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중 본 작품이 데칼로그 시리즈 중 1편과 이 작품밖에 없지만, 두 작품 모두 짧은 런닝타임 안에서도 양가적 고민을 안기는 것이 굉장하다 느껴졌다. <데칼로그1> 에선 신의 존재에 관해서였고, 이 작품에선 사랑에 관해서였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하 <사짧필>)은 토멕과 마그다를 대립항으로 놓고 사랑의 형태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내가 고민해보게 된 것은 첫번째, 사랑과 이해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토멕의 사랑엔 이해가 결여 되어있다. 토멕의 사랑은 그저 보는 것이다. 창문을 통해 먼 거리에서 관음을 한다. 네모의 창을 통해 먼 거리의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어딘가 익숙한 관계이다. 내가 떠올린 것은 아이돌과 팬과 관계였다. 네모 폰으로 직캠 등의 영상들을 보며 사랑하는 것. 네모 창, 혹은 화면으로 보여지는 것만 볼 수 있는 관계. 토멕은 또한 가짜 송금표를 통해 우체국으로 불러와서 마그다를 본다. 이 또한 기시감이 든다. 짧은 대화만이 전부인 아이돌의 팬미팅이 떠오른다. 게다가 토멕은 상대를 알아갈 수 있는 전화가 연결 되어있을 때에도 아무런 말 않는다. 이 사랑은 누군가의 일면만을 보는 이해와 가장 먼 곳에 있다. 관음으로 과격하게 표현했지만 아이돌의 비유로 생각하면 우린 이것을 당연히 사랑이라 부를 것이다.
반대로 마그다의 사랑은 토멕을 이해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사랑한다 빨간 창 앞에서 말한 토멕을 자신의 방에 불러 압박하며 사정하게 하던 구도를 떠올려 보자. 영화의 후반부에서 마그다는 토멕의 공간에서 객체가 된 자신을 보며 웃는다. 망원경으로 우유를 떨어뜨린 자신을 바라본다. 약해진 자신을 보듬어주며 사랑해주는 토멕의 모습을 본다. 이때의 구도는 마그다의 방에서의 구도와 역전된다. 애정을 담아 자신과 토멕을 지켜보며 이해한다. 그렇게 둘의 사랑이 교감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손이 맞닿아야 박수가 되듯 쌍방향으로 흐르지 않는 둘의 사랑은 각자의 품에서 해소될 수 없다.
두번째 고민은 사랑과 욕정, 혹은 욕망과의 관계에 대해서였다. 토론 직전까지 나는 토멕의 사정이 결국 욕망에 굴복하는 순수라 생각을 했다. 토론을 함께한 다른 학우님의 생각은 달랐는데, 사정까지 할 정도의 유혹이었음에도 도망침으로서 순수성을 지키려는 시도라는 것이었다. 토멕과 마그다를 대립항으로 본다면 후자의 감상이 더 적절하다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지키려던 순수가 파괴되었을 때 토멕의 사랑 또한 무너진다. 영화 초반의 치통은 다른 고통으로 잊는다는 친구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 무너진 토멕의 사랑은 입원 혹은 죽음까지 이어질 정도의 아픔으로 잊을 슬픔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결국 고민은 플라토닉 러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육체적 관계가 없는 사랑에 회의적이었으나, 토멕의 사랑을 인정한 순간 이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한 이해와 욕구 어느 쪽을 택하던 택하지 않던 우리는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그 모든 논의들이 결국 사랑이란 단어 아래에 귀결되기에 <살짧필>이, 사랑에 관한 수많은 논의들이 매력적이게 느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