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씨성의 시조 태사공 묘 아래 재숙(齋宿)하는 곳을 종덕재라 한다.
옛적에는 겨우 5간 이었는데 임신(壬申)년에 이축한 것이 창대 함으로
거의 타성씨의 하는바에 부끄럼이 없고 제사한 위토도 많다하더니
을유(乙酉)년 광복의 처음에 정치제도상 토지법이 크게 개혁되어
다 몰수당하였고 경인(庚寅)년 난리에 종덕재에 북괴군 주둔으로
어지럽히고 퇴락하여 불인(不忍) 지경에 이르렀다가 난리가 평정한 후로
점차 보수하였으나 보수한 것이 다시 찌그러져 어찌할수 없었더니
명환(明煥) 재장 익환(益煥) 장재 때에 와서 서로 모의하기를 이것을
조금 조금씩 보수할 것이 아니라 많은 돈을 합하여 크게 보수하자 해서
복구를 하였다.
이 역사를 봄에 여러 일가들이 보조한 것은 백에 하나도 뒤따르지 못하였고
내가 근 20살 때 여러차례 참여하여 본즉 모든 자손이 불과 30여인이더니
오늘에는 배나 차편으로 경각간에 천리길 사방에서 모인 자손이 수
300여 인이기로 제사에는 다 용납을 못하게되자 동환(東煥)씨 재장이
명환(明煥)과 익환(益煥) 두 사람으로 더불어 각각 누 만금을 내고
경향간 여러 파의 보조를 받아 옛적 터 곁에다 집 한 채를 지어 부족함을
보충하고 그 주변에 전토(田土)를 사들여 정원의 규모를 확장하였으니
그 선조(先朝)받드는 정성이 참으로 가히 공경하겠도다.
낙성이 된 뒤로 전 재장 창녕사는 석필(錫泌)씨와 현 유사(有司) 하양 사는
명환(明煥)씨가 나에게 와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여러 일가 들의 성심성력
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전날 세 분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같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 하였을 것이다.
세 분들이 참으로 자기들의 공(功)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일가 로서는 가히
알지 못함은 없을 것 이다.
또한 이 집의 이름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고 이름을 한다면 가히 기문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자네가 이름과 기문을 하라 하기로 생각건데 내가 비록
불영하나 일찍 낙도 인선의 의(義)를 들어본 바가 있은 즉 어찌 가히 마음을
다하지 안 할 소냐.
장차 제사하는 의(義 )를 취(取)하여 반고(反古)복시 하자면 나의 생겨난 바의
말을 잊어버리지 않기로 이름하여 말하기를 반고당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말하자면 반고의 의를 말하기는 쉽거니와 행하기는 실로 어려우니 모든 일이
이루어지니 반드시 물(物)을 기다림에 있는 연유이다.
그러면 돈 있는 사람이 모든 의(義)의 일을 다한다하면 세상에 많은 돈을 가지고
스스로 장 담하는 자를 어디까지에서 그칠 것인고 반드시 다 그렇지도 아니할
것이니 여기에서 가히 정성이 없지 않고 그 사람의 어질고 우매함을 알아서
판단 할 것이라.
옛적 자사(子思:공자님 손자)가 말하기를 어진 사람은 돈으로 출세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내 몸으로 돈을 벌어들인다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 즉
평상시 말하기를 재물을 모으기는 쉬워도 재물을 쓰기가 어렵다 하였으니
쓰는 데에 그 길을 찾아 쓴즉 비록 쓴다해도 줄어지지 않을 것이니 과연
세 분들은 가히 쓰는 길을 찾았다고 하리라.
여기에 특별히 써서 무궁한 후세에 착한 모범이 되게 함이라.
갑인(甲寅)1974년 가을 절서에
동생 규철은 찬함
전남 종생 기동은 삼가씀
첫댓글 명환(明煥) 재장 익환(益煥) 장재 (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