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태허정 최항 (太虛亭 崔恒) 1409~1474 /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생애 및 업적 1434년(세종16) 과거(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종이 승하(1450년)하실 때까지 16년간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으며, 특히 훈민정음[訓民正音(한글)] 창제의 주역 인물이었음. 또한 청백리(淸白吏)로 40년간 관직생활을 하였고, 부친의 거상시묘(居喪侍墓)살이 중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왕명에도 불응하는 등 조선왕조 선비의 기개(氣槪)와 효행(孝行)의 표상(表象)이었음. 주요저서로는《동국정운(東國正韻)》,《경국대전(經國大典)》,《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등이 있음. 최항(1409~1474) 선생의 자(字)는 정보(貞父), 호(號)는 태허정(太虛亭) 또는 동량(㠉梁), 군호(君號)는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본관(本貫)은 삭녕(朔寧)이다. 선생은 세종16년(143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함으로써(26세), 그 학문(學問)의 심박(深博)함이 인정되어 세종대왕으로부터 방방일(放榜日)로 집현전(集賢殿) 부수찬(副修撰)에 특수[特授:특별히 제수(除授)]된 이래 세종32년(1450) 세종대왕께서 승하(昇遐:임금의 돌아가심)하실 때까지 16여년간을 집현전에서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전념(專念)하였다. 훈민정음 창제(創制)에 관하여는 세종대왕의 특지(特旨)까지 받으시고, 그 수석연구관(首席硏究官)으로 창제에 참여한 집현전 8학사들과 더불어 불철주야(不撤晝夜)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주도적(主導的)으로 연구한 결과, 세종25년(1443)에 훈민정음 창제를 완성, 동 왕28년에 반포되었으며, 또한 동국정운(東國正韻)·자치강목(自治綱目)·통감훈의(通鑑訓義)·동국통감(東國通鑑)·경국대전(經國大典) 등 국가통치의 근간(根幹)이 되는 많은 저술(著述)을 비롯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 40여권을 찬술(撰述)하시었고, 태허정 시집(太虛亭 詩集)에는 200여편의 각종 시문(詩文)이 실려 있으며, 2권의 태허정 문집(太虛亭 文集)에는 다양한 종류의 저술『서(序)·기(記)·좌목(坐目)·발류(跋類)·서류(書類)·표류(表類)·전류(箋類)·소류(疏類)·제문류(祭文類)·비명류(碑銘類)·찬류(贊類)·보유(補遺)·행적(行蹟)』등이 수록(收錄)되어 있다. 이 내용 중에는「어제의 서(御製序)」,「경서의 발(經書跋)」,「왕지의 서(王旨書)」,「국서의 표문(國書 表文)」,「전문(箋文)」, 「고문전책(高文典冊)」의「진전문(進箋文)」,「임금과 왕실의 만장(挽章)」,「비명(碑銘)」,「제문(祭文)」등이 수록되어 있는 바, 조정(朝廷)의 웅문대책(雄文大冊)은 모두 선생의 손에서 나왔으며, 화인(華人)들도 항상 우리나라의 표사(表詞)가 정밀하며 적절하다고 칭찬할 만큼 선생의 문장은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이 막힘이 없는 탁출(卓出)한 문장이었다. (원문: 華(덧말:화)人(덧말:인)每(덧말:매)稱(덧말:칭)我(덧말:아)國(덧말:국)表(덧말:표)詞(덧말:사)精(덧말:정)切(덧말:절)) 또한 선생은 시문(詩文)에도 능통(能通)하여 궁중종묘제례악(宮中宗廟祭禮樂)의 악장가사(樂章歌詞)까지도 작사(作詞)하였고, 변려문(跰儷文:四六文)에 정통하는 등 문장의 재질이 뛰어났기 때문에 당시의 임금은 선생을『진천재(眞天才)』또는『유웅(儒雄)』이라고 까지 극찬하였다. “선생은 도덕(道德)이 높고 박학다식(博學多識)하며, 천품(天稟)이 어질고 겸손하여 항상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었으며, 언제나 신중하여 삼사일언(三思一言)과 삼사일행(三思一行)을 실천하였다. 비록 한 더위에라도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온종일 예의에 벗어난 용모(容貌)를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독서(讀書)에 탐닉(耽溺)하였고, 특히 기억력이 뛰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선생은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탁출(卓出)하였을 뿐만 아니라, 효행(孝行) 역시 탁이(卓異)한 선비였으니, 세조4년(1458, 50세)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시묘(侍墓:부모의 거상중에 무덤옆에 막을 짓고 3년동안 지내는 일)살이 중에 있었는데, 그 다음해인 1459년 4월 28일(己卯(덧말:기묘)) 임금께서 기복(起復:관직에 복귀)을 명(命)하였으나, 그 명령이 자식된 도리는 물론 조정의 기강에도 벗어나는 일로 옳지 못하므로 응할 수 없다는 진심어린 글을 3회(5월 11일, 5월 12일, 5월 13일)에 걸쳐 왕에게 상서한 내용, 즉 ‘기복불응상서문(起復不應上書文)’이 조선왕조(세조)실록에 실려 있다. 예로부터 효행(孝行)은 모든 덕행(德行)의 근본(孝百行之本:효백행지본)이라는 말이 전하는 바, 아마도 최항(崔恒) 선생의 행적을 두고 하는 말인 듯 하다. 선생의 이 모든 업적과 덕행은 인륜과 도덕이 무너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본받아야 할 참다운 교훈(敎訓)으로써, 그 업적을 길이길이 추모 현양함이 우리들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