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웨슬리의 삶과 유산 - 3
옥스퍼드 메도디스트 Oxford Methodist
1)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 전경 - 크라이스트 처치는 옥스퍼드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대학으로 13명의 영국수상을 배출하였다. 2시 방향으로 보이는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Christ Church Cathedral)은 영국에서 가장 작은 대성당으로 존과 찰스 웨슬리가 안수를 받은 곳이다.
2) 안쪽에서 본 크라이스트 처치 - 옥스퍼드는 8세기 수도원과 함께 형성된 도시이며 그 수도원의 자리에 세워진 학교가 ‘크라이스트 처치’이다. 하지만 웨슬리 당시의 옥스퍼드는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나태한 상태였다. 찰스는 ‘신앙으로 선다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최악’이라고 표현하였다.
사진 : 유은식 목사(감리교영상연구소 소장)
찰스 웨슬리의 대학시절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괄목할만한 성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웨슬리 집안이 옥스퍼드대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웨슬리 삼형제는 옥스퍼드 중에서도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College)를 졸업했다. 1726년 찰스가 입학 했을 때, 존 웨슬리는 그 해 3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Lincoln College) 교수(Fellow)가 되어 헬라어와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다른 신입생들처럼 찰스는 대학이라는 새로운 문화에 접하며 처음으로 부모와 큰 형 사무엘의 보호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리고 드디어 존 웨슬리가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웨슬리 형제는 옥스퍼드 근교(Stanton Harcourt)에 자주 들러 존 웨슬리의 친구인 커크함(Robert Kirkham)과 그의 누이들과 교제하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독서와 대화가 이어졌고 서로 필명으로 편지도 교환했는데 존은 사이루스(Cyrus), 찰스는 아라스페스(Araspes)였다. 그 중에 존 웨슬리는 샐리 커크함(바라네즈)과 사랑하게 되었지만 찰스 역시 이 자매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이 쾌활하고 사교성이 많은 찰스의 대학생활에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돈이었다. 존 웨슬리 경우를 잠시 살펴보면, 당시 허영과 사치가 만연되어 옥스퍼드 학생들도 비싼 가발을 쓰고 다녔지만 존 웨슬리는 돈을 아끼느라 머리를 길러 단정하게 빗고 다닐 뿐이었다. 노년에 평범한 흰 가발을 쓴 일을 제외하고 존은 평생 가발을 쓰지 않았다.
3) 존 웨슬리의 초상화 - 39세 때의 모습으로 ‘존 웨슬리’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 돈을 절약하기 위해 시작하였지만, 후일 이런 존 웨슬리의 머리 모양을 따라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찰스 역시 차비를 아끼기 위해 고향 에프워쓰에서 런던까지 273Km(일 주일 거리)를 걸어간 적도 있을 만큼 궁핍했다. 찰스의 편지 중 남아 있는 맨 처음 편지는 1728년 1월 28일에 고향에 있는 존 웨슬리에게 보낸 것인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돈이 없다는 것은 나를 둘 중 하나가 되게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든지 아예 아무것도 못 하게 되든지, 뛰어난 경제학자가 되든지 지독한 불한당이 되든지, 몰리(Moll) 누나처럼 인내하든지 패티(Pat) 누나처럼 투덜이(grumbletonial)가 됩니다. … 돈이여 빨리 오라.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다.(ex nihilo nihil fit)’는 이 우울한 격언에서 나를 구해내라. - 나는 저축할 돈도, 절약할 것도 없습니다.
존 웨슬리는 1727년 아버지의 목회를 돕기 위해 고향으로 떠나게 된다. 1728년 안수를 받기 위해 잠시 옥스퍼드에 들른 그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동생의 생활을 점검하였다.
동생은 열심히 공부했으며 규칙적이고 해롭지 않은 생활을 했다. 하지만 내가 신앙에 대해 말할라치면, 그는 발끈해서는(warmly) 대답했다. “뭐라고요! 나더러 단번에 성자(saint)가 되란 말입니까?” 그리고는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찰스는 곧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형(존)의 방식에 따라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1729년)이다. 후일 쓴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대학 생활 첫 해는 다른 데에 마음을 쏟았었습니다.(My first year at College I lost in diversions.) 그다음 해에 나는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부지런히 진지한 사고(thinking)를 하였습니다. 나는 매주 성만찬에 나갔으며 두세 명을 설득해서 나와 함께 할 것과 대학교에서 규정하는 공부 방식을 지키자고 설득했습니다. 이렇게 나는 메도디스트(Methodist)라는 해롭지 않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찰스의 독자적인 진보는 큰 의미를 지닌다. 첫 메도디스트라고 불린 것도, 홀리 클럽(Holy Club)을 시작한 것도 찰스 웨슬리이다. 1729년 5월 5일 존에게 쓴 편지에서 윌리엄 모건(William Morgan)과 로버트 커크함과 함께 옥스퍼드 메도디스트가 시작했음을 알렸다. 그 해 9월 존이 옥스퍼드로 돌아오자 찰스는 형에게 지도권을 넘겨주었다.
찰스는 조지 휫필드(Geoge Whitefield)를 이 모임에 초청했으며 휫필드는 찰스를 ‘결코 잊지 못할 친구(never-to-be-forgotten friend)’이며 찰스가 빌려준 경건서적들은 자신의 회심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존 웨슬리는 이 시절을 회상하면서 1772년 찰스에게 편지를 보낸다.
나는 가끔 ‘나에게 이전의 삶을 돌려다오!’라고 외친다. 다시 옥스퍼드 메도디스트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다시 옥스퍼드 규칙으로 돌아가는 것이 내 인생에 최선이 아닌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 나는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걸었으며, 시간을 아껴 거룩하게 사용하였다.
학문과 경건에 힘쓰는 철저한 신앙 공동체, 가난한 자와 갇힌 자를 도우며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 홀리 클럽은 최초의 메도디스트들이 되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본보기가 되는 웨슬리 형제의 동역은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4) 여러 명이 모여 앉아 존 웨슬리의 설명을 듣고 있는 홀리 클럽을 묘사한 그림(Marshall Claxton) - 사실 홀리 클럽은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모인 것이 아니라 서너 명씩 군데군데서 모임을 가졌다.
나 맡은 본분은 A Charge to keep I have - 찬송가 372장, 새찬송가 595장
웨슬리 찬송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라텐베리(J. E. Rattenbury)는 “만일 세상에서 성경이 없어진다면 찰스 웨슬리의 찬송시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만큼 찰스 웨슬리의 찬송시에는 구절구절마다 성경이 녹아 있다는 뜻이다. 찰스 웨슬리는 1762년 두 권으로 된 「성경구절에서 뽑은 짧은 찬송시들(Short Hymns on Select Passages of the Holy Scriptures)」을 출판했는데 1권은 구약 1160편, 2권은 구약 318편, 신약 871편으로 총 2,349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성경 이외에도 찰스는 루터(Martin Luther), 벵겔(Bengel), 매튜 헨리(Matthew Henry) 등의 성경주석도 신학적인 성찰(reflection)을 거쳐 찬송시에 반영하였다. 이런 점에서 찰스 웨슬리의 시들은 ‘시로 된 성경주석’이라고 불릴 만하다.
“나 맡은 본분은”은 1권 188번 시로, 레위기 8장 35절을 기초로 한 것이며 매튜 헨리(Matthew Henry)의 주석을 참조한 것이다. 매튜 헨리가 쓴 레위기 8장 35절의 주석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 우리 각자에게도 지켜야 할 본분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죽지 않을 영혼을 위해 준비하고, 마땅한 의무를 다해야 하며, 우리 세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그 본분들을 지키기 위해 매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주님이 명하신 것이며 주님은 계산을 하기 위해 우리를 곧 부르실 것인데 만일 우리가 직무를 태만히 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최대의 위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사망을 면하리라”고 하신 것을 새기라. 우리에게 맡겨진 직무를 배반한다는 것은 죽음, 곧 영원한 죽음이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명령을 준행해야 한다.
찰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시로 옮긴다.
“나 맡은 본분은” A Charge to keep I have
“여호와께서 지키라고 하신 것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Keep the charge of the LORD, that ye die not.(KJV) - 레위기 8장 35절)”
내가 지켜야 할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결코 죽지 않는 영혼을 구원해, 하늘에 적합하도록 하며(fit it for the sky),
현재의 세대에 봉사하며, 부르심을 완수하는 것.
오, 나의 모든 힘을 다해 나의 주인의 뜻을 행케 하소서!
질투하시는 돌보심으로 나를 붙잡으셔서 당신의 눈길 속에서 살게 하소서.
또한 오, 주님! 당신의 종이 철저한 회계보고(account)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케 하소서.
깨어있어 기도하고 당신만을 의지하도록 도우소서.
나의 직무(trust)를 저버린다면 영영히 죽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소서.
마지막 구절의 ‘직무를 저 버리면 영원히 죽게 된다’는 표현은 상당히 극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교단에서는 이 부분을 삭제하거나 ‘직무를 저버리지 말게 하시고 하늘나라로 올리소서(But press to realms on high)’라고 바꾸어 버렸고 한국 찬송가에도 이 영향을 받아 ‘내 믿음 변치 않도록 날도와 주소서’라고 완곡하게 번역이 되어 있다. 그러나 원래 찰스가 ‘직무를 저 버리면 영원히 죽게 된다’고까지 강조했던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 아닌가!
찰스 웨슬리 탄생 300주년 - 3월 행사
3월 8일, 런던 웨슬리 예배당
“타고난 우정을 가진 사람(The Man Made for Friendship)”라는 주제의 강연회가 열린다. 강사는 「찰스 웨슬리의 생애(Charles Wesley: A Biography)」를 쓴 게리 베스트(Gary Best)이다.
3월 13일, 런던 Hinde Street 감리교회
딕 왓슨(Dick Watson)의 강연회. 주제는 “성경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찰스 웨슬리와 성경(If the Bible were lost....Charles Wesley and Scri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