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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의 유래와 역사
화장의 발생은 오래 되어 원시인의 안면 채색은 잘 알려졌고,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에서도 안료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무대화장으로서 독립하여 무대예술로서 중요하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그리스 연극 이래의 가면극(假面劇)의 전통이 쇠퇴되어 무대를 옥내에 설치하게 되면서 르네상스 이후부터 분장의 필요성이 생겼다. 그 후 가스 ·전기에 의한 인공 조명이 발달되면서 무대의 독자적인 화장법이 고안되었고, 다시 19세기 후반이 되자 사실주의 연극이 융성해짐에 따라 각종 안료의 연구 ·진보와 더불어 복잡 정교한 분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1. 서양
화장은 고대 이집트에서 사회적 계급이나 성별을 떠나서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는데, 그 기술이 상당히 세련되었었다는 것을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부유한 가정의 여성들은 몸을 깨끗이 씻고 노예를 시켜서 온몸에 향유(香油)를 바른 다음, 긴 시간을 소비해서 정성들여 화장을 하였다.
로마시대에는 근동(近東)의 여러 나라에서 갖가지 화장품이 들어왔기 때문에 화장술이 급속히 발달하였다.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화장은 오전중에 노예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목욕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냉수욕 ·온수욕 ·증기욕 ·약물욕 등이 있었다. 눈썹먹과 아이섀도도 있었고, 피부색에 맞춘 분과 연지도 있었으며, 향료를 특히 중요시하였다.
중세에는 전반적으로 특별한 발전이 없었고, 로마의 전통은 비잔틴이나 이탈리아에서만 살아 있었다. 비잔틴의 여성들은 눈썹을 뽑고 새로 그렸으며, 볼과 입술을 장밋빛으로 꾸밈으로써 그들의 화려한 의상에 걸맞은 기교와 양식을 창조하였다. 인간성의 해방을 몰고 온 르네상스는 나체와 관능의 부활에 의해서 화장미(化粧美)에도 새로운 기준을 탄생시켰다. 작고 정돈된 금발, 스스럼없이 노출시킨 풍만한 육체와 순백의 피부가 고조기(高潮期) 베네치아파(派)의 화가들이 그린 여성의 자태에 유감없이 표현되었다.
18세기는 여성의 세기였다. 조발사(調髮師)와 미용사가 전성시대를 맞이하였으며, 짙은 화장이 유행하면서 화장품 광고도 선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유행은 궁정의 여성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그리고 모든 나라로 퍼졌다.
19세기로 접어들자 사회는 그 때까지의 어느 시기보다도 변동이 심하였는데, 이러한 물리적인 면에 비해서 화학, 특히 유기화학의 발달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의 태반은 색을 연하게 한 단박한 화장과 짙은 머리, 뚜렷한 눈을 주로 하는 낭만적인 화장법이 지배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걸쳐 의학과 유기화학이 급속히 발전하였고, 이와 병행하여 여성의 사회적 해방이 논의되고 스포츠가 유행하였으며, 의복이 단순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화장품이 대중화되어 대량생산되고, 의복의 간결화와 더불어 명확한 화장법이 차차 유행하게 되었다.
◇ 20세기 초(1900~1930) 메이크업
고대 이집트 시대 이래 거듭되어 왔던 메이크업과 화장품 사용에 대한 논쟁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종식되었다. 비록 메이크업에 대한 거부감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연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1915년 미국에서는 철제 고형갑 속에 보관된 립스틱과 아이브로우 펜슬을 판매하기 시작하였고, 1923년에는 속눈썹이 개발되었으며 사용에 편리한 콤팩트가 개발되었다.
1927년에는 오늘날까지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코티분과 샤넬의 NO.5 향수가 개발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928년에는 크린징 티슈인 크리넥스가 개발되었다.
이 당시 한해동안 미국에서 소비된 립스틱의 총 연장 거리는 약 480km로써 이는 신세기에 들어 메이크업이 얼마나 큰 발전을 할 것인가를 예고한 것이었다.
◇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찬바람으로 위축된 사회분위기는 메이크업 패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1930년대 초 메이크업은 절제되고 자연미를 강조하는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영화가 대중 오락중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일반인들의 메이크업 패턴은 영화배우들의 스타일에 따라 영향을 받았는데 절제되고 소박한 경향을 추구하였던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부유한 스타일의 이미지 보다 청초한 미에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1930년대 초기의 메이크업 풍조는 점차 변하고 짙은 눈썹과 두툼하고 강조된 입술, 검붉은 립스틱은 당시 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 메이크업을 논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몇몇 화장품 생산에 종사한 사람들이다.
먼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으로 폴란드에서 안면용 크림을생산하여 판매하기 시작한 헤레나 루빈스타인 부인은 그 후 미국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화장품을 개발. 생산함으로써 일반인들이 화장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헐리우드에서 분장사 겸 헤어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막스 팩터씨는 최초로 팬케이크 타입의 파운데이션을 발명하여 판매함으로써 기초화장의 새로운 기원을 남겼다.
*파운데이션: 드불게 사용되었지만 밝은 색조로 처리.
*파우더: 아주아주 밝고 희게.
*볼터치: 붉은색 볼연지를 볼뼈 전체에 둥글고 진하게 발라서 볼뼈를 강조.
*눈썹: 아주 가늘게 정리후 검정색 크레용을 사용하여 강조.
*눈꺼풀: 섀도우는 제한적으로만 사용.
*속눈썹: 검은색으로 강조.
*아이라인: 검은색 아이라인을 사용. 시선을 강조.
*입술: 둥글고 진한 색의 육감적인 모습으로 표현.
◇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심각한 물자부족 현상은 화장품 업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화학제품을 원료로 하여 화장품이 생산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현상이고 조치이긴 하지만..미국의 '전쟁물자 생산위원회'는 화장품 생산량을 크게 감소시켰다. 194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메이크업산업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다. 크림형 및 액체형 파운데이션이 개발되어 판매되기 시작했고 리필형 립스틱이 크게 성공하였다. 메이크업 풍조 측면에서는 한동안 잠잠했던 것이 대 유행이 되어 수십 가지 종류의 패치(별 모양) 모양을 넣은 상자가 화장품 가게에서 판매되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 번영의 도래를 의미하듯 풍부하고 화려한 립스틱이 강조되었고 눈화장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 1950년대
1949년 겨울부터 파리를 중심으로 <사슴 눈 모습의 아이 메이크업>이 전 세계적으로 번져나갔다. 1950년 중반까지 계속된 이러 메이크업 풍조는 눈의 아이라인을 바깥쪽으로 연장하고 눈꼬리 부분을 올라가도록 그려주었으며 눈썹위 각종 새로운 색을 그려 얼굴을 강조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는 눈썹끝을 바깥쪽으로 길게 올라가는 '만다링'식 메이크업이 뉴행하였고 후반에는 내추럴 톤의 메이크업이 유행하기도 했다.
전쟁 후 여성미가 부활되어, 대표적인 유행 선도자는 요염한 스타일의 마릴린 먼로, 요정같은 모습의 오드리 햅번, 귀족적 분위기의 그레이스 켈리, 자연스럽고 건강한 야성미의 브리짓드 바르도 등이 유행을 선도했다.
오드리 햅번의 굵게 강조한 눈썹과 끝이 치켜 올라간 아이라이너로 젊음을 과시했고, 브리짓드 바르도의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부드러운 긴 헤어스타일에 눈을 강조하고 입술은 옅은 핑크빛으로 칠하였다.
마릴린 먼로는 아니라이너를 길게 그리고 얼굴 윤곽을 강조하고 새빨간 색의 입술로서 순진하고 관능적인 모습을 표현했다.
◇ 1960년대
1960년대 초에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고대 이집트 스타일의 메이크업이 유행하였다. 영화 <안토니 & 클레오파트라>의 영향을 받아 유행했던 소위 이집트리언 룩의 특징은 대담한 검정색 선으로 눈주위를 그린 후 눈끝에서 바깥쪽으로 직선을 연장한 클레오파트라의 눈을 재현하였고 여기에 아랫입술을 강조하였다.
한편 1960년대 중반에는 이집트리언 룩의 모습에서 변형된 립리스 룩(Lipless Look)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는 입술의 윤곽은 흐리게 하고 눈만을 강조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어린애와 같은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또한 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여성의 권한이 획기적인 신장으로 메미크업 스타일은 다양하게 발달되어 다양한 문양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메이크업, 입체형 메이크업 등이 속속 소개되었다.
◇ 1970년대
이 시기의 메이크업은 광대뼈를 강조하기 위해 윤곽 그리기가 사용되었고 입술에는 립라이너를 꼼꼼하게 사용했으며 립스틱 위에 립그로스가 덧칠해졌다.
1960년대의 강한 아이라이너는 가장자리로 지워져서 아이섀도우에 섞이게 되었다. 아이홀이 강조되고 눈썹은 자연스러우나 눈썹을 뽑아줌으로써 정리했다.
◇ 1980년대
경제부흥을 이룬 고도 성장기로서 컬러가 강세를 보인다.
매트한 느낌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메이크업에 있어서는 질감을 중요시하고 투명감을 살리는데 주력했다. 컬러 마스카라가 등장하는 등 새로운 제품이 많이 등장한 시기였으며 눈썹을 강하게 그렸다.
여성이 남성처럼 눈썹을 짙게 그리고 화장을 하지 않은 본래의 얼굴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색조화장을 함으로써 남자가 엷은 화장을 한 것 같은 느낌과 비슷하거나 흰색이 많이 포함된 광택 없는 색조화장으로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것처럼표현했다.
1980년대 강한 영향을 기친 것이 있다면 사람이 아닌 매체이다. 많은 스타일이 공존했으며 유행이 새롭게 들어오자 마자 기존의 유행은 급속하게 밀려갔다.
◇ 1990년대
의학의 발달로 인하여 평균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여러 측면에서 노인문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젊음을 오래 더 유지시키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노화 방지 및 지연을 목적으로 하는 화장품의 개발이 눈에 띈다.
보습효과 또는 세포 활성화 효과가 뛰어난 성분들을 동식물의 천연원료로부터 추출해 내거나 새로운 활성성분을 개발하여 피부 노화에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도모하려는 노력이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의 눈화장, 1930년대의 눈썹, 립스틱, 1960년대의 속눈썹 등 개성에 자유롭게 연출하고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로 다양한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자연주의와 복고주의, 재활용주의, 실용주의의 로코코, 바로크 스타일, 미니멀리즘, 미래주의 메이크업, 테크노풍, 오리엔탈 메이크업이 공존하여 다원화된 다양한 개성표현이 특히 90년대 메이크업의 특징이다.
2. 한국
북방에 거주했던 읍루인(婁人)들이 겨울에 돼지기름을 바른 것은 동상 예방 등 피부의 연화(軟化)를 목적으로 한 것이고 (돼지기름은 동상 ·해그을음 ·눈그을음의 예방 및 피부의 연화작용이 뛰어나 유럽에서도 크림의 원료로 오랜 기간 이용하였다), 남방에 거주한 변한인(弁韓人)들이 새긴 문신(文身)도 원시치장의 한 형태이다. 또한 선사시대의 조개더미[貝塚]에서 가공한 조개껍데기, 짐승의 어금니, 미석(美石)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도 원시 장신구로서 목걸이 ·팔찌 ·가락지로 이용되었다.
1) 삼국시대
삼국시대부터는 당시의 화장과 화장품을 살필 만한 기록과 유물이 뚜렷한 편인데, 예를 들면 고구려의 고분 벽화가 그중의 하나이다. 수산리와 쌍영총 고분 벽화에서 고구려인의 화장을 추출하면, 수산리 벽화의 주인공은 귀부인이고, 쌍영총 벽화의 주인공은 여관(女官) 또는 시녀로 보이는 데도 모두 머리를 곱게 빗고, 눈썹을 짧고 뭉툭하게 다듬었으며, 뺨에 연지화장을 하고 있다. 또한 무인(舞人)들은 머리카락을 뒤로 틀고 연지를 이마에 바르고 금당(金)으로 머리를 꾸몄으니(《三國史記》 志一樂) 신분 ·빈부의 구별이 없이 치장에 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시대
고려인의 화장을 중국측의 기록으로 추측해 보면, ‘부인은 귀밑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내려 드리우고 나머지 머리는 아래로 내려 댕기로 매고 비녀를 꽂았다’(《宋史》)고 하였으며, ‘짙은 화장을 즐기지 않아 분은 사용하나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으며(不喜塗澤 施粉無朱), 버드나무 잎같이 가늘고 아름다운 눈썹을 그렸다. 또한 비단향료주머니를 차고 다닌다’(《高麗圖經》)고 했는데, 이들 기록만으로 고찰한다면 고려인의 화장이 담장(淡粧)에 그쳤던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인들은 향을 애용한 나머지 조정향(助情香)을 먹기까지 하였는데, 기생들이 특히 그러하였다. 고려가요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가 그러한 예로, 향을 먹은 기생의 노래이다. 이처럼 기생들의 분대화장은 화장에 대한 기피성향 ·경멸감을 발생시킨 반면에 화장의 보급과 화장품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기생양성소인 교방(敎坊)에서 기생들에게 화장법을 가르치고, 이들이 사용할 화장품을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수은(水銀)을 수입하여 거울을 만들게 하고 빗도 만들게 하였다(宮中에 鏡匠, 梳匠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후기에는 치졸하나마 머리염색도 유행했던 것 같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의하면, “백발에 화냥노는 년이……센(흰)머리에 흑칠하고……과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던 머리 다 희거다.…”란 속요(俗謠)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화장수준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각종 화장도구와 화장품 용기가 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 전기의 지배층은 고려시대 초기의 지배층이 하였던 것처럼 검약(儉約)을 강조하였다. 이와 아울러 유교윤리를 생활의 기본으로 삼아 내외법이 강조된 나머지 자유연애와 외출이 금지되었다.
여성은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아름다움, 부덕(婦德)이 강조되어 부용(婦容)은 깨끗하고 부드러운 마음가짐의 표현이라고까지 정의되었다. 따라서 여성의 화장이 부덕(不德)한 행위로 간주되기조차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의 화장품생산이 위축되거나 화장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화장개념의 세분화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여염집 여성들의 생활화장과 기생·궁녀 등 특수층 여성의 의식화장이 더욱 뚜렷해지고, 여염집 여성들의 생활화장도 평상시의 청결위주와 혼인·연회·외출시의 화장으로 세분되었다. 이는 남성들의 2원화된 여성관에도 기인한다. 조선시대의 남성들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여인상이 달랐는데, 소실(小室)이나 기생으로는 옥같이 흰 살결, 가늘고 수나비 앉은 듯한 눈썹, 복숭아빛 뺨, 앵도같이 붉은 입술, 구름을 연상하게 하는 머리, 가는 허리를 소유한 팔등신 미인을 으뜸으로 여기고, 며느리나 아내로는 건강하고 성격이 원만하며 성실한 여성을 추구하였다.
◇ 개화기 이후의 메이크업
강화도 조약(1876년)에 따른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는 신식 메이크업 테크닉과 화장법이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주로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유입되었으나 한일합방 이후 1920년대에는 수입선이 프랑스를 주로 한 유럽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수입화장품은 주로 크림, 백분, 비누, 향수 등이었는데 포장과 품질이 우수하여 여성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에는 하얀 얼굴에 반듯한 이마의 잔털을 제거하고 박가분을 물에 개어서 하얗게 발랐다.
그 후 일본 유학생 오엽주가 종로 화신 백화점에 처음으로 미장원을 개업하고 새로운 메이크업 테크닉과 바니싱 크림 등의 신식 화장품을 소개하였다. 또 그는 입술 연지를 아랫입술에만 빨갛게 바르고 눈썹을 초승달 모양으로 그리는 화장법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화장품 산업은 일시적으로 퇴보를 보였으며, 6.25 이후 수입 화장품, 밀수 화장품, 미군 PX 유출품이 범람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다시 국산 화장품 생산이 본격화되고 메이크업 테크닉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60년 이후에는 바니싱 타입의 크림과 백분의 소비량이 격감한 가운데 액상색분(파운데이션)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또 입술연지가 고형(스틱)으로 바뀌었으며 아이섀도우가 등장해 색채 화장법이 시작되었다.
◇ 1900~1930년대
복식 경향은 한복과 양장이 혼동되었으며 신여성이라고 일컬어지고 외국 유학생이나 외교관의 부인 등 극소수의 여성에게 양장이 착용되기 시작했다.
신식화장품과 함께 도입된 신식 화장법은 입술연지의 색깔이 진해지고 향내가 강렬해졌다.
치마의 길이는 짧아졌으며 하이힐을 신고 양산을 든 차림이 신여성을 대표하였다. 하지만 이런 신여성의 화장과 옷차림이 접대부에서 먼저 유행되었고 일부 신여성의 자유연애 예찬으로 빚어진 비난 때문에 어염집 여인들은 종전보다 더욱 엷은 화장을 선호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 1940년대
화장에서 현대식 화장법이 도입된 것은 1940년대 직후이다. 화장 패턴은 얼굴을 희게 하고 눈썹은 반달 모양, 볼연지와 붉은 입술을 하는 것이다. 해방 후의 화장 기법은 번들거리고 눈화장(마스카라와 아이라인으로 강조함)을 강조한 부분 화장에 포인트를 주는 것이다.
1945년의 8.15 광복을 계기로 한국의 화장품 산업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제 화장품의 범람과 일제 화장품 광고의 홍수는 일본의 패망으로 일제히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에 에레나 크림, 바니싱 크림, 모나미 크림, 스타 화장품 등의 구산 화장품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8.15 직후에 원료의 부족이 심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장품 제조 회사의 규모가 영세하였기 때문이며 그나마 1950년 6.25 동란으로 또 다시 화장을 하지 않는 경향을 낳았다.
◇ 1950년대
이 시기에는 수입 화장품, 밀수 화장품, PX 유출품의 범람이 가속되다가 1956년 처음으로 블란서 '코디'사와 기술 제휴로 신제품을 개발하면서 코디분이 국산화되어 품질을 혁신했고, 1960년대로 들어오면서 화장품 시장은 성숙기를 맞이하게 된다. 영국 영화의 상영으로 오드리 햅번 등 영화 스타의 모방이 헤어, 화장, 복식에 유행했다.
◇ 1960년대
정부의 국산 화장품 보호정책에 따라 화장품 산업은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하고 색조화장품을 생산했다. 부자연스러운 하얀분 화장에서 자연스런 피부표현으로 바뀌고, 기초 화장을 중심으로 한 피부 표현에 역점을 두고 수정 화장이 더해져 세련된 느낌을 주긴 했으나 인조 속눈썹의 사용으로 꾸민 듯한 느낌을 주었다.
◇ 1970년대
화장품 회사의 주도하에 메이크업 캠페인으로 색채 화장에 대한 거부인식을 불식시키고 입체 화장이 생활화되었다.
샴푸, 보디제품, 팩제품 등 화장품 시장의 급성장, 의상에 맞추어 화장하는 토털코디네이션이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부터 의상의 유행이 화장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1972년에 복고풍의 의복이 유행하게 되자 화장에 있어서도 복고풍이 나타났다.
1976년에는 패션과 함께 동양무드가 가미된 화장이 선보였고, 색상은 부드러우면서도 침착한 색조 올리브 그린, 크림 베이지, 브라운, 오렌지, 블루, 더블, 핑크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1978년부터 미용 캠페인의 영향으로 메이크업이 토탈패션의 한 부분으로 조화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으며 계절별로 봄의 입술화장, 여름은 자외선 차단, 가을은 눈 화장, 겨울은 기초 피부손질에 중점을 둔 T.O.P 미용법이 정착되었다.
◇ 1980년대
1980년대에는 컬러 TV의 방영으로 색채에 대한 수요가 복식과 화장에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부분적으로 수입 자유화된 선진국의 다양한 색채화장품 수입으로 소비자가 자신의 개성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선택하는 지적 소비자 시대가 되었다.
해외동포의 귀국과 해외와의 교류도 빈번하여 세계의 패턴 소식이 동시에 한국에도 유입되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브룩실즈로 대표되는 자연적인 굵은 눈썹으로 자신감 있고 활동적인 여성상을 표현했다. 색조 화장은 더욱 세련되어지고 다양해졌으며 동양인의 오클계 피부에 잘 조화되는 코랄색상(핑크와 오렌지의 중간)이 유행하고 갈색을 주조색으로 황금색펄과 벽돌색의 조화로 세련되고 매혹적인 분위기의 색조화장이 유행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교복 자율화와 88올림픽을 기점으로 더욱 개성적인 자기표현과 과감한 연출이 두드러졌고, 컬러 TV의 대량보급과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색상 사용이 다양해지고 뚜렷해졌다.
정부의 화장품 산업 보호정책 중의 하나로 1980년대 초까지는 우리나라 화장품이 외국제품과 비교하여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외제 화장품 수입을 금지시켰으며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기술 제휴를 하도록 하였으나 우리나라 화장품도 품질이 향상되어 1983년 이후 화장품의 수입자유화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1986년까지는 전면 수입 자유화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유럽의 메이크업 관련 정보가 많이 유입되어 일본보다는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하였는데 아이섀도우 화장의 더블패턴(아이홀 화장)으로 평면적인 동양인의 얼굴에 입체감을 주고자 했다.
◇ 1990년대
1990년대에도 패션의 흐름과 더불어 메이크업도 유행을 창출하고 선도하는가 하면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패션성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에콜로지의 경향으로 건강에 대한 관심과 자연보호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면서 베이지, 오렌지, 브라운 계열을 중심으로 한 자연스러운 색조가 강세를 보였다.
이 시기에 특히 특이한 현상은 각 브랜드에서 시즌마다 컬러를 제시하여 소비자로 하여금 유행을 선도해 나가는 현상을 들 수 있다.
각자의 개성이 강조되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특징이 화장품 회사 주도하에서 소비자가 선택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혼합되는 색의 강약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무수한 색감을 참조하여 다양한 색채 예술의 감각으로 눈, 볼, 입술 화장을 표현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 패션경향은 어두운 무채색 계열로 몸의 곡선을 가린 미스틱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와 함께 국내에서 오리엔탈리즘과 결합되어 풍부하고 깊이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오리엔탈 패션테마에 맞추어 한국적인 것을 모던하게 표현하게 되었는데 의상과 함께 창백한 피부톤, 가는 아치형의 검은 눈썹, 붉은 립스틱 메이크업도 나타났다.
또한 다른 한편의 메이크업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깊은 컬러의 주류가 예상된다. 우주공간의 어두운 색채들은 금이나 구리 등의 금속적인 광택과 혼합되어 깊이감을 더해주거나 스모키한 느낌의 다소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우더를 뿌려놓은 투명한 피부 표현으로 어두운 색조화장과 병행될 때 냉철하고 지적인 세련미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화장 연령이 저하되어 젊은이 대상의 화장품 시장이 점차 확대되어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3. 현대
현대의 화장은 화장품의 발달과 매스미디어의 발달에 의하여 예전과 같은 화장술의 격차가 없어지고, 화장으로 짐작할 수 있었던 직업이나 지역차, 계층이나 연령 등을 알 수 있는 의미의 표현이 없어지고 개성표현의 요소가 많아졌기 때문에 개인의 기호·지성·교양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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