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나라를 지배한 이정기 장군 ------------------------------------------(소설가 김용필 님의 블로그에서)
당의 노예가 된 고구려 유민 중에 당을 정복하고 고구려를 부흥하겠다는 2세들이 대거 속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고선지. 이정기. 왕구루. 대조영. 왕사례. 왕모중 이었다. 누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말하는가. 나당연합국에 의한 신라의 3국통일은 신라는 물론 백제와 고구려를 고스란히 당에 바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김인문의 자손만대에 규탄 받을 실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죽지 않았다. 고구려 혼은 끊질긴 생명력을 발휘하여 발해로 거듭났고 유민들은 당과 대등한 국가 '제 (齊)' 를 건국하여 마침내 당을 정복한 것이다.
신당사와 구당사에 분명히 기록된 역사인데 그러나 우리 역사는 그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김부식의 신라우상 사관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김부식은 통일신라의 기상만으로 반도축소 지향 사대주의 사관에 의해 고구려 사를 없애는 엄청난 역사을 왜곡시켰다. 당이 고구려를 지배했지만 완전한 지배는 못했다. 30년만에 고구려는 발해로 태어났고 변방의 유민 후세들에 의해 당을 정복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변방에 흩어진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이 측천무후의 인재등용에 의하여 중앙정부 관료로 대거 등용되는 찬스를 얻은 것이다.
측천무후는 이들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재를 과감히 등용하여 정치적인 배후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들이 측천무후를 도와 당을 배제하고 국명을 ‘주’ 라 칭하고 40년이란 세월을 수렴청정을 했던 것이다. 그 긴 세월의 배후에 고구려 유민 장군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등용한데는 고구려 여인으로 당 고종의 후궁이 된 연화정 황후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왕모중. 고선지, 이정기, 왕사례, 대문예, 고문선 등이 당을 지배한 장군들이다. 이들은 장안에 모여 ‘장안의 결의’ (고구려 유민의 당 정복 )를 단행 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측천무후와 연화정 황후의 배경을 업고 승승장구한 고구려 장군들이었다. 이들은 ‘장안의 결의’ 에서 누구든 먼저 당을 정복하고 당의 황제가 될 것을 맹서했다.
그들의 명성과 지위로는 가능했던 것이다. 서역의 유격대장으로 언기진수사가 되어 서역의 천진 산맥으로 명성을 날렸던 고선지 장군이나 동북 평로절도사 안록산의 부관으로 요하 요동의 요양을 다스린 이정기 장군과 장안 궁중 수비대장으로 맹위를 떨쳤던 왕사례, 남방평로 절도사로 안남 국경을 지켰던 연남생, 내무대신으로 후에 당군 총사령관이 된 왕모중. 이들이 연화정 황후의 침소에서 고구려 부흥과 당정복의 ‘장안의 결의’ 를 다짐했던 것이다. 파장은 엄청났다.
먼저 대조영이 봉기하여 북만주로 가서 진국(발해)를 건국했고 고선지, 왕모중, 이정기는 쿠데타로 당을 정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이상은 왕모중에 의해 실현되었다. 당현종의 총애를 받고 궁중 수비대장에서 총사령관이 된 고구려 유민장수 왕모중은 현종을 제거하고 당나라 황제를 꿈꾸었다. 그는 측천무후의 40년의 수렴청정을 도왔던 공신으로 무후가 사망하자 공주와 후궁들이 왕권을 잡으려고 모략하는 혼란기에 뛰어들어 평소 무후가 현종을 왕위에 앉히려던 꿈을 이루어낸다. 공주와 후궁들이 자기 자식을 왕위에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벌이려할 때 모중이 반란의 무리를 제압하고 현종을 왕위에 앉혔다.
이로 인해 현종은 그를 신임하고 보국 대장군에 앉힌다. 왕모중은 세력을 확보하여 중앙무권과 정권, 부권까지 장악하고 동북절도사 부관인 이정기의 힘을 빌어 현종을 몰아내고 당의 황제가 되려고 나서지만 간교한 고력사의 음모로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40년 동안 그는 당의 대장군으로 왕권을 좌지우지한 인물이었다. 장안의 결의는 다시 고선지에게 양도된다. 당현종이 양귀비와 환관 고력사의 농간에 놀아나 태평세월로 국력이 쇠진하는 틈을 타서 고선지와 이정기는 당 정복의 꿈을 꾼다. 동북평로 절도사 안록산을 꼬들겨 반란을 일으키고 이정기와 고선지는 배후에서 안록산을 돕는다. 안록산은 이들의 배후만 믿고 반란을 강행한다.
현종은 곧장 서역 대장군인 고선지를 시켜 란을 평정하라고 명령하지만 고선지는 란을 평정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군사를 집결하여 피하는 바람에 안록산이 장안을 점거한다. 이것을 안 고력사는 현종에게 고해바처 고선지를 현장에서 처형한다. 그리고 안록산의 난은 부하가 그를 죽이므로 해서 평정된다. 고선지는 안록산으로 하여금 당을 정복하게 하고 황제가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안록산의 란이 실패하고 고선지장군이 죽었지만 그 뒤를 이정기가 이어갔던 것이다. 당현종은 안록산의 동북 평로 절도사 자리에 새로 왕거의를 임명했다. 그러나 부관인 이정기가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그는 왕거의를 제거하고 스스로 동북을 평정하는 평로 절도사가 되었다. 이것은 발해의 무왕 대 문예가 군사적 도움을 줬던 것이다. 그는 동북요하를 손아귀에 넣고 고구려 재건을 꿈꾸었다. 마침내 그의 꿈은 실현되었다. 이정기 장군이 당을 정복한 것이다.
이정기 장군은 발해의 힘을 빌어 동북병력을 집결하여 당의 공략에 나섰다. 먼저 라오허강(요하)를 장악한 이정기는 돌궐의 군사와 발해의 지원병과 동북평로절도사 병사 20만을 동원하여 당을 치려 나섰다. 고구려 기상을 발휘한 동북 절도사군은 물밀 듯이 남하하여 당의 15개 현을 정복하고 장안을 행했다. 그는 남북대운하를 끊어 장안으로 가는 물자 공급을 차단하고 산동반도를 점령하여 자치국(진)을 건국하였다. 대운하가 끊겨 장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소금과 생선 쌀등 물자가 차단 당하자 장안에서는 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정기는 군사를 재정립하여 장안을 치고 들어간다. 당 효종은 수도를 봉천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유민의 진 나라에 대적하지만 이정기는 요하에서 산동반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국한다. 그 크기가 38만 평방 킬로미터나 되었다.
이것이 고구려 유민의 장수 이정기가 세운 ‘제(齊)’ 나라이다. 후고구려의 탄생인 것이다. 제국의 탄생으로 고구려는 발해와 제로 태어나면서 당을 정복한 것이다. 이런 역사기록이 당 역사엔 있고 한국사에 없다는 것은 정말 통탄스런 일이다. 2대왕 아들 이납은 ‘제’ 나라 라 칭하고 당과 교전을 계속하여 영토를 넓혀간다. 당이 제를 두려워하는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당의 기세는 점점 제의 세력 안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당의 관리들이 대거 제의 관리가 되겠다고 투항하여 왔다. 제는 명실공히 당을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다. 국력은 손자 이사고에 의해 당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부왕 이사고가 만든 막강한 국가를 4대왕 이사도가 망해 먹었다. 이사고 왕은 아들이 없어 사촌의 아들 이사도를 왕위에 앉힌다. 그런데 이사도는 처인척인 당의 전직관리를 제의 관리로 대거 등용한다. 화근이었다. 이들이 이사도 왕을 살해하고 나라를 당에 바친다. 이로 인해 제(齊)는 55년의 역사를 종직하고 만다. 제의 유민은 갈곳이 없어 바다로 뛰어든 보트 피풀이 된다.
이들을 거두어드린 위인이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이들 유민을 청해진에 옮겨 막강한 해적단(3만명)을 만들었고 이들이 조국 고구려를 찾으려고 신라를 정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한 고구려는 발해로 태어났고 변방으로 흩어진 유민의 후예의 나라 “제”에 의해서 당은 정복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중국의 둥북정공에 고구려가 완전히 당의 속국이 된 것처럼 기술되었지만 고구려는 망하지 않고 발해와 제 로 태어난 것이다. 구당 신당 역사를 토대로 하루 빨리 우리 고구려 사를 재정립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