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빠의 약속
은결이 아빠는 택시 운전을 합니다. 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충분히 잠을 자야 합니다. 그 날도 은결이 아빠는 밤 12시부터 그 다음날 12시까지 일하고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 왔습니다. 배가 고팠지만 밥을 먹을 힘도 없습니다. 닦고 자야 하는데 닦을 기운도 없습니다. 은결이 아빠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냥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커다란 고목나무가 쓰러지듯 그렇게 방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습니다. 두어 시간쯤 그렇게 자고 있었을까요? 무언가 자꾸 귀를 간지럽힙니다. 은결이 아빠는 눈을 뜨지 못한 채 신음처럼 말합니다.
“좀 조용히 해.”
그러나 여전히 귀를 간지럽힙니다. 누굴까요? 지금 은결이 아빠 귀를 간지럽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 핸드폰이군요. 은결이 아빠는 혹 회사에서 무슨 연락이라도 올까봐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핸드폰은 어느새 손에서 빠져나와 은결이 아빠 귀에 붙어 있군요. 그런데 그 핸드폰이 자꾸만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은결이 아빠는 할 수 없이 눈도 뜨지 못한 채 핸드폰을 받습니다. 은결이 아빠가 핸드폰을 받자마자 거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은결이 아빠죠? 도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겁니까? 댁의 은결이가 우리 아이를 괴롭혀서 우리 아들 성태가 오늘도 병원에 다녀왔다고요. 어제 밤에는 놀라서 잠도 못자고요. 우리 아이 잘못되면 책임지겠어요?”
순간 은결이 아빠는 잠에서 깨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눈이 얼른 떠지지 않습니다. 너무 피곤한 탓입니다. 수화기에서는 여전히 날카로운 음성이 쏟아집니다.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죠? 어떻게 책임을 질지 말하라고요.”
상대방은 다시 언성을 높입니다. 그런데 은결이 아빠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낑낑 거립니다. 도무지 말이 나오지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전화는 뚝 끊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다시 전화벨이 울립니다.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입니다.
“은결이 아빠신가요? 저는 새롬이 아빠입니다. 우리 새롬이가 은결이한테 오늘 얼마나 맞았는지 코피가 쏟아지고요. 어깨가 멍이 들었어요. 너무 놀라서 며칠 병원에 다녀야 한대요. 도대체 아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죠?”
죄송하다는 말을 할 사이도 없이 전화가 끊어지고, 다시 벨이 울립니다. 이번에는 여자 목소리입니다.
“1학년 3반 훈이 엄마입니다. 아니 도대체 은결이는 2반이라는데 왜 3반 교실까지 쫓아가서 우리 훈이를 때리느냐고요.”
세 통의 전화를 받는 동안 은결이 아빠는 그만 잠이 다 깨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몸은 천근이나 된 것처럼 무겁습니다. 일어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릅니다.
‘아니 이놈이 도대체 학교에서 어떻게 하길래 사방에서 항의 전화야?’
은결이 아빠는 은결이를 찾으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은결이가 들어오는 소리가 납니다.
은결이 아빠는 하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습니다. 은결이가 들어오자마자 은결이를 닦달합니다. 그런데 은결이는 한 명도 때린 일이 없다고 펄쩍 뜁니다. 맞은 아이들 이름을 대자 은결이는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아빠 아빠, 그건 내가 때린 것이 아니고요. 새롬이와 다른 애가 싸웠는데 새롬이가 억지를 부려서 제가 혼내준 거고요. 성태가 내 짝이랑 싸웠는데, 내 짝이 성태를 한 대만 때려주라고 해서 때려 준거고요. 훈이는 나한테 약을 올리고 도망가서 쫒아가서 그런 건데요. 세게는 안 때렸어요.”
은결이는 펄쩍펄쩍 뛰어가며 아빠에게 사정을 말했지만 아빠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아빠는 빗자루를 집어 은결이를 사정없이 때립니다. 할머니가 아이 잡는다며 말렸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은결이가 아무리 뛰며 몸부림을 쳐도 유도선수였던 아빠 힘을 당해 낼 재간이 없습니다.
은결이는 온 몸에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은결이 아빠는 가방을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은결이는 겁에 질린 채 가방을 아빠 앞에 내밀었습니다, 아빠가 가방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가방 속에 있어야 할 필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순간 아빠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필통 어떻게 한 거야? 또 잊어버린 거야?”
순간 은결이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겁에 질려 벌벌 떱니다.
“또 맞아야 말하겠어?”
아빠 손이 내려치는 순간 은결이가 펄쩍 뛰며 말합니다.
“아빠 아빠, 피아노 학원에 두고 왔어요.”
“사실이야? 그럼 당장 학원에 가서 가져 와. 지금부터 10분이야. 가는데 5분, 오는데 5분, 만약 10분이 넘어서 오면 다시 매타작이야.”
은결이는 피아노학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급히 필통을 찾아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필통을 잡고 주지 않습니다. 사용하기 편한 필통으로 바꾸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필을 깎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은결이는 겁에 질린 채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안되어요. 5분밖에 시간이 없어요. 5분 내로 안가면 나 죽어요. 맞아 죽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은결이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필통을 내어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연필을 다 깎아 새 필통에 넣어주더니 앞장섰습니다.
“같이 가자. 왜 5분이 지났는지 선생님이 아빠에게 말해줄게.”
“선생님이 가도 소용없어요. 우리 아빠는 힘이 세고, 화가 나 있고, 무서워요. 빨리 뛰어 가야해요.”
그런데 선생님은 은결이를 얼른 보내 주지 않습니다. 은결이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걸어갑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은결아, 너 오늘 친구들 때렸니?”
은결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성태는 진짜로 나빠요. 자꾸만 여자 애를 건드리고 괴롭히고, 연필 부러트리고, 하지 말라고 해도 자꾸 그러고, 성태가 나에게 먼저 주먹으로 한 방 날렸어요. 그리고 ......”
어느 새 은결이네 집에 도착했습니다. 피아노 선생님도 망설이지 않고 은결이네 집으로 성큼 들어갔습니다. 은결이네 집은 길고 허름합니다. 은결이 아빠가 있는 방은 집 끄트머리에 있습니다. 피아노 선생님은 은결이 아빠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은결이 아빠는 대답이 없습니다. 은결이 아빠는 다시 잠이 든 것일까요? 피아노 선생님이 노크를 했습니다.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피아노 선생님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방문을 열었습니다. 방문은 쉽게 열렸습니다.
방안 어두컴컴한 곳에 은결이 아빠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5분이 지났다고 아빠가 다시 소리를 지르며 은결이를 야단쳐야 하는데 은결이 아빠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피아노 선생님 목소리만 크게 들리는 것입니다. 피아노 선생님 목소리가 그렇게 큰 줄은 은결이는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은결이 아빠, 당장 일어나세요. 당장 일어나서 이리 나와 보세요.”
그런데 은결이 아빠도 은결이처럼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피아노 선생님이 다시 소리를 지릅니다.
“은결이 아빠, 일어나시라니까요.”
그러자 은결이 아빠가 슬그머니 일어나 거실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피아노 선생님 목소리는 속사포처럼 쏟아집니다.
“은결이 아빠, 왜 은결이를 때리세요? 어쩌자고 은결이를 때려요? 왜 다른 사람 말만 듣고 은결이를 때리느냐고요? 먼저 은결이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하잖아요. 은결이가 아이들을 때렸다면 때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왜 때렸는지, 우선 은결이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고 맞은 애들 엄마에게도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아빠까지 다른 사람 말만 듣고 은결이를 나쁜 아이로 몰아버리면 어떻게 해요? 왜 은결이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고 은결이를 이 지경으로 때리느냐고요? 정말 속상해서 미치겠네. 세상에, 아빠가 은결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누가 은결이 편을 들어줘요? 애를 이 지경으로 때리면 어떻게 해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피아노 선생님이 아빠를 막 야단치는데 은결이 아빠는 아무 말도 못합니다. 오히려 고개를 푹 숙입니다.
“은결이 아빠, 제가 이런 꼴 보자고 은결이 맡은 줄 아세요? 제가 매일매일 은결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고 은결이 공부를 가르치는 줄 아세요? 은결이 아빠, 왜 은결이를 모르세요? 은결이는 착하고 의협심이 강한 아이에요. 은결이가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한 것이 있다면 차근차근 말해서 알려줘야 하지요. 은결이가 잘못을 하지 않도록, 고쳐나가도록 해야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화나는 대로 때려서는 안 된다고요. 오늘은 은결이 아빠가 잘못했어요. 은결이 아빠가 잘못한 거니까 은결이에게 사과하세요.”
세상에, 은결이가 잘못한 거 없다고, 은결이 아빠가 잘못한 거라고, 아빠가 은결이 때린 것이 잘못된 거라고 피아노 선생님이 말하는데 아빠는 아무 말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할머니가 그랬다면 아빠는 이렇게 소리 질렀을 겁니다.
“어머니, 가만히 계세요. 내 새끼 내가 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세요. 상관 마세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아빠가, 너무너무 힘이 센 아빠가 피아노 선생님 앞에서 꼼짝을 못합니다. 오히려 아빠는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은결아, 이제부터는 선생님이 아니라 큰엄마라고 해라.”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피아노 선생님이 아빠에게 약속을 하라고 말합니다.
“은결이 아빠, 지금 이 자리에서 약속을 하나 해 주세요.”
“무슨 약속을요?”
“앞으로는 절대로 은결이 때리지 않겠다는 약속 말이에요.”
와, 이게 정말 무슨 일입니까? 아빠가 정말 그런 약속을 할까요?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아빠가 순순히 약속을 한 것입니다.
“네. 다시는 은결이 때리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선생님께 맡기겠습니다.”
아빠는 은결이에게 새끼손을 내밀어 약속을 합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때리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은결이도 약속을 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때리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은결이 아빠는 비로소 마음이 맑아집니다. 사실 홧김에 은결이를 때려놓고는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때리는 것을 멈추기 위해 가방을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아빠 마음을 은결이가 알 리 없습니다. 하지만 피아노 선생님은 다 아나 봅니다. 은결이 아빠를 바라보는 피아노 선생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습니다. 물론 은결이 아빠는 아까부터 울고 있었고요. 세상 사람들이 은결이를 나쁜 아이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은결이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아빠는 무조건 아들 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들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 아빠가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면 얼마나 근사할까요? 아빠에게 많이 맞은 날이기는 하지만 오늘 은결이 가슴은 자꾸만 두근두근 설렙니다.
11. “저 아저씨는 못 이겨요?”
피아노 학원에 서른이 넘은 총각이 피아노를 배우러 옵니다. 그 총각은 초등학교 1학년이 배우는 시간에 와서 함께 배웁니다. 물론 각자 레슨실에서 배우니 상관은 없습니다만 1학년 꼬마들이 무척 신기해합니다. 사실 은결이를 제외하고 1학년 꼬마들은 일곱 살 때부터 배웠기 때문에 소나티네도 능숙하게 치는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총각은 아직 초보수준입니다. 그런데 그 총각이 말을 잘 안 듣는 편입니다. 어떤 날은 연습을 하다말고 그냥 가버리고는 합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그 총각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저는 은결이와 받아쓰기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총각이 피아노를 치다말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제가 안 된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그 총각이 계속 그만하고 가겠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제가 약간 엄한 소리로 말하자 그 총각은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다음에 많이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강요할 수가 없어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은결이가 막 웃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 선생님이 지는 사람도 있네. 선생님, 저 아저씨는 못 이겨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선생님이 지다니?”
“지금 선생님은 저 아저씨한테 졌잖아요. 선생님, 선생님이 지는 사람도 있어요? 정말 이상하네. 선생님은 힘센 우리 아빠도 꼼짝 못하게 하면서 왜 저 아저씨한테는 져요?”
그제야 은결이가 하는 말뜻을 알아 차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은결이 마음속에는 피아노 선생님이 힘센 아빠를 이기는 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습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은 누가 누구를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닌데 은결이한테는 이기는 것과 지는 것으로 구분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은결이는 기를 쓰고 친구들을 이기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지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져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요? 아니 이기고 지는 관계를 벗어난 행복한 삶을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요?
그 날, 은결이가 본 아빠 모습은 피아노 선생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은결이를 무척 사랑하는 아빠 마음이었다는 것을 얼마큼 시간이 지나야 은결이가 알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