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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 얼굴
나는 낚시를 할 일이 없는 사람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쯤으로 알아 왔다. 그런데 시집을 와 보니 시아버님의 취미가 낚시였다. 아버님께 여름철 낚시는 단 한 가지 할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도 모두 ‘요즘도 어른께서 낚시를 가시느냐’로 아버님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아버님께서는 겨울에는 바둑으로 소일하시면서 해동이 되기를 기다리시다가 우수 경칩만 지나면 낚싯대를 손질하시는 것으로 활기를 찾으셨다. 그리고는 입동이 될 때까지 낚시 행을 계속하셨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해도 출발 순간만 비가 오지 않으면 강행하셨고, 저녁 때쯤 비가 그친다고 예고하면 출발시각에 비가 오더라도 강행하셨다. 그러니 이 기간은 마당에 비린내가 나고 지렁이가 보이며 떡밥 가루가 보이는 아주 어설픈 기간이 되었다. 어쩌다 쉬는 날이면 낚싯대를 말리느라 빨랫줄에 낚싯대가 줄을 지어 서게 되고 비늘 붙은 망태까지 걸려 냄새를 더 했으니 입춘부터 입동까지 낚시와 관련이 없는 날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돌아가신지 십년이 넘는데도 아침밥을 풀 때면 ‘어미야, 밥만 한술 싸 줄래?’ 하시던 음성이 아직도 들리는 것은 내가 오랜 세월 아버님 낚시 도시락을 싸 왔기 때문이다. 출근하면서 도시락을 일곱 개씩 싸던 시절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데 예고 없던 낚시 행이 생기면 도시락 부탁하시는 것이 미안해서 겸연쩍어 하시며 반찬은 아무래도 좋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밥만’ 싸 달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락 싸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장거리 낚시를 위해 새벽길을 떠나시는 것이었다. 파란 별빛이 있는 새벽에 부릉거리는 봉고차가 대문 앞에서 새벽을 흔들면 이것저것 급히 찾으시는 부산한 움직임으로 모두들 새벽잠을 설쳤고 배웅을 끝내고 나면 다시 잠들 수도 없어서 온종일 잠이 부족한 느낌으로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미안한 마음으로 출발하셔도 현장에서는 아버님의 힘이 매우 크신 것으로 짐작되었다. 행선지며 출발시각 차량 준비 떡밥 사기 등 모든 일에 아버님께서 중심이셨다. 어느 날 낚시에서 돌아오신 아버님이 늦은 저녁상을 드시며 이야기하셨다. 그 날 낚시터에서 전직 교장들을 새 친구로 만났는데 낚시 법을 전혀 몰라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셨다고 했다. ‘낚시터에서는 내가 교장보다 낫다’ 하시면서 껄껄 웃으셨다. 그리고 얼마 후 낚시는 잔돈이 수월찮게 드는 취미라 용돈이 궁하면 즐기기 어려운데 교장으로 퇴임해도 자식들이 받쳐 주지 않으면 즐기기 힘이 든다며 ‘너희들이 참 고맙다’고 하셨다. 새로 사귄 낚시 친구가 오래가지 못해 섭섭하셨나 보다.
아버님께서는 물고기를 못 잡은 날은 “그 놈의 바람이…” 하시면서 들어오셨지만 많이 잡은 날은 개선장군처럼 오셨고 특히 월척을 많이 잡으신 날은 마당이 그득하게 목소리를 높여 나를 부르셨다.
“어미야, 이 놈 봐라. 월척이다. 힘이 아주 장사야. 푹 고아서 먹어라.”
커다란 고무 대야 속을 들여다보면 큼직한 붕어들이 꼬리를 치며 대야 속을 휘젓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집안을 메우는 비린내와 잡다한 뒷일 때문에 붕어를 못 잡아오신 날이 더 고맙고 그러기를 은근히 바랬다. 그러나 아버님은 대부분 손바닥 크기의 붕어를 한 양동이씩 채워 오시는 실력이셨다. 이웃집에서 들락거리며 구경을 하러오고 어머님은 퍼덕거리는 붕어를 들여다보며 나누어 줄 곳을 셈 하셨다. 순서를 정해 이집 저집 나누어 주는 일은 전적으로 어머님 뜻대로 이기 때문이다. 다 줘도 좋으니 그냥 주기만 하면 좋겠는데 어머님은 그 많은 붕어를 일일이 배를 따서 손질하여 일부는 얼리고 일부는 요리를 해서 손님을 부르기도 하고 집집마다 갖다 주시기도 하니 복잡한 냉동실이며, 헤푼 밑반찬이며, 비린내 참기며 산더미 같은 빨랫감, 흙 묻은 도시락, 낚시 배낭 정리, 비늘 떨어진 바닥 씻기 등과 함께 뒷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붕어는 요리도 다양하다. 얼큰한 매운탕, 바삭바삭한 튀김, 구수한 곰, 짭짤한 조림, 추어탕처럼 걸쭉한 붕어 탕, 한약재와 섞은 붕어 즙. 늙은 호박을 파내고 그 속에 넣어 고아 낸 붕어 소주. 붕어찜 등등. 그런데 이것이 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고추장도 헤프고 식용유도 헤프고 양념도 가스도 수도세도 엄청나 가계부를 쓰는 입장에선 무척 곤란했다.
많이 잡히더라도 먹을 만큼만 가져오시면 좋겠는데 매번 잡히는 대로 다 가지고 오시는 건 이웃집과 나누어 먹는 즐거움도 있지만 나를 뺀 식구들이 모두 매운탕이나 붕어 튀김을 물리지도 않게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머님께서 끓인 매운탕 맛은 독보적이었다. 국물이 흥건한 것이 아니라 흔한 붕어를 많이 넣고 국물을 자작하게 끓였기 때문에 국물 맛이 맵지 않고 신선한 단맛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점에서 끓여 파는 붕어 매운탕을 잘 먹지 않는다. 집에서 끓인 붕어의 쫄깃한 육질과 신선하고 단맛이 나는 국물 맛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님께서 운명하시고 낚시 도구 유품을 몇 년간 보관하다 결국 시동생에게 주면서 매운탕 맛은 아련히 잊어버렸는데 남편은 가끔 붕어 매운탕을 생각할 때가 있는 눈치다. 그러던 차 오늘은 남편의 친구가 잡은 것이라며 냉동된 붕어를 몇 마리 가져 왔다. 반가운 마음에 매운탕 끓이던 기억을 되살려 순서대로 끓였으나 맛이 달랐다. 어쩐지 모래 같은 것이 씹히는 것 같고 가시가 억세고 살결이 딱딱해서 맛이 영 아니었다. 붕어가 다른가? 그럴 수도 있다. 붕어는 잡은 때에 따라서 맛이 다르기도 하지만 잡은 곳에 따라서도 맛이 다르다. 넘쳐 나서 감당 못하게 많던 붕어도, 매운탕도 아버님이 안 계시니 구경하기도 힘이 든다.
맛 없는 붕어매운탕을 앞에 두고 있자니 오늘 따라 여가만 있으면 낚싯대를 늘이고 조이고 손질하시던 아버님이 생각난다. 작은 얼굴에 구멍 같은 입을 뻐끔거리던 붕어 얼굴도 보인다. 냄새나는 아버님의 낚시 도구를 못마땅해 했던 지난날이 죄송스럽고, 급한 시간에 낚시 도시락을 번개같이 싸며 귀찮아하는 마음을 들키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보이고, 내심 빈 망태로 돌아오시길 기다렸던 철없던 시절이 후회스럽다.
베트남 새댁
여름을 맞아 티셔츠를 하나 사려고 자주 가는 가게에 들렀다. 가게에는 먼저 온 두 사람의 손님이 있어 주인은 열심히 옷을 권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물건을 훑어보면서 두 손님도 슬쩍 보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고부지간이란 것을 단번의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시어머니 되는 사람은 며느리에게 옷을 이것저것 대보고 입혀 보면서 크다, 적다, 안 어울린다는 등, 무엇인가 계속 중얼거리는데 옷을 입어 보는 사람은 말이 없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며느리는 스물도 채 되지 않았을 것 같고 자그마한 키에 어깨가 좁고 얇으며 허리가 길고 가늘어 가냘프기 짝이 없었다. 문득 우리와 동족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새댁을 보니 분위기가 중국 계림에 갔을 때 염소 한 마리를 끌고 가던 원주민 총각의 체형이 생각났다. 염소를 몰겠다는 사람이 너무 약하여 차라리 염소가 사람을 끌고 간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수려하고 웅장한 자연경관에 비해 땀에 전 후줄근한 복장을 한 원주민의 체격은 너무도 왜소하고 초라해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었는데 가이드는 그 원주민 농부가 월남계 혈통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바로 그 사람과 앞에 있는 젊은 여자의 골격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지요?”
시어머니 되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물어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월남, 월남”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어머니는 또 하나의 블라우스를 입혀 보고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벗기고 있었다. 짝 달라붙고 제비 꼬리처럼 빠진 생머리에 검고 뾰루지가 많이 난 화장기 없는 겁먹은 새댁의 얼굴에 잘 맞는 옷이 아니었다.
우리들의 대화로 이방인의 처지를 확인했는지 월남 새댁은 유난히 까만 속눈썹 밑에서 머루 같은 눈동자를 어디든 한 곳에 자신 있게 멈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리며 표정 없는 얼굴로 어깨를 시어머니에게 맡긴 채 서 있었다.
“이것도 안 되겠다. 저기, 저거 좀 보시더” 하면서 높이 걸려 있는 재킷을 턱으로 가리켰다.
몇 벌째 입어 보더니 드디어 어울리는 옷을 찾았다.
한쪽 팔을 끼고 나머지 팔을 마저 끼기도 전에 시어머니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더니 며느리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거 좋다, 그거 됐구나를 연발하며 얼마냐고 물었다.
“예, 잘 맞네요. 육만 원이래요.”
“어이?”
갑자기 시어머니 얼굴에 웃음이 멈추더니 입히던 옷이 벗겨졌다.
“돈이 안돼, 돈이 안돼. 그리 비싼 줄 몰랐제. 아버지한데 더 받아와야 돼. 아버지한데.”
시어머니는 며느리 눈을 들여다보고 손바닥을 부채처럼 펴서 잘게 흔들어 보이면서 돈이 없다는 것을 며느리에게 알리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옷 벗기기도 끝났다.
여전히 새댁은 말이 없었다. 표정도 없었다.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보며 구르는 머루 같은 까만 눈에도 변화가 없었다.
“가자, 가자. 어여! 돈, 더 갖고 오자.”
시어머니는 며느리 등을 돌려세우고 팔을 휘휘 저어 앞쪽을 가리켰다. 새댁이 앞에 서고 시어머니가 뒤에서 며느리를 몰고 황황히 나갔다. 그러나 이집에 옷을 사러 다시 오지는 않을 것 같다.
“삼만 원으로 재킷을 살려니 어디 쉽나.” 주인은 중얼거리며 다시 옷을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초라한 두 등이 보기 민망해 눈을 감고 싶었다.
밤이 깊었는데 왜 이렇게 잠이 들지 못하고 점점 눈이 맑아 올까? 정말로 시어머니 수중에는 삼만 원이 없었을까?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잠 못 드는 내 앞에 낮에 본 월남 새댁이 다시 서 있다. 머루 같은 까만 눈을 어디 둘 줄 몰라 멍한 모습으로 서 있던 가녀린 몸체가 안쓰럽고 불쌍하다. 실망의 눈빛도, 체념의 눈빛도, 귀찮다는 눈빛도 담지 않은 무표정이어서 더욱 안쓰러웠다.
딱하도록 무표정한 눈빛은 월남 새댁이 아직 이곳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시어머니와 감정 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으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형편을 말하는 것이다. 신랑하고 나왔으면 사정이 반전됐을 텐데. 그런데 좀 늙었다는 그 신랑은 뭐하고 시어머니와 나왔을까?
가난을 면해 보고자 국제결혼을 하여 타국까지 왔을 텐데 육만 원짜리 재킷 하나 얻어 입지 못하는 시집이라면 아직 어린아이 같은 그 마음에 후회가 자리잡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나는 망상 속에서 새댁이 되었다. 실망감에 젖어 헤매다 이 현실이 절망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졌다. 울며 매달리는 가족을 뿌리치고 나올 땐 더 나은 장래를 약속받고 싶어서였는데 모든 것이 헛꿈으로 이어지는 조짐이 느껴진다. 차라리 다시 되돌리고 싶다는 데까지 와서는 시어머니가 되었다. 잘 해주려 했지만 막상 뜻대로 되질 않았고 겨우 찾아낸 어울리는 옷을 벗기고 나올 땐 며느리에게 부끄러워 얼굴에 불을 붓는 듯했다. 돈이 없지 체면이 없나. 체면을 세울 수 없는 가난한 살림을 어떻게 하나. 겨우 얻은 며느리가 행여 마음을 바꾸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헤매다가 친정어머니가 되는 망상에 젖었다.
자기네들 극장표 한 장보다도 싼 옷 한 벌을 못 얻어 입을 처지라면 낯설고 물선 외국에는 왜 가며 가족이 서로 헤어져 살 일이 무엇인가. 잘해 줄 것처럼 하더니, 엄청 잘 사는 것처럼 하더니, 갑자기 속았다는 생각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운명에 맡기면서 용서하고 싶진 않다. 나는 월남 새댁의 친정어머니가 되는 망상에서 오래 헤어나질 못했다.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간장이 끓게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나는 어느 쪽도 아니다. 무안한 얼굴로 황황히 나간 시어머니와 도무지 표정 없는 얼굴로 따라 나가는 새댁을 그저 보기만 한 구경꾼일 뿐이다. 먼저 그러한 사정을 알았더라면 우리를 믿고 장래를 맡기는 어린 외국인 신부에게 삼만 원 보태 옷 한 벌 해 주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우연히 또 한 번 만났으면 좋으련만.
이도 저도 못해 준 지금 내 얼굴도 이렇게 달아오른다. 꿈을 가지고 온 어린 신부에게 신랑의 동족으로서 정말로 미안하다. 그리고 진정 부끄럽다. 내 동족, 그 늙은 신랑은 하늘을 쳐다보는 나무꾼이 되지는 않을는지 또 하나의 걱정이 생기면서 밤이 깊어간다.
닭 한 마리 사는 시간
시장에는 내가 이십 년간 단골로 다니는 닭집이 있다. 오래 드나들다 보니 물건값 외에도 우리는 주고받는 말이 많았다.
‘어디 다니십니까?’로 시작하여 어떻게 꼭 이 시간에 오느냐. 직장에 다니느냐. 식구가 많으냐. 이렇게 자주 사는 닭고기를 누가 그리 좋아 하느냐 등등으로 시작하여 날이 가고 횟수가 거듭할수록 깊은 곳까지 서로 묻고 대답하는 사이가 되었다.
닭을 골라 놓으면 아주머니가 재빠르게 손을 놀려 칼로 목을 툭 쳐 머리를 잘라 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내고 똥집을 반으로 갈라서 물 한 바가지를 휙 부어 대충 씻은 뒤 비닐봉지에 넣어서 내 앞에 내밀 때까지의 시간에 주고받는 말이 모여서 세월이 흐르니 동기간처럼 편한 사이가 되었다.
얼굴에는 늘 고단한 인생을 싣고 있었으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늘 시원시원하였고 아주머니는 매번 닭 한 마리만 사는 나에게 가정사를 다 털어 놓기도 했다.
“아이들이 똑똑하잖아요. 아이들 보고 살아요.”
신세 한탄을 듣고 입답 없는 나는 겨우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 설 때가 많았다. 그리고 사실 그 집 아들 둘은 똑똑했다. 시간 나는 대로 어머니를 도우며 공부도 열심히 하더니 모두 일류 대학에 진학을 했고 그것이 아주머니에게는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다.
억척스럽고 착하기까지 하니 하늘이 도우시는 지 가게는 날로 번창했다. 자기 가게를 수리하더니 곧 옆 가게를 인수하여 확장을 하고 그 이후 여관도 사고 빌딩도 샀다며 자랑을 했다.
가게가 번창하면서 나는 아주머니를 잘 볼 수 없었다. 아주머니는 새로운 일, 여관을 경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닭발처럼 사업이 번창하여 닭발을 손질하는 아주머니들이 십여 명은 되었고 이미 중소기업의 수준이 되었다. 피아노를 전공했다는 며느리도 판매대에서 닭을 손질하고 일류 대학을 나와 취직했다던 아들들이 둘 다 내려와서 하나는 가게 관리를 하고 하나는 아주머니와 여관을 경영한다고 했다.
이제 아주머니가 가게에 나오는 날은 명절을 이틀 앞둔 대목장 뿐이다. 바쁜 명절 대목에는 일손이 부족하니 며느리는 튀김 솥에서 닭을 튀겨 내고 아주머니는 판매대에서 생닭을 손질해 판다,
장보기에서 닭이 빠진 것을 알고 부랴부랴 시장에 갔을 때 아주머니는 판매대에서 일을 하다가 사람들 틈에 낀 나를 알아보고 눈으로 인사를 했다.
통통한 닭을 한 마리 골랐더니 아주머니는 “탁” 하고 목을 쳤다. 그리고 닭을 손질하는 동안 우리는 옛날처럼 말을 주고받았다. 정해진 짧은 시간이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반갑기도 하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요즘, 장사 잘 돼서 돈 세느라고 무척 바쁘지요?” 인사했다. 그는 돈은 많이 버는데 나가는 것도 많다며 고용원들 월급에, 선물에, 뭐다, 뭐다, 말도 못한다며 머리로 도리질했다. 사람을 쓰면 월급이야 당연 한 것이고 선물이야 줄데 주는 게 아니겠냐고 되물어 보았다. 누가 누구에게 선물을 하건 나에게는 관심 없는 말이다. 만 원짜리를 주고 거스름돈을 기다리면서
“얼굴이 편안해 보여 좋아요” 했더니 아주머니는 복대에서 잔돈을 찾아서 내게 건네주고는 두 팔로 도마를 짚고 피곤한 몸의 체중을 옮기면서 말 했다.
“돈이라는 건 내가 벌어서 여럿이 같이 쓰는 거래요. 내가 번다고 다 내 것은 아니거든요. 내가 일하는 것은 그저 내 품값을 버는 거고 나머지는 다 같이 써요” 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가 띵해지며 심장이 멎는 듯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찌릿찌릿 해오며 전신이 뻣뻣해졌다. 우문에 현답을 들은 때문이다. 시장에서 하찮은 닭을 팔고 있는 이 아줌마가 배웠다는 내 앞에서 경제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땀으로 닭을 팔아 이룩한 부의 고지에서 아주머니는 ‘공유 인생’의 고리를 알아낸 듯했다. 그리고 공유는 자기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도 알아 낸 듯했다. 다같이 쓴다고 말할 때 아주머니가 고개를 한 바퀴 휘 돌린 것은 점포에서 지금 일하고 있는 수많은 고용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내게 연설을 하듯 말을 계속했다.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고 앞만 보고 살아 온 덕에 돈이 모여 부를 축적하긴 했지만 여관이고 빌딩이고 품에 안을 수는 없었다고. 내 소유로 있을 뿐 그것을 편하게 이용하는 사람은 남이더라는 것이다. 남에게 가장 좋은 방을 내주고 자기는 그의 안전을 위해 밤잠을 설치며 산다고 했다. 한 끼에 두 그릇을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끼니마다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더라는 것. 좋은 옷을 한꺼번에 두 벌 껴입을 수도 없으며 날마다 비싼 옷을 입을 수도 없더라고 말했다. 엄청난 부를 이룬 다음 뒤돌아보니 내 덕에 사는 사람이 많더라고 말을 맺었다.
“너무 좋은 말이네요. 맞아요. 정말 그러네요.” 뛰는 가슴으로 나는 겨우 이렇게 밖에 말하지를 못했다.
닭 한 마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번다고 다 내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을 되뇌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독백 같은 연설은 의미심장한 그녀의 표정과 함께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내 것으로 만들려고 모두들 얼마나 애를 쓰는가? 결국은 공유하는 것인데. 모으려고 욕심낼 일도 아니고, 없다고 허전해 할 일도 아니며 내 것을 남이 쓰고 나도 남의 것을 쓰고 있다는 ‘공유 인생’을 닭 한 마리 사는 짧은 시간에 배운 셈이다.
세상사 그러한 이치를 체험으로 겪어 알면서도 아주머니는 오늘 같이 추운 날도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장화를 신은 채 물통 옆에서 닭을 손질한다. 열심히 벌어서 또 누군가와 같이 쓰려는 생각을 하며 일하겠지. 마음이 이리도 따뜻해져 오는 건 따뜻한 말을 들은 때문일 것이다.
지는 해가 아름다운 이유
해맞이를 가지는 못했어도 해뜨는 광경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소풍 때 속초의 바닷가에서 잔 적이 있었는데 어쩌다 이른 새벽에 마당에 나왔다가 해가 올라오는 장관을 본 것이다. 수평선이 붉어지며 하늘과 바다를 갈라놓은 빛덩이가 길게 바다를 타고 건너 와 내게 까지 오는 장엄함 속에 황홀감을 느꼈다. 수평선 아래서 망설일 때와는 달리 매끄러운 쇠구슬처럼 단번에 쑤욱 올라와 물기를 털어 내고 천지를 밝히던 태양의 그 힘참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날 감격을 준 뜨는 태양이나 지금 서산으로 넘어가는 태양은 뭐가 다른가? 결국은 어제 무심히 보낸 태양이 오늘 다시 떠오르는 것이고, 오늘 무심히 보낸 태양이 내일 다시 떠오르는데 지는 해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뜨는 해에 열광하는 모습들이 너무도 유난스럽다.
지난해 초여름 잘 알고 지내는 분의 콘도가 제천에 있어서 하루를 지내게 된 적이 있었다. 도착한 시각이 오후라 짐을 대강 풀어놓고 주위경관을 구경하러 나갔다, 천혜의 경관을 가진 이곳은 내가 서 있는 곳이나 강 건너 앞에 보이는 광경이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때마침 긴 남한강이 하늘과 산을 담은 채 멈춘 듯 평화롭게 누워 있고 강따라 늘어선 산자락 위로 저녁 해가 너울너울 넘어가고 있었다. 해는 남한 강을 건너오며 젖었는지 물에 불은 듯한 붉은 색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겹겹이 늘어선 산을 한 겹 한 겹 넘나들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저녁 해, 지는 해의 매력이 보이는 장면이었다.
지는 해는 우리 앞에서 멀리 보이는 산위에 선 나무의 잔가지를 끝부분까지 하나하나 살려내고 저녁 하늘에 흩어진 구름을 시시각각 색칠하는 ‘멋’을 부리고 있었다. 산이며 들이며 하루 종일 쓰다듬고 못 가진 자의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이제 남한강 물에 얼굴을 씻고 여유롭게 산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는 해는 산으로 넘어가기 전에 붉은 빛 한 자락을 강물에 풀어 놓아 금빛으로 반짝이게 하고 소나무 밑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냉이나 쑥 한 포기까지 찾아가 한 잎 한 잎 들춰가며 보듬어 주고 있었다. 그 따사함이 놀라워 저녁 해를 쳐다보았더니 저녁 해는 나를 피해 봉우리 뒤로 슬쩍 숨어 겸손을 떨었다. 문득 나는 지는 해가 진정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때 이미 그곳에서 나는 지는 해가 아름다운 이유를 찾은 건지도 모른다.
상경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멀리 산 넘어 지고 있는 해를 바라본다. 하루를 바쁘게 지냈던 마음에 푸근한 여유가 생긴다. 무엇인가 잘 해야지, 해 내야지 하고 바라보는 뜨는 해의 강렬함과는 달리 지는 해를 보고 있으면 오늘 하루도 정말 잘 지냈구나 하는 감사의 푸근함이 생긴다. 바라보는 나도 편안하고 많은 일을 하고 넘어가는 해도 편안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넘어가는 해 앞에 늘어선 산이며 길게 흐르는 강이며 펀펀하게 펼쳐져 있는 들이 모두 편안해 보인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가며, 몸을 돌려가며 지는 해를 따라 눈길이 가는 것이다. 해가 빛을 남기고 산 속으로 쏘옥 들어 갈 때까지 해를 좇아가는 내 마음속에 풀밭 같은 여유가 생긴다.
지는 해 앞에서는 작은 것이 눈에 보인다. 둥지를 찾아가는 새 한 마리도 지는 해를 가로 지를 때는 자기 몸체를 선명히 드러내고, 먼 산 위에서 흔들거리는 부드러운 갈대도 그 끝이 저녁하늘에 선명히 비친다. 뜨거움을 피해 모래 속에 숨어 있던 미꾸라지를 잠시 나오게 하여 하늘을 향해 꼬리를 치켜들고 한 번 돌게 하는 것도 지는 해의 배려이다.
지는 해는 항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세상사, 무엇을 모를까?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입 다물고 시치미를 떼어도, 눈 감고 아웅다웅해도 모른 척 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에겐 다 알고 있다며 이야기를 풀어 준다.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이다. 약한 자를 울린 사람, 여린 자를 속인 사람에게 반성의 옷을 여미게 하고 억울한 사정, 불쌍한 사정, 연민의 삶을 사는 모든 이에게는 기다림의 약속을 한다. 그래서 지는 해는 오늘을 미진하게 산 사람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내일을 희망으로 기약한다.
이렇게 보면 희망이란 역동적인 뜨는 해가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적인 지는 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된다. 지는 해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내일을 꿈꾸고 기다리며 미처 못 이루고 지나간 하루일지라도 마음을 비울 수 있다.
지는 해가 아름답다. 여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바쁜 사람들에게 돌아보는 여유를 주는 ‘지는 해'가 진정으로 아름답게 보여 감사한 마음으로 지는 해를 환송한다.
차창 밖 풍경을 보며
개인적인 볼 일이 있어서 저녁 시간이면 영주에서 안동까지를 하루건너 한 번씩 오르내린다.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니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들어섰다. 돌아올 때는 항상 어두운 밤이지만 내려갈 때는 일몰의 전후 시간이라 조수석에 앉아서 오른편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안동과 영주 사이의 고속 도로변은 절경은 없지만 석양이 빚어내는 오후의 산하가 날마다 조금씩 다르게 보여, 갈 때마다 열심히 바깥을 살핀다. 출발하여 이십 분쯤을 달리면 하늘, 산, 들, 집, 냇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는데 이곳을 지날 때는 눈으로 사진을 찍듯이 그 풍경을 유심히 보곤 한다. 이들이 모두들 말없이 자리를 지키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의 변화는 제일 먼저 하늘의 색에서 찾을 수 있다.
여름철의 하늘은 낮고 짙푸르더니 두 달째가 되어 가면서 하늘은 저만큼 높아지고 시리도록 맑아지며 엷은 색이 되어 간다. 특히 일몰 전의 가을 하늘은 가볍고 창백하다.
흐르는 물에도 계절의 변화는 있다. 지난여름 내성천의 물이 짙은 녹색으로 넘실거리며 제방이 좁다는 듯이 힘차게 흘렀지만 어느새 강폭이 좁아지면서 강바닥을 보이고 얇아진 두께로 하늘의 색을 닮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노래하듯 흐르는 여유로운 흐름이다.
푸르기만 했던 먼 산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분명 초록색으로 여름을 보냈지만 가을로 들면서 물들어가는 빛이 확연히 서로들 다르다. 나뭇잎들이 서서히 수축되고 융단같이 부드러운 초록빛으로 팔팔하던 들녘도 이제 누렇게 되면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여름의 하늘이건 가을의 하늘이건, 하늘은 그 아래서 서로 어깨를 겯고 있는 산이 있을 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산기슭을 따라 말없이 굽이돌며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강이 흐르고 있다면 하늘의 색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늘이 산과 강을 내려다보이며 교감을 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차창 밖의 정경이 그러하다. 모든 것이 정겹다.
하늘가에 그려놓은 산의 곡선이 아름다운 건 산의 높고 낮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산이 그리는 선보다 뒷산이 앞산을 내려다보듯이 품어 주어 겹겹이 겹쳐진 산의 선이 나올 때 아름다움은 배가 된다.
울긋불긋 단풍든 산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검게 보이는 산이 있기 때문이며 한 그루 빨간 단풍나무가 튀듯이 눈길을 잡는 것도 변색하지 않고 그 주변을 지키는 상록수가 뒤를 받쳐 주기 때문이다.
눈이 모자라게 넓고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면 넓다는 것 외에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풍요롭게 익어 가는 황금 들판이 평화롭고 여유롭게 보이는 것도 논과 논 사이를 가르며 아직도 파란색으로 정답게 굽이치며 경계를 만들어 주는 좁다란 논둑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들판 사이에 나 있는 하얀 길이 마을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양 아래 펼쳐지는 이곳의 풍경은 항상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으나 볼 때마다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시간 이 전원 풍경에는 항상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차창 밖으로 풍경을 읽다가 내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 넣어 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집 굴뚝에 연기도 그려 넣고 저무는 농촌의 하얀 길 위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를 그렸다. 이왕 그리는 것, 농부 옆에 그의 부인도 그려 넣었다. 길에다 사람을 그려 놓고 보니 사람이 있는 길은 길로서 더욱 생명력이 느껴지고 두 사람이 되고 보니 숨죽이며 엎드린 산이나 들에 그들의 목소리가 퍼지는 것 같다. 비로소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가 생기는 것이다. 농부 부부에게 경운기를 태워 줄까 망설이는데 차가 휙 산모롱이를 돌아갔다. 보던 풍경이 사라져 버렸다. 모레 이곳을 지날 때는 재빨리 농부 부부를 경운기 위에 앉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산하는 서로 다른 개성이 모여 질서를 지키면서 날마다 조금씩 변해 가며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어디에 속하면서 지금껏 살아왔을까 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미련하게 없는 재주로 스스로 빛나기 위해 발버둥치지는 않았나. 모자라는 힘을 알고 상처 받은 일은 없었나. 녹색의 나무가 단풍나무를 돋보이게 하듯 나도 녹색인 채로 남아서 남을 돋보이게 한 적이 있었을까. 녹색의 나무 덕택에 빛을 보는 단풍나무처럼 남의 덕에 빛을 본 적은 없었을까.
세상살이에 당연히 전자도 후자도 있었을 터이지만 이 시간, 서로 높이를 달리하고서도 어깨를 겯고 하늘을 받쳐 주는 산이 미덥게 느껴지고 한 그루 단풍나무를 튀게 만드는 묵묵히 선 푸른 상록수가 대견하며 황금물결 일렁이는 들판을 풍요의 색으로 만들어 내는 좁고 굽은 논둑과 하얀 길이 더욱 정답다고 느껴진다.
하늘 아래 길게 엎드린 산과 같은 인생도, 단풍나무의 배경이 된 상록수 같은 인생도, 들판에 난 하얀 길 같은 인생도 모두 괜찮은 인생이라고 배우며 간다. 그러나 될 수만 있다면 조용한 그림 같은 풍경에서 생동을 불어넣던, 내가 그린 농부의 존재 같은 인생이라면 더욱 좋겠다.
표정 짓는 산수유
교통이 좋아져서 20분 거리 되는 곳에 봄마다 산수유가 예쁘게 피는 고을이 있다. 봉화군 동양리에 있는 자연 부락명 ‘뒤뜨미’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다. 토요일 오후 가족들과 함께 올해 들어 두 번째 뒤뜨미를 찾았다.
동양 초등학교 교문을 오른쪽에 두고 마주 보이는 산 쪽을 향해 서면 무엇인가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질 것만 같은 하얀 길이 허리를 돌려가며 정다운 자태로 누워있다. 몇 번 가본 길이지만 언제 보아도 보이지 않는 저 산 뒤편에 무엇인가 있을 것만 같은 궁금증이 저절로 생기는 길이다.
굽이굽이 산모롱이를 돌아갈 때마다 소나무 숲이나 작은 정자가 더없이 정다운 모습으로 길손을 반긴다. 어디서부턴가 하얀 길과 계곡이 나란히 붙어서 다정하게 경사를 만들면서 올라가는 길은 마을의 품위를 더하여 왠지 자동차의 소음을 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좁은 길에 차를 세우기도 마땅치 않아 차를 몰고 가면서 내내 마음을 놓지 못한다. 이 길을 갈 때면 늘 그런 기분이 든다. 한 번도 마주 오는 차를 만나지 않은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이다. 열어 놓은 대문에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다.
모처럼 맑게 갠 하늘은 산을 따라 동그라미를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는 부드러운 산은 옆 산과 이어지며 벌어졌다 오므려졌다 하면서 동네를 감싸고 있었다.
‘산이 꼭 커다란 꽃 같다.’
항상 이 마을에 들어 설 때 갖는 느낌이다. 커다란 꽃송이 같은 산은 꽃술인냥 동네를 품고 있다. 동네 가운데로 들어서서 좌우를 한 번 둘러보면 우리도 하나의 꽃술이 되어 활짝 핀 한 송이 꽃 속에 폭 안긴 기분이 된다.
아름다운 풍광이 아까워 차는 늘 시속 5킬로미터이다. 이곳은 절경이 아니라 부드러운 산세로 포근한 곳이다. 차창 밖으로 봄도 겨울도 아닌 계곡에 고인 물이 보이면서 개울둑에 비스듬히 자란 산수유가 보였다. 노란 꽃망울을 활짝 편 채 우리를 맞고 있었다. 며칠 전에 왔을 때만 해도 터뜨릴까 말까하고 망설이고 있더니….
차 안에서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니 산수유나무가 온통 산비탈에, 개울둑에 밭둑에 대문 앞에서 터질 것 같은 미소를 머금고 막 피어오르는 노란 안개 같은 색깔을 내면서 서 있었다. 동네는 며칠 전 보다 훨씬 더 환했다. 느끼는 기분은 몇 배였다.
마른 담쟁이가 붙어서 여름을 기다리는 돌담길은 보기만 해도 정겨운데 이 돌담길을 끼고 돌아서니 고색창연한 아담한 고택이 오늘도 대문을 반쯤 열어 놓고 있었다. 이 고가는 올 때마다 대문이 열려 있어서 기분이 좋다. 누구나 들어와도 좋다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반촌의 인심이 느껴진다.
차에서 내려, 몸을 돌려 오던 길을 내려다보았다. 온 산이 노랗게 노랗게 노랗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담장없는 집안에서 이야기 나누는 여인들의 도란거리는 말소리가 들릴 뿐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한적한 마을을 산수유가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빈 집 옆을 가만히 돌아 농삿길이 이어지는 저 길은 산 밑까지 산수유 나무가 이어져 있음을 암시하고 산 구릉에 몽글몽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노란색 천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참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색이다. 나는 넉넉한 이 밝은 빛깔이 좋아 봄이 되면 이곳에 와 이렇게 서서 눈앞에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풍광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봄에 제일 먼저 피는 꽃으로는 개나리, 벚꽃을 꼽지만 그들보다 먼저 산수유꽃은 이 땅을 찾아온다. 다른 나무들이 아직 겨울눈 준비도 하지 못할 때 산수유꽃은 검은 가지를 조심스레 뚫고 나와 노르스름한 연한 빛깔을 조금씩 풀어내면서 살아 있음을 알리고, 꽃피우고 열매 맺고 단풍들고 낙엽 되는 한 해를 시작한다.
산수유는 푸른 잎 사이로 열매를 빨갛게 익혀가는 여름부터 가을이 아름다운 모습이라지만 나는 봄철의 산수유가 좋다. 그래서 겨울이 막 끝나 갈 무렵이면 꽃을 피우려고 소리 없이 안간힘을 쓰는 산수유를 보러 오고 며칠 뒤, 만개한 모습을 보러 다시 온다. 개화 직전의 수줍은 노란 빛과 만개 후의 우윳빛이 담긴 노란색을 보고 색채가 주는 포근함에 빠져들고 싶어서다.
산수유는 나무 모양에 친근감이 담겨 있다. 키만 쑥 자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키가 자라면서 적당히 옆가지 수를 불려 수형이 둥그스름하게 자라며 옆가지가 밑에서부터 시작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저만치서 바라보기 좋을 만큼 자라는 키로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키로 골짜기마다 개울둑마다 포진해 있는 산수유의 모습은 유순한 사람처럼 넉넉하기 짝이 없다. 굵지 않은 가지가 모여 한 그루를 이루면서 휘기는 할지언정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은 유연함도 보인다. 마치 외유내강의 선비의 기품을 보는 것 같아 보는 이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산수유는 꽃의 색이 좋다. 밝고 환하지만 그 색채가 튀지 않고 천박하지 않으며 품격이 있다. 은은하고 우아하게, 그러나 마침내 세상을 노랗게 칠해 버려 어두운 겨울 산을 수묵 채색화가 그려진 화선지처럼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게 하는 힘이 있다. 잔가지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꽃망울이 맺혀서 터져 나오려 할 때의 안개 같은 연노랑 색채의 신비로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연노랑 물로 돌아 온 봄을 확인시키고는 며칠을 기다렸다가 꽃망울을 활짝, 활짝 터뜨릴 때의 그 밝고 화사하게 부풀어 오르는 노랑색은 보는 이를 설레게 한다.
산수유는 작은 것이 모여 크게 이루는 위대함이 있다.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고 온 산천을 포근하게 만드는 힘은 자세히 보면 작디작은 꽃 하나의 힘이다. 너울거리는 꽃잎 한 장 없이 어두운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같은 모양을 한 작은 꽃들이 수없이 모여서 넓은 산천을 물들이는 위대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향기에 취하는 게 아니라 색에 취해 젖어든다.
산수유는 또한 어디에서건 주위와 어울리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언덕에 선 산수유는 언덕의 경사와 같은 선으로 언덕과 어울리고 비탈에 선 건 또 비탈의 각도와 같은 각도로 비탈과 어울린다. 대문 앞에선 산수유는 대문의 선과 같이 곧게 서서 빈 집을 지키고 산기슭에 선 산수유나무는 산과 같은 둥글음을 유지해 산의 곡선이나 나무의 곡선이 같이 둥글어 산도 둥글둥글 나무도 둥글둥글하여 산수유꽃 피는 마을은 둥글둥글 부드러움이 묻어난다. 한없이 커져 가는 노란 풍선처럼 산 아래 선 산수유나무는 그렇게 둥글게 부풀어 간다.
뒤뜨미의 산수유는 표정과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양각색의 산수유는 하나같이 정겹지만 그 가운데서도 내 마음을 끄는 나무는 마을 입구 언덕 가에서 저 아래 산모롱이 돌아가는 길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나무다. 돌 틈에 뿌리를 박고 수많은 옆가지와 잔가지를 가진 채 언덕과 같은 각도로 비스듬히 서서 벌써 몇 년째인지도 모를 나이를 오그라드는 검은 껍질로 말하며 동구 밖을 향해 서 있는 나무는 올 때마다 내 마음을 끈다.
이 나무는 동네의 과거를 다 알고 있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이 비탈길은 아침저녁이면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 찬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비탈진 밭을 가꾸던 젊은이가 많았던 시절도 알고 있으며 가을이면 빨갛게 익은 열매를 따 밤새 씨를 발라내 양지바른 곳에서 말리던 젊은 아낙의 손길이 많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때는 마을에 군청 직원도 면사무소 직원도 인근 학교 선생님도 꽤 많이 있었다는 것도. 그래서 이 나무는 표정이 있는 지도 모른다. 여름이면 촬촬거리며 흐르는 계곡에 뛰어들어 고무신으로 물고기를 잡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다들 어디 갔을까. 왜 한 번 나간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하며, 혹시나 돌아올지도 모르는 옛사람들을 기다리는 표정을 하고 밤낮으로 노란 불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나는 표정 짓는 산수유가 좋아서 봄이면 몇 차례씩 뒤뜨미를 찾는지도 모르겠다.
먼저 가나 늦게 가나 옹천장
출근길, 멀리서 보니 도로가 빡빡하게 차로 차 있다. 육거리에서 차들이 서로 맞물리며 곡예를 하듯이 빠져 나가고 엉키고 한다. 육거리에는 꽃동산이라는 구조물이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수많은 차들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저기를 잘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출근할 때마다 하는 걱정이다.
이 육거리는 길이 여러 갈래여서 진입하는 차량이 많은데다가 신호등이 없어 운전자들이 눈치껏 빠져나가고 있다. 진입 순서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덩치 순서나 배짱 순서로 빠져나가고 있어 출퇴근 시간 나 같은 초보자에게는 근심이 아닐 수 없다. 승용차만 다니면 그런대로 가겠는데 트럭이나 버스가 큰 몸체를 들이대면 방게 같은 내 차는 기가 죽어 앞으로 가질 못한다.
오늘 아침에도 이러한 현장에 있었다. 빨리 가 봐야 또 엉킬 것이란 생각에 멀리서부터 서행을 하여 남의 차를 긁지 않게 조심조심 차들 틈에 들어서 있는데 뒤에 온 자주색의 아반떼가 차머리를 급히 들이 밀더니 기어이 내 차보다 한 발 앞에 섰다. 그리고는 잠시 후 꼬불랑거리며 보란 듯이 순서를 뒤집고는 차 사이를 빠져나갔다. 바라보는 내 가슴이 서늘했다. 그러나 다음 신호 대기대에서 그 차가 정지선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옆 차선에 가서 그 차 옆에 멈추어 섰다.
이 차를 보자니 ‘먼저 가나 늦게 가나 옹천장’ 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옹천은 인근 촌락 지명인데 5일장이 서던 예전에는 아마도 꽤 큰 장이 섰나보다. 이 말은 빨리 가려고 서두르는 사람한데 쓰는 말인데 아무리 서둘러 가 보았자 결국엔 옹천장에서 모두 만난다는 뜻, 그러니 먼저 가는 것이 별로 잘 하는 일이 아니니 그렇게 서둘지 말라는 뜻으로 사용하던 말이다. 살면서 이 말은 바쁘게 살아가는 나에게 지침이 되기도 하고 가끔 위안이 될 때도 있었다.
나는 이 ‘옹천장’이라는 말에 단순히 장터에서 만난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네 인생에서 ‘목적지를 향한 동행’을 권유하는 말이 내포된 건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어차피 한 곳에서 만날 인연, 혼자 가지 말고 함께 가라는 교훈 말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야기도 나누면서 가는 시장길이, 인생길이 정답지 않을까. 그래서 이웃끼리 함께 가자는 은근한 권유의 뜻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음 신호대기에서 걸릴지라도 우선은 빨리 달리고 보는 성미 급한 운전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사람들은 목적지에 가서 딱히 할일 없이 놀더라도 일단 차도에만 올라서면 주행만은 빨리하려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지만 왜 모두들 그렇게 서두르며 살아갈까? 왜 남보다 먼저 가야할까?
차도에서나 인생에서나 빨리 간다는 것은 언제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찍 와서 다행인 경우도 있겠지만 일찍 왔기 때문에 궂은 일을 만날 수도 있고 반대로 늦었기 때문에 불행을 모면한 경우도 있을 텐데 순리대로 살지 않고 규칙을 어기면서 우선 빨리 가고 보자는 생각을 하는 게 안타깝게 셍각된다.
인생을 질주하는 주행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젊은 나이에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여 승진의 기회를 잡아서 오를 때까지 올랐다가 남보다 빨리 내려가는 준비를 하는 직장인의 인생을 보기도하고, 좀 천천히 가서 남이 내려와야 할 때 높은 곳에 올라서는 여유를 즐기는 인생을 보기도 한다. 서로 다른 인생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 일에 추월과 과속 질주를 하는 차량을 빗대보면 재미있는 상상이 될 것 같다.
먼저 가나 늦게 가나 ‘옹천장’이랬다. 인생의 여정이 누구나 그러그러하고 먼저 가나 늦게 가나 ‘옹천장’이라면 서두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신호등의 색을 내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듯 인생사 또한 내 마음대로, 원하는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옹천장’은 서는 것이고, 옹천장이 서면 장보기는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간다고 장판에 있는 것을 다 사는 것도 아닐텐데 서두를 필요가 뭐 있겠는가. 나보다 먼저 가는 사람이 좋은 것을 다 살 것 같은 조바심이 들지는 모르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오히려 늦게 간 사람이 좋은 물건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 시장이며 인생사에 숨겨진 이치이다. 그러니 서두르고 부딪치며 애쓰고 눈치 보고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신호등에서 빨간불이 켜지면 그냥 멈추는 거다. 서두르지 말고 잠시 숨을 고르고 경직된 어깨를 풀면서 목도 이리저리 돌려 유연성을 높이고 다시 파란불이 켜질 때를 기다리라. 인생에서 앞지르기는 능사가 아니다. 순리대로 행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라. 욕심을 다 비울 수야 없겠지만 욕심의 무게를 조금씩 가벼이 하고 삶의 속도를 조절하라. 옹천장의 속설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빈 자리
선구의 교과서랑 학습 결과물을 내 손으로 싸서 숙모의 손에 건네주고도 아직 선구의 전학을 믿지 않고 등교를 기다린다. 오늘처럼 빈 책상 위에서 얼굴을 내밀고 쌔액 웃고 사라지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선구는 작은 몸과 까만 피부로 결코 이목을 끄는 외모는 아니지만 털털한 성격과 헤벌어지게 웃는 맑은 얼굴로 교실을 일렁거리게 하는 대단한 아이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즐거운 생활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준비해 온 신문, 잡지 등의 자료들을 책상 위에 잔뜩 늘어 놓고 이것저것 골라가며 손길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소리에 사각사각 가위질하는 소리가 어울려 교실이 경쾌하다. 이렇게 무엇인가 꾸미기하는 시간이 좋아 연신 재잘대는 소리가 날 뿐 제각각 부지런히 열중하고 있어 그날도 아마 기가 막힌 작품이 나올 것이란 기대감에 젖어 있는데 갑자기 “여자 다리! 여자 다리 이!” 하고 선구가 분위기를 깨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그날은 반응이 좀 달랐다. 모두들 제 일에 열심이니 선구가 찾는 ‘여자 다리’에 관심이 없어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그러자 선구는 엉덩이를 들었다. 가벼운 몸을 세우고 폴짝거리며 이 모둠 저 모둠을 기웃거리더니만 급기야 까맣고 바짝 마른 얼굴에 웃음을 얹어서 깡마른 다리로 개다리 춤을 추며 “여자 다리! 나, 여자 다리가 필요해. 여자 다리가” 하고 모둠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여기 저기서 ‘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나면서 마침내 교실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감기라며 결석한 이틀과 무단결석이 수상했다. 선구는 아프다며 두 번 결석을 한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전화로 아프다고 알려 왔기 때문에 별로 걱정은 안 했는데 며칠 계속된 무단결석은 좀 이상했다. 결석 이틀째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알게 된 게 없어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선구의 소재를 밝히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나갔다. 지난 두 번의 병결까지 의심이 갔다.
‘어쩐다? 분명 선구는 학교에 오고 싶을 텐데.’
선구에게 학교는 신나는 곳이었다. 남들이 학교 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선구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선구의 무단결석 닷새째 뜻밖에도 할아버지 음성의 전화를 받았다. 화난 목소리의 할아버지는 ‘어! 참,’ ‘어! 참’을 연발하면서 곤란해 했으며 혹시나 하는 예감을 역시나 하는 현실로 확인해 주었다. 선구는 엄마 없이 살아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아버지마저 없이도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
“우째면 되겠니껴?” 할아버지가 한숨을 섞어 물어 오셨다.
일단 할아버지가 계시는 그곳으로 전학을 권하고는 다른 방안이 없어 참으로 답답했다. 당분간 엄마와 별거하는 아이로 자라 가야 할 선구가 안쓰러워 가슴이 아려 왔다. 선구는 멀리 간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려도 되는 걸까? 안 되는 경우, 엄마가 없는 것보다는 새엄마라도 생기는 게 나은 걸까? 어떤 경우이든 선구와 내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딱하기만 했다. 아프다며 오지 않은 그날도 사실은 부모의 불화가 원인이었다고 짐을 가지러 온 숙모가 일러주었다. 빠진 앞니를 내 보이며 감기를 앓았다고 말하더니….
부모의 불화는 제 잘못이 아니란 걸 채 일러주기도 전에 그것을 저의 수치로 알고 남이 알세라 작은 몸짓으로 숨기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온종일 생글거리며 하루를 보낸 어린 가슴을 생각하니 새삼스레 안쓰러워지는데 아침마다 학교 가는 시간이면 집 뒷곁에서 훌쩍거리고 울었다는 숙모의 말은 끝내 내 눈에도 눈물이 핑 돌게 했다. 상황판단이 빠른 아이니 그랬을 것이다. 학교에 가고 싶지만 여기서도 저기서도 갈 수 없다는 상황을 알았을 것이고 할아버지가 아시면 걱정하실 테니 우는 것도 숨어서 울었으리라.
“금방 적응할 겁니다. 영리하거든요.”
선구의 보따리를 손에 들려주며 숙모에게 말했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다. 선구는 싸우지 않고, 빼앗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웃음을 주고 마침내 목적하는 바를 얻어내는 슬기를 가진 아이다.
그날 선구는 개다리 춤을 추어가며 결국 뜻하던 여자 다리를 얻었다. 꼬불랑 머리의 흑인 여자의 얼굴 밑에 넥타이가 멋지게 메어 진 잘 빠진 자켓 아래 바지는 빼먹은 채 어렵게 구한, 날씬하고 길다란 여자 다리를 바로 붙이고는 워커를 신겨 놓은 익살스런 사람의 모습을 캔트지에 붙여서 검사를 받으러 나왔다. 아이들은 선구가 꾸민 작품을 보고 모두 포복절도를 했다.
여자 다리를 얻어 작품을 완성하는 그 엄청난 능력이라면 예전 같은 가정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면서 할아버지 마음을 읽어 제 일뿐 아니라 두 동생을 보살피는 생활까지도 잘 해낼 것이다.
그렇잖아도 이 빠진 얼굴로 입을 헤벌려 생글거리는 얼굴이 선구의 책상 위에서 맴돌고 여자 다리를 소리쳐 찾던 목소리가 들려 와 전학 서류를 하기 위해 출석 일수를 계산하는 마음이 산란스러운데 숙모는 그냥 가면 될 것을 선구가 꼭 우리 교실로 다시 오려고 애를 쓴다는 말은 왜 하는가? 어린 가슴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야하는 나의 무능이 목을 아프게 누르는 것만 같다.
선구가 전학을 간지 보름이 넘어 좌석이 앞니 빠진 선구 이처럼 되었지만 왠지 ‘여자 다리’를 외치며 강중거리는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 그리고 다시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우리 교실을 출렁거리게 해 줄 것 같아서 자리 정리를 하지 않기로 했다. 빠진 자리에 이가 돋아나 메워지듯이 선구가 돌아와 다시 빈 자리를 채워 주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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