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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필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답사기를 써봤습니다. 느낌보다는 흐름대로 써내려가는 것도 추억을 되살릴 좋은 방안이라 생각되어 이 방법을 선택했는데 좀 길어졌습니다. 양해하세요. 앞으로 계속 연재하겠습니다.
우리는 전사(戰士)다
1.프롤로그
올해는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책도 읽고, 여행도하면서 돌아보기도 하고 멀리 내다보고도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다른 해보다도 더 바빠졌다.
밀린 글도 많아서 글을 쓰랴, 강의하랴, 조사하랴 동분서주하다 방학을 맞았다.
이제는 정말 쉬고 싶었다.
팍팍 에너지 좀 충전하고 싶은 욕구가 가슴을 쳤다.
내 입으로 하는 내용 없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해 듣는 신선한 이야기가 그리웠다.
그러던 차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주 신흥무관학교설립 100주년 기념 동북지역 답사를 한다고 하였다.
그래 여기 좋겠다!
급히 양식을 다운받아 신청서를 작성했다.
신청서에는 ‘평택은 이회영, 이시영 형제들의 뿌리가 있는 곳’이어서 평택지역사연구가로 반드시 답사해야 하는 곳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명분이 있어 당연히 되겠지 싶었는데 며칠 후 휴대폰 문자에는 ‘다음 기회에 모시겠습니다’라는 내용이 찍혀 있었다.
‘다음 기회라고, 민족문제연구소 없으면 만주답사 못할 줄 알아!’
혼자 궁시렁대며 며칠을 보내는데 ‘자리가 하나 비었으니 함께 할 생각이 있냐’며 다시 연락이 왔다.
속으로는 반가웠지만 얼른 대답하기가 자존심 상해서, 다른 단체에 신청했는데 취소 가능한지 알아보고 연락주겠다며 뭉겼다.
2.낮선 것들과의 대화
역사교사 23년 동안 독립운동사는 목의 가시였다.
도대체 모호한 모순덩어리를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난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출발하기 전에 사전 학습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기회에 ‘독립운동사’라는 편두통을 말끔히 씻어보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7월은 그리 한가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참아주었던 안성시사편찬위원회에서도 빨리 원고마감을 하라며 독촉하였다.
연재 중이던 평택자치신문도 마음에 걸렸다.
‘옛길’에 관한 다큐를 찍자는 방송국의 제안까지 답사 후로 미뤘다.
그렇게 19일 새벽이 밝았다.
여행은 ‘낮섬’과의 대화이다.
새벽버스를 타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처음 대하는 인천공항은 낮선 것 투성이였다.
집합장소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함께 할 사람들을 관찰하며 방학진 국장을 찾아 눈도장을 찍었다.
비행기여행은 19년 전 신혼여행 후 처음이다.
2008년 해상왕장보고 중국답사는 인천에서 배를 탔다.
인천공항은 넓고 북적대기는 했지만 탑승절차는 김포공항에 비해 간소화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여행이 낮설었던 1980년대처럼 출국하는 한 사람을 수 십 명이 배웅하는 장면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 한동안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카메라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찍어 아들에게도 보여주고 개학 후 우리학교 아이들에게도 보여주자고 마음먹었다.
잠시 후 기내식을 먹을 때쯤에야 옆자리 선생님들과 통성명을 하고 맥주도 한 잔 하였다.
그렇게 낮선 것들과 화해하였다.
3.중국음식은 이상하다!
장춘공항 상공에서 만주와 해후하였다.
산동과 만주는 풍경은 비슷하였지만 느낌은 사뭇 달랐다.
신흥무관학교, 독립, 민족해방, 투사 그리고 고조선과 고구려, 조선족.... 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며 12시 조금 넘어 장춘공항에 발을 디뎠다.
중국에는 한족을 제외한 55개의 소수민족과 24개의 성이 있고, 4개의 소수민족 자치구가 있다.
장춘은 옛 부여의 수도였고, 길림성의 성도다.
과거 만주국 시절의 수도였고, 만주군벌 장작림의 거주지며, 일제강점기 관동군 사령부가 주둔했던 도시다.
길림성은 조선족 자치구다.
조선족은 대부분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동북삼성지역에 정착했다.
역사는 짧지만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조선족의 위상은 높은 편이라고 한다.
조선족의 위상은 일제강점기 혁명의 파트너였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정부도 팽덕회, 김무정, 김두봉 등 중국 사회주의혁명에 목숨을 나눴던 동지들의 민족을 홀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행은 볼거리, 먹거리, 잠자리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가장 즐겁다.
하지만 나에게 중국음식은 절대 아니다.
중국음식은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적응할 때까지 끝없는 두려움과 결단을 요구한다.
3년 전 해상왕장보고 답사 때 경험한 산동요리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야릇한 향기는 식사 때마다 거식증을 일으켰다.
그 때 나를 구해준 것이 고추장이다.
우리는 장춘 시내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공항 면세점에서 구입한 고추장을 꺼내놓았다.
헌데 장춘에서의 음식은 ‘중국음식은 고통스럽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분명 식재료는 크게 다르지 않는데 입 안에서는 전혀 거부음이 울리지 않았다.
허겁지겁 접시를 비우고, 요리에 곁들여 고량주를 한 잔 마셨더니 천국이 따로 없다.
4.그들은 아직도 독립투쟁을 한다
점심식사 후 오후의 주요 일정이었던 혁명열사관 답사를 취소하고 유하현으로 이동하였다.
동북삼성지역은 대부분 밭농사지역이다.
중국통이신 정소진 선생님은 동북지역 평야지대가 한반도의 1.5배에 달하는 35만㎢라고 하였다.
광활한 평야는 온통 옥수수밭 뿐이다.
가이드 말로는 중국인들은 옥수수재배와 오리를 기르고 조선족은 논농사와 닭을 많이 기른다고 하였다.
땅은 소유하지 못하고 건물의 크기까지 제한받는 중국의 농가들은 성냥갑처럼 똑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중국인의 지붕은 직선을 강조한 반면 조선인은 곡선의 미를 살렸다는 점, 그리고 고향에서의 방식을 살려 조선인들은 온돌장치를 하였다는 것뿐이다.
잘 닦여진 도로 위로 달리는 자동차들은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초등학교시절 유일하게 우리동네를 드나들었던 삼륜차, 오토바이, 자전거, 우마차, 당나귀도 거리의 주인이다.
중앙선 침범을 무시로 하고, 경음기를 마구 눌러대는 모습도 1970, 80년대를 살아온 나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타국인의 눈에는 무질서의 범람으로 느껴지지만, 중국인들은 무질서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지켜가며 잘 살아가고 있다.
유하현에서 완전중학교를 방문하였다.
완전중학교는 유하현 유일의 조선족 학교다.
완전중학교는 상동교회 장로 방기전이 삼원포에 세운 은양학교가 뿌리다.
방기전은 일제강점 후 남만주로 이주하여 이회영 형제들, 이상룡, 이동녕, 김동삼 등과 삼원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건설에 매진하였다.
은양학교는 방기전 장로의 뜻과 의지의 결실이었다.
초기 이 학교는 소학교와 2년제 중고등과를 병설하였다.
학생들은 일반교과 외에도 군사훈련, 민족의식 고취를 병행하였다.
1919년 은양학교는 부민단, 신흥무관학교와 함께 유하현 만세운동의 중심이었다.
활발한 만세운동과 민족교육으로 은양학교는 1920년 간도참변 때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방기전 목사는 일본도에 몸이 네 동강으로 잘려 순국하였고, 안동식장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스스로 무덤을 파도록 한 뒤 생매장되었으며, 두 아들도 세 동강으로 잘려 죽임을 당했다.
간도참변 후 삼원포 서문안에는 삼원포 교회 한경희 목사의 주도로 은양학교의 전통을 계승한 동명학교가 설립되었다.
동명학교는 백서농장주였으며 정의부를 이끌었던 김동삼의 영도를 받아 민족교육, 항일교육을 하였다.
완전중학교는 은양학교, 동명학교를 계승한 민족학교다.
아직도 학교 곳곳에서, 교장선생님과 교사들의 모습에서, 학생들의 말과 행동에서 100년 전통의 민족학교다운 기개가 엿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영예로운 전통을 계승하기에는 너무 벅찬 현실과의 투쟁도 병행하고 있었다.
5.답사(踏査)란 낮답사와 밤 답사가 있다!
음식은 문화다.
인간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요리를 시작하였다.
이태리요리, 프랑스요리는 절대왕정과 제국주의 침략의 산물이다.
대륙이 넓고 물산이 풍부했던 중국에서는 매우 다채로운 요리가 발달하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다채로운 요리를 요구하였던 지배층에 의해 다양한 음식문화가 발달했다고 표현해야 옳다.
동북지역 요리는 산동요리, 회양요리, 광동요리, 사천요리와 함께 중국 5대 요리의 하나다.
요령, 길림, 헤이룽강 일대에서 전승되는 요리로 식재료로 해물과 육고기를 많이 사용하고 맛이 짭짤하고 진하며 설탕과 간장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같은 음식문화는 만주벌판에서 반목반농생활을 하였던 고구려, 말갈, 거란의 전통과 잇닿아 있을 것이다.
첫날 저녁식사로 나온 양구이 요리는 5일동안 먹었던 모든 요리의 최고봉이었다.
유목민의 생활방식대로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 위에 고기를 매달아 양념을 뿌려가며 몇 시간을 구원 낸 양고기는, 노릇하고 바삭하며 부드러운 것이 눈맛과 입맛을 모두 만족시켰다.
유하현 유일의 호텔인 유하현빈관은 소박하고 정갈했다.
호텔로 입성하기 전 박한용 실장은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며 밤답사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첫날밤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골몰하던 참이어서 박실장의 제안은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웠다.
객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는 데 전화벨이 울렸다.
시내로 나가서 술 한 잔 할 사람은 로비로 모이라는 전갈이었다.
아, 비로소 밤 답사가 시작되는구나!
기대를 안고 로비로 나갔더니 20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나중에 듣기로는 술을 즐기는 쪽은 박실장님 방으로 향하고, 술보다는 사람과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만 밖으로 나갔다고 하였다.
우리 일행은 유하현 시내 한복판의 양꼬치구이집으로 들어갔다.
거리에는 더위에 지친 중국인들이 웃통을 벗어제낀 채 삼삼오오 가게 앞을 차지하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도 중국인들처럼 가게 밖에 술상을 차렸다.
모처럼 단체손님을 맞은 주인은 안과 밖을 바삐 오가며 시중들기에 바빴다.
잠시 후 하얼빈 맥주, 칭따오 맥주와 함께 십여 가지의 꼬치안주들이 나왔다.
안주 가운데는 듣기만 했던 노릇하고 통통한 애벌레 구이도 있었고, 방금 잡은 흰비둘기를 구운 새구이도 있었다.
첫날이어서인지 일행들은 큰 소리로 떠들거나 열띤 토론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분사분 속내를 꺼내 놓으며 밤 답사의 여흥을 즐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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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함께 할 생각이 있으신지?' 물었을 때, 조금 더 튕기셨으면 이 답사후기 못쓸뻔 했겠네요. 신청 경쟁률이 3:1 였다는데... ^^
ㅎㅎㅎㅎ 아이구.. 저도 답사기를 쓰고 싶은데 손님 접대에 공장관리에 ... 애구 애구.. 쩝~~~ 읽기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하 ㅎㅎㅎ 제이름도 나오네요. 룰루랄라~~~~ ㅎㅎㅎㅎㅎㅎ
대가들 앞에서 주름 잡으려니 몸이 오그라듭니다 그려~~~
그 주름이 바로 대가의 주름입니다.
김선생 답사기 흥미있습니다. 되새겨보는 계기도 되구요..... 후속편 기다립니다. 이근수
열씸이 써보겠습니다.
와... 담백한 선생님의 글...좋습니다. 밤답사..ㅋㅋㅋ 재미있습니다. ㅋ
사진찍느라 고생하시고 멋진 글도 올리시고...
감사합니다....
기대만발입니다 안동 강석주
안동 꽃집 강석주님
잘 들어가셨죠?
아직도 선생님의 걸걸한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합니다.
김샘..... 답사기 잘보고 있습니다. 함께하였던 시간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던 같습니다.
동의삼창합니다
김해규 선생님 일당백이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잠든 사이에 즐거운 일들이 만발했었군요.^^
늦게서야 선생님 글 보게 되었네요. 좋은 글 읽고 많이 배우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