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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방으로 전래되는 기독교
이상규(고신대학교 교수)
울산(蔚山)은 우리나라 동남쪽, 경상남도의 동북쪽에 위치한 중소도시인데, 북쪽으로는 경주, 북서쪽으로는 청도, 남서쪽으로는 양산과 밀양, 남쪽으로는 기장군과 접하고 있다. 행정구역상 청도군이나 밀양시와 인접해 있으나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 이들 지역과의 교류는 빈번하지 못했으나 인접한 양산이나 기장군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이런 지리적 환경 때문에 부산에 거주하던 호주선교사들이 울산지역을 왕래하여 이곳에 기독교가 소개되었다. 특히 1891년 부산에 도착한 호주장로교 선교부 제2진 선교사들로부터 울산지역 순회가 시작되었고, 후에는 미국 북장로교선교사 베어드의 순회여행 중 울산을 방문하여 이곳에 기독교가 소개되기 시작한다. 이점에 대해 약술하면 아래와 같다.
1.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의 부산, 경남선교
부산 경남지방에서의 기독교 전래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의 선교로 시작되는데, 이때가 1889년 10월이었다. 호주장로교회는 1884년의 미국북장로교(PCUSA)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부였다. 호주의 첫 선교사 데이비스 목사(Rev. J. H. Davies)는 그의 누나 메리(Miss Mary Davies)와 함께 내한하였는데, 데이비스는 한 때 인도 선교사였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지를 떠나 호주로 돌아갔고, 멜버른 대학을 졸업한 후 멜버른 교외 카오필드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일했다. 그러든 중 한국선교의 긴박성을 알리는 남중국주제 선교사 울프(John Wolfe, 1832-1915)의 편지를 읽고, 교장직을 버리고 한국 선교를 자원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언더우드, 헤론 등과 함께 생활하며 한국어를 습득하였다. 서울서 5개월을 보낸 후 아직 선교사가 없는 지방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1890년 3월 14일, 누나는 서울에 남겨둔 채 어학선생과 하인, 그리고 매서할 문서와 키니네 등 약간의 약품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약 20일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1890년 4월 4일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부산 도착 다음날인 4월 5일 폐렴과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온 지 겨우 6개월 만이었다.
그의 죽음은 호주장로교회의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한국선교는 중단 없는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그 후 1891년에는 청년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맥카이 목사(Rev. John Mackay) 부부와 여전도회연합회(PWMU)의 파송을 받은 세 사람의 미혼선교사인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퍼셋(Miss Mary Fawcett) 등이 내한하였다. 이들을 통해 호주장로교회의 부산, 경남 지방선교가 시작되었다.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는 1910년 효과적인 부산, 경남지역 선교를 위해 전진정책(Forward policy)을 수립하고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부산에 이어 진주(1905), 마산(1909), 거창(1913), 통영(1913)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자선과 구제 활동을 통해 선교사역을 계속하였다. 이런 호주선교부의 활동으로 부산과 울산지방을 포함한 경남 지방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2. 초기 부산, 경남지역 선교
호주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이전에도 부산과 경남 지방에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다. 이 지방에서 최초로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1883년부터 시도한 성경반포사업이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는 만주에서 누가복음(1882. 3)과 요한복음서(1882. 5)를 각각 3,000권씩 출판했는데, 이중 3분의 1을 일본 요꼬하마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인 톰슨(J. Austin Thomson)에게 보내 조선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일본주재 성서공회는 일본인 나가사까(長坂)를 1883년 부산에 파견하여 성경반포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이 지방에서의 최초의 복음운동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경상남도 지역에 체류하면서 사역했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캐나다 선교사 게일(James Gale)이었다.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YMCA의 파송으로 내한하여 1889년 7월부터 1891년 봄까지 부산에서 사역한 그는 한국의 역사와 언어, 풍습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던 학자이기도 했다. 게일이 부산에서 일했던 기간 중의 선교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부산 체류기간이 짧았고 특히 부산에서 체류 기간 중에는 한국어 공부에 전념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역시 캐나다 출신 하디 의사(Dr. Robert Hardie) 부처가 부산지방에서의 의료 활동을 했다. 그는 1890년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9월 30일 동 대학 의과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이때로부터 1892년 11월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가기까지 약 2년 동안 부산에 체류하며 게일과 함께 선교사역에 종사하였다. 이들이 부산지방의 초기 선교사들이었다. 비록 경상남도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한 이들은 호주선교사들이었지만, 초기 부산에서 일한 이들의 수고와 봉사는 후일 경상남도 지방 복음화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호주장로교의 울산지방에서의 초기 활동
호주장로교가 파송한 첫 한국 선교사이자 첫 희생자였던 데이비스는 부산,경남지역 선교의 중요한 동기를 부여하였음을 이미 언급하였다. 그의 불행한 죽음으로 호주교회가 경상남도 선교를 시작하게 되는데, 데이비스를 이어 두 번째로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들인 멕카이 목사 부부와 멘지스 페리 퍼셋은 부산진 좌천동에 정착했는데, 이곳이 호주선교부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곳에 1892년 부산진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 1892년 8월에는 무어(Bessie S. Moore)가, 1894년에는 손안로(Andrew Adamson)가, 1895년에는 브라운(Miss Agnes Brown)이, 1900년에는 왕길지(Gelson Engel)가 내한하게 되는데, 이들을 통해 선교지역은 울산을 포함한 경남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호주선교사들이 처음 정착하여 시작된 부산진지부(1891)는 부산, 초량일원, 동래, 울산, 언양, 양산, 김해, 밀양, 창녕, 기장, 울릉도 지역을 관할했는데, 부산에서 동래 언양 양산 울주와 울산으로 연결된 순회로가 호주선교부의 중요한 활동 지역이었다.
울산 지역을 방문한 첫 호주선교사는 1891년 10월 내한한 멘지스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된 정보는 없다. 실제적으로 1892년 8월에 입국한 무어는 부산진지부에 배속되어 1893년부터 인근 지역 순회여행을 했으므로 그가 울산지역을 순회한 첫 인물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후 브라운, 아담슨이 이지역을 순회하며 한국인들과 접촉했고, 1900년 왕길지가 입국했을 때는 이미 울산에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고, 이곳 교회를 관장했음으로 1894-1895년경에 울산에 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895년 이후 호주선교사들이 울산지방 방문 기록이 있고, 특히 1900년 왕길지의 내한 이후에는 빈번한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울산지역 순회전도자로는 무어, 브라운이 중심인물이었고, 이들은 한국인 백차영 전유실 등을 대동하고, 동래, 양산, 언양, 울주와 울산 등지를 순회하였다. 백차영과 전유실(1861-1942)은 부산진교회 초기 신자들이자 여 선교사를 도와 순회 전도활동에 참여하였던 전도부인(Bible Women)이었다. 1895년 이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사진은 이들의 활동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울산지방 기독교 연원에서도 외국인 선교사만이 아니라 한국인 동역자들과 사역자들의 수고와 헌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울산지역은 부산지부 관할 하에 있었는데, 울산지역을 방문하며 교회를 관장했던 목사 선교사는 아담슨이었고, 1900년 이후는 왕길지 선교사가 이 지역을 관장하게 된다. 1902년 휴 커를 의사가 내한하여 1905년까지 부산지부엥서 활동했는데, 이 기간 그도 울산 지역을 방문하고 한국인과 접촉했다그러나 이 지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왕길지였다.
4. 미국북장로교의 배위량의 울산지역 순회
울산지역에서 주도적으로 일한 선교부는 호주선교사이지만 기록상으로 울산지방을 방문한 첫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의 배위량(William Baird)이었다. 1891년 9월 부산에 온 배위량은 영선현에 정주하면서 여러 지역을 답사했는데, 공식적으로 4차례의 장기 순회전도여행을 다녔다. 그가 울산을 방문했을 때는 제2차 순회전도여행(1893. 4. 14-5. 20) 때였다. 이 때 배위량은 후일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는 서경조(徐景祚), 고용인 박재용, 그리고 두 사람의 마부를 대동하고 여행했다. 당시 서경조는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였으나 선교여행 참여 요청을 받고 형 서상륜을 대신하여 1893년 4월 초순 부산으로 왔고 전도여행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배위량 일행은 1893년 4월 15일 부산 선교관을 떠나 동래(4. 17, 월요일)를 거쳐 범어사(19, 수요일), 양산읍내, 물금, 밀양(20, 목요일), 청도(21, 금요일)를 거쳐 대구에 도착하였다(22일, 토요일). 다시 여행을 떠나 칠곡, 성주를 거쳐 상주(28, 금요일), 풍산(5. 4, 목요일), 안동(5, 금요일), 영천(8, 월요일), 의성(12, 금요일)을 거쳐 5월 13일(토요일) 경주에 도착하였다. 다시 여행을 계속하여 울산에 도착했을 때가 1893년 5월 18일(목요일)이었다. 이때가 울산에서의 첫 서양선교사와의 접촉이었다. 이날의 울산 방문에 대한 그의 일기는 다음과 같다.
“경주를 떠나기 직전에 많은 책을 팔았다. 어제 아침에 그곳을 떠나서 80리 떨어진 이곳 울산에 도착했다. 이곳은 부산에서 140리, 대구에서 170리 떨어진 곳이다. 도중에 좌병영(左兵營)을 지나왔는데, 어제 지나온 지역들은 다 좋은 곳들이었다. 많은 시내가 흐르고 인구도 많았다. 좌병영은 해군 기지가 있는 곳인데,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관리들도 많았다.”
울산의 위치와 좌병영을 꺼져왔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정보가 없으나 이것이 첫 울산 방문이었다. 울산을 방문한 배위량은 곧 부산으로 돌아오게 된다. 베어드는 약 한 달 간 1,200리의 거리(400마일 정도)를 여행하면서 문서를 배급하며 개인 접촉을 시도했는데, 이때 울산을 처음 방문한 것이다.
배위량이 울산을 다시 방문한 때는 꼭 1년이 지난 1984년 5월이었다. 배위량은 1894년 4월 30일 부산을 출발하여 5월 7일까지 경주를 왕래하는 약 일 주간의 순회여행을 다녔는데, 울산을 방문한 때가 5월 2일이었다. 이날 병영을 거쳐 5월 4일에는 경주로 갔고, 5월 7일 다시 울산을 거쳐 남창 기장을 지나 부산으로 귀환하게 된다. 이때의 방문에 대하여 배위량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우리는 5월 2일 어제 울산에 도착했고, 그 이후 이곳에서 책을 팔고 환자를 보고 있다. 비 때문에 여행을 할 수 없고 환자도 많지 않다. 하지만 꾸준히 몇 명은 있다. 이곳은 아름답고 매우 비옥한 땅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연적인 비옥함에서는 이곳을 능가할 곳이 없고, 거의 언덕 정상까지 경작이 가능하다. 이곳은 바다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 시장에서 좋은 생선은 부산에서보다 다소 높은 가격에 팔릴 것이다. 이곳은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고 말라리아에 걸리기 쉬운 곳 같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은 물이 안 좋다고 말한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좋다고도 말하지만). 하지만 여기서 10리 떨어진 병영(兵營)은 물이 훨씬 좋다고 한다. 이곳은 실제로 농사가 잘 된다. 우리 여행의 목적 중 하나가 내륙의 선교지부를 위한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다. 많은 면에서 이곳이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된다. 땅은 비옥하고, 이곳은 동래만큼은 아니지만 인구도 많은 편이다. 사방으로 마을이 있다. 사람들도 좋아 보인다. 땅은 비옥해도 낮은 곳에 위치해 있고, 물이 넘친다. 어빈 의사에 의하면 말라리아에 걸리기 용이하다고 한다. 한국 선박이 이곳에서 부산까지 빈번히 왕래하며, 바람만 잘 불면 하루 만에 갈 수 있다.”
경주를 거쳐 5월 7일 월요일, 울산 병영을 통과했는데, 이날 일기는 다음과 같다.
“비옥한 골짜기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을 하루동안 여행 한 후 금요일 밤에 이곳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병영을 통과했다. 병영은 언덕 위의 도시였고 아주 비옥한 땅 가운데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선교지부를 개설할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그곳을 둘러볼 것이다. 이곳 땅도 좋지만 도시 근처에는 확보 할 수 있는 장소가 없을 것 같다. 옛 궁궐터는 말라리아를 피하기 위하여 들판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한 유일한 곳이었다. 가장 가까운 언덕은 도심으로부터 약 반 마일 혹은 그 이상 떨어진 곳으로 시내 건너편에 있다. 비록 어제가 장날이었지만 진료를 받으러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지 몇 권의 책을 팔았을 정도였다.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사람들은 외국 의학이나 서적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의 태도는 울산 사람들의 태도와는 아주 다르다. 어제 오후에 왔던 남자가 어제 저녁에 다시 와서 기독교신앙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는 관심이 많아 보였는데, 그의 마음이 우리에게 끌린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의 관심 그 이상이었다. 우리는 다시 오마고 약속하고 그에게 많은 책을 맡겨 두었다. 그는 어빈 의사에게 약을 샀는데, 아침에 약값의 절반만 가지고 왔고 나머지는 나중에 주겠다고 했다. 이 사람들은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인지! 이 사람이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실망했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의 관심이 진실치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울산으로 돌아왔다. 울산을 떠난 후에는 남창(南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 기록을 통해 배위량은 병영이나 그 인근에 선교지부를 설치할 계획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곳에서 현지인들과 접촉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즉 전도책자를 판매했고 소수의 탐문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전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이 울산지역에서의 기독교와의 접촉의 시작이 되지만 북장로교 선교부는 더 이상 이 지역을 방문하거나 전도한 일이 없다. 미국 북장로교회 호주선교부 간의 협의에 따라 이 지역은 전적으로 호주장로교 관할 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5. 왕길지의 울산에서의 활동과 교회의 설립
울산지역과 그 인근 복음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브라운 양(후일 왕길지의 부인이 된다)과 왕길지였다. 브라운 양은 1900년 이후 일기에서 울산과 병영 지역을 수차례 방문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전도부인 백차영이 주로 동행했고, 때로는 김유실이 동행했다. 이들의 순회전도가 이 지역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1900년 10월 내한한 왕길지 또한 1901년 4월 11일 울산을 처음 방문한 이래 1903년까지 이 지역을 네차례 방문하고 전도 및 양육을 시행하고 수세예정자를 교육시키고 성례식을 거행했다. 이 점을 그의 일기를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희대와 박서방(1901.4.4.)
왕길지가 901년 4월 11일에서 17일까지 울산과 병영을 처음 방문했는데, 1901년 4월 11일 자 일기를 보면 마부를 고용하여 말을 타고 김서방과 함께 부산을 떠나 동래를 거쳐 서창에 도착하여 1박 하고 4월 12일 지동골과 태화강을 지나 1시 30분 경 울산을 통과하여 2시 30분경 병영에 도착했다고 한다.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울산을 1시30분에 지나서 2시 30분에 병영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울산과 그 주위의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집으로 갔다. 우리들은 환대를 받았으며,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이 돌아간 뒤에 우리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병영에서 체류한 4월 13일 일기에서는 병영에서의 군인들의 훈련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단지 저녁부터 비가 내렸다고 말하고 있으나 14일 주일에는 병영교회에서의 예배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다.
“비 때문에 병영에 사는 사람들만이 집회에 참석했다. 나는 매주일 아침 예배 시간 전에 글공부를 하도록 주선하였는데 아주 늙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책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이 공부할 때 보이는 그 열심은 놀랍다. 한 여성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지성적인데― 찬송가의 글을 따라 읽어 혼자 글을 깨우쳤다. 예배 후 오후에 세례를 신청한 사람들을 시문(試問)하였고 세례 지원자 반을 만들었다. 15명이 대상인데 날씨 때문에 참석치 못한 4명은 다음에 시문할 것이다. 이곳에서의 어려움은 그들을 가르칠 사람 역시 세례 지원자라는 점인데,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므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가르침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가능한 한 자주 올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 진리를 이해하는 한 그들의 신앙이 건전할 것임을 안다. 특히 기본적인 사랑에 있어서 그들은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다. 저녁에 기도 모임을 가졌다. 사실 우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는데 교인 중 몇 명도 거기에 참여한다.”
15일 월요일에는 비가 왔으므로 집 안에서 보내고, 16일 화요일에도 날씨가 좋지 못해 기동하지 못했다. 17일 수요일 오전 7시 20분에는 병영을 떠나 12시경 동해안의 어촌인 목섬(Mok Soom)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저녁 기도모임을 가졌다. 이곳에도 소수의 신자 혹은 구도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월 18일에는 남창, 주전, 기장을 거쳐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가 울산 지장을 두 번째로 방문한 때는 약 한 달이 지난 1901년 5월 24일이었다. 이때의 여행은 부산을 떠나 초읍, 서창, 지동골을 지나 병영에 도착했다. 왕길지의 5월 25일자 일기를 보면 이날 병영의 모든 신자들을 만났고, 장터에서 브라운의 어학 선생이었던 고서방을 만났다고 한다. 주일인 이튼 날에는 예배드리고 세례준비반을 교육했다고 한다. 이 날 일기는 다음과 같다.
“오늘 많은 사람이 모였다. 날씨가 좋았으므로 먼 곳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올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배웠다. 아직 그들은 세례준비반에 들어가서, 최종적으로 세례받기를 원한다는 그들의 열망을 표현하기를 조금 망설인다. 지난번에 참석하지 않았던 두 여성이 세례 준비반에 들어왔다. 신청했던 사람들 중 몇 명은 그 문제를 좀 더 생각해보고 싶다고 하며 철회하였다. 박 서방 자신은 대구에 갔으므로 참석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전날 저녁에 인근 마을에 도착하여 그날 돌아왔던 것 같다. 그는 선교사가 울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에 왔다. 그의 행복한 기쁨에 다른 사람들까지도 감화되었다.”
병영에 사는 모든 신자들이 회집한 가운데 예배를 드린 후 월요일 아침, 곧 5월 27일 월요일 병영을 떠나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감포, 장기, 그리고 두 지역(Chat tey, Tisu)을 경유하여 경주까지 갔다가 다시 하부 길을 가 언양을 지나 부산으로 돌아갔다.
울산지역을 세 번째 방문한 때는 1902년 3월 28일이었다. 3월 28일 부산을 출발하여 동래, 기찰, 서창, 지동골, 울산을 지나 병영에 도착했다. 5월 28일자 일기에서 왕길지는 이렇게 썼다. “이곳의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반가워했다. 우리가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사람씩 와서 우리에게 인사하고 우리가 온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말했다. 지난번에 이곳을 다녀간 이후 5달 만에 왔는데, 여러 가지 일로 이곳에 좀 더 일찍 오지 못했다. 세례 지원자들을 세례받기를 갈망하고 있다.” 3월 29일(토)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출석자 명부를 살펴보고 또 다른 일들을 챙기며, 또 내일 예배를 준비하며 하루를 보내었다. 오후에는 팔려고 내놓은 집을 보러갔다. 그 집은 남쪽지역에서 이제껏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좋고, 또 외국인들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지어진 주택이었다. 내일의 일을 줄이기 위해서 나는 조력자와 함께 세례 지원자들을 시문하였다. 늙은 여자들까지도 주기도와 십계명 및 사도신경을 외울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구원의 지식과 성례의 의미 그리고 간단한 교회의 통치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한 여성만이 구원의 섭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례가 늦추어져야 하였다. 또 한 청년이 모친과 싸워 세례가 늦추어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역시 세례 지원자인데 그 은총에 참여할 마음의 평화가 없기 때문에 세례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우리의 회의를 마치니 11시였다.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3월 30일 주일은 부활주일이었는데, 학습과 세례 지원자를 문답하고, 세례와 성찬식을 거행했다. 이날 일기는 아래와 같다.
“밤새 많은 비가 내렸으며, 아침에도 계속 비가 내린다. 사람들이 도착하자마자 세례 받을 사람과 학습 받을 사람을 시문하였다. 오전에 날씨가 개였으므로 나는 성례를 오후로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침예배 때는 요한복음 20:1―10을 본문으로 택하였다. 두 예배 중간에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왔으며, 그들도 역시 시문을 받았다.
3시에 오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먼저 나는 12명의 어른들에게 세례를 주고 다음에 4명의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어린이들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그 후에 세례를 받은 신도들에게 주의 만찬을 집전하였고 마지막으로 9명을 세례지원자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세례교인 수는 13명이 되었다. 장 서방의 부인은 예전에 군산에서 한국 남부지역 미국장로교 선교단의 선교사로 부터 세례를 받았었다. 14명의 세례지원자 중 2명이 날씨 때문에 참석치 못하여 세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5명의 세례 받은 어린이 중의 1명은 장 서방의 아들로 이미 군산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밖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여러 가지 질문도 하였다. 이들은 8개 지역의 주민들이다. 다음번에 이곳을 방문하면 오늘 참석하지 않을 몇 사람을 세례 입문자를 받아들일 것이다.”
울산 병영을 네 번째 방문한 때는 1902년 12월 11일이었다. 밤늦게 이곳에 도착하여 12월 12일 토요일에는 주일을 준비했고, 12월 13일에는 4사람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아침예배에는 비록 적은 성도들이 모였지만,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망설이던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좋은 참석율이었다. 중간에 세례 입문반 지원자와 세례 지원자를 문답하였는데, 오후 예배시에 네 명의 여성이 세례 받았고, 열세명의 교인이 목회자와 함께 주의 식탁에 앉았다. 세밀히 조사한 후에 몇 명의 세례 준비자들을 명부에서 제명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임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 금천, 학동, 서생, 안평 등을 거쳐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에서 왕길지는 9게 지역을 방문하였고, 12명의 세례지원자를 얻었다. 특히 학동에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런 노력으로 울산고 인근 지역에 믿은 자들이 생겨나게 되고, 1895년 10월에 설립된 울산 병영교회에 이어 인근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은편교회(1899), 언양제일교회(1902. 9), 천전교회(1905, 경남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기장교회(1905. 10), 울산제일교회(1906. 2), 양산교회(1906. 4)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복음운동이 오늘의 울산지역에서의 기독교 신앙운동의 시작이 된다.
6. 울산병영 지역 초기 신자 이희대
울산지역, 특히 병영의 첫 신자는 이희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울산과 병영을 왕래하던 무어와 멘지스 등 호주선교사들과 접촉하는 중에 신자가 되었고, 처음에는 어머니와 숙모와 함께 부산진까지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교통의 불편함 때문에 1895년 병영 서리 372번지 자신의 집에서 어머니, 숙모, 그리고 이웃의 김본혜, 박정아, 이선대와 함께 아담슨의 인도로 예배를 드린 것이 울산지역 첫 교회인 병영교회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사기 상권』 1895년 항에는 병영교회 설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울산군 병영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是)에 리인(里人) 이희대(李喜大)가 복음을 득문(得聞)하고 린인(隣人)에게 전도하여 신도가 점흥(漸興)함으로 교회가 성립되니라.”
호주선교사 문헌, 특히 왕길지 문헌에서 이희대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901년 3월 12일자 일기인데, 왕길지는 이희대를 Heday로 표기했다. 1900년 왕길지가 내한하기 전까지는 손안로 선교사가 경남 동부, 곧 기장 언양 울산 등지를 관할했다. 그러나 왕길지의 내한 이후 선교구역을 조장하여 위의 지역을 왕길지가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안로 역시 이 지역을 포기하지 않고 방문하는 일로 선교사 간의 담당지역 문제로 불화가 야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희대 또한 처신하기 어려워 힘겨워 했으나 선교부의지역 담당결정을 존중하여 왕길지 목사와 관곟기를 소망하였는데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왕길지의 일기 속에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그 첫 언급이 1901년 3월 12일자 일기였다.
“전에 우리 교회의 초신자였다가 그의 어머니와 숙모와 함께 울산으로 가서 작년에 모임을 시작하여 우리 여신도들을 불러올렸던 Heday가 최근에 여기에 왔다. 나는 지난주일 예배에서 그를 보았다. 오늘 그가 방문하여(그와 함께 울산의 다른 사람들도) 전처럼 우리와 유대를 가지기를 매우 바라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희대를 중심으로 하는 아담슨과 왕길지 간의 문제는 왕길지 일기 1901년 3월 12일자에서 18,19, 21일자에서 언급되고 있다. 어떠튼 이희대를 중심으로 시작된 병영교회는 점차 성장하였고, 1910년에는 이교회에 출석하던 손진병, 박종하에 의해 지당교회가 설립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사기 상권』 1900년 항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울산군 지당(池塘)교회가 성립하다. 초에 손진병(孫晉柄), 박종하(朴鐘夏)가 병영교회에 왕래예배 하더니 가옥을 매수(買收)하야 교회를 설립하니라.
맺으면서
이상에서 울산지방에서의 기독교의 기원과 초기 상황 대해 소개하였다. 초기 미국북장로의 베어드의 순회전도와 호주선교사들의 활동, 특히 왕길지 선교사의 울산 병영 지역 방문과 선교활동을 소개하였다. 이런 선교사들의 헌신과 초기 한국인 권서들의 매서전도의 결과로 이희대가 회심하여 첫 신자가 되었고, 그를 시작으로 그의 모친, 고모, 주변인물이 입신함으로 울산지방 첫 교회가 1895년 병영에 설립되었음을 소개하였다. 그 후 여러 지역으로 복음이 확산되어 주변지역에도 교회가 설립되었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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