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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격월간지 '크리스천 카운셀링' 2004.1-2월호에 게재된 김석산 한국복지재단 회장에 관한 기사
'크리스천 카운셀링' 표지
김 회장 부부
40년의 외길 인생 음지에서 양지의 삶을 산 사람 한국복지재단 회장 김석산 박사 우리는 더불어 살며 공평하게 나누는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을 실천하려 해서 생긴 것이 복지사업이다. 복지사업은 외진 곳을 없게 하고 서로 나누며 함께 어우러져 잘 살기 위해 하는 사업이다. 누가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겠는가? 불행은 선택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국민은 물론 정부에서도 복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50년 전만 해도 그렇지를 못했다.
한국에서 근대적인 사회복지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50년을 전후해서다. 당시에는 복지 대상이 전쟁고아와 가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었는데 사실상 이들을 구호하는 일은 외국 구호기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 때 한국은 사정이 어려웠다. 그리고 그 기관들 중 하나가 미국의 기독교아동복리회(Christian Children’s Fund)였다. 한국복지재단은 처음 CCF한국지부(1948)로부터 시작하여 1979년 한국어린이재단(1979)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94년에 한국복지재단이라는 오늘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은 사업의 변화와 확장에 따른 결과로 이런 변화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필요한 사회복지 사업을 선도하는 가운데 주어진 자연스러운 일들이다. 한국복지재단은 55년이라고 하는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졌다.
김석산 박사가 한국복지 재단에 몸을 담게 된 것은 지금부터 꼭 40년 전이다. 1963년 경희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입사한 곳이 CCF한국지부로, 그 때부터 그는 지금까지 오직 외길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는 한국복지재단의 살아 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그가 한국복지재단 회장직을 맡은 것은 1995년이다. “한국복지재단은 CCF한국지부였어요. 당시에는 취직할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영어를 잘 한다는 명문대생들이 CCF에 몰려들었어요. 미국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시설아동들의 성탄카드와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였고 후원자들의 편지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아동들에게 보내주는 일이었죠. 저는 1963년 11월 어려운 시험을 통해 번역사로 입사했었습니다. CCF는 미국 후원자들의 후원금을 받아서 전국에 있는 CCF 가입시설을 지원했는데 저는 어린 시절 CCF시설인 천양원에서 자랐기에 제가 어렸을 때부터 도움을 받은 기관에서 일하게 되어 참으로 기뻤습니다. 처음 말단직원에서 서신실장, 양연부장, 기획실장, 사무국장, 사무총장, 부회장 등의 직책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일터를 주신 것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 속에는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많은 부분들이 있다. 그는 일본 규수에서 태어나 해방과 동시 아버지, 어머니, 누나와 함께 귀국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어린 몸으로 남의 집에서 채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6.25동란 후 고물 수집하는 집에서 심부름을 했는데, 주인이 고물을 정리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다 고물 중에 섞여 있던 폭탄이 터져 다리에 부상을 입고 대전도립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후 퇴원과 동시 고아인 것이 알려져 대자보육원이라는 시설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도망쳐 나왔다가 걸인 수용소를 거쳐 오늘의 그를 있게 해 준 유성의 천양원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제가 CCF에 입사하는 게 어머니 유을희 전도사님의 간절한 꿈이었어요. CCF는 천양원의 아동들을 먹여 살리는 젖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제가 CCF 직원이라는 것은 어머님께 큰 빽이 되는 것이었어요. 저는 첫 월급으로 어머님께 유사품 밍크코트를 사 드렸는데 오랫동안 입으시면서 아들 자랑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서울에서의 바쁜 생활 중에도 한 달에 한 번은 어머님 뵈러 유성에 갔습니다. 제가 가면 늘 반가워하시면서도 꼭 잊지 않는 말씀은 ‘또 언제 올래’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내려가면 꼭 어머니 방에서 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잤습니다. 어머니는 새벽 4시쯤 일어나서 성경을 보시고 방안에서 틀니를 ‘푸카푸카’ 닦고 그러셨는데 그 소리가 나한테는 하나도 싫지가 않았어요.” 외롭게(?) 자랐으나 외롭지 않게 커 온 그에게는 고아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 그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늘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상하게도 내 기억엔 처절하게 신세 한탄을 한 기억이 없어요. 시설생활이 마냥 좋기만 했습니다. 그 당시에 구호물자로 밀가루가 많이 나와서 저녁마다 국수를 먹었어요. 물론 멸치나 김치가 어디 있나요. 그냥 소금으로 간을 한 국수였지요. 공주에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6년 동안 도시락 한 번 못 싸 가지고 다녔고 수학여행이라곤 중학교 때 한 번밖에 못 가 봤어요. 근데 그런 거 가지고 크게 슬퍼하거나 외롭게 느낀 적이 없어요. 아, 공주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두 달에 한 번씩 단체로 학교에서 영화관람을 갔는데, 그 때 풍덕원 앞을 지나 영화관으로 떼지어 가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퍽이나 부러웠던 때는 있었습니다.” 그의 말과는 달리 그는 상당히 세심한 사람이다. 남의 글 속의 영어 단어 하나가 틀려도 꼭 고쳐서 되돌려주는 사람이다. 그만큼 주의력과 세심함이 있는 그였기에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그는 주어진 환경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원망하기보다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늘을 통해 내일을 기다리는 지혜를 가진 그였다. 현재 한국복지재단 산하에는 전국적으로 36개의 사업기관이 있어 시설아동, 소년소녀가장, 저소득모자가정, 재가(在家)노인가정, 학대 받은 아동, 기타 결손, 빈곤가정을 돕고 있다. 금년에는 부모 없는 아동들을 위해 위탁가정 보호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업의 구석구석에는 김석산 회장의 손길과 숨결이 스며있다.
친구와 같은 부인 김석산 박사의 하루의 삶은 24시간으로는 부족할 지경이다. 그는 후원자들을 찾아 전국은 물론 외국에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다. 그러고 보면 그는 복지분야의 CEO(전문경영인)이다. 그래서 그는 보건복지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2001년에 숭실대학교에서 사회사업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겸임교수직과 KBS ‘사랑의 리퀘스트’ 운영위원장직을 맡고 있으며, 충무교회의 시무장로로 일하고 있다. 일 속에 파묻혀 일과 함께 사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일해 오면서 느낀 보람이 많지만 특히 MBC와 함께 ‘소년소녀가장에게 용기를’이란 생방송 캠페인을 통해 소년소녀가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을 제고한 것이 늘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KBS의 ‘사랑의 리퀘스트’를 한국복지재단이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것 또한 큰 보람이라고 한다. 그는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보다 감사한 것은 어려움을 통해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이란다. 한국복지재단은 현재 북한의 어린이까지 돕고 있는데 그 일을 위해 김 박사는 얼마 전 북한을 다녀왔다. 북한 영아 한 명당 1년에 미화 200불에 해당하는 물자를 1800명에게 후원하고 있다. 또한 ㈜삼립식품의 지원으로 평양에 빵 공장을 설치하는 일이 추진되어 내년 봄부터 빵을 만들어 북한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었다. 그의 쉴 줄 모른 노고의 결실이다. 김 박사는 전혀 성공할 것 같아 보이지 않은 조건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고아로 자랐지만 자신을 고아로 생각지 않는다. 그만큼 그에게는 감사가 많아서다. 그는 자신의 어렸을 때의 삶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고 늘 주어진 일을 열심으로 해내며 인내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의 삶 속에는 늘 하나님이 계셨다. 그의 소탈한 웃음과 반백이 된 머리카락에서 사회복지를 위해 일해 온 50년의 세월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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