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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1권 총서 111번째기사 윤이·이초가 공양왕의 즉위에 대해 명나라에 무고하여 옥사가 일어나다 5월,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조반(趙胖)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예부(禮部)에서 신(臣) 등에게 이르되, ‘그대 나라 사람으로서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彝)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란 사람이 와서 황제에게 호소해 말하되, 「고려의 이 시중(李侍中) 112) 이 왕요(王瑤)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는데, 요(瑤)는 종실(宗室)이 아니고 곧 이 시중의 인친(姻親)입니다. 요(瑤)는 이성계(李成桂)와 더불어 모의하여 병마(兵馬)를 움직여 장차 상국(上國)을 범하려고 하므로, 재상(宰相) 이색(李穡) 등이 옳지 못하다고 하니, 곧 이색(李穡)·조민수(曺敏修)·이임(李琳)·변안열(邊安烈)·권중화(權仲和)·장하(張夏)·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이종학(李種學)·이귀생(李貴生)을 잡아서 살해하려 하고, 우현보(禹玄寶)·우인열(禹仁烈)·정지(鄭地)·김종연(金宗衍)·윤유린(尹有麟)·홍인계(洪仁桂)·진을서(陳乙瑞)·경보(慶補)·이인민(李仁敏) 등은 잡아서 먼 곳으로 귀양보냈는데, 그 내쫓긴 재상(宰相) 등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天子)에게 고하고, 이내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와서 정토(征討)하게 하시오.」한다.’하면서, 이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가 기록한 이색·조민수 등의 성명(姓名)을 내어 보이므로, 조반(趙胖)이 윤이와 대변(對辨)하기를, ‘본국(本國) 113) 이 대국(大國)을 지성으로 섬기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하고, 이내 윤이에게 묻기를, ‘그대는 벼슬이 봉군(封君)에 이르렀으니 자못 나를 알 것인데?’하니, 윤이는 깜짝 놀라면서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우현보·권중화·경보·장하·홍인계·윤유린과 최공철(崔公哲)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이색·이임·우인열·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 등은 청주(淸州)의 감옥에 가두고 이를 국문하게 하였다. ----------------------------------------------------------------------- [註 112] 이 시중(李侍中) : 이성계(李成桂). ☞ [註 113]본국(本國) : 고려. ☞
◈ 태조 1권 총서 112번째기사 청주에 수재가 나자, 윤이 사건과 연루된 죄인의 방면을 논의하다 6월, 공양왕이 청주(淸州)의 수재(水災)로써 태조와 심덕부(沈德符)를 불러 죄수를 놓아주기를 의논하여, 이조 판서 조온(趙溫)을 청주(淸州)에 보내고 교지를 내렸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윤이(尹彝) 등의 말한 바와 같이 그 교령(敎令)의 사람이 죄가 반역에 관계되어 추문(推問)하여 죄상을 밝혀야 될 사람은 이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구문(究問)하니, 윤이의 친족 윤유린(尹有麟)은 제가 그 죄를 알고 먹지 않고 죽었으며, 공모(共謀)한 최공철(崔公哲)은 죄에 자복(自伏)하였으며, 김종연(金宗衍)은 도피 중에 있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정상(情狀)이 명백하진 않으니 다만 고문(拷問)을 더한다면 아마 괘오(詿誤)에 빠질 염려가 있으니, 위의 사람들을 이미 공초(供招)에 자백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마땅히 각처에 안치(安置)하게 하라.”
◈ 태조 1권 총서 113번째기사 태조가 윤이 이초 사건으로 사직하다. 태조를 죽이려는 사건과 연루된 심덕부 등을 논죄하다 11월, 태조가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獄事)로써 글을 올려 사직(辭職)하니, 태조로서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삼았다. 김종연(金宗衍)이 서경(西京)에 이르러 천호(千戶) 윤귀택(尹龜澤)과 심덕부(沈德符)의 휘하(麾下)인 선공 판관(繕工判官) 조유(趙裕)와 공모(共謀)하여 태조를 살해하고자 하니, 귀택(龜澤)이 모계(謀計)가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몰래 태조에게 나아가 변고를 고발하기를, “종연(宗衍)이 심시중(沈侍中) 114) ·지용기(池湧奇) 등과 함께 모반(謀反)할 계획이 있습니다.” 하고, 조유(趙裕)도 또 말하기를, “심시중(沈侍中)이 진무(鎭撫) 조언(曺彦)과 조유 등으로 하여금 장차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니, 이것은 반드시 공(公)에게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그 말을 비밀히 덕부(德符)에게 알리니, 덕부가 조유를 옥에 내려 가두었다. 태조가 아뢰기를, “신(臣)은 덕부(德符)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나라를 받들므로 본디부터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조유를 신문하지 마시고 우리 두 신하로 하여금 종시(終始) 보전하게 하소서.” 하였다. 공양왕이 장차 이를 석방하려고 하니 헌부(憲府)에서 소(疏)를 올려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므로, 조유는 이에 복죄(伏罪)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덕부(德符)·용기(湧奇)·조언(曺彦) 등은 모두 외방(外方)으로 귀양보냈다. ----------------------------------------------------------------------- [註 114] 심시중(沈侍中) : 심덕부(沈德符). ☞
◈ 태조 1권 총서 114번째기사 여러 원수(元帥)들의 인장을 회수하다 공양왕이 헌부(憲府)의 청(請)으로 인하여 여러 원수(元帥)들의 인장(印章)을 모두 회수하였다.
◈ 태조 1권 총서 115번째기사 태조를 다시 문하 시중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는 전문을 올리자 윤허하지 않다 12월, 다시 태조로써 문하 시중 도총 중외 제군사(門下侍中都摠中外諸軍事)로 삼으니, 태조가 전문(箋文)을 올려 사양하였다. “다만 덕(德)을 헤아려 직위를 주는 것은 이것이 임금의 밝음이 되고, 총행(寵幸)으로써 공(功)을 차지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의리에 합합니다. 만약 영화(榮華)를 탐내어 함부로 나아가면 혹은 재화(災禍)를 맞이하고 원망을 초래합니다. 이로써 소공(召公) 115) 은 권세가 극성하면 있기 어려움을 근심했으며, 채택(蔡澤) 116) 은 공(功)이 이루어진 사람은 떠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 조종에서 시중(侍中)의 임무는 실로 주(周)나라의 총재(冢宰)의 벼슬이니 나라를 균등하게 함도 이미 어려운 일인데, 음양(陰陽)을 조화(調和)시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신은 국량(局量)이 좁고 얕으며 학술(學術)은 소략(疏略)하고 거칠은데, 가성(假姓) 117) 이 해독을 퍼뜨리던 시기를 당하여,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는 일이 있어 신(神)과 사람이 함께 통분히 여기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거의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돌이켜 삼가 천자의 명령을 받들었으니, 참위(僭僞) 118) 의 종자(種子)들은 저절로 멸망에 이르고, 정통(正統)의 전승(傳承)은 능히 흥복(興復)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곧 조종(祖宗)께서 몰래 도와주심이요, 진실로 신(臣)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작읍(爵邑)을 주신 은혜를 입어 이내 중외(中外)의 국사(國事)를 통솔하니, 덕(德)에 의하여 잘 다스려진 정치에 도움이 없으므로,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여 일을 실패시킨 근심을 항상 품고 있습니다. 금년 봄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가 도망해 중국으로 들어가서, 가만히 천자(天子)를 업신여기고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사직(社稷)을 옮기고자 하니, 김종연(金宗衍)이 그 주모자(主謀者)가 되어 스스로 미혹(迷惑)하여 도망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실(王室)의 안위(安危)에 매여 있으며, 신(臣) 자신의 이해(利害)에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숨은 것을 고의로 놓아주매, 다만 반역할 것을 몰래 서로 모의하니, 다만 신의 총리(寵利)가 시켜 그렇게 한 것이지만, 생각이 이에 이르매 조심하고 황공하여 그침이 없습니다. 요사이 우의정(右議政)에 사면(辭免)하게 되매 사사로이 마음속에 다행하게 여겼는데, 지금 또 신을 시중(侍中)에 임명하여 명령이 위에서 내려오니 몸둘 곳이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가 재건(再建)되어 문물(文物)이 다시 일어나니, 스스로 큰 인재가 아니면 어찌 국정(國政)을 보좌하겠으며, 무거운 덕망이 없으면 어찌 능히 인심을 진압 복종시키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신의 지극한 정성을 살피시와 신의 중한 책임을 벗겨 주신다면, 신은 마땅히 어진 사람에게 길을 피하여, 관직을 비워두었다는 비난[曠職之議]을 끼침이 없을 것이며, 집에서 노년(老年)을 보내면서 제사지내 복을 비는 정성을 바치겠습니다.” 왕은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였다.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함은 실로 세상에서 뛰어난 인재(人材)가 되고, 도(道)를 논하여 나라를 다스림은 반드시 하늘을 대신하는 정승(政丞)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 몸의 거취(去就)는 나라의 안위(安危)에 관계된다. 경(卿)은, 뜻은 풍상(風霜)에 격려[勵]되고 기운은 삼광(三光) 119) 오악(五嶽) 120) 에 타고났소. 예로부터 공(功)이 왕실(王室)에 있었으며, 지금에 이르러 덕(德)이 백성들에게 입혀졌소. 나씨(納氏) 121) 를 북방 모퉁이에서 쫓아내고 왜구(倭寇)를 사방의 국경에서 섬멸하였소. 선왕(先王)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로부터 위성(僞姓)이 그 사이에 거짓으로 왕위를 도둑질하여 사냥에 빠지고 주색(酒色)을 즐기며, 살육을 마음대로 행하여 완악하고 흉악한 짓을 크게 행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중국을 범하려고 하는데, 경이 역리(逆理)와 순리(順理)를 밝게 알고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돌아와서, 종친(宗親)과 여러 신민(臣民)들과 모의하여 마침내 위성(僞姓)을 폐출(廢黜)시키고 과인(寡人)을 추대하여, 나라의 터전이 거의 위태했는데도 다시 편안하게 하고, 종사(宗祀)가 이미 끊어졌는데도 다시 이어지게 하니, 공(功)을 비교하고 덕(德)을 헤아려보매, 옛날에 빛나고 지금도 빛나서, 마땅히 우리 집에 길이 보좌하고 영광을 후사(後嗣)에게 전해야 될 것인데, 어찌 여러 소인들이 몰래 간사한 계획을 꾸밀줄을 기약했으랴. 이것은 실로 나에게 있고 경의 이유는 아니니, 자기를 책망하는 데 깊이 뜻을 두고서 장차 그 형벌을 바로잡으려고 하는데, 경이 갑자기 전장(牋章) 122) 을 바쳐 직임(職任)을 면(免)하려고 하니, 경은 비록 생각하기를 상심(詳審)했지마는, 나의 소망(所望)은 그렇지 아니하오. 원수(元首) 123) 와 고굉(股肱) 124) 이 이미 일체(一體)처럼 되었으니,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작게 되더라도 감히 내 마음에서 잊겠는가? 번거롭게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그대의 직책에 나아가기를 바라오.” ---------------------------------------------------------------------- [註 115] 소공(召公) : 주(周)나라의 정치가. ☞ [註 116] 채택(蔡澤) : 중국 전국 시대 연(燕)나라 사람. ☞ [註 117]가성(假姓) : 신씨(辛氏). ☞ [註 118]참위(僭僞) : 신우(辛禑)·신창(辛昌)을 말함. ☞ [註 119]삼광(三光) : 일(日)·월(月)·성(星). ☞ [註 120]오악(五嶽) : 동악(東嶽) 태산(泰山)·서악(西嶽) 화산(華山)·남악(南嶽) 형산(衡山)·북악(北嶽) 항산(恒山)·중악(中嶽) 숭산(崇山)을 말함. ☞ [註 121] 나씨(納氏) : 나하추(納哈出). ☞ [註 122]전장(牋章) : 전문(箋文). ☞ [註 123]원수(元首) : 임금. ☞ [註 124]고굉(股肱) : 신하. ☞
◈ 태조 1권 총서 116번째기사 5군을 없애고 3군 도총제부를 만들어 태조를 도총제사로 삼다 공양왕 3년(1391) 신미 정월, 오군(五軍)을 줄여 삼군(三軍)으로 삼고, 도총제부(都摠制府)로써 중외(中外)의 군사(軍事)를 통솔하게 하고, 태조로써 도총제사(都摠制使)로 삼았다.
◈ 태조 1권 총서 117번째기사 사직을 청하는 태조의 전문과 윤허치 않는 비답이 오가다 3월, 태조가 전문(箋文)을 올려 사직(辭職)하고자 하였다. “신(臣)은 용렬한 사람으로서 특별히 별다르게 대우하는 은혜를 입어 직위는 항상 장상(將相)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털끝만한 도움도 없으니, 마땅히 현인(賢人)을 등용하는 길을 피하여 임금의 밝은 정치를 열어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얕은 정성을 다하여 다시 천총(天聰)을 모독하였으나 매양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니, 조심하고 두려워함이 더욱 심합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는 크고 작은 것이 있고 일은 옛날과 지금이 다르지만, 그 임금과 신하의 서로 만나기가 어려운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漢)나라의 고조(高祖)는 창업(創業)한 군주로서 사람을 알아서 잘 임용(任用)하였지마는, 공신(功臣)을 대우하는 데 이르러서는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은 그 결점에 불만이 있었으며, 광무제(光武帝)는 중흥(中興)한 군주로서 호걸(豪傑)을 망라(網羅)하여 한왕조(漢王朝)를 광복(匡復)하고, 또 공신(功臣)을 잘 대우하여 그 종말을 보전하였으니, 뒷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잘함(好)을 칭찬하였습니다. 그 공신은 한신(韓信)과 주발(周勃)도 마침내 장양(張良)의 〈그 종말을〉 보전한 것만 같지 못하고, 구순(寇恂) 125) 과 등우(鄧禹) 126) 도 오히려 엄자릉(嚴子陵) 127) 의 고절(高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신이 비록 배우지 못했지마는 장양(張良)과 엄자릉(嚴子陵)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광무제(光武帝)와 같이 하기를 원합니다. 신이 병신년 6월에 선부(先父)인 신(臣) 이안사(李安社)를 모시고 현릉(玄陵)에게서 명령을 받아 쌍성(雙城)을 평정하고 옛 강토를 수복하고는, 남은 힘을 빙자하여 땅을 넓혀 청주(靑州)까지 이르러 번진(藩鎭)으로 삼고 동쪽을 돌아다볼 근심이 없게 하였으니, 현릉께서 그 공(功)을 가상(嘉尙)히 여겨 신의 아버지를 영록 대부 판장작감사(榮祿大夫判將作監事)로 삼고 그대로 삭방도 만호(朔方道萬戶)로 삼았으며, 또 신을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 승진시켜 나이 30이 되기 전에 직위가 재보(宰輔)에 이르렀지마는, 아무런 보좌한 것이 없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무진년에 이르러 가성(假姓) 128) 이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니, 사람들이 감히 간(諫)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장차 사직(社稷)이 전복될 지경이었습니다. 신이 맨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킨 일이 있어서 다시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했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군사를 마음대로 부렸다고 하며, 다시 기사년에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위성(僞姓) 129) 을 멸망시키고 진성(眞姓) 130) 을 회복시켜 능히 종사(宗社)를 바로잡았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국가의 실권(實權)을 잡았다고 하며, 지금은 통제군사(統諸軍事)가 되어 군사를 기르[養兵]고 가만히 지키고 있으면서 간웅(奸雄)을 진압 굴복시키고 외구(外寇)를 몰래 소멸시켰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군자(軍資)를 소모시켰다 하여 물의(物議)가 분분(紛紛)하니, 변명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신은 세 가지의 불행한 일이 있으니, 공(功)은 작은데 상(賞)은 커서 남에게 꺼린 바가 된 것이 그 한 가지 불행한 일이요, 사직(社稷)을 보전하고 정통(正統)을 회복하고 도적을 금지시킨 등의 일에 조그마한 도움이 없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은총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이 그 두 가지 불행한 일이요, 예로부터 공과(功過)는 서로 가리워질 수가 없는데, 고집이 세고 명민(明敏)하지 못하여 용기 있게 물러가지 못한 것이 그 세 가지 불행한 일입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게 되매 진실로 황공합니다. 이윤(伊尹)은 말하기를, ‘신하는 총리(寵利)로써 성공한 후 관직에 있지 말라.’고 하였으며, 채택(蔡澤)은 말하기를, ‘사시(四時)의 운행하는 차례에 성공한 것은 가버린다.’ 하였으니, 이것은 곧 자연의 이치입니다. 신은 마땅히 오랫동안 현인의 등용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될 것이므로, 바라옵건대, 전리(田里)에 돌아가서 여생(餘生)을 보전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공신(功臣)을 보전시켜 준 덕으로 유독 광무제(光武帝)에게만 혼자 칭찬 듣게 하지 마옵소서.” 왕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였다. “대신(大臣)의 한 몸은 국가의 흥함과 쇠함에 관계되고, 백성의 기쁨과 근심이 매여 있는 바, 직임(職任)이 이처럼 무거우니 거취(去就)를 가벼이 할 수가 없소. 이로써 소공(召公)이 돌아갈 것을 고(告)하려는 마음이 있고, 주공(周公)은 임금을 후하게 보좌하는 의리가 있었소. 경(卿)은 산천(山川)의 기운을 타고난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요, 사직의 원훈(元勳)이 되는 신하이오. 국사를 위하여 사사(私事)를 잊으니 충성이 해를 꿰뚫고, 대의(大義)에 의지하여 신의(信義)에 편안하니 공업(功業)은 하늘을 떠받들었소. 이에 선왕(先王)의 때부터 과인(寡人)의 때에 이르기까지 그대의 힘을 내어 우리 나라를 안녕하게 하였소. 무진년의 중국을 침범하는 군사를 저지시키고 기사년의 난리를 평정하는 계책을 정했으니, 국운(國運)이 이로써 다시 이어졌으며, 백성이 이로 말미암아 다시 소생되었소. 또 그 군병(軍兵)을 훈련 양성하여 국가를 방위했으니, 일이 모두 천리에 합하는데, 마음이 어찌 남의 말을 돌보겠는가? 은총의 지위에 있기를 놀란 것과 같이 하니, 경의 자기 처신은 잘하지마는, 모의를 합하고 정사를 같이 하는데 나의 맡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아아! 엄자릉(嚴子陵)의 고절(高節)은 광무제(光武帝)가 일로써 맡기지 않았으며, 유후(留侯) 131) 의 가버림에 한(漢)나라가 그 편안함을 이루었으나, 옛일로써 지금의 일을 비교하건대 형세가 다르고 일이 다르니, 마땅히 그 직위에 안정하여 나의 마음에 부합(副合)하게 하오.” --------------------------------------------------------------------- [註 125] 구순(寇恂)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신(名臣). ☞ [註 126] 등우(鄧禹)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신(名臣). ☞ [註 127] 엄자릉(嚴子陵) : 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의 자(字). 어릴 때 광무제(光武帝)의 친구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변성명(變姓名)하고 숨어 사는 것을, 광무제가 찾아 간의 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隱居)하였음. ☞ [註 128]가성(假姓) : 신우(辛禑). ☞ [註 129]위성(僞姓) : 신씨(辛氏). ☞ [註 130]진성(眞姓) : 왕씨(王氏). ☞ [註 131] 유후(留侯) : 장양(張良). ☞
◈ 태조 1권 총서 118번째기사 사직을 청하는 태조의 전문과 윤허치 않는 비답이 오가다 6월, 대간(大諫)이 상언(上言)하기를, “우현보(禹玄寶)는 죄가 이색(李穡)과 같은데, 지금 이색이 이미 폄직(貶職)되었으니 마땅히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소(疏)가 무릇 세 번 올라갔으나 모두 전중(殿中)에 머물러 두었다. 우리 전하(殿下) 132) 가 이때 우대언(右代言)이 되었는데, 공양왕이 명하여 태조의 저택(邸宅)에 보내어 대간(臺諫)을 금지시키도록 청하니, 태조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일찍이 내가 대간(臺諫)을 사주했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다. 드디어 전문(箋文)을 올려 사직(辭職)하기를, “모든 정치가 잘되는 것은 명철한 군주가 재상을 선임(選任)하는 데 있고, 온갖 책임[百責]의 모이는 바는 마땅히 수효만 채우는 신하가 현인(賢人)을 추천해야 되니, 진실로 의(義)를 잊고 영화만 좋아한다면, 이것은 사정(私情)을 위하여 덕(德)에 누(累)가 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신은 기국(器局)은 작은데 책임은 크니, 일은 정리되는데도 비방은 일어납니다. 비록 관중(管仲) 133) 처럼 신임을 얻어 정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더라도, 증서(曾西) 134) 취(取)하지 않는 바가 될까 두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얕은 정성을 다하여 다시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합니다. 3월에 신에게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두 번째 제수하시니, 은총(恩寵)이 후(厚)하시어 청의(淸議)에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다. 잘못 윤허된 하교를 받들때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실로 깊었사오며, 더욱이 관직을 비워둔 비난[曠職之譏]을 끼치게 되매 두려움과 근심이 더욱 무거웠습니다. 하물며, 본디부터 병이 있으며, 또 마땅히 영만(盈滿)을 경계해야 하니, 만물의 생성(生成)을 관찰해보면, 사시(四時)가 차례를 번갈아 하는데서 유래(由來)된 것을 알았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시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베푸시어, 신의 지극한 정을 불쌍히 여기시와, 신의 사직(辭職)을 허락하신다면, 신은 삼가 한적한 곳에서 병을 휴양하여 중흥(中興)의 공(功)을 길이 보전하고, 분수를 지키고 마음을 편안히 하여 상수(上壽)의 축원을 항상 바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좌대언(左代言) 이첨(李簷)을 명하여 가서 유지(諭旨)하게 하고, 이내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한 나라의 편안함과 위태함은 매인 바가 중대하니, 대신(大臣)의 거취(去就)는 경솔히 할 수가 없소. 어찌 영만(盈滿)을 경계하는 데만 절개를 힘써서, 몸을 보전하여 물러가기를 원하고자 하는가? 경(卿)은 산천(山川)의 정기를 타고난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요, 일월(日月)같은 고충(孤忠)으로서,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국가가 다시 편안해지고, 명분을 바로잡아 계책을 정했으니 신(神)과 사람이 곧 기뻐하였소. 이 새로 건국(建國)한 시기에 이르러 경에게 임금을 보좌하는 재간에 폐를 끼쳐, 바야흐로 정사를 함께 하여 태평을 이루려고 하는데, 어찌 사직(辭職)을 핑계하면서 면(免)하기를 도모하는가? 비방이 일어나면 도리로써 풀게 할 것이며, 병이 심하면 마땅히 의술(醫術)로써 다스리게 할 것이니, 직위를 내놓아 편안하게 거처할 필요가 없이 능히 정신을 즐겁게 하여 잘 보전할 것이오. 이미 세 번이나 사양했으니 다만 조금 안정하기를 바라오.” 하였다. 태조는 아뢰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신(臣)으로 하여금 함께 모의하게 하고, 변경(邊境)에 급한 일이 있으면 신(臣)으로 하여금 외모(外侮)를 막게 하여, 신(臣)의 할 수 있는 일로써 책임지운다면, 신이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지금 신이, 임무는 크고 직책은 무거워서 이미 능히 감내하지 못하였는데도, 게다가 병이 번갈아 침노하오니, 원컨대, 의약(醫藥)을 써서 스스로 보양(保養)하겠습니다.” 하였으나, 공양왕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강제로 일어나게 하니, 태조는 사양하고 나가지 아니하고는, 또 전문(箋文)을 올리기를, “신(臣)이 무진년에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켜 위성(僞姓)을 폐위하고 진성(眞姓)을 세웠으나,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의 시기함을 입었습니다. 또 창(昌)을 세우고 우(禑)를 맞이할 적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가 함께 모의 한 것이 증험이 이미 명백한 까닭으로, 대간(臺諫)이 자기들끼리 소(疏)를 올려 죄주기를 청하였을 뿐인데, 신이 어찌 감히 사주하였겠습니까? 지금 신에게 명하여 대간을 금지시키게 하니, 이것은 신이 대간을 사주시켰는가 의심하는 일입니다. 신은 재주가 없는 사람이므로 큰 임무를 감당하는 데 적합하지 못하오니, 마땅히 현량(賢良)을 뽑아 신을 대신하게 하소서.” 하매, 공양왕이 전문(箋文)을 보고 우리 전하(殿下) 135) 에게 이르기를, “시중(侍中)의 전문(箋文) 가운데서 진술한 것은 모두가 나의 생각 밖에 나왔다. 내가 무능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왕위에 있는 것은 오직 시중(侍中)의 추대(推戴)하는 힘만을 믿을 뿐이므로, 시중(侍中)을 존경하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는데, 시중께서 어찌 나를 저버리겠는가? 창(昌)을 세우고 우(禑)를 맞이할 적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가 함께 모의한 사람들은, 이미 전년(前年)에 의논하여 정적(情迹)이 명백하지 않다고 하여서 특별히 이들을 사죄(赦罪)했으며, 시중도 또한 그렇게 여겼던 것인데, 지금 대간이 다시 사죄(赦罪) 전의 일을 들어서 죄주기를 청하는 까닭으로, 경(卿)으로 하여금 시중에게 고(告)하여, 시중이 만약 대간을 보게 되면 이 뜻으로 개유(開諭)하기를 청할 뿐이니, 경이 시중에게 어떻다고 말하였기에, 시중이 굳게 사퇴하고자 하겠는가. 만약 시중이 사직한다면, 내가 또한 어찌 감히 이 자리에 편안히 있겠는가.” 하면서, 이내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가리키면서 맹세하였는데, 말의 취지가 매우 간절하였다. 곧 우리 전하로 하여금 가서 관직에 나아오도록 개유하게 하였으나, 태조는 끝내 정사를 보지 아니하였다. ---------------------------------------------------------------------- [註 132]전하(殿下) : 태종(太宗). ☞ [註 133] 관중(管仲) : 춘추 시대 제환공(齊桓公)의 현상(賢相). ☞ [註 134] 증서(曾西) :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증자(曾子)의 손자. ☞ [註 135]전하(殿下) : 태종(太宗). ☞
◈ 태조 1권 총서 119번째기사 공양왕이 대간에게 우현보의 죄를 논하지 말도록 하다 공양왕이 또 대간(臺諫)에게 개유(開諭)하기를, “우현보(禹玄寶)의 죄상은 애매하고, 게다가 사죄(赦罪) 전에 있으니, 다시 청죄(請罪)하지 말라.” 하고, 사순(司楯) 황운기(黃雲起)로 하여금 태조를 부르게 하니, 태조는 병으로써 능히 조회하지 못하였다. 운기(雲起)가 태조에게 강제로 조회하게 하니, 태조가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신(臣)이 병으로써 능히 조회하지 못하온데, 지금 운기가 신을 강제로 조회하게 하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며, 황공하여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매, 공양왕이 노하여 운기를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었다.
◈ 태조 1권 총서 120번째기사 태조를 참소하는 말이 돌자 정도전 등과 거취를 논의하다 태조가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조인옥(趙仁沃)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卿) 등과 함께 왕실(王室)에 있는 힘껏 협력하였는데도 참소하는 말이 자주 일어나니, 우리들이 용납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내가 마땅히 동쪽으로 돌아가서 이를 피하겠다.” 하면서, 먼저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행장을 재촉하여 장차 떠나려 하니, 도전(道傳) 등이 말하기를, “공(公)의 한 몸은 종사(宗社)와 백성이 매여 있으니, 어찌 그 거취(去就)를 경솔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실(王室)에 남아 도와서 현인(賢人)을 등용시키고, 불초(不肖)한 사람을 물리쳐서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는 것만 같지 못하니, 그렇게 하면 참소하는 말이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지금 만약 한 모퉁이에 물러가 있게 된다면, 참소하는 말이 더욱 불처럼 일어나서 재화(災禍)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옛날에 장자방(張子房) 136) 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르겠다고 하니, 고조(高祖)가 이를 죄주지 않았는데, 나의 마음은 다른 뜻이 없으니, 왕이 어찌 나에게 죄주겠는가?” 하였다. 서로 더불어 의논했으나 결정이 나지 않으니, 가신(家臣) 김지경(金之景)이 강비(康妃)에게 사뢰기를,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 등이 공(公)을 권고하여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니, 일이 장차 그릇될 것입니다. 이 두서너 사람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강비가 그 말을 믿고 우리 전하(殿下)에게 알리기를,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모두 믿을 수가 없소.” 하니, 대답하기를, “공(公)이 참소하는 말에 시달려 물러가실 뜻이 있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은 이해(利害) 문제를 힘써 진술하여 그 가시는 것을 중지시킨 사람입니다.” 하므로, 이에 지경(之景)을 책망하였다. “그 두서너 사람은 공(公)과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한 사람이니 너는 다시 말하지 마라.” ----------------------------------------------------------------------- [註 136] 장자방(張子房) : 장양(張良). ☞
◈ 태조 1권 총서 121번째기사 공양왕이 태조의 집에 가서 연회를 즐기다 7월, 공양왕이 태조의 사제(私第)에 거둥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음악을 베풀어 놀다가 밤중이 되어 그치었다.
◈ 태조 1권 총서 122번째기사 태조가 공양왕과 술을 마신 후 마음대로 궁궐의 문을 열고 나가다 태조가 강비(康妃)와 더불어 공양왕에게 나아가 술잔을 드리니, 공양왕이 태조에게 의대(衣襨)·입자(笠子)·보영(寶纓)과 안장 갖춘 말[鞍馬]을 내리니, 태조는 즉석에서 이를 입고 배사(拜謝)하였다. 밤에 이르러 유만수(柳曼殊)가 문을 잠그니, 전하(殿下) 137) 가 몰래 태조에게 사뢰고 나가기를 청하고는, 이에 태조의 명령으로써 금직(金直) 138) 으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하고, 태조를 모시고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마상(馬上)에서 태조가 전하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갓끈은 실로 진귀한 물품인데, 내가 장차 너에게 이것을 전해 주려고 한다.” 하였다. 이튿날 왕이 노하여 금직(金直)을 가두니, 태조가 대궐에 나아가서, ‘술을 견디지 못하여 금직으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하였습니다.’ 하고 사과하매, 왕이 금직을 놓아주었다. -------------------------------------------------------------------- [註 137]전하(殿下) : 태종(太宗). ☞ [註 138]금직(金直) : 열쇠를 맡은 사람. 곧 지금의 사약(司鑰). ☞
◈ 태조 1권 총서 123번째기사 태조를 판문하부사로 삼다 9월, 태조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삼았다.
◈ 태조 1권 총서 124번째기사 이색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태조를 사저에서 만나다 11월, 이색(李穡)이 왕의 부름을 받고 폄소(貶所)로부터 서울로 돌아와서 태조를 사제(私第)에서 뵈오니, 태조는 몹시 기뻐하여 그를 윗자리에 맞이하고 꿇어앉아 술을 올리면서, 이색에게 서서 마시기를 청하니, 이색이 모두 사양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그르게 여겼다. 매우 즐기고서 파(罷)하였다.
◈ 태조 1권 총서 125번째기사 태조에게 안사 공신의 칭호를 더 내리다 12월, 태조에게 안사 공신(安社功臣)의 칭호를 더 내리었다.
◈ 태조 1권 총서 126번째기사 올량합과 알타리가 조회와서 다투다가 화해하다. 태조가 집에서 이들을 대접하다 올량합(兀良哈)과 알타리(斡朶里)가 와서 조회하면서 윗자리를 서로 다투니, 알타리는 말하기를, “우리들의 온 것은 윗자리를 다투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시중(侍中) 윤관(尹瓘)이 우리 땅을 평정하고 비석을 세워 ‘고려지경(高麗地境)’이라 했는데, 그 지경 안의 인민들이 모두 제군사(諸軍事) 139) 의 위엄과 신의(信義)를 사모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면서, 마침내 윗자리를 다투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올량합과 알타리를 저택(邸宅)에서 대접하였으니, 그들이 성심으로 복종한 때문이었다. -------------------------------------------------------------------- [註 139]제군사(諸軍事) : 태조. ☞
◈ 태조 1권 총서 127번째기사 술에 취해 공양왕에게 예절을 갖추지 않은 밀직사 이염을 귀양보내다 공양왕 4년(1392) 임신 정월, 밀직사(密直使) 이염(李恬)이 술에 취하여 왕에게 예절을 차리지 않으니, 간관(諫官)이 극형(極刑)에 처하기를 청하매, 태조가 아뢰기를, “이염이 비록 죄가 있지마는 그 말이 미친듯이 망령되나 강직한 것에서 나왔으니, 이를 용서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마침내 곤장을 쳐서 귀양보내었다.
◈ 태조 1권 총서 128번째기사 공양왕과 권문 세족이 태조를 꺼려하다 태조가 공(功)이 높고 또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으니, 공양왕이 이를 꺼렸으며, 또 구가세족(舊家世族)들은 사전(私田)을 혁파(革罷)한 것을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공양왕이 태조를 꺼려하는 것을 알고서는 온갖 방법으로 무함하고 훼방하였다. 우(禑)·창(昌)의 당(黨)이 왕실(王室)에 인척(姻戚) 관계를 맺어 조석으로 참소하니, 공양왕이 도리어 참소하는 말을 믿고 밤낮으로 좌우(左右)의 신하와 더불어 몰래 태조를 제거하려고 도모하였다. 태조의 휘하 인사(人士)가 그 소위(所爲)에 분개하여, 글을 올려 그 무망(誣妄)함을 변명하고자 하여 글이 이루어졌으나 올리지 못했는데, 태조의 서형(庶兄)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중간에 서서 변고를 관망하다가, 공양왕이 시기하여 싫어함이 이미 극도에 달한 것을 알고는,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평소부터 공양왕의 사위인 익천군(益川君) 왕즙(王緝)과 동경계(同庚契) 140) 를 맺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휘하 인사(人士)가 만든 글로써 왕즙에게 알려 훗날의 터전을 삼으려고 하였으니, 이 까닭으로 공양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조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경(卿)의 휘하 인사(人士)가 글을 만들어 우현보(禹玄寶) 등을 논죄(論罪)하고자 한다 하니, 경도 또한 알고 있는가?” 하니, 태조는 몹시 놀라면서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물러나와서 휘하의 인사를 불러 보고는 그 사정을 알고 이를 중지시켰다.
[註 140]동경계(同庚契) : 동갑계(同甲契). ☞
◈ 태조 1권 총서 129번째기사 세자가 명에서 돌아오다. 정몽주가 태조를 견제하기 위해 태조의 측근을 탄핵하다 3월, 세자(世子) 석(奭)이 중국에 조현(朝見)하고 돌아오니, 태조가 황주(黃州)에 나가서 맞이하고, 드디어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장차 길을 떠나려 하매 무당 방올(方兀)이 강비(康妃)에게 말하기를, “공(公)의 이번 행차는, 비유하건대, 사람이 백척(百尺)의 높은 다락[樓]에 오르다가 실족(失足)하여 떨어져서 거의 땅에 이르매, 만인(萬人)이 모여서 받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강비가 매우 근심하였다. 태조가 활을 쏘아 사냥하면서 새를 쫓다가, 말이 진창에 빠져 넘어졌으므로 드디어 떨어져 몸을 다쳐, 교자(轎子)를 타고 돌아왔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연달아 보내어 문병(問病)하였다. 처음에 정몽주(鄭夢周)가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조정과 민간이 진심으로 붙좇음을 꺼려하였는데, 태조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는 기색이 있으면서 기회를 타서 태조를 제거하고자 하여,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말하기를, “먼저 그의 보좌역(補佐役)인 조준(趙浚) 등을 제거한 후에 그를 도모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태조의 친근하고 신임이 있는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준(趙浚)·전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전 판서(判書) 윤소종(尹紹宗)·전 판사(判事) 남재(南在)·청주 목사(淸州牧使) 조박(趙璞)을 탄핵하니, 공양왕이 그 글을 도당(都堂) 141) 에 내렸다. 몽주(夢周)가 중간에서 이를 선동(煽動)하여 조준 등 6인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그 무리 김귀련(金龜聯)·이반(李蟠) 등을 조준·정도전·남은의 귀양간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그들을 국문(鞫問)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김귀련 등이 길을 떠나려 할 적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외우(外憂)를 당하여 속촌(粟村)의 무덤 옆에서 여막(廬幕)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李濟)가 차와 과일을 준비하여 가니, 전하(殿下)가 이제에게 말하기를, “몽주는 반드시 우리 집에 이롭지 못하니, 마땅히 이를 먼저 제거해야 되겠다.” 하매, 이제는 말하기를, “예! 예!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유숙하니, 전하가 달려와서 아뢰기를, “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모함(謀陷)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태조는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마땅히 곧 서울로 들어가셔야 될 것입니다. 유숙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태조께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굳이 청한 후에야 태조가 병을 참고 밤에 행차하니, 전하가 태조를 부축하여 저택(邸宅)에 이르렀다. ------------------------------------------------------------------------- [註 141]도당(都堂)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 태조 1권 총서 130번째기사 밀직 제학 이성중이 가보인 보검을 태종에게 바치다 전하(殿下)가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에 이달충(李達衷)의 아우 밀직 제학(密直提學) 이성중(李誠中)이 그 아들 휴(携)로 하여금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금으로 장식한 보검(寶劍)을 바치게 하니, 전하가 왕비(王妃)와 더불어 앉아서 이를 받았다. 왕비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보검(寶劍)을 보낸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데?” 하였다. 이튿날 전하가 성중(誠中)의 집에 가서 사례(謝禮)하기를, “나는 유학(儒學)을 닦은 선비인데 무엇 때문에 보검(寶劍)을 보냈는가?” 하니, 성중이 대답하였다. “보검은 저의 소용이 아닙니다. 명공(明公)께서 당연히 쓸 것이기에 감히 바치는 것입니다.”
◈ 태조 1권 총서 131번째기사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정몽주(鄭夢周)가 성헌(省憲) 142) 을 사주하여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李芳果)와 아우 화(和)의 사위인 이제(李濟)와 휘하의 황희석(黃希碩)·조규(趙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 대간(臺諫)은 조준이 전하(殿下)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沮止)시켰다고 논핵(論劾)하니,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臺諫)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하여,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禍)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몽주(夢周)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상왕(上王) 143) 과 이화(李和)·이제(李濟)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道傳) 등을 국문(鞫問)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면서, 우리 전하에게 “속히 여막(廬幕)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 144) 를 마치게 하라.” 고 명하였다. 전하가 남아서 병환을 시중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하는 수 없이 나와서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邸宅)에 이르러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급히 나가서 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이 극언(極言)하기를, “백성의 이해(利害)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을 일으킴이 저와 같은데 공(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王侯)와 장상(將相)이 어찌 혈통(血統)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간절히 말하였다. 전하가 즉시 태조의 사제(私第)로 돌아와서 상왕(上王)과 이화(李和)·이제(李濟)와 의논하여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몽주를 치려고 하니, 두란(豆蘭)은 말하기를, “우리 공(公) 145) 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매, 전하는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하고는, 휘하 인사(人士) 조영규(趙英珪)를 불러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王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했으니,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나쁜 평판으로써 뒤집어 씌울 것이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휘하의 인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이씨(李氏)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은 없는가?” 하니, 영규(英珪)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영규·조영무(趙英茂)·고여(高呂)·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私第)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公)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하고는, 이에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上王)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上王)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영무가 돌아와서 전하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전하가 들어가서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전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不孝)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매, 전하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康妃)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 전하는, “마땅히 휘하의 인사를 모아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待備)해야 되겠다.” 하면서, 즉시 장사길(張思吉) 등을 불러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빙 둘러싸고 지키게 하였다. 이튿날 태조는 마지못하여 황희석(黃希碩)을 불러 말하기를, “몽주 등이 죄인과 한편이 되어 대간(臺諫)을 몰래 꾀어서 충량(忠良)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복죄(伏罪)하여 처형(處刑)되었으니, 마땅히 조준·남은 등을 불러 와서 대간과 더불어 변명하게 할 것이다. 경(卿)이 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라.” 하니, 희석(希碩)이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여 말이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제가 곁에 있다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으므로, 희석이 대궐에 나아가서 상세히 고하니, 공양왕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탄핵을 당한 사람들과 맞서서 변명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장차 대간(臺諫)을 밖으로 내어보낼 것이니, 경(卿)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 때 태조는 노기(怒氣)로 인하여 병이 대단하여,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하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다.” 하고는, 비밀히 이자분(李子芬)을 보내어 조준·남은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할 의사로써 개유(開諭)하고, 또 상왕(上王)과 이화·이제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상왕을 보내어 공양왕에게 아뢰기를, “만약 몽주의 무리를 문죄(問罪)하지 않는다면 신(臣) 등을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공양왕이 마지못하여 대간(臺諫)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외방(外方)에 귀양보내야 될 것이나, 국문(鞫問)할 필요가 없다.” 하더니, 조금 후에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克廉)·문하 평리(門下評理) 김주(金湊)·동순군 제조(同巡軍提調) 김사형(金士衡) 등에게 명하여 대간을 국문하게 하니,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말하기를, “몽주·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가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조호(趙瑚)를 보내어 신(臣) 등에게 이르기를, ‘판문하(判門下) 이성계(李成桂)가 공(功)을 믿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다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보좌역(補佐役)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숭인·이종학·조호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조금 후에 김진양과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우간의(右諫議) 이내(李來)·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우헌납(右獻納) 권홍(權弘)·사헌 집의(司憲執義) 정희(鄭熙)와 장령(掌令) 김묘(金畝)·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이신(李申)과 이숭인·이종학을 먼저 먼 지방에 귀양보냈다. 형률(刑律)을 다스리는 사람이 말하기를, “김진양 등의 죄는 참형(斬刑)에 해당합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진양 등은 몽주의 사주(使嗾)를 받았을 뿐이니, 어찌 함부로 형벌을 쓰겠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호되게 곤장을 쳐야 될 것입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이미 이들을 용서했는데 어찌 곤장을 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진양 등이 이로 말미암아 형벌을 면하게 되었다. --------------------------------------------------------------------- [註 142]성헌(省憲) : 대간(臺諫). ☞ [註 143]상왕(上王) : 정종(定宗). ☞ [註 144]대사(大事) : 상사(喪事). ☞ [註 145]공(公) : 태조. ☞
◈ 태조 1권 총서 132번째기사 조준 등을 소환하고 태조를 문하 시중으로 임명하다 조준 등을 소환(召還)하고, 태조를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삼으니, 태조가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태조 1권 총서 133번째기사 공양왕이 태조의 집에 가서 위문하다. 조인옥 등 52명이 태조를 추대하기로 결정하다 6월, 공양왕이 태조의 사제(私第)에 거둥하여 병을 위문하였다. 남은(南誾)이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이킨 때로부터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비밀히 태조를 추대하기로 의논하였는데, 돌아온 후에 전하(殿下)에게 알리니, 전하가 말하기를, “이것은 대사(大事)이니 경솔히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투어 서로 추대하려고 하여, 혹은 빽빽하게 모인 많은 사람이 있는 중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소속된 데가 있는데, 어찌 빨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하가 이에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했는데, 남은이 비밀히 평소부터 서로 진심으로 붙좇은 조준·정도전·조인옥·조박(趙璞) 등 52인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하기를 모의했지만, 그러나, 태조의 진노(震怒)를 두려워하여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들어가서 강비(康妃)에게 고하여 태조에게 전달되도록 하였으나, 강비도 또한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남은 등에게 일렀다. “마땅히 즉시 의식(儀式)을 갖추어 왕위에 오르심을 권고해야 될 것이다.”
◈ 태조 1권 총서 134번째기사 공양왕이 태종과 사예 조용을 시켜 태조와의 맹약을 위한 초안을 잡게 하다 처음에 공양왕이 전하(殿下)와 사예(司藝) 조용(趙庸)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장차 이 시중(李侍中) 146) 과 더불어 동맹(同盟)하려고 하니, 경(卿) 등이 내 말로써 나아가 시중에게 전하고, 시중의 말을 듣고서 맹서(盟書)를 초하여 오라.” 하고, 또 말하기를, “반드시 고사(故事)가 있을 것이다.” 하니, 조용이 대답하기를, “맹세는 족(足)히 귀한 것이 아니며, 성인(聖人)이 싫어하는 바입니다. 열국(列國)의 동맹(同盟) 같은 것은 옛날에 있었으나,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는 것은 경적(經籍)의 고사(故事)에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공양왕이 말하기를, “다만 이를 초잡으라.” 하매, 조용이 전하와 함께 태조에게 나아가서 왕의 명령대로 전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네가 마땅히 임금의 명령으로써 글의 초를 잡으라.” 하였다. 조용이 물러가서 초를 잡기를, “경(卿)이 있지 않았으면 내가 어찌 이에 이르겠는가? 경의 공과 덕을 내가 감히 잊겠는가. 황천(皇天) 147) 과 후토(后土) 148) 가 위에 있고 곁에 있으니, 대대로 자손들은 서로 해치지 말 것이다. 내가 경에게 믿음이 있는 것은, 이같은 맹약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조용이 전하와 함께 초잡은 것을 공양왕에게 바치니, 공양왕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조용이 이때 사관(史官)을 겸직하였는데, 글을 쓰기를, “임금이 시중(侍中) 149) 에게 자기를 도와 왕으로 세운 공도 보답하지 못했는데, 도리어 해칠 마음이 이미 싹텄으니, 천명(天命)이 이미 가버리고 인심(人心)이 이미 떠났으므로, 구구(區區)한 맹약(盟約)은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하였다. ---------------------------------------------------------------------- [註 146] 이 시중(李侍中) : 태조. ☞ [註 147]황천(皇天) : 천신(天神). ☞ [註 148]후토(后土) : 지기(地祇). ☞ [註 149]시중(侍中) : 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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