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광주이씨 첨지사공
 
 
 
카페 게시글
역사 연구 스크랩 광주이씨(廣州李氏)
은재 추천 0 조회 84 09.03.11 00: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주(廣州)는 경기도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으로 망명하여 회안국을  세우고 한왕이 된 마한의 일부였다. 서기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은 남한산에 이도(移都)하여 이 곳을 한성(漢城)이라 불렀고, 756년 한주로 고쳤으며, 940년에 지금의 광주(廣州)로 개칭하였다.

광주이씨(廣州李氏)시조는 신라 내물왕때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본래 칠원에 세거해온 호족의 후예로, 신라에서 벼슬을 세습해 오다가 제56대 경순왕에 이르러 신라가 망하자 이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가 회안 호장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으로 칭관하다가 940년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광주이씨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의 소목실전되어 고려말에 현달했던 현조(顯祖)를 1세조로 하여 수보(修譜)를 하게  되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빼어난 인맥을 살펴보면,
율정공파(栗亭公派)의 파시조 관의(寬義)청백리 (知)公의 맏아들로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번번이 낙방하였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

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몰두,성리학.천문.지리.역학 등에 일가를 이루었다.

1483년(성종14)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을 받아 경연에서 <대학>과<중용>을 강론하여 서거정(徐居正)은 물론 왕도 그의 고매한 품위와 박식에 탄복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율정공 관의(寬義)의 맏아들 은 성균관 사예와 집의, 사성을 역임한 후 형조참판에 올랐다. 후에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같은해 한성 판윤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북 부안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 후에 복관되어 이조판서한성 판윤, 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생원공 당(唐)을 시조로 하는 후손에서는 다섯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광주이씨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그중 둘째 아들 둔촌 집(集)
의 인맥이 가장 화려하다. 초명이 원령(元齡)인 집(集)은 1368년당시 요승(妖僧)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웃에 살고 있는 채판서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비판했다가 화를 자초하는 결과가 되어 신변에 위험을 느낀 둔촌은 노구인 아버지 당(唐)을 등에 업고 천곡 최원도가 살고있는 경북 영천으로 은거하였다.

둔촌 부자를 반갑게 맞이한 천곡 최원도는 다락방에 이들을 숨기고 4년동안 돌봐주며, 가족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하고 큰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게 하여 세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이때 천곡의 집에는 열아홉 살인 제비(燕娥)라는 여종이 있어, 한끼에 밥을 세그릇씩 먹고 방안에서 용변을 보는 상전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상전의 소행을 수상쩍게 여긴 주인마님이 이 제비라는 여종으로 하여금 염탐을 시켰다. 제비는 밥 세그릇을 상전이 다먹는 것이 아니라 벽장 속에 두사람을 숨겨두고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발견하였다. 만약에 포살령이 내려진 둔촌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양가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하기 때문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질린 여종 제비는 마님의 걱정을 덜고 또 상전의 신의와 상전 친구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하여 약을 먹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듬해 둔촌의 아버지 당이 영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천곡은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놓은 영천군 나현 모부인(母夫人) 묘 아래에다 예장을 치루었다.
1371년 신돈이 역모로 주살된 후에야 비로소 둔촌은 자유의 몸이 되어 송경 용수산 아래에 있는 현화리 옛 집으로 돌아와 살면서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어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풍애 지직(之直)의 둘째 아들로 세조때 우의정에 올랐던 인손(仁孫)의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명문의 지반을 다졌는데, 장남
극배(克培)는 성종때 좌리3등공신으로 좌참찬, 영중추부사를 거쳐 영의정에 오르고 광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평생에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특히 그는 항상 자기 가문의 세력이 너무 성해지면 망하는 이치를 강조하였으며, 두 손자의 이름을 겸(謙)공(恭)이라 지으면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도리는 이 두글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경계하였다.

광성군 극감(克堪)의 맏아들 세좌(世佐)는 성종이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던 날 형방승지로서 약을 가지고 갔었고, 그의 아들 수형, 수의, 수정, 3형제가 이조와 홍문관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간신 임사홍과 류자광이 연산군을 충동하여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어느날 임금과 신하들이 즐기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연산군이 재상들에게 술을 돌려 주었다. 다른 재상들은 모두 받아 마셨는데, 세좌는 끝의 술잔을 받아서 마시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튿날 연산군은 신하가 임금이 주는 술을 받아서 마시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하고, 또 남은 술방울을 임금의 옷자락에 흘린 것은 불경죄이니 세좌를 옥에 가두라고 하명하였으며, 그의 아들, 손자들과 설날 그의 집에 세배갔던 이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세좌의 손자 연경(延慶)은 세좌가 북방변지로 귀양갔을 때 모시고 다니며 모든 험난한 일을 다 겪었다. 그후 조부와 숙부가 모두 화를 입었다.

수정의 아들 준경(浚慶)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신승연과 황효헌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31년 문과에 급제했고, 여러 관청의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558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윤경의 아들중열(中悅)은 명종때 을사사화에 연루된 친구 이휘를 변호하다가 갑산에 유배, 사사되었다.

광주이씨의 화려한 인맥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거목인 한음덕형(德馨)좌의정 극균의 현손으로 지중추부사에 오른 민성(民聖)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덕형은 31세 때 학자 관직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대제학에 올랐다. 초탁(招擢)되었다. 광해군때 영의정으로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했다가 삭직되고 양근(陽根)으로 내려가 53세로 생을 마쳤다.

어렸을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혼조삼리(昏朝三李)]라 하여 이항복 이원익과 더불어 당대의 명신이었다.

광주이씨의 또 다른 인맥으로는 지군사공 희령(希齡)과 집의 둘째아들 지강(之剛)한성부윤을 지내고 의정부 참찬 겸 대사헌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지유(之柔)성주목사를 역임했다.

한편 고려 말에 형조 우참의를 역임하며 강직한 충절로 이름이 높았던 양중(養中)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며, 후에 남한산 밑으로 퇴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동생인 암탄공 양몽(養蒙)은 자손들에게 조선조에 불사(不仕)하기를 유언했고, 지금의 서울시 고덕동은 양중과 양몽이 절의를 지켰던 고덕(高德)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그 밖의 인물로는 효행과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필성(必成)과 조선조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던 휴징(休徵)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성리학에 정통했던 극기(克基)의 아들은(誾)은 학자로 영광의 보촌우에  배향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이씨(廣州李氏)는 남한에 총 33,816가구, 141,8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무갑리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전북 고창군 해리면 기반리

경남 창녕군 계성면 신당리

전남 보성군 전역

경남 하동군 화개면 삼신리

경북 칠곡군 전역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양곡리

평북 의주군 옥당면 당목동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