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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5일 아침 10시경.
귀가할 때 지하철 5호선 고덕역 승차, 약수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기
까지 동행한 것의 역(逆)순으로 하여 고덕역에 도착했다.
80대인 내게 2년은 40분의 1로 흔적도 잘 보이지 않는 세월이다.
그러나, 10대 손자들에게 2년은 그들이 살아온 세월의 5분 1이나 되기
때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세월이다.
작은 손자보다 2년 연상인 큰 손자가 함께 하므로 헤어진 후와 만나기
까지의 그들의 왕복 교통편에 마음을 덜 써도 된다는 뜻이다.
정도의 차는 있을 지언정 일리일해(一利一害)는 불변의 진리?
마음 놓이는 데가 있는데 반해 발랄한 두 놈 관리는 한 놈보다 어렵다.
한 놈 때는 다소곳하고 고분고분했는데 2대1로 내가 되레 밀린다.
난이도가 낮은 길이기 망정이지 험한 산길이라면 못할 듯싶다.
지구를 3바퀴는 돌았을 내게 157km와 태어나 최초로 3자리수 거리에
도전하는 손자들에게 그 거리의 의미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가 있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반환점을 돈 셈이니 무난히 완주할 것을 기대한다.
어제 마감한 지점에서 재개한 우리는 이 코스의 2번째 스탬프(명일근린공원 둘레길 입구)를 찍음으로서
남은 길을 시작했다.(스탬프대 사진이 증발)
구간 거리 중에서 34.5km인 북한산코스 다음으로 긴 26km 중 어제 걸은 거리가 16km였으므로 3코스의
출발점인 광나루가 10km 전방이다.
스탬프도 타 구간과 달리 4곳에 비치되어 있으니까 아직 1곳이 남았다.
서울둘레길은 108m 고덕산을 넘어간다.
높은 산을 많이 탄 등산인에게는 산이랄 수 없고 낮은 언덕에 불과한데 고매한 이름으로 불린다.
고려말, 두문동72현 중 하나인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이 한때 은거했던 마을을 그의 충절을 기리는
후세인들이 고덕리(高德里)라 했고 그 마을 동산을 고덕산이라고 불렀다는 것.
500년 이씨조선은 좋게 말해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이지 쿠데타로 탈취한 새 왕조다.
이씨에게 무너진 고려 왕조 역시 신라 천년 사직을 무너뜨렸다.
신라는 어떠했는가.
정립(鼎立) 상태인 3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서로 도와서 통일을 이룩하기 보다 외세(唐)를 빌어서 두
상대를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불사이군 (不事二君)이 과연 만대에 지켜야 할 장부의 도리인가.
왕조가 다른 경우는 고사하고 동일 왕조의 선후대 간에서도 충절을 고수하다가 목숨을 잃기 허다했다.
애오라지, 권력만을 향한 해바라기, 철새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성장하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
고덕산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을까
단심가(丹心歌/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번 고처 죽어.. . . .)의 시대가 아니고 하여가(何如歌/이런들 어떠
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 . )의 시대라는 지금.
카아(Edward H. Carr)에 의하면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라는데 과연 대화가 원만
하게 이뤄지고 있는가.
어느 시기에 지고지선의 가치를 지난 역사적 사실(충절)이라 해도 이 시대에 어떤 의미(메시지)를 주지
못한다면?
충절은 미라(mirra)로 남아있기는 커녕 화석(化石)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지자체들이 터무니없는 연기(緣起)를 이유로 자기 고장 홍보에 활용하는데 열 올리기 전에 역사적 사실
이라 해도 현재의 의미를 따저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른 아침에 손자들과 함께 고덕산 해설(아래 1)을 읽는 동안에 반응 없는 손자들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고덕산에서도 고인돌(Dolmen) 2기가 발견되었단다.(위)
청동기시대의 무덤인데,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BC1.500~BC30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니까 고조선
시대에 해당되며 인근인 암사유적지와 더불어 선사시대의 생활터전이었음이 더욱 분명하다.
고창(전북), 화순(전남), 강화(인천) 등지의 우리나라에도 30.000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2000년에 UNESCO 세계유산(World Heritage/문화)에 등록되었다.
특히 고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447기) 지역이다.
나는 지금, 고인돌이 아득한 옛 선조들의 무덤이라는 정도로 알아도 다행인 세대와 함께 걷고 있다.
"많이 묻는 자가 많이 안다"
큰 손자가 '지적삼각점'(아래)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교실이 따로 있어야 하는가.
역사와 지리교실이 된 작은 동산, 고덕산에서 손자들을 상대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할아버지.
두 손자 사이에 2년이 얼마나 거창한 세월인가를 재삼 확인했다.
국토의 측량과 지도의 제작을 위해서는 기준점들이 필요한데 그 기준점이 삼각점이며 국가와 지방에
따라서 등급이 있고 지방자치단체는 관내 지적(地籍)측량을 위해 지적삼각점을 설치한다.
만일, 이 삼각점의 위치를 임의로 변경하면 회복이 어려운 오류를 범하게 될 정도로 중요한 표적이다.
더 자세히 알려면 '국립지리원'(인터넷)을 방문하면 된다고 알려줄 때 진지하게 듣고 있는 큰 손자와
달리 딴청을 피우고 있는 작은 놈.
저 놈도 2년 후에는 이 놈 만큼 성숙해지겠지.
고덕산에서 암사동 선사유적지로 가는 서울둘레길도 지자체 강동구가 관내 주민들을 위해 설치한
각종 시설로 어지러울 정도다.(위)
과밀한데다 대로 이용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느낌인데 암사동 이후에는 대로뿐인 둘레길이다.
이 길이 과연 최선의 길인가.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미련 없이 과감하게 버려야 괄목할 만한 것을 얻을 수 있는데, 광진 쪽을 버리고 새 길을 모색하면
어떨지.
암사동선사주거지(아래).
BC4000~BC3000년 어간의 신석기시대인들이 살았던 움집터의 유적이란다.
1981~88년의 유적지 발굴조사로 햇볕을 보게 되었다는데 반만년 역사의 단군신화(totemism)의
근거가 확보된 것인가.
기원전 3.000년은 5.000년이 되니까.
나는 둘레길을 잠시 접고 이 유적지를 둘러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손자들을 유인하는데 실패했다.
이번에는 크 손자도 내 편이 아니었다.
실로, 충격이었으며 실망했다.
저들을 사로잡는 위력은 애오라지 스마트폰으로부터만 나오는가.
말 한필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이지는 못하는데 어쩌면 좋으냐.
그런 관심을 가질 연령대가 아직 아닌데 내가 너무 일찍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애들의 관심이 온통 식당으로 집중되고 있는 점심때가 되었는데 딴 이야기가 들리겠는가.
오늘은 메뉴를 추어탕으로 정했다.
암사동선사유적지를 지나 고덕로변에 있는 '남원추어탕' 간판 앞에서.(위)
남원(전북)은 춘향전의 무대로 알려졌지만 남원과 추어탕은 동의어가 되다시피 추어탕으로 명성을
얻은 고을이니까.
돌덩이도 삭여버릴 식욕의 시기에 가릴 것이 있으랴.
손자들과 함께 점심 먹기 6일째인데 이 때가 가장 순수하게 즐거운 시간이다.
토끼굴을 통해 광나루 한강변 길에 들어섰다.(아래)
눈이 부시도록 하얗고 넓고도 긴 백사장은 광나루 한강공원, 암사생태공원 등 갖가지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변해 있다.
여가를 선용할 만한 마땅한 공간이 부족한 1천만 서울시민을 위해서 크게 봉사하고 있다.
백사장이면 그게 안되나?
뚝섬도 그랬지만 특히 광나루 한강은 숨 막힐 듯 답답한 서울 시민들의 뱃놀이 공간이기도 했는데
바다를 방불케 하는 한강의 너른 백사장은 온갖 이름이 동원된 공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 많은 이름 중에 왜 백사장공원은 없을까.
일방적, 획일적으로 강행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물었다면 아마 일부 백사장 공간의 존속을 원했을
것이며 이용도가 백사장이 가장 높을 것이다.
이 곳 백사장과 광나루 한강은 나와 인연이 많은 곳이다.
1950년대 말의 여름방학철에는 백사장에서 살다시피 했고 70년대 봄 가을에는 뱃놀이 주선(酒仙)이
되었으니까.
전후(6. 25)의 어려운 시절에 여가를 이용해 맡은 학생 서클(Circle/소속학교와 무관한 복합 모임)을
이끌고 갈만한 마땅한 곳이 없으니까 하계 농활(농촌봉사) 기간 외에는 이 백사장에 모였다.
매월 만나는 자그마한 모임의 호주가들에게 광나루 한강에 띄워놓은 배 위에서 마시는 술 보다 더한
신선주는 없었다.
우리가 그랬어도 한강은 맑고 푸른 물이었다.
한강 오염의 주범이 백사장이었던가.
동력이 아닌 노젖는 배들 때문에 오염되었던가.
한강변의 음식점들이 오염의 원흉이었다고?
스위스 인터라켄(Interlaken/Bern)의 브리엔츠(Brienz)와 툰(Thun), 장대한 호수가 오염으로 인해
호숫가의 즐비한 집들과 호반 마을들을 철거한다는 뉴스를 듣거나 본 적이 없다.
한강 오염의 주범은 백사장도, 놀잇배도 아니었고 강변 마을이나 강가의 위락시설도 아니었다.
거대한 양돈장에서 나오는 오폐물을 몰래 한강의 지천인 경안천에 지속적으로 버려서 한강의 수질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양돈업자 S.
오늘날에는 세계 굴지의 재벌이 되었지만 이처럼 온갖 패악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재벌이다.
설치한 정화, 정수시설을 가동하지 않고 오.폐수를 한강으로 흘러보낸 상류 한강변 음식점들, 이들과
결탁하여 이를 눈감아준 당국자들, 그들이 바로 주범들이었다.
광진교(廣津橋)를 건넜다.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을 있는 1.056m다리다.
반(半)을 풀어서 광나루다리 또는 광장교로 불리기도 한 이 다리가 처음 놓인 해는 1936년이다.
한강에 3번째(인도교로는 한강대교에 이어 2번째)로 다리가 건설됨으로서 사람은 물론 수레와 차량
까지 모두 배를 이용해 건너야 했던 불편이 일시에 사라지게 된 것.
넓은 나루라 광나루, 옛 광주땅 나루라 광나루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는 등 호사가들의 일거리가 되고
있다는 이름 광진.
한강을 경계로 하여 남쪽은 광주군, 북쪽은 양주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북쪽인 광진 광나루는 양진
(楊津) 양나루가 되고, 광진구는 양진구로, 현 광동구는 광진구로 바뀌어야 한다고.
삼국시대부터 통일 신라, 고려와 이씨 왕조를 거쳐 오는 동안 무수히 바뀌고, 일제 강점기에 다시 온
나라의 지명을 한자화 하느라 또 바꾸고, 광복 후 복원과정에서 다시 바뀐 지명들.
대한민국 70년사에서도 고유 지명의 복원, 행정구역 통폐합 등의 이유로 난도질한 것이 지명이다.
나는 50년을 이사해 보지 않았지만 사는 마을 주소와 이름이 7번 바뀌었다.
7년에 1번 이사한 꼴이다.
이즈음에는 인터넷으로 인하여 공간개념이 사라지고 일체의 교신이 즉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빨라야
1주일이 걸리던 먼 나라의 친구들은 내가 자주 이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주소지와 동명이 자주 바뀌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혼란스럽다.
미국의 남부 일대(캘리포니아, 아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등)와 중남미의 광대한 땅이 모두 스페인의
영토였다(브라질은 포르투갈)
당시(15c)에 지명 짓기가 어려운 일어었던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자국 내의 지명들을 몽땅 점령지로 수출(?)하여 붙여 놓았다.
지금은 모두 독립했거나 미국의 주로 편입되어 있지만 지명의 개명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다.
스펠링 한자도 바뀌지 않았고 다만 영어와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의 발음 따라 달리 불리고 있을 뿐.
지명, 동명, 인명 가릴 것 없이 걸핏하면 바꾸려 할까.
구차스럽기 짝이 없는 이유로,
광진교 북단에 설치되어 있는 스탬프대에서 3코스-1 스탬프를 찍음으로서 이 코스를 마감했다.(위)
과욕을 결코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두었건만 점심때를 막 지난 시간(13시44분)에 귀가한다?
2코스의 중간을 조금 벗어나는 망우리 고개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겠다 싶었다.
2코스는 6호선 화랑대역 앞에서 묵동천 ~ 망우산 ~ 용마봉 ~ 아차산을 연결하며 5호선 광나루역을
나들머리로 하는데 역(逆)으로 가면.
아차산의 최고봉인 용마봉만 넘어서면 곧 평탄한 포장도로인 망우산공동묘역이라 위험 지역도 없다.
즉시, 2코스인 용마 . 아차산코스에 진입했다.(아래)
평일(목요일)인데도 초입의 아차산생태공원으로 오르는 길이 아차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북한산이 전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아차산(峨嵯山)이 북한산 못지 않게
소중한 산이리라.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는 아차산생태공원에 올랐다.
생태공원은 어떤 곳인가.
생태계란 기본적으로'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상호작용의 체계'라고 볼 수 있는데 생태공원은 아마도
이같은 체계를 관찰하고 체험하며 여가를 선용하는 공중 공간을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가장 자연스러운 생래적 환경이 전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일반 공원 같은 인위적
질서와 청결미가 부족할 수 있다.
지저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소 지저분할 수 밖에 없으므로 거금을 들여서 생태계를 파괴해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태공원은 어이없게도 선진 외국의 그것들과 달리 하나같이 질서정연하고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방부목 데크를 비롯해 갖은 적(敵) 생태계성 공해물질들로 가득차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중앙정부로부터 금전의 지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 아닌지?
2코스 첫 스탬프( 제3스탬프)를 찍고 완만하나 아차산 오름이 시작되었다.(위)
서울특별시 광진구와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으며 최고봉(龍馬峰)이 해발 348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
더러는 용마봉을 용마산이라 하여 아차산(해발287m)과 별개의 산으로 보고(서울둘레길 당국자들
까지도) 있으나 예전부터 두개의 산이 하나의 이름, 남행산으로 불렸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남쪽을 향하여 불뚝 솟아올랐다 하여. . .
아차산의 서울둘레길은 고구려보루군의 답사로에 다름아니다.(아래)
역으로 걷고 있는 우리는 1, 5, 3, 4보루를 거쳐가지만 순방향길은 4, 3, 5, 1순으로 오고 있다.
"할아버지, 보루가 워예요?"역시 큰 손자의 질문이다.
보루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돌이나 콘느리트 등으로 쌓은 구축물이라는 뜻 풀이로 시작하여
삼국의 긴장 관계를 다시 설명했다.
아차산의 보루들은 정립(鼎立) 상태에 있던 삼국 중에서도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 간의
대립이 치열했던 현장이다.
도봉산과 사패산, 양주의 불곡산 등에도 고구려의 보루들이 있다.
이 보루들은 한강 이북의 고구려에게는 남쪽 국경 방어의 기능과 아울러 남정(南征)의 꿈을 이루기
위한 전진기지였을 것이다.
한강을 끼고 걷는 산길이며 북한산을 제하고는 가장 높은 산이라 조망권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건만
답답한 시야를 어찌한다.
한국의 새 랜드마크일 뿐 아니라 월드 랜드마크로 등장한 123층, 555m 롯데월드타워가 시끄무레한
괴물처럼 보이니.
이른바 미세먼지 공해.
새 밀레니엄(millennium) 벽두에 등장하여 인체의 건강을 해침은 물론 시야마저도 심각하게 훼방
하는 악마다.
아니다.
자연을 거스르고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인간에게 내리는 재앙이다.
배불리 먹겠다고(빈곤을 물리치겠다고) 원수에게 비럭질하여 그들이 버린 치명적인 공해도 수입한
자를 우상처럼 받드는 인종이 받을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재앙이며 형벌이다.
어떤 벌이 대기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
미구에 이승과 작별하게 될 늙은이의 문제가 아니라 자손 삼사대까지지 이어진다는 벌이기 때문에
이 벌을 받아야 하는 손자들 세대가 안쓰럽고 두려운 것이다.
보루길이 끝나고 안부로 내려섰다가 한 번만 오르면 용마봉이다.
깔딱고개가 있으나 순방향에 해당되므로 전혀 개의되지 않는다.
느긋한 기분일 때, 돌연 작은 손자가 비명을 터뜨렸다.
산토끼처럼 잘도 올랐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것.
안부에서 간고랑길을 따라 중곡동으로 탈출했다.
부축을 받으며 내려가 의사의 응급처지를 받았다.
노로바이러스 감염 의심이 간다며 처방해준 약을 들고 귀가해야 한 돌발사태.
발생하지 않으니만은 못해도 더 나쁘지 않은 일이니 다행이다.
(아래는 중곡동 간고랑길 들.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