온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께서는 아마 내가 금성쯤에서 왔다고 여기셨을 것이다.
남편은, 나와 우리 아이와의 여행이나 외식에도 자신의 엄마와 함께 하기를 원했다. 어머님 또한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는 엄마가 살면 얼마나 오래 살겠냐며 효도할 시간이 짧음을 늘 안타까워했다. 어머님은 백세에 생을 마감하셨다.
이제는 어머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도 하다. 나도 서른이 넘은 딸을 아직 어린애로 여기지 않는가. 그런 내게 그 아이가 결혼을 한다고 하루아침에 어른으로 보이겠는가. 현재의 심정으론 딸아이 사랑은 사위에게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 조용히 바라만 볼 작정이지만 잘 될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주말의 저녁 메뉴는, 유부 주머니 속에 잡채를 넣어 싼다고 어머님이 보따리라 부르는 유부 전골이었다. 남편은 그걸 무척 잘 먹었다. 그는, 주말마다 엄마가 보글보글 끓여주는 전골을 먹으며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고 휑한 객지에서 일주일을 지낼 힘이 돼 주었을 것이다.
유부전골은 만들기 편한 음식이 아니다. 유부를 끓는 물에 한 번 데쳐 기름을 제거한다. 깨끗이 씻어 다듬어 놓은 미나리와 시금치는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얼른 찬물에 씻어 물기를 짠다. 당면은 끓는 물에 삶아 찬 물에 헹궈 체에 받혀둔다. 채를 쓴 쇠고기, 양파, 당근을 볶는다. 갖은 양념에 당면과 볶아놓은 재료와 시금치를 버무려 잡채를 만든다. 데쳐놓은 유부의 윗부분을 잘라 주머니가 될 수 있게 한 후 만들어 놓은 잡채를 넣고 미나리로 묶어 유부 주머니를 완성한다. 어묵 자른 것과 유부 주머니를 냄비에 넣고 쇠고기 육수를 부어 간장으로 간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어머님께서는 쉽게 잘 하셨다. 자른 유부 속을 통통하게 채워 미나리로 묶는 것만 내게 시키셨다. 속을 얼마만큼 채워야 하는지 당신께서 만든 견본을 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시댁에서 오년을 보낸 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남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돼 그와 합가했다. 그 후 어머님도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셔 함께 지냈다. 천성이 게으른 나는 그 음식 정성을 전혀 배우려 하지 않았다. 나는 현재 그 때의 어머님보다 스무 살 정도 나이가 적다. 그런데도 귀찮아하며 유부 전골은커녕 잡채조차도 잘 만들지 않는다. 아직도, ‘유전자를 압도하는 습관은 없다’는 연구결과를 들어 성실한 아버지와 어머니 대신 얼굴 한 번 뵌 적 없지만, 틀림없이 계셨을 부지런하지 못한 먼 조상을 탓하며 살고 있다.
바람이 차다. 모락모락 김을 피우며 끓고 있던, 어머님께서 만드시던 유부 보따리가 나도 먹고 싶어진다. 그 맛은 안날 터이나 만들어 놓은 것이라도 사러 가야겠다. 어머님이 그리워진다. 당신께서도 지금 자신의 별에서 며느리와 아들을 생각하고 계실까.
남편이 먹고 싶어하는 유부 전골을 발상의 계기로 삼아, 결혼을 하여 줄곧 함께 살았던 시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을 매우 자연스럽게 이끌어낸 글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남편의 살가움이나 화자 자신의 성격적 특성도 잘 드러내었다. 그럼으로써 이 수필은 어느 한 사람의 삶에 초점을 둔 글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결혼생활 전체를 되돌아본 글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크게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다.
(6) 헛 수 고
오늘도 딸아이는 아침식사를 함께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어젯밤에도 학교 동아리 행사 때문이라며 파김치가 된 얼굴로 들어오더니, 아침 등교시간에도 벌떡 못 일어나고 잠이 모자라서 저 모양이다. 학교의 봄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고, 행사에 출품할 공연 연습을 밤늦게까지 해야 하는데다가, 맡고 있는 직책이 있어서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한다.
첫 시간이 학과장 수업이라 늦으면 안 된다면서, 내가 문밖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씻고 감고 말리고 난리를 치고 있다. 우리 때와는 다른 밤 문화를 가진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들한테는 밤이 아주 긴(長)줄 알고 있는 것 같다.
‘애 나이가 몇 살인데 계속 도와주느냐?’는 성화는 내가 딸아이의 방 정리를 해주고 나올 때마다 아내가 내게 늘상 하는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도 아니고, 제방의 청소와 정리정돈에 관한 간단한 일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잔소리도 그만큼 들었으면 버릇을 고칠 만도 하건만, 도대체 딸내미에겐 우이독경이다.
사용한 비누나 샴푸는 제자리에 놓인 걸 못 봤고, 수건하나도 제자리에 제대로 걸려져 있질 않다. 드라이기는 코드에 꽂힌 채로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고, 덮고 잔 이불도 마치 뱀허물 벗어놓은 듯이 몸만 쏙 빠져나온 동굴모양이니, 도대체 마음에 드는 데가 한군데도 없다. 철이 들면 괞챦아 지겠거니 하는 기대를 갖고 무슨 봉사활동 하듯이 묵묵히 딸내미방의 뒷정리를 해오고 있지만, 도대체 그 철은 언제나 들지 가늠도 못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딸아이의 새로운 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제 사촌언니의 여섯 살 된 애를 자기 방에서 데리고 놀 때의 모습이었다. 방을 청소하고 서랍을 정리하는 놀이인 듯, 여기저기를 구석구석 닦아내고, 빨래를 차곡차곡 개고, 서랍 안의 양말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을 가르치는 장면이었다.
나긋나긋하고 친절한 말투와 능숙한 행동으로, 자기가 늘 구박받는 바로 그 부분을 어린 조카에게 솔선해서 보여주는 뜻밖의 모습에 난 잠시 흠칫 했지만, 짐짓 모른 체 했다.
‘정리를 못 하는 게 아니었구나!’‘일부러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서운하기도 하고, 괘씸하기조차 했으나 드러내 놓고 물어 보지는 않았다.
맞선을 볼 때 남자들에게 회자되는 옛말이 있다.
당연한 얘기로 들릴 수도 있으나 ‘장모를 보면 딸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무릇 딸의 행동거지는 엄마의 행동과 말투와 습관을 따라할 수밖에 없음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용의주도한 여성스러움이건, 주위가 산만하여 덤벙덤벙 거리는 습관이든 간에,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엄마의 행동을 배우기 때문이라는 말일 것이다.
딸내미의 게으르고 산만한 지금까지의 모습대로라면, 미래의 사위는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고, 아내 또한 딸을 잘 못 키웠다는 누명 아닌 누명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인데, 알고 보니 얘가 천성적으로 게으르거나 산만하진 않은 것 아닌가.
분명히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무언가 제 나름대로는 표현 못할 섭섭함이 있었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단단히 삐친 어린 마음이 반항적인 행동으로 나타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론 귀엽기조차 하였다.
오늘도 딸내미 방을 치우고 나오는 내게 아내는 자꾸 그렇게 해 주니까 나이 그만한 게 아직도 그렇다고 잔소리를 시작한다. 할 줄 몰라서가 아니고 일부러 안하는 그게 더 나쁜데, 그걸 왜 자꾸 도와 주냐고 따진다.
‘그건 버릇을 고치는 게 아니니 헛수고 좀 그만 두고 베란다 청소나 해 달라’고 불만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딸내미가 짐짓 그런 행동을 하는 데에는 분명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다. 그 사연이 무엇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제 엄마보다 더 깔끔하기도 한 것 같다. 내가 직접 보았으니까.
부모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지 않았는가. 언젠가 환하게 웃으며 ‘이젠 제가 할 게요’ 라고 먼저 말해 올 것이니, 아버지의 손길로서의 이 작은 헛수고쯤은 계속 할 작정이다.
훗날의 우리 사위도 ‘장모님을 보고 결혼했다’는 얘기를 할 게 분명하지 않은가.(11.3)
딸을 향한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을 전달하는 수필이다. 작은 실천으로 보여준 그 사랑의 손길 속에 아버지의 깊은 혜량까지 담겨져 있다. 소재와 주제, 그리고 제목을 엮어내는 글솜씨가 돋보이는 깔끔한 글이다.
(7) 안 듣기
큰일이다. 혹 낙상이라도 하는 날에는 말짱 도루묵이다. 노인 분들 특히나 투석환자는 뼈가 약해서 사고가 나면 뒷감당이 어렵다. 가라한다고 그 말을 들은 시누가 원망스럽고 감당할 수 있는 자식을 내친 영감님도 밉다. 가뜩이나 혈관이 약해져서 시술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가늘어진 팔로 안간힘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있을 수가 없다. 다음 날 건강검진을 예약해놓아 병실을 지키지 못한 남편이라도 보낼까 했더니 벌써 한잠이 들었다.
아버님이 입원했다. 수속을 마치고 병상에 눕자마자 이제 됐다며 가라한다. 일주일에 세 번 통원 치료 중인데다가 또 자식들 고생 시키는 것이 싫어 혼자 계시겠다는 것이다. 건성으로 대답하고 병실을 지켰다. 간호사가 온갖 검사 하느라 들락거렸고 저녁식사까지 들어왔다. 잠시 쉴 틈도 없다. 몸이 고달파 남편의 누이, 그러니까 형님에게 원조를 청했다. 밤을 지킨다 했다. 얼마나 고마운지. 늦은 밤 노곤한 몸을 누이는데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결국 아버님 성화를 못 이긴 것이다.
병실에 누운 환자와 그에게 얽힌 사람들. 내 코가 석자라 남의 일에 귀 닫고 싶은데, 한 방에 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들리는 것이 있다. 입구 쪽 남자 분은 입이 거칠었다. 벽에 대고 욕을 퍼붓는다. 욕 속에 자신의 아들이 의사라는 정보가 새나온다. 듣다 보니 그건 욕이 아니라 아들 자랑이었다. 급기야 비어 있는 옆자리를 가리키며 수술하러 간 사람이 여태 안 온다는 며 걱정으로 난동을 마무리했다. 서로의 사정을 얼마쯤 알고 있는 다른 환자들이 그의 말에 동조했다. 미수의 나이에 홀로 밤을 보내는 아버님을 두고 했을 그들의 짐작이 마음에 걸렸다.
병실의 불은 꺼져있고 문이 닫혀있었다. 혼자 쓰는 곳이 아니라 차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입원환자 이름이 적힌 게시판 앞에서 아버님 함자만 보다가 돌아섰다. 형님이 새벽에 가기로 했으니 불과 몇 시간이다. 애써 나 자신을 진정시켰다. 뒤척이던 밤 동안 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좋다고 호들갑 떨 일인데 병실의 허연 이불 같아 외면했다. 아버님은 무탈했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잤다. 젊은 남자 의사가 오더니 내일 아침에 팔 시술하면서 다리 시술도 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 소리 듣고 나니 잠이 오나. 아침 되니까 젊은 여의사가 오더니 팔 만 해도 된다고 하더라. 먼 소린지 알 수가 있나. 그때 병원 안 오고 한 사흘 정도 앓다가 고만 갔어야 했는데. 괜히 투석 시작했다.” 담당 간호사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팔이 안 되면 다리 쪽으로 관을 넣어 시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는 것이다. 극구 당신 고집대로 자식들 집으로 돌려보내고 청력 시력 안 좋으면서 웬 독선인지 모르겠다. 안 해도 될 걱정까지 하고. 잠든 아버님 곁에 서서 다짐했다. 이젠 아버님 말씀 안 들을 거라고.
친정 엄마가 입원을 했었다. 창원에 사는 여동생이 복직하면서 네 살짜리 조카 봐주러 가 있는 동안 공교롭게도 결석이 생겼다. 남편과 시간을 맞추느라 곧장 뵈러가지 못했다. 병간호에 지쳐 있을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더니 길도 얼었는데 오지 마라 한다. 같이 가려고 올케에게 전화를 했다. 올케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갓난쟁이를 안고 있는 처지였다. 제 앞길 제가 닦겠거니 믿고 창원으로 내려갔다. 침상에 누워계시던 엄마와 그 아래 좁아터진 보호자 침상에서 일어서던 아버지는 내 뒤쪽만 살폈다. 올케를 데리고 오지 않은 나를 나무랐다. 정작 아버지는 당신 며느리에게 오지마라고 하셨으면서. 집으로 오자마자 올케에게 전화를 했다. 딸, 사위는 아무 소용없더라. 아들, 며느리가 최고더라. (화자의 진술인지, 아버지의 말인지?) 올케에게, 자네가 가봐야겠더라고 앓는 소리를 했다. 늦은 밤 올케는 짐을 꾸렸다. 내겐 넋두리를 늘어놓았지만 막상 도착한 올케에게 아버지가 보여줬을 그림은 안 봐도 뻔하다. 비디오다.
퇴근해서 병실을 찾는 여동생 빼고는 아버지께 아무 자식도 없었던 셈이다. 어느 집 살가운 며느리는 앵앵 우는 아이 들춰 업고 시어머니 곁을 지켰을 것이다. 간혹 그 시아버지는 우는 손주 데리고 휴게실에서 진땀 흘리는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다. 경황이 없는 당신 며느리 사정을 뻔히 알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면서 왜 원망이 없었겠는가. 그래도 막상 전화 통화로는, ‘됐다, 오지마’라고 하셨을 것이다. 설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부모의 뜻을 헤아리기가 이리도 어려운 것인가. 올케도 간혹 제 시아버지 말씀을 안 들었으면 좋겠다.(15.0)
병원에 입원한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의 화법을 제재로 삼았다. 속마음과는 다르게 말하는 부모님들의 화법을 여실히 들춰내어 전달하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경험이지만 주목하지 못하고 넘겼던 일상의 하나를 들추어내었기에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다만, 올케에 대한 직접적인 서움함이나 반감은 최대한 숨겼으면 좋을 성싶다.
(8) 태백 눈 축제를 다녀와서
눈 축제장에 도착하니 때맞춰 굵은 하늘에서는 주먹만한 눈송이가 우리를 맞이한다. 해 주었다. 백두대간을 타고 흐르는 골짜기 가득 메우고 선 대형 눈 조각 작품들, 먼저 그 웅장함에 놀라고, 화려하고 미려한 솜씨에 경탄했다. 하늘에도 땅에도 온통 새하얀 눈이 지천이다. 말 그대로 눈 축제다. 그 분위기에 젖어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도 탄성을 질렀다. 머리 위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눈 조각 사이를 걷는다. 우리가 움직이는 눈 조각상 같다.
조각상 사이를 걸으며 조각상들과 눈을 맞추었다. ‘모자상’ 앞에 서니 어머니가 아들을 내려다보는 눈이 얼마나 정답고 따뜻하던지 차가운 눈 조각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꽃을 든 신부’의 조각상은 꽃도 드레스도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신부의 얼굴에 근심이 있어 보였다. 아마도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혀 신랑이 많이 늦나 보다.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도 곧 명량해전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고 ‘스티브 잡스’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그의 옆에 작은 휴대폰은 앙증맞고 귀여웠다. 아마 우리나라 삼성 스마트폰에 겁을 먹었나 보다. 북극 가까이에서 온 ‘러시아 궁전’은 이깟 날씨가 뭘 그리 춥다고 야단이야 라며 빈정대듯 서서 궁전 문을 비스듬히 닫고 있다. 눈 조각을 만드느라 수고한 작가의 마음이 되어 봤다. 한참을 그렇게 눈 조각상 앞에서 붙잡혀 있었다. 놀다가 눈길을 따라 이글루 카페를 들어서니 커피의 진한 향이 얼음 위로 베어 나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에 추위도 녹이고, 얼음 의자에 앉아 마시는 커피 맛은 여태 먹어본 것 중에 일품이었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팡파르로 흩날리고 있다. 눈길을 따라 추억의 먹거리 코너로 찾아들어서니 연탄불 위에서는 군밤과 옥수수 그리고 오징어가 몸을 비틀고 있다. 한쪽 연탄불 위에는 국자에 설탕과 소다를 섞어 녹으면 평평하게 펴서 갖가지 모양을 찍어 내는 달고나를 하느라 사람들은 추억으로 들어가 집중하고 있다. 나도 달고나로 별을 만들어 보았지만, 자꾸만 귀퉁이가 잘려서 결국엔 태백에서 별을 따지 못했다. 썰매장의 썰매는 옛것과 닮았는데 내 몸뚱어리는 이미 옛것이 아니라서 서툴 수밖에 삐뚤삐뚤 거리다가 결국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괜히 쑥스러워 빈 썰매만 발길질해댔다.
비탈진 언덕에 잘 지어진 석탄 박물관. 먼저 그 규모에 놀라고, 하나하나 진열 된 전시물에 한 번 더 놀랐다. 그리고 태백 주위에 그렇게도 많은 탄광이 있었다는 게 제일 놀라웠다. 고작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동원 탄광, 대한 중석 정도였는데, 그 많은 탄광 이름에서 옛 태백의 번화함이 눈앞을 스쳤다. 옛날 가끔 TV속 태백도 생각이 났다. 그때는 드라마 속 배경도 종종 되었었는데 지금은 빈 아파트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황량하고 스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한참을 석탄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광부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힘든 작업을 했을 그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덕분에 우리들은 따뜻하게 살 수 있었고 산업의 발전을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분들은 아직도 진폐증으로 많은 분들이 병원에서 혹은 가정에서 고생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부디 빨리 완쾌하시어 건강 하시기를 기도해 본다.
백두대간에 우뚝 솟은 태백산은 자연이 사람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다. 아니 우리 인간이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일 게다. 그 사실을 망각한 인간들이 자연의 주인 행세는 하지 않았는지? 이번 여행을 통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자연과 인간의 소통, 자연과 사물의 대화,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되뇌기만 했지 자연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 아니 자연은 사람들이 있어서 함께 하는 걸로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자만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여기 태백에는 큰 강들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낙동강(황지연못)을 비롯하여 한강 발원지이기도 하다. 가까이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기차역 추전역이 해발 855m 고지대에 있다 싸리나무가 많이 자라던 곳이라 하여 싸리골 혹은 싸리밭골이라 하기도 했단다. 옛날에는 화전민들이 주위에서 밭을 일구며 마을을 만들어서 살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가 떠나고 기차마저도 다니지 않은 하늘 중간에 떠 있는 간이역이 되었다. 이마와 맞닿은 하늘에서는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바람도 소리 없이 철길 따라 흘러 정암굴(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굴) 속으로 사라졌다. 역 앞 눈을 이고 선 키 작은 소나무는 우리 일행마저 내려가 버릴까 조바심을 내며 고드름을 달고 울먹이고 서 있다. 나는 여기 추전역에 길을 만들고 싶다. 싸리나무 엮어 기차 만들고 하늘 여행할 사람들 모아 추전역을 달리고 싶다. 철길도 소나무도 까르르 웃는 소리 듣고 싶다.
여행의 감동을 전하는 수필에서는 풍경을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하거나, 여행 체험에 대한 신선한 해석이 있어야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눈으로 만든 조각상을 전달하는 데서는 작가의 독창적인 해석이 부여되어 있어서 독자에게도 동일한 감동을 전달해 준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는 여정을 충실히 전달하는 데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느낌이다. 마지막 부분의 동화적 상상도 낯설다.
(9) 마지막 원고
기가 찰 노릇이다. 매사 차분하다가도 가끔씩 허둥대며 일을 저지르는 내 모습이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해거름에 가까이 사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 앞으로 갈 테니 같이 마트에 다녀오자는 전화였다. 마침 저녁 찬거리도 마땅찮던 터라 그러자고 대답을 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사는 친구니 마음이 급했다. 부랴부랴 시장갈 채비를 하고 나오는 길에 쓰레기와 세탁소에 맡길 남편의 양복바지를 들고 나왔다. 분리수거를 하는 동안 세탁소에 가져 갈 바지를 한쪽에 곱게 올려 두었는데…….
친구와 수다를 떨며 느긋하게 시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야 바지 생각이 났다. 그것도 바지를 쓰레기통 위에 올려둔 것까지만 생각이 나고 그 다음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럴 수가, 허둥지둥 아파트 쓰레기장으로 달려갔지만 상황이 아까와는 달랐다. 지저분하던 주변은 물론 바닥까지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정신없이 관리실로 달려갔지만 이미 불이 꺼진 상태였다. 다시 아파트 입구에 있는 경비실로 갔다. 사정 이야기를 하고 그 시간 청소 담당자와 연락이 닿았지만 바지의 행방은 묘연했다. 구입한 지 열흘도 되지 않는 새 옷이다. 남편의 까다로운 입성에 별도의 수선비를 지불해 가며 맞춤을 하다시피 한 바지였다. 입을 때마다 흡족해 하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라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몇 번이나 쓰레기통을 뒤지고 헌옷수거함까지 확인하고 돌아서는데 그제야 내 행색이 눈에 들어 왔다. 집에서 입고 있던 반팔 셔츠에 양말도 신지 않은 슬리퍼바람이었다. 초겨울 밤공기는 왜 그렇게 차가운지, 허탈감과 추위가 한꺼번에 몰려 왔다.
이제 올해도 한 달을 남겨 놓고 있다. 새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을 다짐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를 정리해야 할 시간이다. 책상 앞 달력에는 집안 대소사를 비롯해 여러 모임의 송년회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정신 줄을 놓고 바지를 잃어버린 것이 대수는 아닐 것이다. 허둥대며 살아온 시간조차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가슴 저리게 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어쩌겠는가. 차분하고 이성적이기를 바라지만 허둥대는 모습도 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위로를 삼는다.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을 놓칠 수 있다’는 인디언 속담이 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리기 위해 말에서 내려 한동안 기다린다고 한다. 나에겐 유달리 바쁜 한해였다. 어찌 보면 두서도 내용도 없이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진하기에 급급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대일산필’과의 만남은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독자와의 소통은 차치하고라도 스스로를 진단하고 시험하는 기회라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음을 고백한다. 턱없이 모자라는 지식과 언어의 운용으로 한계에 부딪히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내가 쓰는 글은 완벽하지 못한 나보다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인 내 모습의 반영일 것이다.
오늘로써 ‘대일산필’은 마지막 원고가 된다. 매주 한 편의 원고를 쓰는 일은 내 능력에 부치고 적잖은 부담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허둥지둥 원고를 마감하고 글이 신문지면에 활자화되면 늘 아쉽고 부족한 ‘나’가 글 속에 있다. 그럼에도 매주 월요일 아침을 기다리고 격려해 주신 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이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고 했던가. 부족했던 자신과 그동안 소홀했던 주변을 돌아보며 또다시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서두의 첫 문장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일간지 칼럼으로 쓴 글이다. 완벽하지 못하여 곧잘 실수를 저지르는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제시하고, 그런 자신보다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의 글이 자신의 반영이라고 맺었다. 통일성이 잘 갖추어진 글이다.
(10) 밥상
오전 10시에 오겠다는 손님을 위해 핸드드립 커피를 준비했다. 잿빛 하늘과 은은한 커피 향, 모처럼 찾아 온 손님맞이에 집안은 생기가 돈다.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아, 커피 향이 좋아요.’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아들이 커피 원산지 에티오피아에서 사 온 거예요.’ 말하면서 당신은 내게 귀한 손님이라 특별한 커피로 대접하고 싶었다고 말솜씨도 곁들일 참이다. 그녀가 무반응이다. 집안을 둘러보는 그녀에게 원두커피를 준비했는데 설탕을 넣을까 물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우전 차를 내오겠다고 했더니 번거롭게 해서 어쩌느냐고 한다. 아껴두었던 우전 차를 개봉해 찻물을 우려냈다.
그녀가 가고 난 뒤 여고 시절 짝꿍이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서울 집에 있다고 한다. 친구는 구미에서 나와 같은 일을 한다. 그녀는 나보다 일의 규모가 훨씬 크다. 남편의 직장과 두 아이의 학교가 서울에 있어 일주일 반은 서울, 나머지는 구미에서 지낸다. 일과 가정을 완벽할 정도로 소화해내 두 마리 도끼를 다 잡았다. 경제적 능력과 자녀들의 탄탄한 입지는 또래 여자들이 부러워 할만하다. 그런 그녀가 불쑥 남의 밥상을 차리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세를 준 호수가 보이는 집으로 곧 이사를 한다며 부엌 리모델링에 가장 신경을 썼다고 했다.
쉰, 친구의 나이다. 이즈음에는 부엌에서 지지고 볶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을 텐데 오히려 바깥사람을 집안으로 불러들여 맛있는 밥상을 차리겠다니 그 연유가 궁금했다. 의아해하는 내게 어린 시절 마음 한 토막을 들려준다. 너무나 곤궁했기에 가난을 팔래, 영혼을 팔래 물으면 후자를 팔겠다고 할 정도로 궁핍한 것이 싫었다고 했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내 자식한테는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단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밥을 함께 먹자고 하는 사람이 없더란다. 이리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훅 들이닥쳐 남 (가족?) 을 위한 밥상을 차리려는 꿈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친구는 그 마음을 야무지게 싸놓고 이삿날이 오기만 기다리는 눈치다.
나와 친구는 여러모로 닮았다. 자라 온 환경과 가치관이 비슷하고, 직업이 같다 보니 속내를 드러내놓고 지낸다. 타인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싶다는 마음 또한 나도 담고 있었다. 18년째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명함에 적을 만한 약력이 없어 오전 시간을 이용해 여기저기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학생들이 하교 후에야 일을 시작하기에 일과가 끝나는 시각은 자정이었다. 늘 동동거리는 나를 주변 사람들은 배려해주었다. 친목 모임 날짜는 내 일정에 맞추었다. 이웃사촌들과 모이면 늘 바쁘다는 말이 첫인사였고, 그들 역시 첫마디가 바쁘지? 다. 수년째 이러다 보니 지인들의 전화가 뜸해졌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마음이 수런거렸다. 왜 나에게서 멀어져 있느냐고 전화를 해댔다. 하나같이 똑같은 대답이다. 공연히 바쁜 사람 시간 빼앗을까 봐 연락을 못했다고 한다. 나는 차 한 잔 하러 오라고, 밥 한 끼 먹자며 아이처럼 보챘다.
내 기억의 방에는 여러 독방이 있다. 그중 부엌은 가장 차갑고 어두우며 습한 방이다. 천장까지 치달은 그을음, 구들을 데울 땔감은 고래 입구에서 허기가 져 너울대다 사그라졌다. 여름이면 눅눅해진 성냥개비를 달래다 결국은 사정없이 아궁이 속으로 내던져 버리기를 얼마나 반복했던가. 어둡고 축축한 그곳에서 처음으로 뿌듯함을 맛본 적이 있었다. 굳이 맛봤다고 표현한 것은 우리 집이라는 공간에서 생애 첫 번째로 살맛을 느꼈기 때문이다. 40년 세월 속에서도 그때의 장면은 정지된 시간사진으로 남아있다. 빈궁하기에는 우리 집과 매양 같았던 이웃집 부엌이 장마에 내려앉았다. 몇 가지도 안 되는 부엌살림이지만, 그마저도 흙더미에 깔려 끼니를 건너뛰게 되었다. 엄마는 식솔을 우리 집 부엌으로 불러 보리밥을 해주었다. 컴컴한 부엌에서 서로 이마를 맞대고 다디달게 먹었다. 보리밥에 반찬이라곤 달랑 된장과 열무김치였던 밥상은 열 살 계집아이에게 자존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인의 밥상’이란 TV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원로 배우가 전국 곳곳을 다니며 음식을 소개한다. 우리의 밥상은 공동체적 요소가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혼자 먹는 밥상이 아니라 여럿이 먹는 밥상이다. 나를 위한 밥상이 아니라 누군가를 보듬는 상차림이다. 우리네 인사말도 밥이 들어간다. 한해 음식물 쓰레기가 북한 주민의 일 년 식량보다 더 많다는 작금에 밥 먹었느냐고 묻는 것은 왜일까? 소통의 첫 단추로 밥만 한 게 없기 때문 아닐는지. 최근엔 1인 가구를 위해 식료품이 소량으로 포장돼 나온다. 1인 식당도 늘어나는 추세다. 혼자 먹는 어색함을 들어주려고 칸막이가 설치돼 있다. 다변화 사회에 빠르게 대응하는 상술은 개인의 프라이버시 운운하며 단절을 가속화 하는데 불을 지피고 있다.
오도카니 혼자서 밥을 먹는 사람이 겨울 산에 불 번지듯 늘어나고 있다. 해마다 치르는 축제에 등장하는 비빔밥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뤄 화합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몇 미터나 되는 김밥을 말아보는 행사는 소통하는 상가번영회를 만들자고 다짐하는 자리다. 내 친구 경숙이가 쉰 살에 오색 반찬을 만들어 이웃을 초대하겠다는 건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함께 먹는 밥상에는 화합, 소통, 행복이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도 그 축에 끼려고 꿈질대고 있다. 또 한 번 찌릿한 자존감을 맛 보려한다. 밥상은 삶의 성장통을 앓을 때 잘 듣는 약이다.
누군가를 위하여 밥상을 차린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타인을 위해 커피를 내리고 차를 다리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 베푼다는 것의 즐거움이며, 화합과 소통의 장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첫 번째 에피소드가 그 뒤를 잇는 것들과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 에피소드는 상대방의 호의와 정성을 알아주지 못하는 어떤 인물을 그려내고 있는 것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11) 보리새우
붓끝에서 새우 꼬리가 붉게 파닥였다. 수염을 눈 꼬리까지 둥글게 말아 올리고 웃는다. 휘어진 등은 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반짝이고, 앞발은 숟가락과 포크를 들었다. 백진주를 박은 크고 검은 눈은 나를 보고 ‘왜, 거기 서 있느냐’고 묻는 듯하다. 잠시 옆을 쳐다보니 하얀 식빵 모자를 쓴 주방장새우 손에 들린 후라이 팬에서는 ‘그러게’하는 대꾸 소리가 보글거렸다. 혼자서 웃고 있는데 벽화를 그리던 아가씨가 말을 던진다. “다음 주에 오픈해요. 드시러 오세요.” 벽면 가득 크고 작은 새우들이 있는 것을 보니 대하가게가 들어설 모양이다. 큰새우, 작은새우, 엄마새우, 아빠새우, 요리사새우, 알바생새우, 술취한새우, 춤추는새우, 부장님새우, 꾸러기새우 등을 의인화한 포스팅은 내 발목을 붙들더니 입꼬리를 올리고 걸어가게 한다.
어릴 적, 엄마의 장바구니에는 새우가 종종 들어 있었다. 바삭바삭 마른 새우를 살짝 볶아 수염과 다리를 제거하고, 마늘쫑과 양념을 넣어 다시 버무린 새우볶음은 먹성 좋은 우리들 도시락 반찬으로 자주 등장했다. 날씨가 흐리거나 꾸물한 날에는 새우, 멸치 다시마를 넣어 푹 우린 국물에 국수나 수제비를 끓이고, 찬밥이 어중간하게 남은 날은 김치를 듬성듬성 썰어 넣은 갱시기(국밥)를 끓여 온 식구의 저녁 끼니를 마련했다. 새까만 가마솥에 김이 솟아오르길 기다리며 한껏 고개 숙여 아궁이에 장작을 들이밀던 엄마의 얼굴은 새우처럼 발갛게 불이 붙었다. 쪽문을 열고 밥냄새에 코를 벌렁거리는 우리들의 눈은 새우새끼들보다 더 새까맣고, 더 반짝거렸고.
바람이 차다. 예년에 비해 겨울이 이르고 길 것이라고 뉴스 앵커가 전한다. 엄마생각에 전화를 건다. ‘엄마’, 겨우 한마디밖에 하지 않았는데 엄마의 마음은 바다가 되어 넘실거린다. “야이야! 날이 마이 춥단다. 배추 절여 놓고, 양념 다 개어뒀으니까 내일 김장통 들고 와라.” 태평양 바다 같은 엄마의 헤아림에 하고 싶던 말 다 잊어버린다. 그냥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신이 나서 하직인사를 한다. 그것도 매우 짧게, ‘응! 엄마’. 언제나 당신 생각은 접어두고 자식들이 휘청거리지 않고 똑바로, 힘차게 걸어가기를 기원하며 묵묵히 견디며 사는 엄마다. ‘한때 바다이거나 늪이었던 사막에는 만년청풀씨, 새우알, 연꽃씨앗들이 있다. 그 가운데 새우알은 뜨거운 모래흙 속에서 큰비가 내리길 천 년이나 기다리며 견딘다.’고 한다. 《견딤의 미학》에서 적고 있는 새우알에서 엄마의 마음을 읽는다.
엄마에게로 간다. 차의 뒷좌석에는 빈 통 여섯 개가 앉아 있다. 엄마의 정성과 사랑을 가득 담을 통이다. 집에 도착하니 벌써 김장배추를 혼자서 버무리고 있다. 소금에 절여 씻어놓은 배추가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뒤에서 엄마를 꼬옥 안았다. “야가 와이카노!” 팔꿈치를 흔들며 떼어놓으려 한다. 나는 엄마를 더 꼬옥 안으며 말했다. “엄마가 좋아서” 엄마는 피식 웃으시며 툭 말을 밷는다. “빌 소리를 다 하는구만” 그 투박한 소리까지 좋다. 앉은뱅이 상에 비닐을 깔아놓고 배추소쿠리를 끌어 당겨 앉자 금방 양념에 버무린 배추속고갱이 한쪽을 떼어 입에 넣어준다. 고소하고 달다. “음, 엄마!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맛있어?” 묻는 말에 고개도 들지 않고 손을 바지런히 움직이며 중얼거린다. “너거 줄라꼬. 사람들이 좋다카는 거 마이 너었다. 거 머시고 까만줄 있는 새우, 보리새우라 카덩가 그거 하고, 우엉, 연뿌리, 마늘, 생강, 젓국도 너었다.” 자식들에게 좋은 것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양념이 되었다.
《본초강목本草綱目》과 한방에서는 새우를 좋은 식품으로 꼽는다. 특히 신장에 좋으며 온몸의 혈액순환을 왕성하게 해서 기력을 충실하게 하여 양기를 돋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엄마는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참으며 용돈을 모았을 것이다. 배추잎 같은 종이돈에 갖가지 양념 이름을 적어 꼬깃꼬깃 일 년을 재워두었을 것이다. 까만줄무늬 보리새우가 김치를 버무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 보릿고개를 아슬이 넘었고, 해방과 한국전쟁의 북새통에서도 살아남았다. 어느덧 여든의 나이를 넘긴 엄마의 등이 휘고 있다. 엄마가 가득 채워준 김치통을 싣고 집으로 가는데 등 굽은 보리새우가 아득히 따라오며 손을 흔들고 있다.
보리새우가 그렇듯, 온 몸울 감싸고 있는 딱딱한 등껍질은 엄마의 사랑을 구속하지 못한다. 거센 파도도 엄마의 부지런한 손발을 막을 수 없다. 드넓은 바다는 엄마가 키우는 밭이다. 엄마의 정성과 사랑을 먹고 내 마음의 키가 자란다.
새우를 연상의 고리로 삼아, 새우처럼 허리가 구불어진 어머니의 일방적인 자식 사랑을 전달하고 있다. 가슴 울리는 감동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글이다. 새우와 어머니의 비유, 그 둘의 유사성(analigy)인 등이 굽었다는 것의 의미를 더 파헤쳐 표현해 낸다면 주제의 깊이를 확보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