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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하나 사랑하나 원문보기 글쓴이: 고로오
남자, 남자를 사랑하다
대식은 거리에서 살아간다. 그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어느날 거리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괴로워하는 어느 한 남자를 본다. 주가폭락으로 증권사의 유능한 펀드매니저에서 일순간 거리로 나 앉게 된 석원. 대식은 만신창이가 된 석원을 돌봐주고, 석원은 하루하루 대식에게 익숙해져 간다.
그들은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여행 도중 바닷가 변두리 마을로 흘러든 그들 앞에, 도발적인 여자 일주가 나타난다. 일주는 대식을 사랑하게 되고, 한사코 뿌리치는 대식을 따라 그들의 여행에 합류한다.
석원은 대식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를 경멸한다. 그런 석원에게 떠나달라고 다그치는 일주,그리고 석원이 떠날까봐 불안한 대식. 엇갈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세 사람은 불편한 여행을 계속한다.
절망의 끝에서 사랑을 외치다
이 영화는 참 아프다. 불가능한 것들을 갈구하는 주인공들의 애틋한 마음도 아프고 죽음만이 유일한 구원인 주변부 인생을 살면서 여기저기 떠도는 삶도 무척 마음 아프다. 가진 것 없고 가질 수 있는 희망도 없는 이들에게 사랑조차 허락하지 않는 건 너무 잔인한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렇다. 빛나고 돋보이는 것에만 박수를 치느라 우리가 만든 그림자에 대해선 방치하고 무신경하고 너 나아가 냉담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눈감고 방치한 대식(황정민)과 같은 인물들은 우리들의 냉담함 때문에 오늘도 절망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닐지.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내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맹세가 아니라) 그들에게 가해자 노릇을 했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이 영화는 대식(황정민)이라는 성적 소수자의 존재를 통해 내 속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게 하고, 석원(정찬)이라는 몰락한 루저를 통해 내 속의 나약함과 이기심을 꿰뚫어보게 한다. 카메라는 두 사람이 만나 떠돌면서 강하고 배려심이 깊은 대식과 허약하고 쓸모없는 석원의 모습을 계속 대비시킨다. 때론 슬프게 때론 우스꽝스럽게. 줄곧 품넓고 희생적인 대식의 인간미를 강조하면서.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의 비극성을 더 강조하기 위한 구조라는 걸 나중에사 알게 된다. 석원을 향한 대식의 마음이 그가 잡은 생의 마지막 끈이었다는 것을 알려줄 때, 나는 내 속의 그림자 같은 존재였던 알몸의 대식을 끌어안고 마구 울고 싶어졌다.
사랑이 구원이 아니라 대식에게처럼 절망의 최전선이 될 때, 사회의 냉혹함이 아니라 사랑만이 구원이라고 믿는 나라고 하는 인간의 허영심을 질책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 생의 유일한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을 오늘은 새롭게 질문하게 된다. 주류로부터 배제된 그들에게 사랑조차 허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불관용 또한 질책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들은 이토록 사회적 타자와 소수자에 대해 냉정하고 경계하며 심지어는 배제하려 드는가. 그들은 단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일 뿐이며 우리에겐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데도 말이다. 다른 것들이 한데 섞여서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은 15종의 혼합 잡곡처럼 우리들도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 색안경 끼지 않고 볼 수 있는, 그래서 함께 존재해도 불편하지 않는 여유로움이 언제쯤이나 찾아 올 수 있을까.
말 그대로 로드 무비인 이 영화는 길에서 찍은 아름답고 쓸쓸한 영상과 그 속을 걸어가는 추레하고 얼룩진 두 사람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사람살이의 희노애락이야말로(덧붙여 사랑까지) 덧없고 애닯은 한순간일 뿐임을 매우 잘 형상화한다. 대식을 동성애자로 그려 애당초 석원과 불가능한 관계를 상정하는 것도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한 훌륭한 비유로 보인다. 어떤 연애든 그것이 이성애든 동성애든 관계없이 완벽한 소통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남자를 사랑하는 대식과 여자를 사랑하는 석원 간의 사랑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사랑의 소통 불가능성을 정체성의 차이로 표현한 시도는 그러므로 다양한 치환이 가능한 비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와 뮤직비디오를 왔다갔다 하는 촬영은 어둡고 칙칙하고 습기를 머금고 있지만 슬프고 아름답다. 아니, 슬퍼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길에서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의 절망 앞에, 돈이나 명예 같은 현세적인 가치들이 지저분해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드러내놓고 성공을 좇으며 허방을 피하려고 나와 다른 이들을 소외시킬 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생의 나락, 그 컴컴한 어둠을 밟고 있는 이들은 세상이 허용하지 않는 곳에서 간당간당하게 버티다가 결국 외롭게 죽어간다. 그건 자살이라기 보단 타살이라고 불러야 맞다. 칼만 안든 강도처럼, 실제로 죽이진 않았지만 죽으라고 내버려둔 채고 돌봐주지 않았으니 간접적인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 중 누가 간접 살인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해도 [로드 무비]의 대식이와 같은 존재들은 죽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영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 살인, 다수가 소수에 대해 저지르는 사회적 타살에 대해 속죄하고 그들의 명복을 비는 일종의 제의 같은 영화다.
황정민, 정찬 두 배우의 연기는 경이롭다. 어떻게 그런 배역을 선뜻 맡고 소화할 수 있을까.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그토록 절절한 연기를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의 노력과 재능에 감동, 단단히 먹었다. 특히, 황정민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그 눈빛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거 같다. 진짜 멋졌다. 그의 연기 스타일을 느끼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영화 보고나서 그에 대한 생각을 단번에 바꾸게 되었다. 왜 사람들이 황정민 연기를 칭찬하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영화는 최고라고 극찬 받았던 [브로크백 마운틴]보다 내가 보기엔 더 낫다. [브로크백 마운틴] 영화를 볼 땐 답답했는데 이 영화를 볼 땐 슬픔이 먼저였다.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영화에 내가 더 끌리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