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아들> 감상문
사회학과 2024130565 최우영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홀로코스트는 그저 ‘한 세기 전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전쟁 범죄’였다. 토론하면서 상대방을 비판할 때 ‘그 주장은 나치즘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 적도 몇 번 있지만, 나치가 나쁘다는 것을 일종의 수학적 공리처럼 써왔을 뿐 막상 나에게도 크게 와닿지 않았다. 지금까지 안네의 일기, 바스터즈, 조조 래빗 등등 나치 집권기를 다룬 많은 매체를 봤지마는 마찬가지로 체감되지 않았다.
영화를 시작한 지 첫 씬 만에 비로소 아우슈비츠가 어떤 존재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얇은 벽 너머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것을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체험할 수 있었다. 13인치 노트북으로 보면서도 몰입도가 높아서 영화를 끄고 싶은 욕구를 몇 번 참았다. 주인공은 널려있는 시체를 토막처럼 나르고, 피를 닦고, 아들이 죽임당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을 학살할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하루에 몇백 명씩 죽어 나가고, 동료가 죽는 사건이 반복되다 보니까 존더코만도에 이입해서 영화를 보는 나도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의 죽음이나 홀로코스트 행위에 무관심해졌고, 주인공의 임무와 안위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극 중 죽음이 가까워진 존더코만도들이 우리 일상에서처럼 ‘예쁜 여성 수용자가 너에게 관심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씬은 환경에 적응하고 무뎌진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학살을 일으킨 나치들의 모습도 존더코만도의 이러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사유를 게을리한 채 상투적이고 관료적인 언어에 머무를 때 극단적인 행위가 정당화된다고 말했다(악의 평범성). 데이비드 L. 스미스는 타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할 때(비인간화) 통제됐던 공격성이 풀려날뿐더러 폭력 행위를 도덕적 의무로 착각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나름대로 종합해서 결론을 내려보자면,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고, 따라서 환경을 극복하고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성을 잃어간다는 ‘문제 상황’ 속에서 주인공 사울이 택한 ‘해결 방안’은 아들 시신을 장례 치르는 것이다. 사울은 봉기를 준비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꿋꿋이 시신을 탈취하고 랍비를 찾아서 몰래 데려온다.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다. 장례에 집착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유대인 사이에서는 화장을 법으로 금지하며 반드시 매장해야 한다는 관습이 있다. 육체를 하나님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야 하는데 시신을 화장해버리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치에게 잡히면 큰일 나는데’, ‘생존해야 하는데’, ‘봉기 계획이 틀어지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는데, 사울은 이러한 생각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그 너머를 본 것이 아닐까 싶다. 동료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를 버린다’며 사울을 나무란다. 사울은 ‘우리는 어차피 이미 죽어 있었어’라고 답한다. 존더코만도들의 봉기는 생존, 복수, 응보의 수단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관점과도 부합한다. 효용성의 관점에서 생각해봐도 나치의 전력을 약화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울은 아이의 장례가 인간성을 지키는 행위라고 믿는다. 투쟁의 길을 택해도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고, 매우 운이 좋아 생존해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학살을 방조했다는 상흔에서 해방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존더코만도로 생활하면서 찌들은 어른들과 대비되게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를 하느님께 그대로 올려보내는 것이 종교적으로 성화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아이가 실제 사울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는 언급이 꾸준히 나오는데 이는 사울의 행위가 그저 혈연관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박애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행위라는 점을 암시한다. 마지막에 주인공 앞에 다른 한 명의 아이가 등장한 것도, 주인공의 이름이 성경 인물 ‘사울’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가장 비인간적인 곳에서 우리는 인간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여러 인간군상의 존더코만도들이 보여주듯이, 의식주와 생존 욕구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도 있고, 할 수 있는 최대한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종교적인 연결과 성화를 택할 수도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인간성’에 따라서 삶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중요하다. 홀로코스트의 기제가 될 수 있는 비인간화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미국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한 트럼프는 이민자들을 일컬어 인간이 아닌 존재, 해충, 침략자라고 말하곤 한다. 한국에서도 난민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부상하고 있고, 기후 변화가 심각해짐에 따라 난민은 더더욱 늘어날 것이다. 무엇이 인간성인지, 그에 따라 개인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는 꾸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한 문제지만, 적어도 공감과 역지사지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비인간화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에 비춰 봤을 때 자명해 보인다.
<슬픔의 삼각형> 감상문
사회학과 2024130565 최우영
슬픔의 삼각형은 젠더, 계급, 인종 등 여러 양상의 권력 관계를 끈질기게 뒤집고자 하는 영화적 시도이다. 이 영화는 총 세 장으로 나뉜다. 1장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지위가 높은 패션모델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모델 커플의 갈등이 나타난다. 2장에서는 인플루언서 협찬을 통해 부자들이 타는 크루즈에 탑승한 모델 커플과 주위의 다양한 상류층 인간군상들이 만들어내는 크루즈의 사건들을 다룬다. 3장은 크루즈의 침몰로 무인도에 표류한 8명의 생존자 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1장에서 남자 ‘칼’과 여자 ‘야야’의 갈등은 레스토랑에서 일어난다. 야야는 돈을 내지 않으려 하고, 칼은 그 부분에서 불만을 품는다. 야야는 ‘돈을 언급하는 것은 섹시하지 않다’라며 남자로서 칼이 찌질하다고 여긴다. 칼은 ‘우리가 성 역할에 얽매여 있어서 그렇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가 되고 싶다’라며 반박한다. 미시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권력 관계는 사회적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여성은 여성성에 의해 제약되는 ‘제2의 성’으로서 존재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남성이 여성이 착취하는 관계로 바라볼 수는 없다. 남성 또한 구조적으로 남성성에 제약된다. 남성은 ‘돈을 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다. 여성은 ‘돈을 내게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다. 실제로 얻는 금전적 이익이 핵심이 아니라, ‘남성이 이 정도를 내게 하는 여자’가 되고 싶은 욕구가 핵심이다. 남자는 성 역할이 진정한 에로스의 걸림돌이 되는 바로 이 부분에서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특히 패션모델계에 속해 있는 만큼, 돈을 덜 버는데도 남성성을 요구받는 데에서 모순과 압박을 더 크게 느꼈을 것이다. 여자는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과연 그 남자가 나를 보호해줄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존의 성 역할을 옹호하는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타당하다. 인간에게는 생득적으로 주어진 성별(섹스)과 그 성별에서 파생되는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득적 성별까지 해체하려고 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어찌 됐든 패션모델계라는 뒤집힌 세상에서,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여자가 남자보다 더 지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성과 남성성은 여전히 인간을 제약한다. 자본주의의 계급적 욕망이 성 역할을 강화한다고 보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초점을 자본주의로 확장한다.
2장의 크루즈는 돈이 지배하는 곳이다. 꼭대기 층에서는 부자들이 유희를 즐기고, 두 번째 층에서는 백인 승무원들이 팁을 노리며 근무를 하고, 보이지 않는 마지막 층에서는 유색인종 노동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육체노동을 한다. 전형적인 설정이지만 자본주의 구조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크루즈 안에서 ‘불결하게 취급되는 것’은 항상 가려진다는 것이다. 부자 승객들이 배에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돛이 더럽다며 시정 요구를 하면 선장과 승무원들은 그저 동의한다. 겉으로 항상 세련되어 보이고자 하는 이러한 태도는 본인들에게도 귀속된다. 거친 풍랑 때문에 선체가 크게 흔들림에도 부자 승객들은 꿋꿋이 음식이 맛있다고만 하며 마치 풍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는 사이에 풍랑은 더욱 거세져서 한 명씩 구역질과 구토를 시작하고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배설물이 역류하고 구토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총체적 난국에서, 사회주의자인 미국인 선장은 자본주의자인 러시아인 부자와 함께 농담 따먹기를 하듯이 각자의 사상에 부합하는 사상가들의 명언을 주고받으며 배를 유기한다. 이 대목에서는 현실과 유리된 정치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치가 하나의 장을 형성하고 정치인들끼리 싸우는 흉내를 내면서 적대적 공생을 하는 와중에 현실 사회는 침몰해 간다. 그 와중에 변기를 붙잡고 이리저리 휩쓸리며 구토를 하는 부자의 모습은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인다. 아비투스로 꽁꽁 감싼 인간 본연의 너절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이 부분은 ‘돈을 언급하는 것은 섹시하지 않다’고 말한 야야의 말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내 옆에 있는 하나의 사람처럼 느껴질 때는 성적 대상화가 발생하지 않는데, 궁색한 돈 얘기를 하지 않거나, 인스타그램의 사진 몇 장으로만 볼 수 있는 존재일 경우에는 성적 대상화를 하기 쉽다. 자본주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가리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장에서는 크루즈가 표류하면서 무인도에 떠밀려온 8명의 생존자 간에 새로운 권력 관계가 조성된다. 인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계급의 탄생을 재구성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사회 실험이다. 크루즈에서 최하층 신분이었던 필리핀 이민자 여성 에비게일은 뛰어난 사냥 기술과 생존 기술, 크루즈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통해 섬의 ‘선장’이 된다. 2장에서 처칠과 대처의 명언을 인용했던 러시아 자본가는 섬에 표류하자 능글맞게 ‘능력에 따른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는 공허한 울림에 그친다. 에비게일은 축적한 사유 재산을 통해 야야의 남자친구인 칼의 성을 구매한다. 겉으로는 안온한 무인도의 공동체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균열과 불신이 존재한다. 그러던 와중 야야와 에비게일이 둘이서 탐험 끝에 섬의 호텔을 찾는다. 현실 세계로 돌아갈 처지에 놓이자 에비게일은 섬에서의 권력을 잃고 청소 노동자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커다란 돌을 들고 야야를 내려칠 결심을 한다.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치는 것을 망설이는 야야의 표정과 불길함을 직감하고 뛰어가는 칼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열린 결말인 채로 영화는 끝난다.
‘과연 평등한 사회가 가능한가?’ 영화가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자, 영화를 구성하는 세 장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거대 담론이다. 권력과 폭력은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다. 남자에게는 근육이 있고 여자에게는 자궁이 있다. 젠더 불평등의 뿌리는 생득적인 섹스이다(1장). 외부적 재난에 의해 자본주의 구조(크루즈)가 전복되어도 불평등 구조는 유지된다(2장).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 무인도에서도 사유 재산과 권력 관계는 생겨난다(3장). 냉소적인 태도와 낙관적인 태도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블랙코미디 장르 특성상 언뜻 ‘평등 사회는 불가능하다’는 냉소적인 결말로 영화가 끝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주의의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불평등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해서 인종차별, 양극화, 젠더 불평등 때문에 삶을 살아갈 자유를 제약받고,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군주제 시기에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소아병 취급받았지만 끊임없는 민중의 노력 끝에 지금은 모든 나라가 민주정을 추구하듯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사회는 진보한다. 진보의 근원 또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에비게일이 야야를 살해하려고 하는 마지막 씬에서 에비게일의 슬픈 눈물과 고뇌는 인간 본성의 긍정성을 상징한다. 권력을 놓기 싫은 것도 인간 본성의 일면이고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것도 인간 본성의 일면이다. 수직적 관계를 추구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고, 수평적 관계를 추구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다. 귤화위지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본성과 성격은 어떤 환경에서 자라냐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 본성이 잘 자라나고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갖춘 사회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