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서당교사연수원 원문보기 글쓴이: 무인행
論語注略
(學而篇, 文法論附錄)
이 文書는 論語, 學而篇 중에서 중요 章과 朱子의 集注를 選別한 것이다.
讀者 諸賢의 漢文 學習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文書를 作成하였다.
뒤에서는 附錄으로, 漢文을 理解하고 解釋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항들을 정리하였다.
1999年 10月 日
동양고전읽기 主人, 某가 쓰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공자가 이르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데서 찾아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學之, 習之를 붙여서 쓰면, “學而習之”가 된다. 여기서 之는 學을 받는 대명사가 아니라, 어기(語氣)를 고르게 하고, 之자 앞의 단어를 술어가 되게 하는 어감을 주는 어조사(語助辭)이다. 어조사라는 말은 다소 애매하여, 앞으로 이 책에서는 之를 부정대사(不定代辭)라 부를 것이다. 지시하는 대명사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不定”이라 하고, 명사를 받는 대명사(代名詞)가 아니라, 단순히 어기를 고르게 하기 위해 동사의 빈자리를 메꿔주는 말에 불과하므로 “代辭”라 한다. ○說(설/열)은 원래 “말하다/ 기뻐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의미를 분명히 구분하기 위해 “기뻐하다”는 뜻으로는 “悅”(열)로 대신하여 쓰이게 된 것이다. 물론 후대에도 說(열)과 悅을 혼용하기도 한다. ○有朋(유붕)에서 有는 “있을 유”의 1차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에서 파생하여 불특정한 대상을 지목할 때 쓰이는 한정어이다. 우리말로는 “어떤~, 어느~” 등의 명사를 지목해주는 말을 붙여주거나, 또는 아예 우리말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知는 “~을 알다”는 뜻이지만, 전(轉)하여,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가치)를 알아준다”는 의미로도 흔히 쓰인다. ○慍은 성낼 온.
學之爲言效也. 人性皆善, 而覺有先後,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 旣學而又時時習之, 則所學者熟, 而中心喜說, 其進自不能已矣. ○朋, 同類也. 自遠方來, 則近者可知. ○尹氏曰: 「學在己,知不知在人, 何慍之有?」 愚謂及人而樂者順而易, 不知而不慍者逆而難, 故惟成德者能之. (學而章一)
배움이란 말은 본받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모두가 선한 것이지만, 깨달음에는 먼저 깨닫는 사람과 뒤에 깨닫는 사람이 있으니, 뒤에 깨닫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깨달은 사람의 행위를 본받아야만 선을 밝혀 그 본성의 처음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새가 날개짓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배우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새가 날개짓을 부지런히 하는 것과 같다. 이미 배웠어도 수시로 익히면 배운 것이 무르익어 마음 한가운데에서 희열을 느끼니, 그 나아감을 저절로 그칠 수 없는 것이다. ○벗이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먼 데서도 찾아 온다면, 가까이 있는 곳의 사람들이 찾아옴도 알 수 있다. ○윤씨가 말하였다. “배움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요, 알아주고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성낼 것이 있겠는가?” 내 생각에, 남에게 미쳐서 즐거운 것은 마음에 거스릴 것이 없어서 쉬운 일이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것은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라 어려우므로, 오직 덕을 이룬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사람의 본성을 본시 선(善)한 것으로 여긴다. 즉,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네가지의 선한 본성을 타고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기질(氣質)적인 영향이나, 사리사욕에 선한 본성을 가리우게 되니, 배움이란 것은 바로 그 본성의 선함을 깨닫고, 그 본성의 처음을 회복하여 밝게 밝히는 과정인 것이다. ○學之爲言: 배움의 말 됨은, 배움이란 말은.. ○效는 본받을 효. ○乃는 접속사로, 또는 부사로서, “이에, 비로소” 등의 뜻이다. ○可以는 “~할 수 있다.” 그 뒤에는 대개 술어가 오므로, 明은 동사임을 알 수 있다. “~을 밝히다”의 뜻이다. ○復은 회복할 복. 復舊(복구), 恢復(회복: 또는 回復이라고도 씀) ○數은 자주 삭. 부사로서 술어를 한정한다. ○習의 글자 모양을 보면, 깃털(羽)이 들어 있는 글자이다. 그래서 習이란 단어의 뜻을 어린 새가 날개짓을 반복하는 것과 연관지어 주석을 한 것이다. ○已는 그칠 이. ○之는 부정대사(不定代辭)의 용법 외에, 두 문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흔히 우리말의 관형격 조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때의 용법도 단순히 관형격 조사로서의 쓰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명사구 또는 동사구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므로, 본인은 이를 연결사(連結辭)라 부를 것이다. 두 명사구나, 동사구가 연결될 때, 이 두 문구는 주격/목적격/관형격 등으로 연결되기도 하며, 또는 단순히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 之를 붙이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學之不已, 如鳥數飛也”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學과 不已라는 두 동사구를(또는 명사구로 볼 수도 있음) 之가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관형격으로 해석하면, “배움의 그치지 않음은..”이 되며, 주격으로 해석하면, “배움이 그치지 않는 것은...”이 되고, 목적격으로 해석하면, “배움을 그치지 않는 것은..”이 된다. 즉, 之는 주격이냐, 목적격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우리말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중요할런지 몰라도, 한문 그 자체로 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구분임), 두 동사구나 명사구를 연결시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旣A, (而)又B”는 관용구로 자주 쓰이는 문형이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즉 A이면서 또 B이다. (이미) A하고 또 B한다. 등등 동시 상황을 나타내는 어구이다. ○熟(숙)은 “~을 익히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熟知(숙지), 熟讀(숙독). ○類는 무리 류. 部類(부류), 人類(인류). ○者는 사람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 ~라는 것”의 뜻이 있어서, 명사구를 형성하거나, 또는 명사절을 형성하는 용법으로도 많이 쓰인다. “及人而樂者順而易”에서 及人而樂者가 하나의 명사절을 형성하는 것이다. “남에게 미쳐서 즐거운 것은”의 의미이다. ○順과 逆은 대칭이 되는 두 단어이니, 이를 이용해서 댓구문을 많이 만들기도 한다. 順行(순행), 逆行(역행), 順風(순풍), 逆風(역풍). ○“何慍之有”에서도 之는 何慍이란 명사구와 有라는 동사구를 연결시키는 연결사(連結辭)이다. 이때 주격이냐, 목적격이냐, 관형격이냐를 따지는 것은 별 소용이 없고, 다만, 두 문구를 우리말의 어감에 맞게 적당히 옮기면 되는 것이다. ○愚(우)는 어리석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자신을 가리키는 겸칭(謙稱)으로, 1인칭 대명사이다.
(注)
공자의 이 세가지 말씀은 모두 단편적으로 따로 따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종합해서 보면, 이 문장에서는 학문(學)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학문이란 爲人之學(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爲己之學(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한 학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학문을 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요,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학문이 여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 명성이 멀리까지 알려져 먼곳의 사람들도 그 학문을 본받고자, 또는 그 뜻을 같이 하고자 하는 동지(同志: 즉 朋을 말함)들이 찾아온다면, 비록 남을 위한 학문을 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즐거워할 만하다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설사 자신의 학문이 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또한 이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면, 진정으로 爲己之學을 행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하고 넌지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독자는 여기서 朋의 의미를 통상의 친구라는 의미로 새기지 말기를 바라며, 공자의 이 우회적인 말씀을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이해하기를 바란다.
● “所+타동사”의 용법
“所+타동사”에서 所는 그 뒤에 오는 타동사의 행위의 대상을 나타낸다. 즉, 행위의 목적이나 대상을 받는 말이다. 예를 들면, 所願(소원)이란 단어에서, 所는 願이라는 원한다는 타동사의 목적/대상이 된다. 우리말로 옮기면, “원하는 것, 원하는 바”가 된다. 중요한 점은 所가 동사의 주체가 아니라, 목적격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단어는 무척 많이 있다. 所聞, 所行, 所致, 所請 등등 이런 단어에서 그 의미를 음미해 보기 바란다.
여기서 좀 응용을 해보기로 하자. 이번에는 “所+타동사+목적어”의 구문에서는 所가 어떤 기능을 할까? 이미 타동사의 목적어가 나와 있으니, 이때 所는 무슨 의미가 되는 것인가? 잘못된 표현이라 속단할지도 모른다. “無所逃罪”(죄를 피할 곳이, 죄를 피할 바가 없다)란 예문을 보자. 여기서도 역시 所는 逃罪라는 동사구의 대상/목적을 나타낸다. 다른 예문을 보면서 所의 의미를 음미해 보기 바란다. 虎無所措其爪(호랑이가 그 발톱을 둘 곳이/둘 바가 없다). 雖有舟輿, 無所乘之(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 일이/탈 바가 없다)
이외에도 所와 관련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많다. 이 所의 용법만 제대로 알아도 한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이만 살펴보고, 다음에 다시 위의 용법에 이어서 설명하기로 한다.
예문 : “所依者不失其可親之人, 則亦可以宗而主之矣”이란 문구를 해석해 보기 바란다. 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되도록 번역을 해야 한다. “남이 의지해 와도, 의지를 받은 사람이 그 친히 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는다면, 또한 그를 宗主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所依者를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한다면 벌써 위에서 언급한 所의 용법을 망각한 것이다. 所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그 대상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所依者는 의지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타동사의 대상이 사람을 가리킬 때는 오역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有子曰: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유자가 이르시길, “그 사람됨이 효제스러우면서,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무니라.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동 부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아직까지 없었으니라. 군자는 근본에 힘쓰나니, 근본이 서면 도는 저절로 생겨나느니라. 효제라는 것은 아마도 인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
○爲人은 한 단어로, “사람됨”을(인간 됨됨이를) 뜻한다. ○也는 종결형 어조사로도 쓰이지만, 여기서처럼 주어를 구분짓는 역할도 한다. 其爲人也(그 사람됨이..)라고 하여 호흡을 잠깐 끊고, 뒷 문장을 이어준다. ○弟는 원래 “아우/(형이나 어른을) 공경하다”는 뜻이 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후자(後者)의 뜻을 별도로 구분짓기 위해 마음심(心)변을 붙여, 悌로 쓴 것일 뿐이다. ○好는 타동사로는 명사가 뒤에 오면 “~을 좋아하다”의 뜻이고, 동사가 목적어로 오면, “~하기를 좋아하다”는 뜻이다. 또는 한정어로 쓰이면 “좋은~”의 뜻이다. 好人(좋은 사람). ○鮮은 드물 선. ○未之有也: 대개 未, 莫, 不 등의 부정사가 대명사를 받는 술어와 함께 쓰이면, 그 대명사가 도치된다. 莫我知(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 未我知(나를 아직 알아주지 않는구나) 不我知(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윗 문장에서도 之는 부정대사로서, 有와 도치된 것이다. 之는 지시성이 약한 代辭로서, 문법적인 성격은 일반 대명사와 같은 부분도 있다. 그러나 다른 점도 많이 있기 때문에 본인은 代名詞라 부르지 않는 것이다. 일반 대명사와의 동이(同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한다. 이 도치구문에서 중요한 점은 대명사일 경우에만 도치된다는 것이다. 대명사가 아닌 경우에는 도치되지 않는다. 不知人(남을 알아주지 않는다: 人은 인칭 대명사가 아니므로 도치되지 않는다) ○務는 힘쓸 무. ○“其~~與(乎)” 구문은 “아마도 ~일 것이다”의 뜻으로 흔히 쓰이는 관용구이므로 반드시 익혀 두도록 하자.
有子, 孔子弟子, 名若. 善事父母爲孝, 善事兄長爲弟. 爲仁, 猶曰行仁. ○程子曰: 「孝弟, 順德也, 故不好犯上, 豈復有逆理亂常之事. 德有本, 本立則其道充大. 孝弟行於家, 而後仁愛及於物, 所謂親親而仁民也. 故爲仁以孝弟爲本. 論性, 則以仁爲孝弟之本.」 或問: 「孝弟爲仁之本, 此是由孝弟可以至仁否?」 曰: 「非也. 謂行仁自孝弟始, 孝弟是仁之一事. 謂之行仁之本則可, 謂是仁之本則不可. 蓋仁是性也, 孝弟是用也, 性中只有箇仁義禮智四者而已, 曷嘗有孝弟來. 然仁主於愛, 愛莫大於愛親, 故曰“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學而章二)
유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약(若)이다.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효(孝)이고, 어른과 형을 잘 섬기는 것이 제(悌)이다. 爲仁이란 行仁이라는(인을 행한다는) 말과 같다. ○정자가 말씀하셨다. “효제라는 것은 순응하는 덕이어서,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어찌 이치에 거슬리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겠는가? 덕에는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서면 그 도가 충대해진다. 효제(孝悌)는 우선 집안에서 행해진 뒤에야 인애(仁愛)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되는 것이니, 이는 이른바, 「그 어버이를 친히 하고 나서 백성을 인(仁)으로 대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인을 행하는 것은 효제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단, 만약 본성(本性)을 논한다면, 인을 효제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누가 묻기를, “효제는 인의 근본이니, 이는 효제를 따르면 인에 이를 수 있다는 뜻입니까?”라고 하길레, 내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게 아니다. 그것은 인을 행하는 것이 효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것이다. 효제는 인의 한 가지 일이니, 효제가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하면 옳지만, 효제가 인의 근본이 된다고 하면 옳지 못하다. 인은 본성이요, 효제는 겉으로 드러난 응용이다. 본성에는 다만 인의예지, 네가지만 있을 뿐이니, 어찌 효제가 이에 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은 사랑을 위주로 하고, 사랑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효제라는 것은 아마도 인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復는 부사로서, 다시 부. ○常은 명사로서, 常道(상도), 常法(상법)을 가리킨다. ○“~而後~”는 “~하고 나서 ~한다”는 의미로 흔히 쓰이는 관용구이다. ○親親而仁民: 앞의 親은 동사로서, “친히하다”는 뜻이고, 뒤의 親은 명사로서, “어버이 친”이다. 이 문구는 자기 어버이를 먼저 사랑하고 나서,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仁의 점진적인 파급을 말하는 것이다. 유명한 문구이므로 외워두길 바란다. 그래서 程子께서 所謂(이른바)라는 말을 그 앞에 붙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墨子(묵자)라는 사상가는 儒家의 이러한 점진적인 사랑의 원리를 비판하고, 모든 사람을 자기 부모처럼, 또는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자는 兼愛說(겸애설)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或問에서, “孝弟爲仁之本”라고 한 부분의 爲는 “될 위”자로 쓰인 것이다. 孝弟가 주어이고, 仁之本이 주격 보어로 쓰인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은 爲仁之本(인을 행하는 근본)이란 有子의 문구를 잘못 해석하여, 즉 “할 위”자를 “될 위”자로 받아들여, “인의 근본이다”라고 오해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否(부)는 문장의 끝에 붙어, 의문문을 만들어 준다. 물론, 의문형 어조사인 乎를 붙일 수도 있지만, 이처럼 否를 붙여 의문문을 만드는 경우도 많이 있다. 乎는 주로 문어체에서 의문문을 만들고, 否는 주로 구어체에서 쓰이는 의문문이다. ○“謂之行仁之本則可”에서의 之는 부정대사이고, “謂是仁之本則不可”에서의 是는 동사로서, “~이다”의 뜻이다. 是의 주어는 문맥상 분명한 경우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현대 중국어에서도 마찬가지로 흔히 쓰이는 용법이다. 즉 문맥상의 주어는 孝弟이므로, 주어를 쓰지 않는 것이다. ○仁是性也와 孝弟是用也에서 是도 역시 동사이다. ○用(용)은 體와 상반되는 말로서, 體는 본질이나, 본체를 의미하고, 用은 그 본질의 응용을 뜻한다. 위의 문장에서는 仁이 體이고, 孝悌는 그 用이라는 것이다. 體用(체용: 본질과 그 응용/작용) ○箇는 個와 같은 글자이고, 양사(量辭: 물건을 세는 단위)로서, “하나의~”의 뜻이다. 이런 양사는 주로 구어체에서 쓰이는 단어이다. ○“~而已”는 “~일 뿐이다”는 뜻의 관용구이다. ○蓋(개)는 “대개, 일반적으로/ 아마도” 등등의 2가지 의미를 가진 발어사(發語辭)이다. ○曷은 어찌 갈. ○嘗은 부사로서, 일찍이 상. ○然은 접속사로, “그러나”의 뜻.
(注) 사람의 본성.
유가(儒家)에서는 사람의 본성을 仁義禮智, 이 네가지로 규정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부여한 이 네가지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각 개인이 타고난 기질(氣質)적인 영향이나, 인욕(人慾)에 사로잡혀 종종 이 네가지의 본성을 가리우게 되고, 또한 이를 깨닫지 못한다. 孟子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 네가지 본성이 있음을 증명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四端說이다. 즉, 사람에게는 누구나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사양할 줄 아는 마음, 그리고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바로 이 네가지 발단이 되는 마음을 귀납해 들어가면 바로 仁義禮智의 네가지 본성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아기가 우물속으로 기어 들어가려고 한다면, 누구나 이 아기를 구해줄 것이다. 이는 타고난 기질(氣質)이 순수하건, 잡되건, 또는 그 아기를 구해줌으로써 어떤 대가를 얻거나 칭찬을 받고자 하는 마음, 즉 사리사욕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 아기를 구하려는 마음은 바로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이로부터 보면, 사람은 누구에게나 仁義禮智의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孟子가 설파한 것이다. 배움이라는 것은 바로 이 네가지의 선한 본성을 깨닫고, 그 본성의 처음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有子의 말씀은 바로 그 네가지 본성 중에서 仁을 행하는 근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仁은 사랑을 위주로 하고, 사랑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仁을 행하는 근본은 바로 孝悌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孝悌는 바로 이 仁에서 비롯된 것이니, 효제의 근본은 바로 仁이 되는 것이다. “其爲仁之本與”라는 문구를 或者는 “효제가 인의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로(爲를 「할 위」자가 아닌, 「될 위」자로 본 것으로 생각됨) 오해하여, 程子에게 물었으나, 程子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본성을 들어 仁은 그 자체가 본성이니, 仁의 근본은 더 따질 수가 없고, 다만, 仁을 행하는 출발점이 孝悌라고 지적한 것이다. 즉, 仁은 더이상 근본을 따질 수 없는 하늘이 부여한 본성이며, 孝悌라는 것은 그 仁을 행하는 하나의 응용(應用)일 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朱子는 이에 爲를 「될 위」자가 아닌, 「할 위」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爲仁은 行仁과 같다고 하여,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 “其~~與(歟, 乎)”의 예문.
이 예문은 한문에서 아주 많이 쓰이는 관용구이다. 많은 예문을 접해봄으로써 이 용법에 익숙하게 되기를 바란다. 與(歟)나 乎 등등은 감탄의 어기를 갖는 어조사이다. (與도 역시 “참여하다. 더불다”는 뜻과 “감탄형 어조사” 두가지로 쓰이는데, 이때 후자의 뜻을 구분짓기 위해 歟라는 글자가 생겨난 것임)
知我者, 其天乎! (나를 알아주는 자는 아마도 하늘이리라!)
知變化之道者, 其知神之所爲乎! (변화의 道를 아는 자는 아마도 神이 하는 일을 알 것이다)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천지지간, 그것은 아마도 풀무(槖籥:탁약)와 같을 것이다)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詩經에 이르기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듯이라는 것은 아마도 이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이르는 것일 것이다.)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夫子의 구하심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구함과는 다를 것이다!)
從我者其由也與! (나를 따를 자는 아마도 유(由)일 것이다. 由는 공자의 제자 중의 한 사람)
豈古陶淵明之徒歟! (아마도 옛적의 도연명의 무리이리라)
이 이외에도 이런 문장은 수도 없이 많다. 이런 문형이 나오면 이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지막 예문에서 豈는 원래, “어찌 기”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其와 그 음(音) 똑같아서 가차(假借)하여 쓴 것이다. 豈가 종종 이런 추측의 뜻으로도 쓰이므로, “어찌 기”로 해석해서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면, 이때는 其(아마도)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마지막 예문을, “어찌 옛적 도연명의 무리이겠는가?”라고 해석하면 문장의 의미가 정 반대로 뒤바뀌어, 오역이 되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子曰:「巧言令色, 鮮矣仁!」
공자가 이르시길,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 중에는 드물도다. 인(仁)한 자가!”
○巧는 공교로울 교. 교묘하다. 재주가 있다. 좋게하다(好)는 뜻이다. ○令은 아름다울 령. 아름답다, 선(善)하다는 뜻이다. 令夫人(남의 부인에 대한 존칭) 令女(남의 딸에 대한 미칭,美稱) ○矣는 주로 단정, 결과, 확신, 추측 등등의 어감을 갖는다. 또한 주로 단음절의 술어와 붙어서 단정적으로도 많이 쓰인다. 鮮矣(드물다), 久矣(오래되었다), 謬矣(오류이다) ○위 문장은 도치된 것이다. 정치(正置)시킨다면, 이와 같이 써야 할 것이다. “巧言令色而仁者, 鮮矣”
好其言, 善其色, 致飾於外, 務以悅人, 則人欲肆而本心之德亡矣. 聖人辭不迫切, 專言鮮, 則絶無可知, 學者所當深戒也. (學而章三)
그 말을 듣기 좋게 하고, 그 얼굴빛을 선하게 하여, 외면을 꾸며 남을 기쁘게 하기를 힘쓰면 인욕(人慾)이 방사해져 본심의 덕이 사라진다. 성인의 말씀은 박절하지 못하여 다만 「드물도다」라고 하셨다면 절대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배우는 사람이 마땅히 깊이 경계하여야 할 일이다.
○致는 이를 치. 이룰 치. “~에 이르다, ~을 이루다” 등의 뜻이다. 致飾: 꾸밈에 이르다. 즉 꾸미다는 뜻이다. ○務以悅人: 여기서 以는 務와 悅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즉, “~하여(써) ~한다”는 뜻으로, 동사구를 인과 관계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즉, “힘써서(以) 남을 기쁘게 한다”는 뜻이다. ○人欲은 人慾으로도 쓰며, 한 단어이다. 사람으로서 갖는 욕망과 욕심을 뜻하는 단어이다. ○肆는 방사(放肆)할 사. 즉, 제멋대로 한다는 뜻이다. ○亡(무)는 없을 무. 옛날에는 無와 통용되었던 글자이다. ○迫切(박절)은 현대에도 많이 쓰는 단어이다. 박절하다. ○專은 부사로서, 오로지 전. ○絶(절)은 부사로서, “절대로”의 뜻이다. ○“可知~”는 관용구로서, ~임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可見~”과 같은 뜻임. ○所當深戒: 當은 마땅히 ~해야 한다. 深은 부사로서, 깊이, 매우 등의 뜻이다. 戒(경계하다)라는 동사의 대상/목적은 所가 받는다. 어찌보면, 所는 영어의 의문대명사인, what과도 같은 것이다. (所當深戒 = what should be paid great attention to)
(注)
겉으로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얼굴빛을 억지로 좋게 꾸미는 사람들 중에는 그 본심과 외면이 서로 어긋난 경우가 많으니, 사실 仁한 자가 드물다. 공자의 이 말씀은 본심과 외면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朱子는 巧言令色하는 자는 모두 절대로 仁한 자가 없다고 해석하였으니, 좀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巧言令色을 하되,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오히려 이 사회를 더 밝고 활기차게 만들 것이다. 공자의 이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내심과 외면이 서로 어긋난 사람들을 질책하는 것이지만, 간접적으로는 巧言令色을 하려거든 진정으로 仁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함을 표현한 말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 “A는 B이다”라는 문형(文型)의 고찰.
1. 孔子, 聖人也. (공자는 성인이다)
2. 孔子是聖人也. (공자는 성인이다)
3. 孔子爲聖人也. (공자는 성인이다. 공자는 성인이 된다: 定義를 내리는 것임)
4. 孔子乃聖人也. (공자는 이에 성인이다: 앞서 공자에 대한 얘기가 있고, 이에서 결론을 도출함)
5. 孔子卽聖人也. (공자는 곧 성인이다)
6. 孔子則聖人也. (공자는 성인이다. 또 누구누구는 ~이다: 주로 병렬구조에서)
7. 孔子乃是聖人也. (공자는 이에 성인이다)
1의 경우처럼 동사를 쓰지 않는 것은 A와 B가 서로 동격인 관계일 때 많이 쓰인다. “有子, 孔子弟子, 名若”(유자는 공자의 제자이고, 이름은 若이다)이란 문장을 보면, 이런 동격 관계를 알 수 있다. “習, 鳥數飛也”(익힘이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習과 뒷구절은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A=B”라는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2의 경우는 주로 구어체에서 쓰이는 문장인데, 현대 중국어에서는 이처럼 是를 붙여줘야 올바른 문장이 된다. 우리말의 “~이다”라는 동사에 가장 근접한 단어가 是이지만, 한문에서는 이외에도 다양한 용법으로, 말하자면, 아래의 예문에서처럼 부사(乃, 卽)를 붙여서도 “~이다”라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말의 “~이다”가 항상 是와 대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3의 경우는 爲(~이 되다)라는 동사를 이용하여 문장을 지은 것이다. 이때는 1과 2의 경우와 그 어감이 좀 다르다. 즉, “孔子는 聖人이 된다”는 의미로 “聖人이다”라는 평면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는 그 어감이 좀 다르다. 또한 爲는 주로 “A는 B가 된다”는 뜻으로, A의 의미를 정의할 때도 자주 쓰인다. 善事父母爲孝(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孝이다(孝가 된다): 孝를 정의하는 것임)
4의 경우는 乃라는 부사(또는 동사로 볼 수도 있음)를 이용하여 지은 문장인데, 이때도 그 어감은 약간 다르다. 乃는 앞선 문장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을 유도할 때 쓰이는 부사이다.(또는 동사로 보기도 함)
5의 경우도 卽이란 부사(또는 동사로 볼 수도 있음)를 이용하여 “A=B”라는 문장을 만든 것이다.
6의 경우도 則이란 부사(또는 동사로 볼 수도 있음)를 이용하여 “A=B”라는 문장을 만든 것이다.
7의 경우는 乃是라는 “부사+동사”라는 형식을 빌려 표현한 것인데, 사실 현대 중국어에서는 이때 부사 뒤에 붙은 是는 별 의미가 없이 단순한 어조사에 불과한 경우로 쓰이기도 한다. 즉, 아무 의미없이 어감상 붙은 말이다. (현대 중국어의 예문으로 한문과는 무관함:可是, 但是, 總是)
각각의 경우마다 그 어감이 조금씩 다르므로, 그 어감을 구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A=B”라는 문장을 만들 때 是, 爲, 또는 부사, 또는 1의 경우처럼 아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연결시키는 다양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한문의 문장을 대하면, 한문만의 독특한 어감을 알게 될 것이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씀하셨다. “나는 날마다 세가지로 내 자신을 성찰한다.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되지는 않았는가? 친구들과 사귐에 신의가 없었는가? 전수받은 것을 익히지는 않았는가?”
○日은 부사로, “날마다”의 뜻이다. ○爲는 위할 위. ○與는 “~와”의 뜻. A與B = A와 B. ○孝悌와 더불어 忠信은 유가(儒家)의 중요한 덕목이다. 孝悌忠信(효제충신)
曾子, 孔子弟子, 名參, 字子輿. 盡己之謂忠. 以實之謂信. 傳, 謂受之於師. 習, 謂熟之於己. 曾子以此三者日省其身, 有則改之, 無則加勉, 其自治誠切如此, 可謂得爲學之本矣. 而三者之序, 則又以忠信爲傳習之本也. ○謝氏曰: 「諸子之學, 皆出於聖人, 其後愈遠而愈失其眞. 獨曾子之學, 專用心於內, 故傳之無弊, 觀於子思孟子可見矣. 惜乎! 其嘉言善行, 不盡傳於世也. 其幸存而未泯者, 學者其可不盡心乎!」 (學而章四)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삼(參)이고, 자(字)는 자여(子輿)이다. 자신을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성실함을 다하는 것을 신(信)이라고 한다. 전(傳)은 스승에게서 수업한 것을 말한다. 익힌다는 것은 자기에게 익숙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증자는 이 세가지로 날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여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잘못이 없으면 더욱 근면하여 그 스스로를 다스림이 이와같이 정성되고 절실하였으니, 학문을 하는 근본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 세가지의 차례에 있어서는 충(忠)과 신(信)이 전수받고 익히는 것의 근본이 된다. ○사씨가 말하였다. “여러 제자들의 학문이 모두 성인에게서 나왔으나, 그 후대가 더욱 멀어질수록 그 참된 것을 더욱 잃어갔다. 오직 증자의 학문만이 내면에 마음을 쏟았으니, 그 학문의 전수에 어떠한 폐단도 없음을, 자사(子思)와 맹자(孟子)를 살펴보면1) 분명히 알 수 있으리라. 애석하도다! 그 아름다운 말씀과 선한 행실이 세상에 다 전하지 못함이여! 그나마 다행이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1) 道統 (儒道의 계통)
孔子의 학문은 曾子로 이어지고, 曾子는 孔子의 손자인 子思에게 道를 전수하며, 孟子는 子思의 門人으로 공자의 道統을 이어갔다. 그 후대에는 孔子의 道가 미미하였으나, 唐나라 때 韓愈가 孔子의 道를 주창하고, 宋나라에 이르러, 程子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이 나왔으며, 朱子에 이르러 性理學을 집대성하였다.
○盡己之謂忠: 이때 之는 연결사(連結辭)로서, 관형격으로 보면, “자기를 다하는 것의 이름이 忠이다”가 되고, 목적격으로 보면, “자기를 다하는 것을 일러, 忠이라 한다”가 된다. 이러한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점은 之가 盡己와 謂라는 두 문구를 연결한다는 것이고, 이때 우리말의 어감에 맞게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이 문장은 부정대사 之를 붙여 이와같이 쓸 수도 있다. “盡己, 謂之忠.” 그러나, 영어나 우리말의 경우처럼 “타동사+목적어+목적격보어”와 같은 어순으로 하여, “謂盡己忠”이라는 표현은 절대로 쓰이지 않음에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謂라는 동사는 연결사 之를 이용하거나, 또는 부정대사 之를 이용하여 문장을 지어야 한다. 혹은 “謂盡己曰忠”처럼 쓸 수도 있음. ○以實에서 以는 用의 뜻이다. ○“傳, 受之於師”에서 之는 부정대사이다. 즉, 之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명사가 아니며, 傳을 받는 대명사는 더더욱 아니다. ○加勉에서 加는 부사로서, “더욱”의 뜻이다. ○愈는 부사로서, 더욱 유. 특히 “愈+동사, 愈+동사” 구문은 관용적인 표현으로, “~하면 할수록, 더욱 ~하다”는 뜻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흔히 쓰이는 표현임. 愈遠愈失(멀어질수록 더 잃는다) ○用心은 한 단어로서, 주의를 기울이다, 마음을 쓰다, 등의 뜻이다. ○“可見~”은 “可知~”와 같은 뜻으로 “~임을 알 수 있다. ~임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可見의 목적어는 앞에 나온 “傳之無弊”이다. ○嘉言(가언)은 한 단어로, “아름다운 말(좋은 말)”이란 뜻이다. ○不盡傳於世에서 盡은 부사로서, “다, 모두”의 뜻이다. 동사 앞에 쓰였으므로, 부사임을 알 수 있다. ○泯은 없어질 민. ○“其幸存而未泯者, 學者其可不盡心乎!” 學者뒤의 其는 盡心의 목적어가 된다. 이처럼 其가 동사의 목적어로서 동사 앞에 쓰이는 경우가 많이 있다. ○“可不+동사”는 “~하지 않는 것이 可하겠는가? 옳겠는가?”의 뜻으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이며, 반어적인 표현으로 흔히 쓰인다.
●而의 용법
而는 주지하다시피, 두 동사구나 명사절을 “순접”이나 “역접”의 관계로 연결시킨다. 이러한 용법은 어느 책에서나 언급된 것이므로, 잘 알 것이다. 그러나, 而는 이 이외의 용법으로도 자주 쓰이는데, 여기서는 이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學者務此, 則仁道自此而生也. (배우는 사람이 이것을 힘쓰면, 仁의 도는 이로부터, 생겨난다)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不能以 = 不可以, 一瞬은 동사로 쓰였음)
(대개 그 변하는 것으로부터 보면, 천지는 일찍이 한 순간도 그대로 일 수 없다)
○與朋友交, 而不信乎? (벗들과 사귀는데 있어서, 신의가 없었는가?)
○人而不仁,如禮何? (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면 禮는 차려서 무엇하랴?)
○婚娶而論財, 夷虜之道也。(시집․장가가는데 있어서,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들의 도리이다)
○人不通古今, 馬牛而襟裾。 (사람이 古今에 통하지 못하면, 소나 말에, 옷을 입혀 놓은 꼴이다)
○與朋友交,言而有信。(벗들과 사귀되, 말에, 신의가 있다)
○爲人欲所蔽,則有時而昏。(人慾에 가리워지는 바가 되면 가끔씩, 혼미해진다)
○時習者, 無時而不習。(때때로 익힌다는 것은 어느 때고, 익히지 않는 때가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而는 앞 문구와 뒷 문구를 끊어 호흡을 잠깐 멈춰주고, 그럼으로써 그 앞 문구에 주의를 끌게 하여, 의미를 분명히 구분지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때 而는 반드시 써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쓰지 않아도 무방한 경우가 있다.
“仁道自此而生”에서, 自此를 강조하기 위해, 또는 의미상의 분명한 전달을 위해, 而를 붙여 주는 것이다. 사실, 이때 而를 쓰지 않고, “仁道自此生”이라고 써도 무방하지만, 而를 쓴 경우와 그 어감이 다소 다르다. 즉, 而를 붙임으로써, 그 앞 문구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의미를 분명히 끊어주는 역할을 바로 而가 하는 것이다. “自其變者而觀之”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自뒤의 말이 길어지므로써, 주의가 분산되는 것을 막고 의미를 분명히 구분하기 위해 而를 붙이는 것이다. 또한 “無時而不習”의 경우도, 而를 쓰지 않은 채, “無時不習”이라고 하여도 되지만, 위와 같은 어감을 위해 而를 붙여준 경우이다.
이러한 용법은, 而앞의 구절이 명사라도 상관없다. 즉, “馬牛而襟裾”처럼 而앞의 구절이 명사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단, 而뒤에는 반드시 서술구가 와야 한다. 이 문장에서 襟裾(금거)는 동사로 쓰인 것이다. “人而不仁,如禮何?”의 문장에서도 人을 강조하고, 호흡을 끊음으로써, 주의를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而를 반드시 써야 한다.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공자가 이르시길, “자제들은 집안에 들어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경하며, 삼가고 미쁘며, 널리 뭇사람들을 사랑하되 인(仁)한 자를 친히 해야 한다. 이를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그로써 글을 배울지니라.”
○弟子(제자)는 지금 흔히 사용하는 의미의 스승과 제자(弟子)의 의미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아우와 자식이란 뜻으로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弟(제:悌)는 (어른이나 형에게) 공경하다는 뜻이다. ○汎은 넓을 범. 汎國民的(범국민적), 汎太平洋(범태평양). ○親仁에서 仁은 어진 사람을 가리킨다. ○以는 用(~함으써, 쓰다)의 뜻이다. 이처럼 以는 원인이 되는 말이 앞에 나오고, 그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독립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孝公用商鞅之法, 移風易俗, 民以殷盛, 國以富强, (孝公이 商鞅(상앙)의 법을 이용하여, 풍속을 바꾸니, 백성은 그럼으로써 성대해지고, 나라는 그럼으로써 부강해졌다: 殷은 성할 은. 盛과 같은 뜻임)
程子曰: 「爲弟子之職, 力有餘則學文, 不修其職而先文, 非爲己之學也.」 尹氏曰: 「德行, 本也. 文藝, 末也. 窮其本末, 知所先後, 可以入德矣.」 洪氏曰: 「未有餘力而學文, 則文滅其質; 有餘力而不學文, 則質勝而野.」 愚謂力行而不學文, 則無以考聖賢之成法̖ 識事理之當然, 而所行或出於私意, 非但失之於野而已. (學而章六)
정자가 말씀하셨다. “자제의 직분을 행하고서, 힘이 남거든 글을 배울 것이요, 그 직분을 닦지 않고 글을 먼저 하면 위기(爲己)의 학문이 아니다.” 윤씨가 말하였다. “덕행(德行)은 근본이요, 문예(文藝)는 말단이다. 그 본말(本末)을 궁구하여,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덕(德)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홍씨가 말하였다. “여력이 없는데도 글을 배우면, 그 문식(文飾)이 마음의 바탕을 사멸시키고, 여력이 있는데도 글을 배우지 않으면 마음의 바탕이 우세하여 거칠어진다.” 내 생각에, 힘써 행하기만 하고 글을 배우지 않으면, 성현(聖賢)들께서 만들어 놓은 법식을 고찰하거나, 사리(事理)의 당연함을 알 길이 없어, 행하는 일이 혹 사사로운 뜻에서 나오기도 하니, 이는 단순히 거칠어지는 폐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窮은 궁구할 궁. 궁핍하다, 가난하다는 뜻도 있음. ○可以~: ~할 수 있다. ○文質(문질)은 “꾸밈과 바탕”을 뜻하는 말로 서로 대칭이 되는 한 단어이다. 文은 꾸밀 문. 質은 바탕 질. 文飾. 文身(문신). 洪氏의 주석은 文의 뜻을 “문식, 꾸밈”으로 확대 해석하여, 덕행을 본바탕이라 보고, 文質이란 단어에 맞춰 공자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다. ○野는 야비하다. 아무런 꾸밈이 없다. (아무런 꾸밈이 없이) 야하다는 뜻이다. ○無以+동사: ~할 길이 없다. ~할 방법이 없다. ~할 근거가 없다는 뜻으로 흔히 쓰이는 관용구이다. ○識은 알 식. ○失之에서 之는 부정대사이다. 단순히 失을 동사로 만들어 주는 어감을 주는 것이다. 실수하다. 실패하다는 뜻이다. ○“非但~而已”는 흔히 쓰이는 관용구로서, “비단 ~일 뿐만이 아니다. 비단 ~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의 뜻이다. 여기서 已는 그칠 이. 또는 전(轉)하여, “뿐 이, 따름 이”의 뜻이다.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자하가 이르시길, “현자(賢者)를 현자(賢者)로 대하되 마치 여색(女色)을 대하는 마음으로 바꿔서 하며, 부모를 섬기되 자신의 온 힘을 쏟고, 임금을 섬기되 자신의 온 몸을 다하며, 벗들과 사귀되 말에 성실함이 있다면, 비록 학문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러한 사람을 학문을 하였다고 이르겠노라.”
○賢賢에서 앞의 賢은 동사로서, “현자(賢者)로 여기다. 현자로 대하다”는 뜻이고, 뒤의 賢은 명사로서, 賢者를 뜻한다. ○易色(역색): 朱子는 이 문구에 이와 같이 주석을 달았다. “賢人之賢,而易其好色之心”(다른 사람의 어짐을 어질게 여기되, 그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꾸듯이 한다) ○竭은 다할 갈. ○致는 이를 치. 다할 치. 여기서는 後者의 뜻이다.
子夏, 孔子弟子, 姓卜, 名商. ○游氏曰: 「三代之學, 皆所以明人倫也. 能是四者, 則於人倫厚矣. 學之爲道, 何以加此? 子夏以文學名, 而其言如此, 則古人之所謂學者可知矣. (學而章七)
자하는 공자의 제자로 성(姓)은 복(卜)이요, 이름은 상(商)이다. ○유씨가 말하였다. “삼대(三代)의 학문은 모두가 인륜(人倫)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네가지의 일에 능하다면 인륜(人倫)에 있어서 두터울 것이니, 학문이라는 도(道)! 이에 무엇을 더 보탤 것이 있겠는가? 자하는 문학으로 유명하였는데도, 그 말씀이 이와 같다면 옛사람들의 이른바 학문이란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三代(삼대)는 고대의 夏殷周(하은주) 세 왕조를 가리키며, 정치적, 도덕적으로 융성을 누렸던 세대이다. ○“所以+동사”는 이유나, 방법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하기 위한 것”이라고 의역하면 좋다. 즉, 이유를 나타내는 말로서, 이와 같이 의역한 것이다. 文所以載道也(文은 道를 싣기 위한 것이다) ○“何以~”는 “무엇으로써..?”의 뜻으로 관용적인 표현이다. ○“可知~”는 “可見~”과 같은 뜻으로, “~임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가 이르시길, “군자가 진중하지 못하면 위세가 없으니, 배워도 굳어지지 않느니라. 충신(忠信)을 주로 하며, 나만 못한 이를 벗하지 말며, 잘못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고쳐야 하느니라.”
○重은 신중하다. 중후하다. ○則은 대개 그 앞 구절을 가정으로 해석한다. 또는 문맥에 따라 양보(~일지라도)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가정의 의미가 양보의 의미까지 내포하는 것은 영어에서 if가 가정의 뜻은 물론, 양보의 뜻까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守以法度, 則有時以廢(법도로 지켜도 때때로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主는 타동사로, “~을 주로하다. ~을 위주로하다”의 뜻. ○友는 타동사로, “~을 벗하다. 사귀다”의 뜻. ○憚은 꺼릴 탄. 忌憚(기탄)없이 말하다.
輕乎外者, 必不能堅乎內. 故不厚重則無威嚴, 而所學亦不堅固也. ○人不忠信, 則事皆無實, 爲惡則易̖ 爲善則難, 故學者必以是爲主焉. ○無, 毋通, 禁止辭也. 友所以輔仁. 不如己, 則無益而有損. ○自治不勇, 則惡日長. 故有過則當速改, 不可畏難而苟安也. 程子曰: 「學文之道無他也, 知其不善, 則速改以從善而已.」 ○游氏曰 「君子之道, 以威重爲質, 而學以成之; 學之道, 必以忠信爲主, 而以勝己者輔之. 然或吝於改過, 則終無以入德, 而賢者未必樂告以善道, 故以“過勿憚改”終焉.」 (學而章八)
밖으로 가벼운 자는 틀림없이 안으로도 견고할 수 없다. 그러므로 후중(厚重)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배운 것도 또한 견고하지 않다. ○사람이 충신(忠信)하지 못하면 일에 모두 내실(內實)이 없어서, 악(惡)을 저지르기는 쉽고 선(善)을 행하기는 어려워지니,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이를 위주로 해야 한다. ○無는 毋와 통하여 금지사(禁止辭)이다. 벗이란 나의 인(仁)을 보충하기 위한 자인데, 나만 못하다면 이로움이 없고 손해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 다스리기를 용감히 하지 않으면 악(惡)은 날마다 자라난다. 그러므로 잘못이 있으면 마땅히 속히 고쳐야 할 것이요, 그 (고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여 구차스럽게 안주하여서는 안된다. 정자가 말씀하셨다. “학문(學文)의 도(道)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불선(不善)을 알았으면 속히 이를 고쳐 선(善)을 쫓는 것일 뿐이다.” ○유씨가 말하였다. “군자의 도(道)는 위엄과 진중을 바탕삼아 학문으로써 성취하는 것이요, 학문의 도(道)는 충신(忠信)을 위주로 하여 나보다 나은 자로 보충하는 것이다. 그러나 혹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다면 끝내 덕(德)에 들어갈 길이 없으며, 현자(賢者)도 또한 선도(善道)로 충고하기를 꼭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래서 「잘못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고쳐야 하느니라」로 끝을 맺은 것이다.”
○輕乎外者에서 乎는 於와 같은 처소격의 의미를 갖는다. ○友所以輔仁에서 所以는 “~하기 위한 것”의 뜻이다. 친구는 仁을 보충하기 위한 것(?), 보충하기 위한 자이다.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다.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군자는 文으로서 벗을 모으고, 벗으로서 (자기에게 부족한) 仁을 보충한다) ○吝은 인색할 린. 吝嗇(인색) ○“無以~”는 관용구로서, “~할 방법이 없다. ~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未必(미필)은 부분 부정으로, “반드시 ~하는 것은 아니다”의 뜻. ○樂(요)는 좋아할 요.
○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증자가 이르시길,“부모의 임종(臨終)에 대해 삼가고, 먼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德)은 후한 데로 귀착되느니라.”
○愼은 삼갈 신. ○終은 마칠 종. 여기서는 부모의 임종을 뜻한다. ○追(추)는 추모하다. 쫓다. ○遠(원)은 여기서는 먼 조상을 가리킨다. ○矣는 상태의 변화나, 또는 결과의 어감을 갖는다.
愼終者, 喪盡其禮. 追遠者, 祭盡其誠. 民德歸厚, 謂下民化之, 其德亦歸於厚. 蓋終者, 人之所易忽也, 而能謹1)之; 遠者, 人之所易忘也, 而能追之: 厚之道也. 故以此自爲, 則己之德厚, 下民化之, 則其德亦歸於厚也. (學而章九)
“신종(愼終)”은 초상(初喪)에 그 예(禮)를 다하는 것이요, “추원(追遠)”은 제사(祭祀)에 그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백성의 덕(德)이 후한 데로 귀착된다는 것은 아랫 백성들이 이에 교화되어 그들의 덕이 후한 데로 귀착한다는 것이다. 대개 부모의 임종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이나 이를 능히 삼가고, 먼 조상은 사람들이 잊기 쉬운 것이나 이를 능히 추모한다면, 이는 후해질 수 있는 도(道)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스스로 행한다면 자신의 덕(德)이 후해지고, 아랫 백성들이 이에 교화되면 그들의 덕(德)도 또한 후한 데로 귀착되는 것이다.
(1) 謹.
원래는 愼으로 써야 하나, 朱子는 宋나라 당시 孝宗의 이름자인 愼을 피하기 위해, 그 뜻이 비슷한 謹으로 대체하여 표기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중국 뿐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있었던 일이다. 임금의 이름자를 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도 자기 조상의 이름자(諱字)는 절대로 쓰지를 않았다. 이를 기휘(忌諱)라 한다. 옛날 조선 중기에 李 某라는 사람은 觀察使에 제수되었는데, 이를 사양하였다. 그 이유는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李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나서야 그 李 某라는 사람이 벼슬에 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국 唐나라 때에는 李賀라는 文才가 매우 뛰어난 이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進士에 급제하자 주위에서는 李賀가 進士에 급제한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그 이유는 그 아버지의 이름이 晉肅이어서 그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자를 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양인의 관점에서는 이름을 특히 중요시 하여 이를 함부로 부르지도 않았으며(대신 字를 지어 불렀음), 더구나 자기 조상의 이름자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했다. 서양인의 경우에는 ***** Jr. (**** 2세), 또는 헨리 6세, 등등이라 하여 자기 이름과 자식의 이름을 함께 쓰기도 하니 격해지감(隔海之感)을 느낀다고나 할까?
○子貢曰: 「貧而無諂,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공이 말하였다. “가난하지만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지만 교만함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좋다.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느니라.” 자공이 말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길, 자른 듯, 그것을 다시 갈은 듯, 쪼은 듯, 다시 그것을 갈은 듯이라고 하던데, 아마도 이것을 일컫는 것이겠군요!” 공자가 말씀하셨다. “사(賜)도 이제 같이 시(詩)를 말할 만 하구나! 지난 것을 말해주니 올 것을 아니 말이다.”
○諂은 아첨할 첨. 阿諂(아첨) ○驕는 교만할 교. 驕慢(교만) ○磋는 갈 차. ○琢은 (옥)쪼을 탁. ○始는 부사로, 비로소 시. ○諸는 어조사 저. 於와 비슷하다. ○“其~與”의 구문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常人溺於貧富之中, 而不知所以自守, 故必有二者之病. 無諂無驕, 則知自守矣, 而未能超乎貧富之外也. 凡曰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也. 樂則心廣體胖而忘其貧, 好禮則安處善̖樂循理, 亦不自知其富矣. 子貢貨殖, 蓋先貧後富, 而嘗用力於自守者, 故以此爲問, 而夫子答之如此, 蓋許其所已能, 而勉其所未至也. ○詩衛風淇奧之篇, 言治骨角者, 旣切之而復磋之; 治玉石者, 旣琢之而復磨之: 治之已精, 而益求其精也. 子貢自以無諂無驕爲至矣, 聞夫子之言, 又知義理之無窮, 雖有得焉, 而未可遽自足也, 故引是詩以明之. ○往者, 其所已言者. 來者, 其所未言者. ○愚按: 此章問答, 其淺深高下, 固不待辨說而明矣. 然不切則磋無所施, 不琢則磨無所措. 故學者雖不可安於小成, 而不求造道之極致; 亦不可騖於虛遠, 而不察切己之實病也. (學而章十五)
보통 사람들은 빈부(貧富)의 와중에 빠져서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니, 틀림없이 이 두가지의 병폐가 있다.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다면 스스로를 지킬 줄은 알지만 아직 빈부(貧富)의 밖으로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무릇 좋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겨우 간신히 좋다는 것이지, 아직 미진한 바가 있다는 뜻의 말이다. 즐거워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너그워져 그 가난함을 잊을 것이요, 예(禮)를 좋아하면 편안히 선(善)에 처하고 즐겁게 이치를 따를 것이니 또한 스스로 그 부유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공(子貢)은 재화를 증식하였으니, 아마도 처음에는 가난하고 뒤에 부유해졌고, 일찍이 스스로를 지키기에 힘 쓴 자이기에,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자 부자(夫子)께서 이와 같이 대답하셨으니, 그의 이미 능한 것은 인정해주고 그의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권면(勸勉)하신 것이다. ○시경(詩經)은 위풍(衛風)의 기욱편(淇奧篇)이니, 뼈와 뿔을 다루는 자는 이미 그것을 잘랐더라도 또 다시 갈고, 옥과 돌을 다루는 자는 이미 그것을 쪼았더라도 또 다시 가니, 그 다룸이 이미 정밀한데도 더욱 그 정밀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자공(子貢)은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지극하다고 여겼는데, 부자(夫子)의 말씀을 듣고는 그 뜻과 이치가 무궁함을 또 알게 되어, 비록 얻는 바가 있기는 하지만, 곧 스스로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시(詩)를 인용하여 더욱 분명히 한 것이다. ○지난 것이란 그 이미 말해준 것이요, 올 것이란 그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 장(章)의 문답은 그 심천(深淺), 고하(高下)가 본래 변설(辨說)할 것도 없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르지 않으면 갈을 데가 없고, 쪼지 않으면 갈을 데가 없으니,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작은 이룸에 안주하여 도(道)에 이르는 궁극점을 구하지 않는 것도 안되지만, 또한 허원(虛遠)한 곳으로 치달려 자기에게 절실한 실제 병폐를 살피지 않아서도 안된다.
○溺은 빠질 닉. ○所以는 방법이나 이유를 나타낸다. ○僅은 겨우 근. ○心廣體胖(심광체반)은 관용적인 성어(成語)로서, 마음과 몸이 넓어지고, 편안해진다는 뜻이다. 胖(반)은 “넓다”는 뜻이다. ○貨殖에서 貨(화)는 재물을 뜻하고, 殖(식)은 늘어나다, 불다는 뜻이다. ○許는 허여(許與)할 허. 인정해준다는 뜻이다. ○治는 다스리다는 뜻도 있지만, 다루다, 조작하다는 뜻도 있다. 治水(치수) ○精益求精(정익구정)은 관용적인 성어(成語)로서, 좋은 것이지만, 더욱 더 좋은 것을 구한다는 뜻이다. 즉, 이미 정밀하여 좋지만, 더욱더 좋게 한다는 뜻이다. 益은 부사로서, “더욱”의 뜻이다. 위 주석에서는 이 성구(成句)를 풀어서, 해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遽(거)는 부사로서, “대번에, 곧바로” 등등의 뜻이다. ○按(안)은 “살피다, 고찰하다, 상고하다” 등의 뜻이다. ○固는 부사로서, “본래, 본시, 원래” 등등의 뜻이다. 固有한(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정서(情緖). ○不待辨說而明矣: “不待~而~”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한다.”는 뜻으로, 의역하면, “~할 것도 없이 ~한다”는 뜻이다. 위 문장을 번역하면, “辨說할 것도 없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不可는 불능이나, 금지의 뜻을 갖는다. 즉, “~할 수 없다”(=不可以)는 뜻과,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의 의미를 갖는다. ○騖는 달릴 무.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공자가 이르시길,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
○患(환)은 뒤에 명사구나 명사절을 받아서, “~을 걱정하다”의 뜻이다. ○不己知, 不知人: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不, 莫, 未 등의 부정사가 대명사를 받는 술어와 함께 쓰일 때는 그 대명사가 도치된다. 己는 대명사이므로 도치되지만, 人은 대명사가 아니므로 도치되지 않는다.
尹氏曰: 「君子求在我者, 故不患人之不己知. 不知人, 則是非邪正或不能辨, 故以爲患也.」 (學而章十六)
윤씨가 말하였다. “군자는 나에게서 구하는 자이므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남을 알지 못하면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혹 가릴 수 없으므로 나의 걱정으로 여기는 것이다.”
○在는 개사(介辭: 전치사)로서, “~에, ~에서”의 뜻이다. ○辨은 가릴 변.
附錄:
주요 문법사항 및 단어.
◆ 도치구문
대명사가 목적어로 쓰일 때, 不, 莫, 未 등등의 부정사가 있으면 “不+대명사+술어”의 어순으로 도치시켜서 쓴다.
○ 日月逝矣, 歲不我與. (해와 달은 흘러가는데 세월은 나와 더불지 않는구나)
○ 父母之不我愛, 於我何哉? (부모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내게 있어서 무엇 때문인가?)
○ 世遂有擬摹倣像, 而不之恥者.(세상에는 마침내 베끼고 모방하는데도 이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자가 있다)
○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作亂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다)
○ 往往自陷於行詐欺天, 而莫之知也.
(속임수를 행하고 하늘을 속이는 데에 스스로 왕왕 빠지고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 형용사의 명사화
한문에서는 흔히 사람의 성격․품성․성질 등을 나타내는 형용사(또는 동사)로서, 그러한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로 쓰는 경우가 많다.
○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뒤에 깨닫는 자는 반드시 먼저 깨달은 자의 행한 바를 본받아야만 비로소 善을 밝혀 그
본성의 처음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 巧言令色, 鮮矣仁.(교언영색하는 자들 중에는 드물도다! 인(仁)한 자가)
○ 剛毅木訥, 近仁. (강직하고 굳세며, 박눌(朴訥)한 사람은 인(仁)에 가깝다)
○ 汎愛衆, 親仁.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인(仁)한 자를 가까이 하라)
○ 孝順還生孝順子, 忤逆還生忤逆兒. (효도하는 자가 다시 효도하는 자식을 낳고,
불효하는 자가 다시 불효하는 아이를 낳는 법이다: 孝順: 효도하다. 忤逆: 불효하다)
○ 闒茸尊顯, 讒諛得志.
(어리석고 못난 이들이 존귀해지고 드러나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는다)
◆ 부정대사 之의 용법
여기서 말하는 代辭란 다른 언어, 예를 들면 영어나 우리말의 대명사(代名詞)와는 그 성격이 다소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와 구별 짓기 위해 代辭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다. 다른 언어의 대명사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詳說하기로 한다.
1. 之에는 그 지시성(指示性)이 뚜렷하지 않다.
대명사라면 당연히 그 지시성(指示性)이 뚜렷해야 할 것이지만, 之는 단순한 代辭로서 그 지시력 (指示力)이 약하다. 지시성이 뚜렷한 대명사로는 此나 是가 쓰인다. 다만, 우리말의 어감을 위해서는 之를 목적어로 해석해줘야 좋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우리말의 어감을 위해 적절한 목적어를 붙이는 것이 좋다. 우리말과 한문은 1:1의 함수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적절한 번역이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목적어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어감에 맞게 하기 위해서 “~을, ~를”이란 조사를 붙여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 道之以政. (政으로 이끈다: 之는 단순한 代辭로 道를 타동사로 만든다: 道는 導의 뜻)
○ 道謂先之. (이끈다는 것은 먼저 행하는 것을 말한다: 之는 先을 타동사로 만든다)
○ 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다: 之는 思를 타동사로 만든다)
○ 愛之重之. (애지중지), 一筆揮之. (일필휘지)
○ 學而時習之. (배우고 때때로 익히다: 之는 단순한 代辭)
○ 一言以蔽之. (한마디 말로 이를 덮는다: 之는 단순한 代辭)
○ 五畝之宅, 樹之以桑. (오 무쯤 되는 땅에 뽕나무를 심는다: 之는 단순한 代辭)
○ 衆惡之, 必察焉. (뭇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핀다: 之는 단순한 代辭)
○ 故爲之著論. (그래서 이 때문에 論을 지은 것이다: 之는 단순한 代辭: 爲는 ~ 때문에)
○ 寒然後爲之衣, 飢然後爲之食. (추운 연후에 그들에게 옷을 만들어 주고, 배고픈 연후에
그들에게 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爲는 ~을 만들다. ~을 짓다: 之는 단순한 代辭)
○ 以此之敬, 而敬人之父, 則凡爲之子者, 莫不悅矣. (이러한 공경을 써서(以=用의 뜻으
로 동사임) 남의 아버지를 공경하면 모든 그 자식된 자들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다)
2. 之는 동사뒤에만 붙는 代辭이다.
○ 造次必於是. (O) (잠깐 사이라도 이에 있다: 造次: 잠깐 동안의 시간)
○ 造次必於之. (X) (之는 전치사 於의 목적어로서의 대명사가 될 수 없다)
☞ 흔히 각종 한문 서적에서 焉을 於之와 같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분명한 오류이다. 심지어 중국어 사전에서 조차도 焉을 於之와 같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큰 오류이다. 한문에서 於之라는 문구를 일찍이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있지도 않은 가공의 문구로 焉을 설명하니 참으로 한심하다. 이는 之의 성격을 제대로 모르는 소치에서 나온 한심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 自是舜以克孝, 而徽五典. (O) (이로부터 舜임금이 능히 효도하므로써 五典을 아름답게 하셨다)
○ 自之舜以克孝, 而徽五典. (X) (之는 전치사 自의 대명사로서의 목적어가 될 수 없다)
☞ 如, 若, 猶 등과 以(=用의 뜻으로 동사임)는 동사이므로 之가 붙을 수 있다.
○ 如之何, 則可乎?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 君子所守者道義, 以之脩身. (군자의 지키는 바는 道義이니, 그것으로써 修身한다)
3. 단순한 代辭로서 문장의 안정감과 균형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 民德歸厚, 謂下民化之.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감은 아랫 백성들이 교화된다는 것을 말한다)
☞ 化之의 之를 우리말의 대명사와 동일시하면 오역하기 십상이다. 즉 우리말의 대명사로 보면, “아랫백성들이 그들을 교화한다”의 뜻이므로, 얼토당토않은 오역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之는 단순한 代辭일 뿐이지, 무엇을 지칭하기 위한 대명사가 아니다. 동사뒤에 단순한 代辭를 붙여줌으로써 문장의 안정감과 균형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大車無輗, 其何以行之哉? (큰 수레가 수레 횡목이 없으면 그 무엇으로써(어떻게) 가리요?)
☞ 行之의 之를 우리말이나 영어의 대명사와 동일시 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으로써 그것을 가게 하 리요?”가 된다. 行은 자동사로서 “가다”의 뜻이지, 타동사로 “가게 하다”의 뜻이 아니다. 타동사라 면, “~을 행하다”의 뜻이지, “가게 하다, ~을 움직이다”의 뜻이 아니다. 여기서도 之는 단순한 代辭로서 문장의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 不知手之舞之, 足之蹈之. (손이 춤추고, 발이 구르는 것도 모르다: 舞, 蹈는 자동사임)
○ 貊, 五穀不生, 惟黍生之. (貊(맥) 땅에는 오곡이 나지 않고, 오직 기장만이 난다)
○ 公子糾敗, 召忽死之, 吾幽囚受辱. (公子 糾(규)가 패하자, 소홀은 죽고 나는 깊히 갇혀 욕을 보았다).
○ 屈平旣嫉之, 雖放流, 眷顧楚國, 繫心懷王, 不忘欲反. (굴평이 이미 미움을 받자, 비록 추방되 어 유배되었으나, 초나라를 사랑스레 돌아보며 회왕에게 마음을 매어 둔 채 (왕에게) 돌아가고자 함을 잊지 않았다)
☞ 위의 문장에 쓰인 之를 영어나 우리말의 대명사와 동일시 하면, 모두 오역이 되어 버린다. 바 로 여기서 之를 왜 대명사․목적어로 부르면 안되는가에 대한 극명한 해답이 있다. 그러나 현 재 대부분의 한문 서적들은 모두 之를 대명사․목적어로 부르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마치 우리말의 “그것을, 이것을”에 해당하는 목적어와 완전히 동일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이는 之를 처음에는 “그것을,” “그를” 등등의 목적어로 부르고 해석하면 잘 들어맞는 듯 이 보이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之의 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에는 한문만의 독특한 어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끝으로 만약 之가 대명사 라면, 그 사용빈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용법이 현대 중국어에서도 그대로 쓰여 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대 중국어에서도 之는 관용적으로 굳어진 말이나, 또는 고문투에 서만 쓰이는 代辭로 남았을 뿐이다. 이는 之가 지극히 文語的인 단어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4. 之는 어감에 따라 쓰이기도 하고 쓰이지 않기도 한다.
○ 沽酒市脯, 不食. ((공자께서는) 시장에서 사온 술과 육포를 먹지 않았다)
☞ 之는 동사뒤에 목적어가 없을 때 代辭로 항상 붙는 것이 아니라, 어감․어세․어조에 따라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不 등의 부정사나, 可 등의 조동사, 때에 따라서는 주로 댓구문 에서 부사가 동사를 수식할 때는 어감상 之를 붙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위의 문장에서도 不食之라 하지 않은 것은 어감이 나쁘기 때문이다. 不食이라는 두 음절이 어감상 좋기 때문이 다.
○ 勢利紛華, 不近者爲潔. 近之而不染者爲尤潔. (권세와 이익의 화려함에 가까이 하지 않는 자 가 고결한 것이요, 가까이 있더라도 물들지 않는 자는 더욱 고결한 것이다)
☞ 이 문장에서 之는 아주 특별한 기능을 한다. 즉, 之를 통해서 문장의 안정감을 얻을 수 있 는 것은 물론이고, 어세(語勢)와 어조(語調) 등을 고르게 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즉, “不近者”를 不近之者“라고 하지 않거니와, ”近之而不染者“를 ”近而不染之者“라고 한다거나, ” 近之而不染之者“라고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그 어감과 어세 등을 위해서 그런 것이다.
○ 得爲而不爲, 不得爲而爲之, 均於不孝.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데도 하는 것은 불효에 있어서는 똑같다)
○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 王曰: 王政可得聞與? (왕께서 이르기를, 왕도 정치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 흔히 之를 “목적격대명사”로 부르는 것에 대한 反論.
○ 反比我於毒而棄之乎? (도리어 나를 독에 비유하여 버리는가?: 詩經集傳)
○ 神仙固有之. (신선은 본래 있는 것이다: 蘇東坡)
之가 소위, 대명사라면, 위의 문장에서는 之가 “나”를 받는 1인칭 대명사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대개 之를 “그것을, 이것을, 그를, 그들을”로 하여, “3인칭대명사”라고 하였놓고서는, 여기서는 “1인칭 대명사(我)”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온당한 문법론이겠는가? 본인이 누누히 말했듯이 之는 대명사가 아니며, 단순히 동사뒤에 붙어서, 그 동사를 타동사화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동사의 뒷자리를 메꿔주는 단순한 代辭에 불과함이 자명한 것이다. 또, 소위 之를 목적어로도 부르는데, 이는 엄연히 잘못된 명칭이다. “聖人過之, 百姓化之”(성인이 지나가면, 백성이 교화된다)에서, 만약 之를 대명사로 보아, 之가 “百姓”과 “聖人”을 받는 대명사라고 하여 번역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성인이 그들을(백성을) 지나가자, 백성이 그들을(성인을) 교화하였다.”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라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之는 우리말이나 영어의 목적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神仙固有之”라는 문장을 보더라도, 만약, 之를 목적어로 번역하면 어찌 되겠는가? “신선은 본래 그것을(신선을) 가지고 있다.” 이 번역문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之는 목적어라는 명칭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흔히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쉬운 한문의 문장들의 경우에는 대개, “之”를 목적격 대명사라 하여, “그것을”이라고 번역하면, 99%는 거의 다 들어맞는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들어맞는 듯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좀더 다양한 문장을 접해보면, 之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이 금새 드러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之를 목적어/대명사로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이는 오히려 之의 본래의 용법을 오도시키는 명칭이 되는 것이다.
◆ 可, 不可, 可以, 不可以 등의 제용법
■ 可의 용법
1. 가능이나 허락을 나타낸다. (~하는 것이 可하다. ~해도 된다. ~할 수 있다)
주로 가치판단이 개입된 가능이나 허락을 나타낸다.
☞ 可以는 주로 가치 판단없이 단순히 능력이나 가능을 나타낸다.
☞ 可에 반대되는 말은 바로 不可이다.
○ 可遠觀而不可褻翫焉. (멀리서 볼 수는 있어도 褻翫(설완: 희농지거리하며 놀) 수는 없다)
○ 少者則猶可呼名, 長者則不可呼名.
(어린애는 오히려 이름을 불러도 되지만, 어른은 이름을 부르면 안된다)
☞ 위처럼 可와 不可는 상반되는 의미로서, 대구를 이루어 쓰는 경우도 많다.
○ 向弔客, 再拜而哭, 可也. (弔客에게 再拜하고 哭하면 된다․哭하는 것이 옳다: 向은 介辭임)
○「富而無驕, 何如?」子曰:「可也」(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좋다」)
○ 其流至於無父無君, 謂之好學可乎?
(그 흐름이 無父無君에 이르렀는데, 好學이라 하는 것이 可하겠는가?)
☞ 위처럼 가치 판단을 나타내는 可 또는 不可는 단독으로도 쓰인다.
○ 衆人豈可不以聖人自期乎? (衆人이 어찌 聖人으로서 스스로 기약하지 않음이 可하겠는가?)
○ 學者其可不盡心乎? (배우는 사람이 그것에 어찌 다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으리오?)
☞ 可不+술어는 반어적인 표현으로서 관용적으로 쓰인다.
즉, “~하지 않는 것이 可하겠는가?”의 뜻으로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의 반어문이다.
2. 가치판단없이 단순히 능력이나 가능을 나타냄.
☞ 可以(1)의 뜻과 같지만, 주로 목적어+可+타동사의 어순으로 고정되어 있어 可以와 대체되지 않 는다.
○ 道可道, 非常道. (道를 道라 할 수 있으면 常道가 아니다. 앞의 道는 목적어, 뒤의 道는 타동사)
○ 心可逸, 形不可不勞. (마음은 편히 할 수 있을지언정, 몸은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없다)
○ 水底魚天邊雁, 高可射兮低可釣.
(물밑 고기와 하늘가의 기러기는 높아도 활로 쏠 수 있고, 밑에 있어도 낚을 수 있다)
○ 若心心念念, 在於養親, 則珍味亦必可得矣.
(모든 생각과 마음이 養親에 있으면 珍味를 반드시 얻을 수 있다)
3. 가치나 효용 등을 나타낸다. (~할 만하다. ~할 가치가 있다)
○ 若事之可爲者, 父母不許~ (만약 일 중에 행할 만한 것이 있는데 부모님께서 불허한다면~)
○ 必從容而不迫, 乃爲可貴. (반드시 從容不迫하여야만, 귀히 여길 만한 것이 된다)
○ 千乘, 諸侯之國, 其地可出兵車千乘者也.
(千乘은 제후의 나라이니, 그 땅이 兵車 千乘을 낼 만한 곳이다)
○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의지함에 그 친함을 잃지 않으면 또한 본받을 만하다)
○ 所因者不失其可親之人~(의지받은 사람이 그 친히 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는다면~)
4. 숙어로 쓰이는 관용적인 표현:
可知(~임을 알 수 있다), 可見(=可知와 같음), 可謂(~라 말할 수 있다),
☞ 可以知 (그럼으로써 ~임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앞에 원인이 되는 문장이 나온다)
可以見 (그럼으로써 ~임을 알 수 있다: 以는 원인을 나타내준다)
得以+술어 (그럼으로써 ~할 수 있다: 역시 以는 원인을 나타냄)
5. 可+(감정 등을 나타내는) 동사가 형용사로 쓰이는 경우.
可歎(한탄스럽다), 可笑(가소롭다), 可惜(애석하다), 可愛(사랑스럽다), 可觀(볼만하다)
可憎(가증스럽다), 可恐(가공할 만하다), 可驚(놀랄 만하다), 可矜(불쌍하다)
○ 今俗多不識禮, 其行祭之儀, 家家不同, 甚可笑也.
(지금의 풍속은 禮를 모르는 이가 많아 그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집집마다 다르니, 심히 可笑롭다)
■ 不可의 용법
1.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不可함을 나타낸다. (~하는 것은 不可하다. ~하면 안된다)
○ 家若貧, 不可因貧而廢學. (집이 가난하더라도 가난하다 하여 학문을 폐해서는 안된다)
○ 學者不可安於小成. (배우는 사람은 小成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 不可半途而廢也. (半途而廢하는 것은 不可하다․中道에 집어치우면 안된다)
2. 不可以와 같은 뜻으로 단순히 불가능을 나타낸다. (不可=不可以: ~할 수 없다)
☞ 이때는 不可와 不可以가 대체해서 쓰일 수도 있다.
○ 薄暮之事, 不可必也. (薄暮의 일을 期必할 수는 없다: 必은 여기서 動詞임, 薄暮:땅거미질 무렵)
○ 朽木不可雕也.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다)
○ 言出於口, 不可不愼也. (말은 입에서 나오니 삼가지 않을 수 없다)
○ 有國者不可以不愼. (나라를 소유한 자는 삼가지 않을 수 없다)
■ 可以의 용법
1. (가치판단없이) 단순히 가능이나 능력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 人皆可以爲堯舜. (사람은 모두 堯舜이 될 수 있다)
○ 松栢可以耐雪霜, 明智可以涉艱危. (松柏은 雪霜을 견뎌 낼 수 있으며 明智는 危難을 건널 수 있다)
○ 觀朝夕之早晏, 可以卜人家之興替. (朝夕의 이르고 늦음을 보면 그 집의 興替를 점칠 수 있다)
○ 可以變愚爲智. (어리석은 자를 변하게 하여 지혜있는 자로 만들 수 있다)
○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해야만 善을 밝혀 그 처음을 회복할 수 있다)
☞ 위의 예문은 모두 可로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人皆可爲堯舜과 같은 문장이 말이 될 것 같지만, 이는 분명히 위의 예문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다. 굳이 이와 같은 글을 해석하자면, 사람은 모두 堯舜이 되어도 된다로 어색한 문장이 되며, 이런 문장은 쓰이지도 않는다.
2. 가능이나 허락을 나타낸다 (이때는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可와 뜻이 같다: 주로 구어체임)
○ 可以取, 可以無取, 取傷廉. (取해도 되고, 取하지 않아도 되는데 取하면 청렴을 해치는 것이다)
○ 三年無改, 亦謂在所當改而可以未改者耳.
(三年無改란 또한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지만, 아직은 고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할 뿐이다)
■ 不可以의 용법 (可以(1)의 否定 : ~할 수 없다)
○ 禍不可以倖免, 福不可以再求. (禍는 요행히 면할 수 없으며 福은 다시 구할 수 없다)
○ 學不可以已也. (배움을 그칠 수는 없다)
◆ 처소격의 虛辭인 於(于), 乎의 쓰임새.
여기서는 우선 처소격(處所格)의 기능을 하는 虛辭로서의 於, 乎만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각각의 구체적인 쓰임새에 대해서는 이후 다음 기회에 보충하기로 한다.
1) 於(于)와 乎
흔히 於와 乎를 같은 뜻으로 여겨, 둘 다 처소격 어조사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가지 虛辭의 쓰임새가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즉, 이 둘이 항상 대체관계로 쓰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구분하자면, 於는 명사앞에 붙는 전치사(前置詞)이지만, 乎는 동사뒤에 붙는 어조사이다(이때 감탄의 어감도 함께 내포하고 있음). 따라서 이 둘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有以事乎上, 有以臨于下. (윗사람을 섬길 수 있고, 아랫사람에 임할 수 있다)
足國之道在乎務本而節用. (나라를 풍족하게 하는 道는 근본(농업)에 힘써 절약하는 데 있다)
道之本在於修身. (도의 근본은 修身에 있다)
☞ 이때 乎와 於는 모두 처소격의 의미를 담고 있어, 서로 대체하여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서로 대체하여 쓰일 수는 있지만, 在於의 於는 전치사로서 명사앞에 붙는 어조사이고, 在乎의 乎는 감탄의 어감을 내포하며 동사뒤에 붙는 어조사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경우에는 절대로 이 둘을 대체해서 쓸 수 없다.
於我惡者, 我亦善之. (O) (내게 악한 자에게도 나는 역시 선하게 대한다)
乎我惡者, 我亦善之. (X) (乎는 동사뒤에 붙는 어조사이므로 이와 같은 문장은 틀림)
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O) (先帝의 특별한 대우를 추모하여 陛下께 보답하려 한다)
追先帝之殊遇, 欲報之乎陛下也. (X) (역시 乎는 명사앞에 붙는 어조사가 아니므로 틀림)
2) 乎는 동사뒤에 붙어, 처소격의 의미와 함께 감탄의 어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於에는
감탄의 어감이 없다. 또한 “술어+乎”는 주로 관용적으로 굳어진 것들도 많다. 예를 들면,
在乎~: ~에 있다. 樂乎~: ~을 즐기다. 合乎~: ~에 부합하다. 觀乎~: ~을 보다.
貴乎~: ~을 귀히 여기다. 幾乎~: 거의 ~에 가깝다.
忠乎君而樂乎善. (임금에게 충성하고 善을 즐긴다)
3) 처소격 조사를 붙이지 않는 경우.
漢文에서는 항상 처소격의 의미를 갖는 문장에 於나 乎를 붙이는 것은 아니다. “타동사+직접목적어+간접목적어”의 형태를 갖는 문장에서는 종종 於(于)를 붙이지 않는다.
立都阿斯達.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다: 이때 立都於阿斯達과 같이 써도 됨)
孔子傳之孟軻. (공자께서 맹자에게 전하다: 之는 직접목적어 자리에 쓰인 代詞)
醉翁之意不在酒, 在乎山水之間也. 山水之樂, 得之心而寓之酒也.
(醉翁(취옹: 술취한 노인)이란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山水之間에 있는 것이니, 산수의 즐거움을 마음에 얻어, 이를 술에 기탁하여 비유한 것이다)
☞ 이상과 같이 “타동사+직접목적어+간접목적어”와 같은 문형에서는 於를 생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생략되는 것은 아님)
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先帝의 특별한 대우를 추모하여 陛下께 보답하려 한다)
◆ 者의 용법
(1) 者는 다른 어구와 붙어서 명사구나 명사절을 이룬다. (사람 자, 것 자)
① 명사구를 형성 :
1. 주어를 강조하기 위한 용법 (동격 형성)
學者, 將以行之也 (學者: 배움이란 것은...: 學과 者는 동격으로, 者는 學을 강조함)
2. 명사구를 형성
學者當勞之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學은 者를 한정함)
② 명사절을 형성 :
及人而樂者順而易 (남에게 미쳐서 즐거운 것은 順한 일이므로 쉽다)
豈復有相視如路人者哉 (어찌 서로 보기를 노인(路人)처럼 하는 일이 다시 있겠는가?)
(2) 명사절을 만드는 “者”의 용법
者는 명사절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 명사절은 주로 “주어”나 “주격 보어”로만 쓰이고, “목적어”로는 쓰이지 않는다. 다만, 명사구의 경우에는 “목적어”로도 쓰이며, 이때는 不定代辭인 之를 붙이는 것이 상례이다.
<者가 이끄는 명사절이 주어로 쓰이는 경우>
○ (語意渾然, 又若不專爲三家發)者, 所以爲聖人之言也.
(語意가 渾然하고, 또 오직 三家만을 위하여 말씀하지는 않은 듯한 것은, 聖人의 말씀이 되는 所以이다)
(語意渾然, 又若不專爲三家發)者가 이 문장의 주어이다.
<者가 이끄는 명사절이 주격 보어로 쓰이는 경우>
○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明德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것으로, 虛靈하고 不昧하여 온갖 이치를 모두 갖추고 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가 주어인 “明德者”의 주격 보어가 된다.
<者가 이끄는 명사구가 목적어로 쓰이는 경우>
○ 爲善者, 天報之以福.
(善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 갚는다: 하늘은 善을 행하는 사람에게 복으로 갚는다)
報의 목적어는 “爲善者”이며, 이때 한문에서는 者가 이끄는 명사구가 직접 동사의 목적어로는 쓰이지 않고, 不定代辭인 之를 붙여 문장을 간결하게 만들어 쓰는 것이 상례이다. 즉 목적어인 명사구를 먼저 서술하고, 그 다음에 之를 붙인다. 즉, 이때의 어순은 우리말의 어순과 같다. (마치 영어에서 “it”의 假目的語 용법과 유사)
◆ 是의 용법
① 옳을 시
是非(시비), 不見是而無悶(옳게 인정받지 못해도 개의치 않는다), 實事求是(실사구시)
② 이 시(지시형용사, 지시대명사: 단, 주어로는 쓰이지 않는다)
(지시형용사) 夫子至於是邦也.. (선생님께서 이 나라에 오시다..)
(지시대명사) 造次必於是 (잠시라도 이에 있다. 造次: 잠깐 동안의 시간)
(지시대명사) 如是之人 (이와 같은 사람)
(지시대명사) 전치사 또는 타동사의 목적어로만 쓰인다.
☞ 단, 주어로는 쓰이지 않는다.
③ ~이다(동사로 쓰임)
仁是性也 (仁은 性이다)
孝弟爲仁之本, 此是由孝弟可以至仁否?
(孝悌는 仁의 근본이다. 이는 효제에서 말미암아 仁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인가?)
☞ 是의 보어는 명사(구) 뿐만 아니라, 서술절을 그 보어로 삼기도 한다. 즉, 첫 번째 예문에서 是의 보어는 性으로 명사(구)이다. 그리고 두 번째 예문에서 是의 보어는 서술절을 받는다. 즉, 是다음에 “술어+명사구”의 서술절을 보어로 받는다.
過而不改, 是謂過矣。(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이 바로 잘못이다)
이 예문에서도 是는 동사로 쓰였다. 흔히 이 문장을 번역할 때,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일러 잘못이라 한다”라고 하여, 마치 是를 목적어로서 지시대명사인양 번역하는데, 이는 是가 지시대명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어감에 맞게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是는 동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謂過는 是의 보어이다. 만약 지시대명사라면, 謂是過矣의 어순으로 써야 할 것이나, 이와 같은 문장은 쓰이지 않는다
☞ 是의 주어는 문맥상 분명한 경우에는 종종 생략된다.
孝弟是仁之一事。謂之行仁之本則可, 謂是仁之本則不可。
(효제는 仁의 한가지 일이다. ~~~, 인의 근본이라고 하면 옳지 않다)
여기서 是는 역시 동사이며, 주어는 문맥상 孝悌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나온 是는 그 주어가 孝悌로 명시되어 있으나, 뒤에서는 문맥상 같은 얘기이므로, 주어를 쓰지 않은 것이다. 즉, 제대로 주어를 갖추어 쓴다면, 謂此是仁之本則不可라고 하여 此라는 대명사, 또는 직접 孝悌라는 주어를 붙여줘야 할 것이지만, 한문에서는 문맥상 주어가 분명하면 주어는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우리말의 경우에도 흔히 있는 일이므로 이해할 것이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여기서도 是는 지시대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서, “~이다”의 뜻이며, 주어는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온 문구이므로 생략된 것이다. 위의 문장을 흔히 번역하기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라고 하여, 마치 是를 지시대명사로서 주어인양 번역하는데 이것 역시, 是가 지시대명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말의 어감에 맞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일 뿐이며, 是는 주어가 아닌, 동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④ “(唯)+목적어+是+동사”의 구문.
대개 목적어를 강조하기 위해, 목적어를 문두(文頭)에 먼저 쓰고, 是로 받는 용법이 있다.
唯利是求. (오직 이익만을 추구한다)
⑤ ~이다(동사로 쓰임)에서 전(轉)하여, “~때문이다”의 의미로도 쓰인다.
父不憂心因子孝, 夫無煩惱是妻賢.
(아버지가 마음을 근심하지 않는 것은 자식이 효도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요, 지아비가 번뇌함이 없는 것은 지어미가 어질기 때문이다)
◆ 「所+타동사」의 용법
① 「所+타동사」 (~하는 바, ~하는 것)
所知有限. (아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知所先後, 可以入德矣. (앞뒤에 할 것을 알면, 德에 들어갈 수 있다)
☞ 이때 「所+타동사」를 강조하기 위해 者를 붙여 쓰기도 한다.
所學者在我. (배운 것이 나에게 있다) (所學在我라고 써도 됨)
☞ 所는 타동사의 목적/대상이 되는데, 비단, 타동사의 목적/대상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동사구나, 또는 전치사의 목적/대상이 될 수도 있다.
雖有舟輿, 無所乘之.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 일이 없다: 乘之의 목적이 됨)
此典樂之官所由設也. (이것이 바로 典樂이라는 벼슬이 말미암아 생겨난 바이다: 由의 목적이 됨)
此吾之所自出也.
(이것이 내가 말미암아 나온 바이다. 내가 그로부터(所自) 나왔다: 所는 自의 목적이 됨)
人生而必有所賴以持身者.
(사람은 살면서 반드시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있다: 所는 賴의 목적이 됨)
② “주어+(之)+所+타동사” (이때 주어와 「所+타동사」는 소유격 또는 주격의 관계이다)
學者所當深戒也. (배우는 사람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이다)
....人之所易忽也. (.....사람이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이다)
③ 「所+타동사」+명사구” (이때 「所+타동사」와 명사구는 동격을 이루며, 별개의 독립된 어구임)
若上文所謂孝悌, 乃是爲仁之本. (所謂와 孝悌는 별개의 독립된 문장 성분임)
(윗 문장에서의 이른 바, 효제와 같은 것은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 所謂와 孝悌는 동격)
☞「所+타동사」와 연결된 명사구를 강조할 때, 또는 명사절이 길어질 때는 者를 붙이기도 한다.
所謂致知在格物者, 言~~~(이른바 致知가 格物에 있다는 것은 ~~~을 말한다)
所思忠孝者, 人雖不知, 天必知之. (所思와 忠孝는 별개의 독립된 구절임)
(생각하는 바가 忠孝인 사람은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늘만은 반드시 알아준다)
④ 「所+타동사」+(之)+명사(구) (「所+타동사」가 명사구를 한정함)
☞동사가 명사를 한정할 때는 이처럼 반드시 所를 붙여 동사를 명사로 만든 다음에 한정하는 것이다.
發明所言之理. (말씀하신 이치를 밝힌다)
天命者, 天所賦之正理也. (천명이란 것은 하늘이 부여한 올바른 이치이다.
此李太白之所作夏日詩也. (이것은 이태백이 지은 夏日이란 詩이다)
此李太白所作之夏日詩也. 또는 此李太白所作夏日詩也. (所作과 夏日詩는 독립된 구절임)
⑤ 爲+A+「所+타동사」 (A의 ~하는 바가 되다. 피동형이 됨
爲人所容. (남에게 용서받다: 남의 용서하는 바가 되다.)
爲氣稟所拘. (기품에 구애받다: 기품의 구애되는 바가 되다)
◆ 以의 주요 용법.
1) 以+명사구, 또는 명사구+以 (자격을 나타냄: ~로서, ~을 가지고서, ~을)
○ 以善及人, 而信從者衆, 故可樂.
(善을 남에게 미쳐, 믿고 따르는 자가 많으니 즐거운 것이다)
○ 爲仁以孝弟爲本. (仁을 행하는 것은 孝悌를 근본으로 삼는다)
○ 曾子以此三者日省其身. (曾子는 이 세가지를 가지고서 날마다 자신을 성찰했다)
○ 使民以時. (때로서(때를 맞춰서) 백성을 使役한다)
○ 敎人以善, 毋過高. 當使其可從.
(사람을 善으로 가르칠 때는 너무 고상하게 하지 말고 그가 쫓아갈 수 있게끔 해야한다)
2) 서술절(또는 동사구)+以 (인과관계의 접속 역할을 함: ~하므로써, ~하여서)
○ 陳酒肴以娛之. (술과 안주를 벌려 놓고서(以) 즐긴다: 肴는 안주 효)
○ 積金以遺子孫, 未必子孫能盡守. (금을 쌓아서(以) 자손에게 물려줘도 자손이 반드시
다 지켜내는 아니다: 未必은 부분 부정. 盡은 부사로 “다, 모두”의 뜻)
○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진실로 의당 聖德을 펼치시어(以) 先帝의 遺德을 빛내셔야 합니다)
☞ 이처럼 以는 앞에 서술절을(또는 동사구를) 받고, 以바로 뒤에는 동사가 옴으로써 앞 뒤 문구를 인과관계로 접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때는 而와 그 쓰임새가 비슷하며 또 한 댓구문에서도 흔히 以와 而를 번갈아 가며 대(對)를 맞추기도 한다.
舟搖搖以輕颺,風飄飄而吹衣。
(배는 흔들흔들하여(以) 가벼이 출렁이고, 바람은 표표(飄飄)하여(而) 옷을 흩날린다)
3) 以+서술절 (이유 또는 양보를 나타냄: ~하기 때문에, ~하므로, ~할지라도)
○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天地가 長久할 수 있는 所以는 그것이 스스로 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 勿以惡小而爲之. (惡이 적다고 하여(惡이 적다는 이유로), 이를 해서는 안된다)
○ 學者, 將以行之也. (배우는 것은 장차 행하려 하기 때문이다․행하기 위해서이다)
☞ “~하기 때문에, ~하다”는 식으로 문장을 만들 때는, 뒤에 故를 붙여 호응한다.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그것이 끝내 스스로 크게 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능히 그 위대함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以其謹於言行, 故能見用於治朝. (그가 言行에 있어 삼갔기에, 그래서 천하를 잘
다스리는 조정에 쓰일 수 있었던 것이다: 見+술어: ~을 당하다.)
4) 종종 서술절(명사구)가 以와 떨어져 쓰이는 경우도 있다.
○ 天行健,君子以自强不息。(天行(하늘의 운행)이 건실하니, 군자는 그럼으로써 자강불식한다)
○ 行有餘力,則以學文。(행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그것으로써 글을 배우라)
○ 孝公用商鞅之法,移風易俗,民以殷盛̖國以富强。(孝公이 상앙의 법을 써서,
풍속을 바꾸니, 백성은 그럼으로써 융성해지고, 나라는 그럼으로써 부강해졌다)
☞ 以대신, 以之를 쓸 수도 있음.
君子所守者道義, 以之脩身 (군자의 지키는 바는 道義이니, 그것으로써 修身한다)
5) 관용구문
○ 所以+술어: ~하는 소이(所以), ~하는 까닭, ~하는 방법, ~하는 바의 것.
○ 無以+술어: ~할 길이 없다. ~할 방법이 없다. ~할 수 없다.
○ 有以+술어: ~할 방법이 있다. ~할 근거가 있다. ~할 수 있다.
○ 可以+술어: ~할 수 있다. ~해도 된다. (가능이나 허가를 나타냄)
○ 足以+술어: 충분히 ~할 수 있다.
○ 是以 : 이로써, 그러므로.
○ 何以 : 무엇으로서? 어떻게? (何以知之乎?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 以爲 : ~으로 생각하다. ~으로 여기다. ~으로 삼다.
○ 不以+A+술어 : A로서 ~하지 않는다. (不以貧富動其心: 貧富로 그 마음을 움직 이지 않는다.) 이때 以貧富不動其心과 같은 어순으로 쓰지 않음에 주의할 것.
不以人廢言 (사람을 가지고서 그 사람의 말을 폐하지 않는다: 사람이 천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말까지도 천하게 여겨
◆ 所以의 용법
1) 이유, 까닭, 원인 등을 나타내는 경우. (~하는 이유, ~하는 까닭, ~하는 所以)
○ 此吾譜之所以作也. (이것이 바로 우리의 족보를 만드는 이유․소이(所以)이다)
○ 先王之道, 此其所以爲美. (先王의 道에 있어서, 이것이 바로 아름답겨 여겨진 所以․이유이다)
○ 究其所以. (그 원인․이유를 연구하다: 所以는 명사로서 단독으로도 쓰임)
☞ 앞에 원인을 나타내는 말을 쓰고, 뒤에 그 이유를 설명할 때 以나, 爲 등 이유를 나타내는 말로 호응시킨다.
○ 君子所以爲君子, 以其仁也. (君子가 君子되는 所以․이유는 그것은 바로 仁 때문이다)
○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也. (天地가 長久할 수 있는 所以는 스스로 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 古者所以不出其言, 爲此故也. (옛날에 그 말을 쉽게 꺼내지 않은 所以는 이 때문이다)
2) 방법이나 목적을 나타내는 경우. (~하기 위한 것. ~하는 방법. ~하는 所以)
○ 大學之書, 古之大學所以敎人之法也.
(大學이란 책은 옛날 태학(太學)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법이었다)
○ 孝者所以事君也. 弟者所以事長也.
(孝는 임금을 섬기기 위한 것이요, 悌는 어른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 矩所以爲方也. (矩(구: 곱자)는 네모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 友所以輔仁也. (벗이란 나의 부족한 仁을 돕기 위한 (것?) 사람이다)
○ 不知所以自守. (스스로를 지키는 所以․방법을 알지 못하다)
○ 三代之學, 皆所以明人倫也. (三代의 학문은 모두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 日夜思慮, 求所以補報萬一.
(밤낮으로 생각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방법․所以를 구하고 있다)
○ 聖人所以知來者蓋如此. (聖人이 앞으로 올 것을 아는 방법․所以가 대개 이와 같으시다)
○ 春秋者, 魯之所以名史. (春秋라는 것은 魯나라가 史冊을 이름붙이기 위한 것이다)
3) 결과를 나타내는 경우. (所以가 접속사로서, “그러므로, 그래서”의 뜻으로 쓰인다)
○ 惟仁者無私心, 所以能好惡(오)也.
(오직 仁者만이 私心이 없다. 그래서 능히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
○ 孔子患舊史是非錯亂而善惡不明, 所以修春秋. (공자는 옛 史冊들의 是非가 착란되어 善惡이
분명치 않게 됨을 걱정하시어, 그래서 春秋를 보수(補修)한 것이다)
○ 佛氏之言, 比之楊墨, 尤爲近理, 所以其害爲尤甚. (佛氏(불교)의 말은 楊墨에 비하면
더욱 이치에 가까우니, 그래서 그 害가 더욱 심하다)
◆ 在의 용법
1. ~에 있다. (A在B= A가 B에 있다. 이때 종종 在於~, 在乎~로도 쓴다)
所學者在我. (배운 것이 나에게 있다)
一年之計在於春. (일년의 계획은 봄에 있다)
足國之道在乎務本而節用. (나라를 족하게 하는 길은 근본(농업)에 힘써 절약하는 것이다)
☞ A(명사)+有+B= A에 B가 있다.
死生有命, 富貴在天. (죽고 사는 것에는 命이 있는 것이요,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다)
2. ~에 달려 있다.
知不知在人. (알아주고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다․다른 사람에게 있다)
兵不在多, 在精. (병사는 수가 많은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정예화에 달려 있다)
3. (自動詞) 존재하다. 건재하다.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멀리 나가지 말고, 멀리 갈 때는
가는 방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멀리 갈 때는 가는 곳을 부모님께 알리고 가라)
禮樂皆在. (禮樂이 모두 남아있다)
4. (介詞: 명사앞에 전치사처럼 끼어 붙는 말)
(시간이나 장소 또는 상황 등등) ~에, ~에서, ~의 경우에, ~에 있어서..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永和 9년, 때는 계축 늦은 봄
초에(在) 회계산 북쪽의 난정(蘭亭)에 모이다: 陰: 山의 북쪽을 陰이라 함)
子在川上, 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공자가 시냇둑 위에서 말씀하시길,
“가는 것(흐르는 강물)은 이와 같을진저! 밤낮으로 그치질 않는구나”)
楊家有女初長成, 養在深閨人未識. (양씨 집 딸이 이제 장성하여, 깊은 규방에서 자라게
되어 사람들이 (양씨 집 딸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有는 불특정한 대상을 지목할 때 씀)
☞ 이처럼 “동사+在”의 용법은 한문만의 독특한 용법이므로 주의있게 보기 바람.
三年無改, 亦謂在所當改而可以未改者耳. (삼년간 고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마땅히
고쳐야 할 것에서 아직 고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할 뿐이다: 而는 호흡 조절의 기능)
此皆在我所當爲. (이 모두가 내게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이다)
在聖人則有不然者. (聖人의 경우에는․聖人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第六章乃誠身之本, 在初學尤爲當務之急. (제 6장은 誠身의 근본이 되니, 초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마땅히 힘써야 할 급선무가 되는 것이다. 乃는 동사로 “(곧)~이다”)
◉ 한문의 해석 방법 ◉
우선, 본인이 이런 명제를 내세워서, 글을 쓸 정도의 자격이나 능력이 없음을 본인은 잘 알고 있다. 다만, 초학자들을 위해서 궁색한 조언이나마 드리면서 이 문서를 끝맺으려 한다.
한문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우선 문법과 어휘력, 그리고 고전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라는 세가지의 요소가 잘 갖춰져야 한다. 여기서, 고전에 대한 지식은, 지금 우리가 한문을 읽으면서 배우고자 하는 내용이므로, 이는 한문을 읽으면서 익히면 되는 것이다. 둘째, 어휘력에 있어서는, 낱글자로서의 漢字 하나하나의 어휘는 물론이거니와, 두 글자가 합쳐서 이루어진 복합어에 대한 어휘력을 길러야 한다. 사람들은 대개 漢字 하나에 하나의 어휘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아주 단순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唐宋 代로 내려오면서, 이 복합어들이 엄청나게 불어나고 한문의 어휘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현대에도 물론 이런 어휘들이 여전히 쓰이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이미 잊혀진 단어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은 좋은 사전의 힘을 빌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서의 글풀이 중에 종종, “무엇은 한 단어로 쓰인 것이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 이는 그 단어가 하나의 어휘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일이 그런 표현을 지겹도록 한 것임을 독자들은 알아주기 바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한문에 대한 지식은 지금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대상이며, 어휘력은 사전을 통해 키워나갈 수가 있다. 그러나, 문법을 모르면, 문장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며, 무엇이 주어이고, 무엇이 목적어인지도 모르며, 또 무엇이 한 단어로 쓰인 어휘이며, 또 무엇이 故事를 인용한 문구인지조차도 알지 못하게 된다. 문법은 한문의 문장 구조를 파악하는데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며, 이러한 문법 개념이 확실히 서 있는 사람은 한문의 문장을 제대로 보게 되는 안목을 지닐 수 있다.
따라서 본인은 항상 초학자들에게 그 문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법은 多讀을 통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多讀을 요구하기란 어려운 실정이며, 따라서, 먼저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던 내 자신이 이런 홈페이지를 통해 문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통한 문장의 이해에 주의를 환기시키된 동기가 되었다.
이 문서의 잘못된 점은 독자들께서 스스로 바로잡아 가면서, 보시길 바라며...
차후에, 능력과 여가가 허락된다면, 논어의 나머지 부분도 이와 같은 형식으로 정리할 생각임.
첫댓글 정말 성의에 놀랍고 님의 정성에 감사합니다,,,좋은 자료 정성껏 공부하겠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