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 동안.. 교회 내부공사가 한 창 진행이 되었습니다. 교회 성도 한 분(조현숙집사님)의 아이디어로 강대상의 위치를 바꾸었더니, 공간활용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가져오는 당장의 유익을 경험하며,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이 우리 삶 속에서도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음...이번 주는 내부 페인트칠과 유리작업, 또 외부의 익스테리어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좀 더 정리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먼지도 많이 먹고... 땀도 많이 흘리고 했지만... 참 감사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특별히, 직접 오셔서 도와주시고, 마음 나눠주시고, 후원도 해주시고, 또 무엇보다 기도해 주시는 모...든 성도님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무형의 교회뿐만이 아니라, 밖으로 보이는 유형의 교회역시 성도들의 교제와 나눔으로 함께 세워갈 때 더욱 견고해지리라 믿습니다.
저는 사실... 일주일 내내... 함께 작업하느라 말씀을 볼 시간이 좀처럼 없었습니다. 머릿속에서 갈등이 조금 되었습니다. “그냥 도서관가서 짱 박혀서 책 읽으면서 설교준비나 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몸은 저절로 교회로 향하고 있더군요. ㅎㅎㅎ
음... 공사하면서 에피소드 하나 나누자면... 교회 강대상 철거작업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강대상을 뜯고 보니 그 밑에 폐자재 & 쓰레기더미가 한가득 숨겨져 있는게 아닙니까... 먼저 공사했던 사람들이 버리기 귀찮으니까.... 다 쓸어 담아 놓고 마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카페트를 벗기고 합판을 뜯는 순간.. 함께 있는 분들이 경악을 했습니다.
그래도 나름 성스럽고 거룩하게 여기던 강대상 밑이 쓰레기더미였다니.... 그런 줄도 모르고, 교회 어른들은 강대상에 아이들 올라오면 안 된다... 신발 신고 올라오면 안 된다.... 하면서 나름 특별히 생각하며 관리했을 것 아니던가요!
함께 있었던,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속마음도 사실 다 이런 구석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겉보기에는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며 손들고 찬양하고, 소리 높혀 기도하고, 아멘을 외치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게 우리 안에 감추어놓은 (철저하게 은폐시켜놓은 쓰레기같이 냄새나는 죄악된 실상들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작게는 신발/겉옷 하나 사는 것부터... 입시생은 어느 대학을 갈 수 있는지.... 졸업 후 직장은 남들 다 알아주는 대기업에 들어갈 수는 있는지.. 연봉은 얼마인지... 어떤 자동차를 탈까... 어떤 집에서 살까하는 문제까지.. 사실은 우리가 일평생을 노력하고 수고하면서 얻으려는 일들이... 그렇게 인생을 포장하려는 욕구가 아닌가... (이번 공사를 통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그 속에 있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한 번, 그 끝을 생각해시기 바랍니다. 더 견고하게 안전장치를 세우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몇 단계의 비서를 거쳐야만 통화가 가능한 과정을 만들고... 더 높은 곳에... 더 깊은 곳에 자기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점점 더 그렇게 자기 성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권위 있다고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행복일까요? 그건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건 사실 자신의 감옥을 스스로 세워가는 것 아닐는지요. 예수는 낮아지고 낮아지셔서 마굿간 말구유 안에 오셨는데, 왜 우리는 그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토록 높이 오르려고 매달릴까요...
남들이 평가하는 우리의 외형은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 외형이 벗겨지는 날이 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일평생 수고하고 노력해서 ‘추구해야하는 것’은, 그 외벽(외면)을 치장하는 것에 목표가 맞추어져서는 안 되고, 그 내면의 상태를 직시하고 바라보는 일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내면에 악취가 뿜어져 나오는 쓰레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견고하게 포장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우리의 외면을 치장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건 자신 스스로 “나는 속이 더러운 사람입니다”...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과 같은 의미 일 것입니다. (물론, 겉모습도 정갈하고 깨끗하면 좋은 것이지만...)
결국, 그 속이 드러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거룩해 보이는 빨간 카페트가 벗겨지고, 누구도 못 열어볼 것처럼 박아놓은 못이 뽑혀지고 합판이 거쳐지듯이... 우리의 그 잘난 치장들이 벗겨져나갈 때가 올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스러울까요. 우리 자신들이 그 쓰레기더미 위에서 거룩을 폼 잡고 있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속을 알고 있는 분이 그 모습을 보고 계신다면, 얼마나 가엽게 보일까요...
그러고보면 인생이 참 코메디가 아닌가요. 정말, 그렇게 잠시 코메디 본 것같이 웃고 끝나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결론 맺는 되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그렇게 찾아온다면... 그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눅12:1~3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하신 말씀이던가요?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된 모습을 “화 있을진저...”하며 책망하시니까... 그들이 이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다시 책잡고자 노리고 있을 때,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군중들에게 하신 이야기 아니던가요.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들어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회칠한 무덤이라는 사실을 눈앞에... <구약의 약속대로 예수가 나타나서 직언을 하는데도...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즈음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일까요? (회칠한 무덤같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가까울까? 아니면,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는 경고를 듣는 무리들의 편일까?)
“내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그래도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다 전자일 것입니다. 그나마 나는 “내가 바로 그 바리새인이구나...”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경고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감추인 문제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없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나조차도 잊어버린(아니 없다고 치부해버리는 문제들이) 잠잠히 가라앉아 있는데... 어쩌다가 한 번씩 긴 지팡이가 들어와서 밑바닥을 휘~휘 젖고 나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는 쓰레기들이 있지 않던가요. (이런 일은 주로 내 오랜 과거를 아는 사람들이 하게 되는데... 주로 가족...)
그때 드러나는 그 모습이 바로 ‘나’인 것입니다. (포장되지 않은 바로 ‘나’...)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내면에 감추인 추악한 것들을 그러니 제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제거 할 수 있겠습니까...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산적한 문제들... 덮기도 힘든데... (사실 방법이 없으니까 덮으려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쓰레기 치우는 용역을 부르면 됩니다. 내가 못하는 것... 대신 해 줄 수 있는 <준비된 일꾼>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비용이죠? 그런데 그거 공짜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안에 이런 더러운 것들이 있으니...치워주세요..” 말만 하라는 것 아닌가! “나는 할 수 없으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만 하라는 것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내가 인정만 하라는 것” 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거저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성을 쌓고 굴을 파려 드는가!)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인데... 우리가 교회 인테리어를 바꾸고 익스테리어를 바꾸는 것 역시... 우리 자신의 어떤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는 포장일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되돌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십자가를 거둬들이고 교회의 색깔을 지우며... 지역사회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가는 이 노력이 아주 그럴듯해 보이는 우리 더작은교회의 낮아짐의 모습일지 모르지만, 도리어 이건 아주 견고한 포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디 신앙의 본질을 기억하며 교회를 세워 가십시다. 개혁이 본질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 율법이야기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율법을 지키는 삶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하라고 했고 하지 말라고 했는지를 열심히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결정을 하려고 할 때 꼭 성경적 근거를 대라고 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이 아닙니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지를 따지는 차원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말씀에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저절로 할 수 있고, 그전에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하던 것들이 말씀 앞에서 죄로 깨달아지면 끊어 낼 수 있는 ‘변화된 삶’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누려야하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된 삶인 것입니다.
롬4: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우리가 우리의 견고한 위선의 포장을 벗고, 우리의 죄된 모습을 인정하고, 드러내어 주께 고백하면, 주께서는 그 죄를 가리어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어떤 세상의 복과 바꿀 수 없는... 이 <죄로부터 해방되는 복>을 경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지난 주일... 공사중 느꼈던 소회를 담아서 전했던 설교를 요약해서 올려봅니다.
마음에 쏘~옥 들어와 은혜가 되었습니다.
개혁주의의 달콤한 유혹을 넘어서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내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요즘 제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다 하나를 가르키고 있네요...
우리 모두 '복음 앞으로'의 온전한 개혁과 회복이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