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사 박영효 그리고 민영익은 1883년 1월 귀임했고, 김옥균은 계속 남아 추가적인 차관(일본군 차병(借兵)을 위한) 도입의 가능성을 타진하였습니다. 유길준은 박영효, 민영익 일행과 같이 귀국하였습니다.
유길준은 새로 신설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즉 외아문(外衙門)의 주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길준은 박영효 밑에서 신문 발행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박영효는 귀국 후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에 임용되었고, 일본에서 신문제작과 인쇄 기술자 7명을 데려왔습니다. 이들 가운데 유길준과 같이 경응의숙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유길준은 신문제작에 큰 뜻을 품고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부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에서 그러하였듯이 언론을 통하여 국민들을 계몽하고 나라를 개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고종은 한성부에서 신문을 발행하라는 명을 내렸고, 유길준은 <한성부신문국장정> 그리고 <신문 창간사>와 <해설문> 등을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신문 창간사는 국한문 혼용으로 쓰여졌습니다. 여기서도 유길준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다. 유길준은 이 신문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발간되는 신문 제1호라고 하면서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요한 본령은 한 나라 인민의 지견(智見)을 확대하는 데에 그치지 않으니, 크게는 만국 정치 사리로부터, 작게는 일신 일가의 다스림(修齊)에 이르게 하여, 일신 우일신 그 비루한 습속을 벗어 버리고 개명한 세계 변화(化運)에 향하여 폐해를 제거하고 올바른 이치를 돌아보며 불편을 버리고 유익함을 취하여 그 나라의 문명을 증진케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이광린, 유길준, 30쪽, 원문 국한문 혼용, 한글 번역은 필자)
그러나 유길준의 뜻은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신문 발간을 의욕적으로 진행하던 중 박영효가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로 좌천된 것이었습니다. 신문 발간에 대한 수구파의 견제가 작용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유길준의 신문 창간은 좌절되었고, 곧 외아문의 주사직도 내놓았습니다. 유길준은 정계에서 물러나 집에 머물며 <서유견문>를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최초 원고도 누군가 훔쳐갔습니다(이광린, 유길준, 35쪽).
한편 6개월 뒤에 <한성순보>가 창간되었습니다. 박문국 수장은 온건개화파의 김만식이었고, 신문은 순 한문으로 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문의 기본 체제와 내용은 유길준의 구상에 기초를 두었습니다(김복수, “유길준의 개화운동과 근대신문 창간에 미친 영향”, 한국언론학보, 제44권 4호, 한국언론학회, 2000, 22쪽). 유길준의 원래 포부에 미치지 못하였겠지만, <한성순보>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으로서 개화의 창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