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사로 접근하는 TBC 성서연구 - 제 1 강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구약성서
(4) 구원의 드라마로서의 성서연구 이사야 6:8
성서를 연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는 성경을 밖에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대상화(對象化) 해놓고, 다시 말해 성경을 수술대 위에 딱 올려놓고 부검하듯, 쪼개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인류의 모든 지식적 역량을 동원해서 성경을 분석해 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성경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들이 바로 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온 것이 이제 여러 가지 성서비평들입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볼까요?
원본 또는 매우 권위 있는 본문을 가려내는 것을 주로 하는 본문비평, 그 시대의 어휘·문법·문체 등을 정확히 알기 위해 성서언어를 연구하는 문헌비평, 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저작의 구성시기, 저자, 본래 기능 등에 관한 증거를 알아내기 위해 성서에 내재해 있는 여러 문학 장르에 초점을 두는 문학비평, 기록된 본문에 앞서 있는 구전 전승의 발전과정을 추적하는 전승비평, 성서적 저작의 기원이 되는 비유·찬송·시 등의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형식에 따라 기록된 자료를 분류하는 양식비평 등이 그 주요 유형들입니다.
무슨 이야기예요? 제가 글을 한 편을 썼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글에서 진짜 “서설원이 한 말이 무엇이냐?”를 찾는 것이 본문비평, 서설원이 사용하고 있는 어휘와 문법, 그 문체는 무엇인가? 문헌비평입니다. 오늘 서설원이 쓴 글에는 어떤 장르의 문학요소가 포함되어 있는가 문학비평, 이 글에 서설원이 기록한 이야기가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쳤는지, 그것을 추적하는 것이 전승비평, 오늘 그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하기 이전에 어떤 삶의 자리에서 주로 말해진 이야기인지를 분류하는 것, 이것이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인지, 집에서 하는 이야기인지, 시장에서 하는 이야기인지, 그 자리를 역추적하는 것이 양식비평입니다.
그 외 다른 성서비평의 유형들은 즉 본문이 가지는 원래 의미를 찾으려는 데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중에는 본문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신학사상을 가진 저자와 편집자들에 의해 수집되었는지를 연구하는 편집비평, 성서 본문을 그 역사적 배치에 따라 해석하려는 역사비평,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증거를 밝히기 위한 '고등비평'이 있습니다.
또 이외에도 여러 가지 연구방법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신약논문을 쓸 때 사용했던 방법은 “사회학적인 비평” 그 중에서도 공동체 안에서 보여지는 일들에 대한,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접근의 한계를 절충한 ‘중수준적인 접근법’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계속해서 여러 가지 교수들에 의해서 이름 붙여진 수많은 비평방법으로 성경이 연구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렇게 성경을 연구하면 금방 되겠습니까? 성경 짧은 한 장속에서, 한 권 속에서도 수많은 문학 장르들이, 삶의 자리들이, 그리고 여러 편집자와 저자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체계와 그들만의 기호, 그들만의 상징, 그들만의 가치체계가 다 다른 것이지요? 하나의 이야기가 쓰여지기까지, 거기에는 무수한 일들이 조화를 이루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쓰는데 이 시가 생각났습니다. 혹시 여러분, 이 시를 기억하십니까?
대추 한 알 詩.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모든 성서비평이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저 대추 한 알이 어떻게 둥글고 붉게 열렸을까? 그렇게 성경을 세분화해서 읽어나가는 연구해나가는 과정도 분명,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성경 속의 언어와 문체들, 그리고 문학구조, 성경이 쓰여진 문화적, 역사적인 배경들과 상황들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가진 보잘것없는 지식으로만 성경을 읽을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성서본문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성경을 바라보고 읽는데 있어서 나름의 장점들과 중요성, 그리고 여러 의의들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 저희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면? 저부터 그렇게 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분류하고 나누고 정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만큼 공부를 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절, 한 절 세부적인 연구자료들을 찾고 참고하고 읽다가는 일 년 내내 10절도 못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추를 보면서, 이게 어떻게 붉어지고, 어떻게 둥글어지는지를, 그 원인과 과정, 그것이 심기어진 시기, 심기워진 마당, 심은 사람, 쳐다본 사람들 등, 이 동네 도당리는 어떤 곳이고, 대추나무의 종류와 사용한 농약, 대추의 영양분 구성 등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성경연구를 해나가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연구하려고 해요?
“대추를 먹어보니 맛있다.” “너도 먹어봐” 그렇게 읽으려고 합니다.
대추가 되어보니, 벼락도 치고, 번개도 치고, 무서리도 내리고, 땡볕도 쪼이고, 가뭄에 고통도 당하고, 새들이 와서 쏘아 먹고, 못된 뚱땡이는 와서 가지도 잘라내고 그러더라는 것을 함께 경험하며, 함께 둥글어지고, 함께 붉어지려고 합니다. 그 방식이 오늘 TBC성서연구가 이야기하고 있는 성서연구 방법이라고!! 이 연사 두 주먹 불끈 쥐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위에서 말씀드린 저런 학문적인 연구가 전혀 배제된 그런 성경읽기는 아닙니다. 저분들이 해놓으신 분류와 작업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성경을 읽어나가되, "대추가 맛있다는 것을 결코 놓치지 않으면서" 연구를 해나가려고 합니다. 성서비평의 문제점이랄까 한계는 하도 난도질을 해대다 보니 대추의 맛을 결국 잃어버리고 만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까는 뭐였어요? 첫 번째? 성경을 밖에서 들여다 보는 방법, 두 번째는, 성경 안에서 성경을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성서 안에 함께 들어가서, 성서 속 대추나무가 되어서 오늘 저 성경 속 인물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이 보고 경험하고 누린 상황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그분이 이끌어가시고 세워가시는 세상을 함께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런 고민을 가지고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음하던 이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이런 고백을 남겼구나.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같이 고백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어나가야, 우리 역시 우리의 관심과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들의 삶과 내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찾아오시고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더 이상 성서는 연구의 대상이나, 교재정도가 아니라,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우리의 집주소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낸 편지”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참으로도 놀랍고 보배로운 성경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2019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은혜가 오늘 우리의 성서연구에 늘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 속에 들어가서 성서를 읽고 성경의 창문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성경 연구, 우리는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요? 두 가지를 기억하고 우리는 성서연구를 해나가려 합니다.
첫 번째, 성서는 하나님의 선언(宣言)입니다.
성서연구의 독특성은 성서 자체의 독특성으로 만들어집니다. 성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드러내신, 계시를 통하여 당신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고 경험하게 해주신 책”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 사실이 성서를 이 땅의 모든 다른 책들과 구별되게 만드는 점이기도 합니다.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다리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을 위한 매개체가 되는 것이지요. 성경 속에는 이러한 인격적인 만남이, 그리고 그러한 만남이 이루는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서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말씀들이 전하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초대와 요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건지시고, 세우시고, 새로워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 계획과 뜻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선언”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전에 보면 “선언”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통치기관이나 정치적 집단에 의하여, 어떤 의도와 동기를 제시해 주는 공식적 선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공산당 성명서는 역사적인 과정을 해석한, 그리고 경제적인 불평등과 위기에 대한 이유와 의미와 해결책이 선언이 되는 것이지요? 또한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물과 사건을 전부 그들이 선언한 의미와 관점으로 바라보고 대할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하일교회에 창립표어, 사명선언문이 있지요. 무엇입니까?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교회,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터에서, 하나님의 일을 내는 사람들의 공동체”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사람이 되려하는 것이고, 모든 순간 더욱 정직하고 진실하게 땀 흘리려 하는 것이고,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허락하신 일과 자리를 감사함으로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성경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 당신이 지으신 하나님의 백성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어떠한 행동을 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할지 우리의 존재와 이 땅의 역사에 대하여, 모든 위기와 불평등, 불의 와 악에 대한 의미를, 그것을 바라보는 눈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선언해주신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특별한 의미에서, 성서는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언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과 그 위기의 순간들에 의미를 가르쳐주시며, 우리네 인생의 시작과 끝에 방향을 제시하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이 기록하고 증언하고 고백하고 있는 모든 사건들 속에 나타나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하고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산당원이 되는 것, 하일교회 교우들이 되는 것에 비교할 수 없는, 이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관점에서 만물과 세상을,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과 마음이 하나님의 것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처럼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서연구가 목표하는 바가 있다면, 그리고 성서연구를 하는 내내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이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또한 나의 사회가 겪고 있는 역사적인 위기, 그 의미와 해결방법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저와 여러분은 이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건들이,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내 삶 속에 실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만나는 모두를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만나야 합니다." 말이 어렵진 않은데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열린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개인성을 존중해주고,
서로간의 대화를 통하여 기꺼이 배우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만나든, 어른을 만나든, 남루한 사람을 만나든, 화려한 사람을 만나든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누군가를 대할 때처럼 편견을 가지고, 선입견을 가지고, 잘 안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편하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사로운 의견이나 선이해, 선지식을 과시하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사람을 교정하기 위해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고 정직하게 성경 구절과 씨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 성경말씀이 내게 해주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예요? 여러분이 주도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서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고 도전을 하고 선언을 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물음을 성서에 던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좋은 대답을 정해놓고 성경에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답이 나오는 성경을 그 구절을 뒤적거려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내 문제를 정직하게 진솔하게 성경에 묻고, 성서와 내가 주고 받는 대화와 경험,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답을 찾는 것입니다. 나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답을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그 축복이 이 성경과의 만남 속에 이루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앞으로 진행되는 성서연구 69강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 전체와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저도 그렇고 여러분의 대다수가 성서 전체에 대한 어떤 총괄적인 지식을 갖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제가 시리즈로 설교한 것이, 수요일에는 아브라함, 요나, 다윗 주일예배 때는 나아만, 산상수훈, 성령의 열매 등등, 성서의 단편적인 부분들인 것이지요? 유명한 말씀들, 여기 저기를 부분, 부분, 그것도 참으로 조금 조금 맛보기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편 단편 나무들을 보기 전에, 잎과 꽃과 벌레들을 보기 전에 먼저, 숲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나무들로부터 조금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70과로 되어 있는 이 TBC성서 연구의 가치와 의의가 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적 드라마가 상연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거대한 한 분에 의해서, 인간 작가가 다루는 몇몇 얽히고 설킨 그런 관계 정도가 아니라, 오고 가는 무수한 인류들의 관계를 써내려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작품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총괄적으로 본다면, 드라마로서의 성경 읽기가 확실히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만나게 되는 가장 적절한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드라마로 접할 때, 성경 전체가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지루하고 읽기 힘들고 졸리기만 한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드라마 전개에 꼭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되는 이야기로 읽혀지게 될 것입니다.
드라마, 어떻습니까? 여러 가지 특징들이 떠오르시지요? 그 모든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시작도 있고, 끝도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시작해서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또한 드라마에는 출연자들이 있고, 스토리는, 희망과 공포, 웃음과 슬픔, 야망과 비극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게다가 드라마에는 여러 막을 거쳐서, 처음에 발생한 에피스소드들이 보다 큰 의미로 이해되게 되는 대단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구성들이 있습니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같은 말이지요. 또한 드라마에는 변화무쌍한 사건들과 반전들, 오해와 갈등이 있습니다. 즉 서로 다른 여러 성격들, 제각기 달리 표현되는 언어들, 각각 다른 시간에 다른 배경을 두고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저변에는 모두, 처음 계획한 의도대로 목표를 향해서 진전되는 사건의 구성이요, 흐름이 있는 것이지요? 중간 중간 복선도 있고, 답답함에 가슴도 치고, 같이 울기도 하고, 함께 속이 후련해지기도 하는 경험이 드라마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서에는 드라마보다 더욱 정확한 그리고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쓰실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시작에서 끝으로, 창조에서 새로운 창조로 움직여 가고 있습니다. 그 스토리는 인간들이 경험하는 희망과 공포, 기쁨과 슬픔, 야망과 비극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서에도 무궁무진한 변화와 반전이 있습니다. 여러 다른 저자들의 말투와, 서로 다른 역사적인 상황들, 각자 다른 종류의 하나님을 향한 신학적인 표현들이 들어있습니다. 등장하는 출연자 각자의 경험과 지식, 그 수준과 깜냥에서 토해지는 수많은 대화들과 고백들이, 때로는 무지하고 미련하고, 고집스럽고, 악하기도한 여러 가지 행동들과 사건들이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엄청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저변에는 근저에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고 이끌어나가는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완성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그 뿐인가요? 그렇게 멀리 서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계시지만 않습니다. 직접 이 이야기 속으로 뛰어 들어오십니다. 이 드라마의 특별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연출자임과 동시에, 또한 순간 순간, 끊임없이 배역을 맡아 진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단순히 무대 뒤에서 드라마를 진행시키고 감독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의 무대에 올라오셔서 대사도 하시고, 행동도 하시고, 일을 내기도 하시는 것이지요? 그 모든 사건과 이야기들은 모든 반대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대단원은 잘 아시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당신과 같은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시는데, 그것을 패배가 아닌 승리로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바로 이 사건을 주기시 위해 이 드라마가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진행해 오신 오늘 그분의 마음과 뜻을 알고 품고 이 성경 드라마를 보아나가면, 오늘 그분이 행하신 사건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인지 더욱 그 역사들이 깊고 따듯하고 분명하게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TBC연구가 인용하는 버나드 앤더슨에 의하면, 크게 3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개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