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부동산”
삼옥리 토지 매매건 입니다.
오늘은 매일 다니는길로 가지말고 예전길로 가볼까 합니다.
새로난길은 터널로 멋지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가끔 구길로 다녀보면
어! 여기가 이렇게 멋있었나하고 종종 놀라곤 합니다.
그 전에는 그저 그냥 지나쳤는데
지금은 어딜가든 유심히 관찰하고(좋은 땅 있나? )다니는 점이 달라서일까요.
예전길을 보면 거의 운치가 있습니다.
또 차들이 다니지 않아 한가로운점도 좋고요.
삼옥리로 접근하는 예전 구길에서 삼옥리 쪽을 향하여 찍었습니다.
좀 험한듯 보이지만 멀리 보이는 도로로 접근하는길은 지금은 완전 평지나 다름 없습니다.
동강시스타,??박물관등 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는 곳이니까요.
토지의 명세는
대 지: 340㎡ 103평 전: 270평 계: 373평 입니다.
계획관리지역. 매매가: 1억 3천만원
좀 비싸다고 생각하실수 있으나 이곳 시세로는 아주 싼 가격 입니다.
영월에서 가장 토지가격이 비싼곳이 삼옥리고 그중에서도
이곳 토지 주위가 가장 비싼 곳이라고 생각 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곳 매물이 나와도 잘 올리지 않았습니다.
가는길데 보이는 삼옥리 둥글바위의 모습 입니다.
이곳을 지나가게되면 가다오다 보이는곳 영월 동강의 랜드마크(?)라 본인이 명명 합니다.
이렇게 생긴 도로를 지나서......
강가에 피서객들이 보입니다....
목적지 입니다.
좌측으로 대문이 보이고 울타리(녹색철망)안으로 입니다.
입구의 모습 입니다.
열쇄가 .....
토지앞 도로의 모습으로 더가면 두집이 있고 끝.
조금더 뒤로 나와 입구 전체의 모습이 파악되게 찍어 봅니다.
울타리로 경계를 표시하였습니다.
간이 화장실을 갖다 놓았습니다.
대지 자리에 콘테이너가 있고 스카이 라이프 있는걸 보니 TV도 있나?
열쇄가 없어서 ...........
매실이 심어져 있습니다.
옆 토지 경계의 모습 입니다.
매매하고자 하는 토지는 울타리가(녹색 철재 울타리) 둘러쳐져 있고 그안에 매실나무가 있으며
옆 토지는 옥수수가 자알 자라고 있습니다.
뭔가 미진한것 같아(한컷에 토지를 전부 담아야 하는데...) 항공사진을 첨부 합니다.
노란 부분이 목적 토지이며
이런 안내판도 있네요.
두 사진을 비교해 보면 대비가 됩니다.
일명 벌말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고 삼옥교 좌측 입니다.
삼옥리의 유래는
동강이 마을 앞으로 휘돌아 나가며 농업을 행하고 있는 농촌이다. 낙엽송과 잣나무 숲이 울창하며 맑은 샘물과 산신당이 있는 삼옥재가 위치한 마을이라 삼옥리라 불리게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번재, 사지막, 섭사 등이 있다.
이렇게 되어있고
재미있는 지명유래가 있어 실어 봅니다.
땍빼리(닥바우)
번재(番峙)에서 덕포로 가는 길가에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신작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꽃밭여울에 있는 구길을 이용하여 읍내로 다녔는데, 그 길가에 큰 벼랑이 똑바로 서 있으므로 '땍빼리'라고 한다.
'빼리'는 '절벽이→벼랑→벼리→빼리'로 변화된 것으로 예전에 이 벼랑 밑으로는 푸른 강물이 흐르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길이 좁고 험해서 짐을 진 사람들은 옆으로 걸어다녔다고 한다.
꽃밭여울
땍빼리와 자연암(紫煙岩)사이에 있다. 이 곳은 물이 얕으면서 세차게 흐르는 여울목이다. 늦봄인 5월이 되면 바위에 붙여서 자생하던 철쭉꽃이 연분홍 빛깔의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므로 '꽃밭여울'이라고 한다.
둠벙소
번재의 자연암 밑에 있는 깊은 소(沼)이다. 가마솥처럼 검은 구멍이 둠벙났다하여 '둠벙소'라고 하며, 이곳에는 지금도 쏘가리가 많이 잡힌다.
번재(番峙)
덕포리에서 삼옥으로 가는 첫 번째 마을로 자연암 앞에 있다. '번(番)'이란 돌아서 간다는 뜻이고 '치(峙)'는 '고개'를 뜻한다. 삼옥으로 가는 신작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이 마을로 가자면 벼랑(병창) 밑을 빙글빙글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번재(番峙)'라고 하였다.
자연암(紫煙岩)
삼옥의 번재 앞에 있는 큰 바위로 일명 '둥글바위'라고 한다. 자연암은 번재마을의 넓은 백사장과 봉래산의 충암절벽이 어우러진 동강 가운데 우뚝 솟은 큰 너럭바위로 「寧越府邑誌」에는 『在郡東二十里 川上面巨巖盤屹江中可坐百餘人 兩巖時立江邊巖成三峯中通巨?...』라고 하여백 여명이 앉을 수 있는 큰 바위라고 수록하였다.
안돌
번재서 땍빼리를 지나 강을 따라 이어지는 옛 길이 있는 바위이다. 먹골어구로 도로가 나기 전에는 이 바위를 한 사람이 겨우 안고서 돌아가야할 정도로 좁은 벼랑길이었다. 예전에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 윗마을 먹골의 처녀가 내려오고, 번재의 총각이 먹골로 가다가 두 사람은 이 벼랑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길이 좁아 서로 꽉 껴안고 지나갔는데, 결국은 그 인연으로 결혼을 하여 잘 살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바위는 처녀, 총각이 서로 안고 돌았던 바위므로 '안돌'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송이골
벌말 북쪽에 있는 소나무 숲이 무성한 곳이다. 이 곳은 자식에게도 안 가르쳐 준다는 송이밭이 있어서 '송이골'이라고 한다. 송이골을 지나면 북면 마차리로 가는 길이 있었다.
삼옥나루터
안돌에서 윗벌말로 건너다니던 나루이다. 지금은 삼옥교가 완공되었으므로 이 나루터는 없어졌다.
삼옥재(三玉峙)
삼옥초등학교가 있는 아랫말에서 영월읍 속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여름 한철 장마로 물이 불어나면 나루터를 이용할 수 없는 거운, 문산리 사람들은 '진구비'와 '당목이재'를 넘고 벌말을 거쳐 영월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삼옥재'이다. 이곳 삼옥재는 낙엽송과 잣나무 숲이 울창하며 맑은 샘물과 산신당이 있었다.
현재는 탄광과 석회광산의 개발로 화물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개통되었으나 산사태로 많이 파손되었다. 그러나 삼옥온천이 개발되면 삼옥재를 넘어가는 교통로가 개설될 계획이다.
솔치(松峙)
송이골 뒤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송이골에서 북면 마차리로 넘어가는 잿말랑 부근에 큰 소나무 숲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옻물내기
삼옥리 벌말(平村)에서 거운리로 넘어가는 당목이재에 있다. 예전에 나무를 때던 시절 옻 오른 사람들이 이곳 옷물내기의 물을 먹기 위하여 많이 찾았다고 한다.
바닥골
삼옥교에서 도로를 따라 먹골로 가다가 우측 첫 번재에 있는 작은 골이다. 윗산에 큰 박달나무가 있어서 이 나무로 빨래 방망이와 다듬이판을 많이 만들었으므로 '박달골'이라 한다.
사지막(砂地幕)
목골(먹골)의 강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층암절벽의 봉래산을 등 뒤로 하고, 앞으로는 드넓은 모래벌과 오염되지 않은 푸른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할 때 모래 위에다 움막을 짓고 살았으므로 '사지막'이라 하였다. 마을 앞에는 먹골로 건너가는 사지막 나루터가 있으며, 위쪽 강가에는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굴이 있다.
먹골 열녀각
먹골의 도로 우측에 있으며, 정의영(丁義英)의 처 평창(平昌) 이씨의 열녀각이다. 금실이 좋았던 정씨 부인은 남편이 사지막 잔칫집에서 밤늦게 돌아오다가 얼음이 깨지면서(음력 12월 22일) 강물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구하려고 얼음 구덩이로 뛰어 들었다가 두 손을 꼭 잡은 채 함께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정시 문중에서는 이를 기리기 위해 『學生丁義英妻孺人平昌李氏烈女之門』이라는 열녀문을 세웠다.
먹골 서낭당
먹골에서 섭사로 가는 도로 우측에 있다. 예전에는 음력 보름에 제(祭)를 올렸으나, 지금은 음력 초순에 왼 새끼에 문종이를 끼운 금줄을 서낭당에다 매어 놓고 붉은 진흙을 뿌려 잡귀의 근접을 막는다. 그리고 삼색 실과와 주과포를 준비하여 당고사를 지낸다.
섭사(涉砂)
거운리 동남쪽의 강가 마을이다. 삼옥리와 거운리가 접하는 곳으로 예전부터 강물이 자주 범람하여 물결에 밀리어 쌓인 보드라운 모래와 자갈로 마을 전체가 덮여있다. 농경지를 개간하기 위해서 골라 놓은 작은 돌서덕이 밭둑 곳곳에 있으며, 모래가 쌓인 내를 걸어서 건너야 했으므로 '섭사(涉砂)'라 한다. 섭사의 서낭당에는 여러 그루의 늙은 당목이 서있다. 93년부터 홍수 방지를 위한 제방을 쌓아 섭사의 강물 범람을 막고 있다.
지루하지 않으셨나 모르겠네요 ^^
위의 글을 미루어 상상해본 모습과 지금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
한마디로 桑田碧海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