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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404년을 기념하여 조선통신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옛길을 한일 양국 민간인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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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우정걷기]는 약 400여년 전 우리의 옛 조상들이 한ㆍ일 선린우호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그 숭고한 정신과 문화적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ㆍ일 민간차원에서 조선통신사 옛길을 답사하여 21세기 한ㆍ일 우호관계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친선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사)한국체육진흥회 (한국걷기연맹)와 (사)일본걷기협회가 공동으로 1607년 조선통신사를 파견한지 400년을 맞는 2007년, 2009년에 이에 3번째로 오는 2013년 4월1일부터 [제4차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우정걷기]를 실시하여 걷기문화를 문화적 유산에 결합하여 더욱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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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적 | |
구분 |
안내사항 |
목 적 |
[제4차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우정걷기]는 약 400여년 전 우리의 옛 조상들이 한ㆍ일 선린우호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그 숭고한 정신과 문화적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ㆍ일 민간차원에서 조선통신사 옛길을 답사하여 21세기 한ㆍ일 우호관계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친선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사)한국체육진흥회(한국걷기연맹)와 (사)일본걷기협회가 공동으로 1607년 조선통신사를 파견한지 400년을 맞는 2007년에 이에 3번째로 오는 2011년 4월1일부터 [제4차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우정걷기]를 실시하여 걷기문화를 문화적 유산에 결합하여 더욱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
☞ 기본현황 | |
구분 |
안내사항 |
일 정 |
☞ 서울에서 부산까지 : 524 Km |
☞ 부산에서 일본 동경까지 : 633 Km | |
걷기구간 |
서울 경북궁 → 광화문 → 양재 → 판교 → 용인 → 양지 → 죽산 → 충주 → 수안보 → |
참가대상 |
남녀 구별 없이 신체건강한 사람 누구나 |
공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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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내용 |
1. 참가자 전원에게 국제시민스포츠연맹. 한국걷기연맹 완보증 및 구간 완보증 수여 |
참가자혜택 |
지속적으로 각종 걷기정보 및 걷기대회 정보제공 및 추후 걷기지도자 강습회 참가비 할인 혜택 |
주 최 |
일본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 |
주 관 |
21세기 조선통신사 한일우정걷기회 |
후 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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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후원 |
부산일보, 국제신문, 경남도민일보, 경북일보, 경상일보, 양산시민신문 |
지방자치단체 |
용인시, 충주시, 문경시, 예천군, 안동시, 군위군, 의성군, 경주시, 양산시, 부산동래구청 등 |
협 조 |
구간 지역내 지방자치단체, 경찰서, 보건소, 언론사 등 |
참 여 |
한국체육진흥회 경북지부, 대구지부, 부산지부, 한국청소년화랑단, 한국노르딕워킹연맹 |
공식협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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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 재 |
동아일보사, 아사히신문사, 일본NHK, 재일민단신문, 기타 지역 신문 및 방송사 |
참가문의 |
☞ 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 [21세기 조선통신사 한일우정걷기회] 사무국 |
☞ 한국청소년화랑단 www.ihwarang.or.kr |
구분 |
안내사항 | ||||||||||||||
참가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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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방법 |
1. (사)한국체육진흥회 www.walking.or.kr 조선통신사 한일우정걷기회 사무국, | ||||||||||||||
참가방법 |
참가 구분 |
참가 구간 |
참가일시 |
참가방법 | |||||||||||
한국→일본 전구간 참가 |
서울→일본 동경 |
4.1∼5.20 |
- 신청서 작성 | ||||||||||||
국내 전구간 참가 |
서울→부산 |
4.1∼20 |
- 신청서 작성 | ||||||||||||
국내 일부 구간 참가 |
서울→부산 구간중 일부 구간 |
자유 |
- 신청서 작성 후 구간 선정 | ||||||||||||
1일 이상 단기간 참가 |
서울→부산 구간중 자유 선택 |
자유 |
- 신청서 작성 후 구간 선정 | ||||||||||||
일본 전구간 참가 |
일본 전구간 |
4.22∼5.20 |
- 신청서 작성 | ||||||||||||
신청기간 |
수시 참가자 모집 | ||||||||||||||
구간안내 |
(사)한국체육진흥회 및 한국청소년화랑단 홈페이지에 구간 안내 참고 | ||||||||||||||
활동안내 |
1.(사)한국체육진흥회 및 한국청소년화랑단 홈페이지를 통해 매일매일 걷기소식 소개 |
☞ 조선통신사 여정로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국내 일정 안내 | |||||
일시 |
도보 구간 |
출발지 |
도착지 |
도보거리 |
숙박장소 |
4월 1일(월) |
경복궁→숭례문→한강진→신원→정토사 |
경북궁 |
양재(정토사) |
27 Km |
정토사 파라다이스 |
4월 11일(목) |
쉬는날 (안동 하회마을 등 문화유적 탐방 - 안동하회마을 등) | ||||
4월 12일(금) |
안동→일직→의흥 |
안동시청 |
의성군청 |
31 km |
테마모텔 |
4월 16일(화) |
쉬는날 (불국사, 석굴암, 감은사지, 대왕암, 첨성대, 경주박물관 등 경주 문화유적 탐방) | ||||
4월 17일(수) |
경주→입실(외동)→외동 |
경주부동헌 |
구어 |
21 Km |
홀인모텔 |
4월 21일(일) |
쉬는날 (동래 문화유적 탐방 - 태종대 등) | ||||
4월 22일(월) |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출발→ 일본 대마도 행 | ||||
국내 구간 거리 합계 |
총 도보거리 |
524 Km |
☞ 일본 일정 안내 | ||||
일시 |
도보 구간 |
경유지 |
도보거리 |
숙박장소 |
4월 22일(월) |
일본 대마도로 출국 |
부산국제여객터미널 → 대마도항 |
선편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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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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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문화유적 탐방 - 고려미술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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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수) |
교토 → 구사쓰 |
27 K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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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수) |
오카자키 (문화유적 탐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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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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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자키 → 토요바시 |
33 K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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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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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문화유적 탐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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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수) |
시미즈 → 요시하라 |
32 K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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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구간 거리 합계 |
633 K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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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일본 전구간 도보거리 합계 |
1,157 km |
☞ 조선통신사 이야기 ! |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 분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그 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의 사절단으로 최초의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그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刷還), 일본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가 주 임무였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의의는 조 일 양국간만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공존을 위한 국제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데 있다. 파견절차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습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3인 이하로 정사 부사 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 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하였다. 그 뒤 육로로 교토로 갔다. 조선 전기에는 이곳에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교토가 종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장군이 도쿄[東京]에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도쿄가 되었다.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과 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대하였다. 특히 통신사에 대한 화려한 접대는 일본의 재정을 압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1711년 아라리 하구세키는 통신사 접대에 관한 규정을 바꾸기도 하였으나 1719년에는 다시 환원되었다.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한 통신사는 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서화 시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이 화려한 행렬도를 그린 병풍 회권 판화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또 그들은 귀국 후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여러 형태로 남겼는데, 이것이 《해행총재(海行總載)》라는 견문록으로 엮어져서 당시 두 나라 간의 외교적인 역할 및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 |
- 조선시대에도 한류(韓流)는 있었다 -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 誠信의 교환 조선통신사는 조선과 일본의 7년간 즉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의 전후 처리를 위해서 시작되었다. 1592년 4월, 일본군 20만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시작된 임진왜란은 일본천하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심에서 출발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재침 도합 7년의 전쟁으로 조선은 그야말로 쑥밭이 되고 만다. 明軍의 지원으로 조선군과 明軍의 합동작전과 전쟁에 지친 일본군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죽음으로 전쟁은 종결된다.
전쟁이 끝났지만 일본이 다시 재침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그 동안 일본군이 데려간 포로의 송환문제도 있어 조선정부는 사명당 송운대사를 대마도에 파견한다. 당시 일본 국내사정은 급변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內戰을 통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을 제압하고 실권을 잡고 있었다.
이러한 안팎의 분위기로 대마도에 온 사명당 일행은 대마도 영주 宗氏의 안내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을 만나기 위해 京都까지 오게 되었다. 당시 京都의 후시미 城에 체재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명당 일행을 만나 포로 송환에 성의를 보이고 조선과의 성의와 신뢰 즉 誠信의 교환을 통한 通交를 환영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사절단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 문화의 “로드 쇼" 포로 쇄환사로 시작한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조선에서 온 관리가 500여명, 조선통신사를 경호하는 대마도의 무사들 200명, 현지안내원 등 모두 1,000명 규모의 사절단이 구성되었다. 머무는 곳도 간단치 않아 체재지의 대부분은 절을 이용 분산숙박 하였다고 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대개 조선통신사가 한 번 왕복에 6개월에서 1년이 걸렸다고 하며, 여기에 소요되는 예산이 당시 일본 정부로서는 지금의 화폐로 환산하면 1,000억 엔의 재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외 사절단 영접 준비 등에 3,000명 정도가 차출되고 머무는 곳의 大名(領主)들이 지불한 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나고야 지역에는 기소, 나가라, 이비 등 큰 강이 세 개나 흘러 1,000명이 강을 건너는데 각각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여 이용케하였다.
이러한 거대한 배다리 가설공사로 보아 당시 일본정부가 조선통신사를 얼마나 특별 예우하여 영접하였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숙소 등에서 조선통신사를 통해 漢字를 이용한 필담을 하였다. 그리고 서로 글을 주고받았다. 각각의 소임을 상세하게 표기하여 남긴 두루마리 그림.
그런데, 조선통신사가 재정문제로 반대에 부딪쳐 1811년 마지막에는 대마도까지만 갔다가 되 돌아 갔다. 그 이후에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이 온 것이 그로부터 50년 후다. 조선통신사 교류가 유일한 대외 접촉이었던 쇄국일본은 조선을 통한 대륙문화 흡수에서 영?미 등 해양문화를 빠르게 흡수하면서 문화선진국 조선을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 조선통신사 부활 1868년 일본은 德川막부를 쓰러뜨리고 明治유신을 거치면서 德川막부가 한 일은 모두 무시된다. 德川家가 좋아하여 200년 이상 해오던 조선통신사 외교도 역사 속에 파묻히고 많은 자료가 소멸되고 만다. 당시는 征韓論 대두될 때라 조선(韓)의 선진문화의 도입을 이야기하는 조선통신사는 明治의 대외정책과 맞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明治 이후의 일본은 세계 2차대전의 패전으로 망할 때까지 근린국의 침략과 확대 정책이 지속된다. 이는 마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등 확대 정책과도 유사하다.
지금부터 30년 전에 일본의 여러 절에 奉獻되어 보관되어온 조선통신사의 두루마리 그림이며, 병풍 등이 발견되었다. 조선의 관리와 그들을 호위하는 일본의 무사, 가마를 메고 짐을 나르는 일본의 서민들 그리고, 연도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려진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곳곳에서 발견돼 당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제일 먼저 나서는 것은 기수단이다. 길을 비켜라는 의미의 淸道旗. 그리고 조선국왕의상징인 龍旗가 나간다. 그리고 악대다. 일반적으로 취타대라고 불리는 각종 악기를 연주하면서 당당히 지나간다. 나발, 태평소, 대금, 해금, 징, 바라, 북 등 입으로 불고 손으로 치면서 연주하는 악대가 지나가면 국서(금서)함 행렬이 뒤따른다.
☞ 조선시대의 “한류"
특히 대마도에 근무하면서 대조선 외교를 담당했던 당시 일본제일의 朝鮮通 이었던 아메노 모리호우슈(雨森芳洲)는 그 자신이 2번씩이나 조선통신사의 안내역을 맡아 에도까지 수행하는 등 당시 조선과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우호증진을 꾀하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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