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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간화선 특강)
제2강 - 2부(2012.10. 22.)
答 曾侍郎 天遊(一)
그 영화장면에 나오는 그 다치는 일이나, 그 다친 것을 치료하는 일이나 전부 幻입니다. 幻藥으로써 다시 幻병을 다스리니
病瘥藥除하면 依前只是舊時人이라
若別有人有法則是는 邪魔外道의 見解也니라
病瘥藥除(병차약제)하면, 병이 낫고 약마저 제거 된다면 幻입니다.
依前只是舊時人(의전지시구시인)이라.
옛날을 의지한, 옛날 그대로 다만 옛 사람일 뿐이다.
그전엔 병나기 전, 환이라고 알기 전 사람은 환상의 무상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것을 알고 보니까 이제 병도 낫고 약도 제거됐어요. 그러면 딴 사람인가요? 역시 그 사람입니다. 옛날 그대로 그 사람입니다.
依前只是舊時人. 참 유명한 말입니다. 깨달아서 도통을 하고, 큰 진리를 터득했다 손 치더라도 뭐 달라지는 것 있나요? 달라지는 것 없습니다.
그대로 일상생활 다 하는 겁니다.
이 몸뚱이 가지고 있는 이상은 일상생활 그대로 다 하는 겁니다. 깨닫고 나서 그날도 밥 먹어야 됩니다. 깨달은 그날도 잠자야 됩니다. 어제 깨달다면 내일도 또 밥 먹고 잠자고,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해야 되고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습니다.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단 그 허망한데 속지 않는다는 겁니다. 허망한데 속지 않고 사느냐? 그 허망한 것을 모르고 그 허망 속에 치다꺼리를 하면서 사느냐? 하는 단 그 차이 뿐입니다. 사람은 똑 같아요.
若別有人有法則是(약별유인유법즉시)는 邪魔外道(사마외도)의
見解也(견해야)니라. 만약 따로 다른 사람이 있고, 또 어떤 도리가 있다 법이 있다고한 즉은 이것은 邪魔外道의 見解也니라. 삿된 견해고 마군이의 견해고, 외도의 견해다. 그 말입니다. 邪ㆍ魔ㆍ外道. 이것이 다 다른 말이지요. 아주 삿된 소견ㆍ마구니의 소견ㆍ외도의 소견이니라. 그렇습니다. 참 이 불교는 이런 점이 뛰어납니다. 우리가 불교도 모를 때는, 제대로 모를 때는 특별한 것이 있는 냥으로 어떤 환영에 사로잡혀서 출가하는 경우도 있고요. 또 불교 공부를 하면서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려니 생각하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한 것이 없으면 재미없어요. 근기가 하열한 중생들에게는 아주 신기하고 특별한 것이 없으면 사실 재미를 못 느낍니다. 이것도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특별한 것이 있고 뭔가 기특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정말 邪魔外道의 견해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불교 공부라는 것이 진실한 불교공부는 아무 새로울 것이 없고, 신기할 것도 없고 그냥 본래 그대로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다. 세상에서 그런 싱겁고 재미없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고, 특별한 것이 있으려니 하는 그런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사실 참 힘 빠지는 이야기지요. 이런 내용이 참으로 힘 빠지는 내용입니다. 결국은 힘이 빠져야 됩니다. 우리가 괜히 긴장하고 뭔가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그런 너무 기대를 가지고 불교 공부를 이렇게 하면 나중에 정신 이상자 되고요. 뭔가 불교를 해도 불교 안에서 이상한 그런 내용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교화하고 그래요.
지금 불교 T V에 그 전에 더러 나오던데 요즘 또 BBS에서는 그것이 광고가 나오더라고요. 춘천에 어디 있는 그런 사찰에서는 부처님이, 자기 자신이, 경전 상에 있는 어떤 선 도리로써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이것은 부처님냥으로 그렇게 선전하고, 또 거기에 현혹된 사람들도 또 많아요. 그래서 절을 크게 지어가지고 거기 또 등을 다는데 파란등만 달았더라고요. 온 도량이 그냥 파란 등으로 완전히 뒤 덮인 그런 도량이 있어요. 그런 것이 참 위험천만이지요. 자기가 그렇게 환영에 사로잡혀 버리면 그것이 자기 살림살이가 돼가지고 다른 사람도 전부 그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여기 보십시오. 만약에 특별히 또는 따로 사람이 있고, 법이 있다면 그것은 邪魔外道의 견해다.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제가 늘 주장하는 것이 “사람이 부처다ㆍ사람 그대로 부처다.” 사람 모습 그대로 부처지 달리 무슨 법을 받고, 어떤 꿈속에서 법을 받았다고 한다든지, 누가 점지를 했다든지 해가지고 부처다 라고 하는 것. 그런 경우하고는 차원이 영 다른 것입니다.
公은 深思之하야 但如此崖將去호대 時時於靜勝中에
切不得忘了須彌山과 放下著兩則語하고 但從脚下하야
著實做將去언정 已過者는 不須怖畏하고 亦不必思量이니
思量怖畏하면 卽障道矣리라.
公(공)은 深思之(심사지)하야, 그대는 깊이ㆍ깊이 생각을 해서
但如此崖將去(단여차애장거)호대, 다만 이와 같이 崖將去호대,
崖將去. 이런 것이 옛날 우리 서장교재에 보면 “바다에 가다.” 그런 식으로 표현해 놨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이것은 “그대로 밀어간다.” 이 뜻입니다. “밀어간다.” 이 생각을, 이 생각이 뭐라고요?
依前只是舊時人이라. 그대로 우리가 눈을 뜨면 옛날 그대로의 사람이고, 만약 특별한 것이 있다면 邪魔外道의 견해다. 라고 하는 이런 사고. 이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 如此崖將去. 이와 같은 생각을 그대로 가져가되,
時時於靜勝中(시시어정승중)에 切不得忘了(절부득망료),
때때로 靜勝. 고요하고 수승한 가운데, 경을 보든지ㆍ기도를 하든지ㆍ참선을 하든지 간에 그래도 제일 좋은 환경은 고요한 환경입니다. 그래서 꼭 수승할 勝자를 붙여놨습니다. 그래서 선방에서 만약에 공사한다든지 학생들이 수련대회를 한다든지 해서 도량이 좀 시끄럽게 하면, 시끄럽게 한다고 야단이잖아요. 고요한 것이 그래도 공부하기가 좋은 겁니다. 그래서 수승할 勝자를 붙인 것입니다. 고요한 환경을 택해서 공부하는 그런 가운데 切不得忘了. 간절히 忘了하지 말라 = 잊어버리지 말라. 무엇을요?
須彌山放下着兩則語(수미산방하착양측어)하고,
이것이 다 화두지요. 須彌山은 한생각도 일으키지 아니했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렇게 학인이 물으니까 “수미산” 그랬습니다. 이것을 조금 풀면 수미산은 큰 산이잖아요. 허물이 “수미산처럼 크고 많다.” 이렇게도 해석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放下着은 한물건도 가져오지 아니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까 “내려 놓아라 = 방하착하라.” 우리 불교명언들 중에서 참~~ 放下着같이 근사한 말 없습니다. 참~~ 근사한 말. 이것은 여러 분야에서, 여러 각도로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낱말입니다. 放下着. 우리가 도반들끼리 시시비비 하다가도 “방하착하라.” 어떤 문제에 고심하면 “방하착해라.” 그러잖아요. 참 좋은 만병통치약입니다. 여기는 한물건도 가져오지 아니했을 때에 어떻습니까? 하니까 “내려놓아라.” 아니 한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다그랬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입니까? “내려놓기 싫거든 가져가거라.” 그랬습니다. “짊어지고 가라.” 이것이 화두의 원형인데요. 아무튼 放下着. 須彌山. 다 우리에게 익숙한 화두라서 길게 설명 안 하겠습니다.
“그 兩則語를 잊어버리지 말고,” 그랬습니다.
여기 우리가 화두 드는 입장에서 설명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절대 화두 두 개드는 것을 가르치지 아니해요. 두 개들면 안 된다고 그래요. 당연하지요. 화두 한 개도 들기 어려운데 두 개를 왜 듭니까? 그런데 兩則語를 잊어버리지 말라. 그랬습니다. 여기에 대혜스님이 간화선의 시조인데, 대혜스님이 간화선의 시조이고 간화선의 창시자입니다. 그런데 이 때가 아마 그것의 공부지침이, 정리가 채 되지 않았던 때가 아닌가? 이 글만 가지고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방하착이면 방하착. 수미산이면 수미산. 무자면 무자다 하지, 왜? 兩則語를 잊어버리지 말라. 라고 했을까? 이것 우리가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아~, 그래서 이 때는 뭔가 간화선 지침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물론 화두를 두 개들 수도 있고, 또 A라는 화두를 들다가, 깨닫는 것은 B라는 화두는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조사스님들 관례가 많거든요.
그래서 아마 그런 입장에서 생각하면 대혜스님이 그 당시로서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었지 않겠는가? 하지만 요즘 간화선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크게 잘못 지시 하는 겁니다. 크게 잘못 지시하는 것이라고요. 왜냐? 두 화두는 왜? 한 화두도 많은데 두 개 화두를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느냐? 절대 두 개드는 말을 요즘 선지식들은 안 합니다. 해서도 안 되는 일이고요. 아무튼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간화선 지침이 채 정리되지 않았던 때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화두는 하나만 들도록 하자 하는 것입니다.
但從脚下(단종각하)하야, 다만 脚下로부터, 지금 이 순간부터
着實做將去(착실주장거)언정, 착실하게 지어갈지언정, 공부를 지어간다.
지을 做자는 지어간다 = 공부를 해간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것을 꼭 지을 做자를 씁니다. 공부를 “지은다.” 그래요. 짓는다 하니까 집 짓듯이 그렇게 짓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닌데, 아닌데 做자를 그렇게 씁니다. 그래서 이 지을 做자 때문에, 요즘 선지식들도 “공부 짓는 일이 잘되느냐?” 짓는 일이라는 말이 필요 없거든요. 공부가 잘되느냐? 하면 되는데, 공부 짓는 일이 잘되느냐? 화두는, 화두는 예를 들어서 수미산 화두라도, 그냥 수미산하면 의심이 안 되지 않습니까?
須彌山이 의심이 되게 하려면 “한생각도 일으키지 아니했는데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을 먼저 떠올려야 됩니다. 그리고 선지식은 “須彌山” 이렇게 말했으니까 그 사전에 떠올리는 그 이야기하고, 須彌山이라고 하는 것 하고 이것이 우리 상식 속에 있어야 의심이 되는 겁니다.
狗子無佛性(구자무불성)도 그렇지요. 有情無情이 皆有佛性(유정무정개유불성)인데, 개는 불성이 없다. 이런 사실들을 떠올려야 無자가 의심이 되는 것이지, 이 사실을 떠올리지 아니하면 의심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做자를 넣는 것이지요. 그런 사전의 어떤 상황들을 떠올려서 마지막에 수미산이면 수미산. 방하착이면 방하착. 무자면 무자. 그래서 최종적으로 그 하나의 업보를 가지고 의심을 일으켜요. 그 의심이 일어나기까지는 그 사전상황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을 做자지요. 계속 做자를 써야 됩니다. 다른 공부에는 做자를 안 씁니다. 그런 것들도 이 선문의 특색이지요.
做將去언정.
已過者(이과자)는 不須怖畏(불수포외)하고,
이미 지나버린 일들은 두려워하지 말나. 怖畏 = 모름지기 두려워하지 말고, 須자는 필수라고 해서 반드시, 모름지기 하는 것이지요. 반드시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亦不必思量(역불필사량)이니, 또한 思量하지도 말지니,
思量이 뭡니까? 이래저래 헤아리고ㆍ생각하고, 이렇게도 생각보고 저렇게도 생각보고, 그렇지요. 화두 드는데 그런 것은 제일 금물이지 않습니까?
思量怖畏(사량포외)하면, 이렇게도 생각하거나 아니면 怖畏.
두려워하는 것은, 已過者는 했으니까, 이미 살아온 그 삶. 그 삶이 업을 많이 지었고, 세속생활을 많이 했고, 세속적인 업이 잔뜩 쌓여있으니까 이 사람은 늘 그 생각하는 겁니다. 증시랑이 편지에 그랬습니다. 그것을 절대 두려워하고 생각할 것이 없는데 그래서 思量하고 怖畏하는 일이
卽障道矣(즉장도의)리라. 도를 장애할 것이다. 도 닦는 것. 그 보다 더 장애되는 것이 없다 이 것이지요.
但於諸佛前에 發大誓願호대
願此心이 堅固하야 永不退失하고 仗諸佛加被하야
遇善知識하야 一言之下에 頓亡生死하고 悟證無上正等菩提하야
續佛慧命하야 以報諸佛莫大之恩하야지이다하라.
若如此則久久하면 無有不悟之理하리라.
여기서부터 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공부인으로서 당연히 우리가 원력을 세워야 되는데, 원을 세워야 되는데 어떻게 원을 세우느냐?
但於諸佛前(단어제불전)에, 다만 諸佛前에, 부처님 앞에서
發大誓願(발대서원)호대, 큰 서원을 발해라. 어떻게 서원을 세운다?
願此心(원차심)이 堅固(견고)하야 永不退失(영불퇴실)하고,
원컨대 공부하고자하는 이 마음이 견고하고 견고해서 영원히 退失하지 아니하고, 仗諸佛加被(장제불가피)하야, 모든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의지해서 = 仗. 그러니까 과거 모든 부처님과 깨달은 사람들ㆍ또 모든 선재 선지식들, 이런 분들의 加被가 있어야 된다. 그리고 신장과 천룡팔부의 가피도 있어야 된다. 그것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까지도 우리가 다 믿고, ‘없는 존재다.’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해서 ‘없는 존재다.’ 예를 들어서 부엌에 절하는 옛날 큰스님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꼭 눈에 보여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중들을 위해서, 대중들이 먹을 음식을 생각해서 그 부엌에 절하는 겁니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절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칙신” 해가지고 화장실을 지키는 신이다. 이렇게 해가지고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 대중들을 보호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자세. 이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꼭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따진다면 그것은 유물론자지요. 형이하학적인 론자 아닙니까? 종교하고는 거리가 180도로 멀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데도 정말 최첨단 불교.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지요?
초기불교에서부터 쭉~~ 자세하게는 설명 안 드렸습니다만, 불교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치면서 발달해 왔습니까? 이제 와서 선불교. 달마스님이 중국에 오면서부터 선불교가 등장했거든요. 선불교가 등장했지만 달마스님 당시 때는 사실은 경도, 유마경 같은 경도 가져오고, 또 간혹 어떤 선사들이 금강경을 권하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사실은 아직도 (그 당시만 하더라도) ‘덜 발달한 선불교다.’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이 간화선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발달할 때까지 발달한 겁니다. 최상승으로 발달했는데 그런 상황이 되면 사람들 마음이 어떻게 되는가 하니 전통적인 그런 신앙심이 좀 사라지기가 쉬워요. 그런데 대혜스님은 여기 보십시오. 諸佛의 加被를 의지해서 그리고 또
遇善知識(우선지식)하야, 선지식을 만나야 돼요. 그래서
一言之下(일언지하)에 頓亡生死(돈망생사)하고,
한 마디 아래에서 깨닫는 것이거든요. 아무리 오래 참구하고 참구하다가 어느 계기에, 一機一境上(일기일경상). 또 一言一句下(일언일구하).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一言一句下 = 경전의 한 구절 말씀이나, 또는 선지식의 한마디 말이나, 아니면 한 계기, 一機一境上. 예를 들어서 겨울에 정진하다가 화장실에 가는데 눈길에 미끄러졌다. 미끄러진 그 계기를 통해서 눈을 뜹니다. 울력하다가 돌이 굴러가지고 대나무에 탁 친다. 그 계기에 또 눈을 뜹니다. 이런 사실들, 그 겁니다. 여기는 선지식을 만나서 한마디 말씀 아래 頓亡生死라. 몰록생사를 잊어버렸다 = 생사가 달아나버렸다 = 없어져버렸다 = 없어지고
悟證無上正等菩提(오증무상정등보리)하야,
無上ㆍ正等보리를 悟證해서, 깨달아 증득해서, 세상사는 깨달음. 그래서
續佛慧命(속불혜명)하야, 부처님의 혜명, 지혜의 생명을 이어받아
以報諸佛莫大之恩(이보제불막대지은)하야지이다하라.
“모든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라고
“갚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이렇게 원력을 세우라 그랬습니다. 이 원력이 그 말입니다.
願此心이 堅固하야부터, 원컨대 이 마음이 견고해서
永不退失하고 仗諸佛加被하야 또 遇善知識하야, 선지식을 만나서
一言之下에 생사를 잊어버리고 無上正等菩提를 悟證해서, 깨달아 증득해서, 그리고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고, 그래서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아지이다. 갚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하는 이런 서원을 세우고 하라. 이것 하나를 증시랑에게 대혜스님께서 아주 부탁하는 것입니다. 아주 깊이 당부하는 것이지요. 若如此則久久(약여차즉구구)하면,
이러한 자세로 오래 오래할 것 같으면 깨닫지 못할 이치가 없다. 이러한 자세로 계속한다면 無有不悟之理(무유불오지리)하리라. 누군들 못 깨닫겠는가? 그런 뜻입니다.
참선을 하겠다고 대혜스님에게 편지를 보냈고, 보내면서 자기의 살아온 허물을 다 토로했고, 그러니까 대혜스님이 거기에 또 감동을해서 이렇게 아주 친절한 가르침을 내리는 그런 내용인데요.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살이를 어떻게 살 것인가? 과거의 삶은 또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이런 것들. 우리가 포교 일선에 있으면서 이런 문제를 많이 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의 표본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정말 순수하게 세속에서 세속생활을 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 했을 때, 그들의 삶과 불교적인 그 어떤 공부의 길. 예를 들어서 갈등하고 참 어려워하는 경우가 실지로 아주 많습니다. 그랬을 때 이런 것을 기준으로해서 딱 한 마디 제대로 일러준다면 아주 훌륭한 멘토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不見가 善財童子가 從文殊發心하야 漸次南行호대
過一百一十城하야 參五十三善知識하고 末後於彌勒一彈指頃에
頓亡前來諸善知識의 所得法門하고 復依彌勒敎하야
思欲奉覲文殊한대 於是에 文殊遙伸右手하고
過一百一十由旬하야 按善財頂曰 善哉善哉라
善男子야 若離信根이런들 心劣憂悔하야 功行이 不具하고
退失精勤하야 於一善根에 心生住著하며 於少功德에
便以爲足하야 不能善巧로 發起行願하며
不爲善知識之所攝護하며 乃至不能了知如是法性과 如是理趣와
如是法門과 如是所行과 如是境界하리며 若周遍知와 若種種知와
若盡源底와 若解了와 若趣入과 若解說과 若分別과 若證知와
若獲得을 皆悉不能일러니라.
不見(불견)가? 그대는 알고 있습니까? 혹시 보지 못하였습니까?
善財童子(선재동자)가 從文殊發心(종문수발심)하야,
이것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있는 내용입니다. 대혜스님이 왜? 화엄경 입법계품을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까? 여기서 우리 행장에서 봤지요? 화엄경을 보다가 10지 보살이야기에 가가지고 앙굴마라가 산모를 구한 그런 내용을, 제7지 보살이 無生法忍處에 이르러가지고 앙굴마라의 그런 화두. 앙굴마라가 산모를 구하는 그런 내용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랬습니다. 대혜스님은 원오스님한테도 깨달았고, 원오스님 만나기 전에도 깨달았고, 수 10번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혼자, 다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토굴에서 화엄경을 읽었는데 화엄경을 보다가 제 7지 보살이야기에 와가지고 엉뚱하게도 앙굴마라가 산모 구한 그런 화두를 다시 깨닫게 된 겁니다. 참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대혜스님께서는 다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화엄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화엄경 읽다가 또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된 겁니다. 결국은 최종적으로 화엄경 읽다가 깨달은 겁니다. 최종적으로 보면 화엄경을 읽다가 마지막 깨달은 것으로 그렇게 우리가 봐야합니다. 그래서 화엄경에 대한 그런 관심과 은혜가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이 처사가 화엄경 봤을리가 없고 하니까 화엄경을 인용해서 한 예로써 또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선재동자가 맨 처음 문수보살로부터 발심을 하지요. 53선지식을 친견하는데, 문수보살이 남쪽으로ㆍ남쪽으로 선지식을 참례해라. 그러니까 한 선지식을 참례하니까 또 그 선지식이 또 다음 선지식을 소개하고ㆍ또 다음 선지식을 소개하고ㆍ또 다음 선지식을 소개하고, 이렇게 해서 53명까지 만나게 되잖아요.
참~~ 그 교훈도요? 우리가 정말 본받아야 할 교훈입니다. 끊임없이 소개해준 선지식은 그 사람이 무슨 기생이 됐든지ㆍ뱃사공이 됐든지ㆍ외도가 됐든지ㆍ처사가 됐든지ㆍ비구니가 됐든지ㆍ비구가 됐든지, 그것 전혀 분별심 일으키지 아니하고 무조건 가서 선지식으로 친견하고 거기서 뭔가 배우려고 했다고 하는 이 자세. 그것 하나만 우리가, 사실 마음에 깊이 담아도 인생에 큰 덕이 되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漸次南行(점차남행)호대, 점차 남쪽으로ㆍ남쪽으로 가서
過一百一十城(과일백일십성)하야, 일백일십성을 지납니다. 그리고
參五十三善知識(참오십삼선지식)하고,
53선지식을 참례하게 되지요. 그리고 마지막 미륵보살을 만나지요.
화엄경 내용에 의하면 53명의 선지식을 친견하는 동안 여기는 일백일십 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햇수로는 수 100년 걸렸어요. 아무튼 거기에 나온 어떤 이는 7일 만에 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몇 달 만에, 어떤 이는 몇 년 만에, 몇 10년 만에 보기고하고 그렇습니다. 한 선지식을 만나는데... 경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미륵보살을 만나게 되잖아요.
우리가 불교에 인연된 이상 최소한도 화엄경은 소상하게 한 구절ㆍ한 구절 음미하면서 한 번쯤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그 전에 자운스님, 律師스님으로 유명한 큰스님인데요. 그 스님이 말년에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갖다가 천천히 소리 내가면서 음미하면서 읽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스님 문 앞을 지나가면 꼭 화엄경을 그렇게 읽어요. 제가 그 스님에게 기억되는 것은 그것 하나 뿐입니다. 그렇게 천하 律師라고 했어도 혼자서 당신 방에 그것도 말년에 화엄경을 장경각에서 내다놓고 글을 천천히 읽으면서 새겨보는 참, 불법의 진정한 맛을 느끼는 것이 그 음성에 배어나는 겁니다. 그것이 아주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혜스님도 마지막에 화엄경을 보셨고,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도 우리가 본받을 일이지요.
53선지식을 친견하고
末後於彌勒一彈指頃(말후어미륵일탄지경)에,
마지막에 미륵보살을 만났는데, 미륵보살은 법문 안에서 一彈指頃에,
彈이라고 하는 것은 튕길 彈입니다. 손가락을 튕긴다 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손가락을 튕기는 그 사이에, 그 순간에 그 동안 53명에게서 들어온, 그 오랜 세월동안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주옥같은 법문들을 그것이 뭐라고요?
頓亡(돈망), 다 없어버렸다ㆍ몰록 없어버렸다.
前來諸善知識(전래제선지식)의 所得法門(소득법문)하고,
그랬습니다. 그 동안 거쳐 온 그 많고 많은 선지식에게서 얻은바 법문이 다
없어져버렸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미륵보살은 딱 손가락 하나 튕기는데 딱 소리 나는데 그만 그 동안 쌓아온 그 공부가 정말 삭~~~ 없어져버렸어요.
復衣彌勒敎(부의미륵교)하야, 다시 미륵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미륵보살 앞에서 그랬으니까 어떻게요? “아~~ 제가 이렇게 됐습니다. 제 머리가 하얗게 돼버렸습니다. 제 머리는 하얀 백지장과 같았습니다. 그 동안 쌓아놓은 것이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 어떻게 해야 됩니까?” 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 미륵의 가르침은 뭔가 하면, “네가 문수보살을 처음 만나서 53명을 거쳐서 나에게까지 왔으니까 그럼 다시 문수보살에게 가야 될 것 아니냐? 그것이 순서 아니냐?”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彌勒敎라고 하는 것이 무슨 미륵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미륵이 가르치는 彌勒敎를 또 그렇게 알아들으면... 허허허허허허허
지금은 미륵교가 별로 이야기가 없는데, 우리 어릴 때는 미륵교가 상당히 세력이 있어가지고 한 고비 막 횡횡했어요. 저~ 기 금산 쪽 미륵교, 포항 쪽 미륵교. 미륵교가 두 개가 있어요. 다 미륵신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가지고 포항 쪽 미륵교는 조계종에 침투했어요. 조계종에 침투해서 곳곳에 이 사람들이 작정을 하고 조계종으로 출가를 했어요. 출가를 해가지고 가끔 이 사람들이 모입니다. 가끔 이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저희들끼리 막 이야기를 하다가 미륵교 아닌 사람이 딱 들어오면 그만 입을 딱 다물고 설렁ㆍ설렁ㆍ설렁 일어나고 가버리고 그래요. ‘이상하다ㆍ이상하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전부 포항 경주 영덕 영천 이 지역 사람들입니다. 출신이 전부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드러나게 되는데, 그 사람들이 많이 나갔어요. 자기들 본색이 드러나니까 거의 다 나가버렸어요.
조계종에 와서 공부했는데도 조계종으로 귀의한 사람이 없고, 거의 다 나가 버렸어요. 그런 미륵교가 있었어요. 그런 역사 여러분 잘 모르지요? 우리 조계종에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아주 큰 사건이었어요. 곳곳에 미륵교 쫓아낸다고 그냥 쫓아내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원력을 세우고, 쫓아내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천하가 다 아는 사이비 미륵교니까... 그쪽 사람들은 오히려 조계종에 귀의가지고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쪽 미륵교는 서백일이가(교주) 일찍이 죽고, 또 그것이 邪敎(사교)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 드러나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전부 조계종으로 들어와서 조계종 승려가 돼서 아주 열심히 수행 잘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도반들도 있고 그래요.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가르침은 그 겁니다.
“네가 문수보살로부터 발심했으니까 문수보살로부터 다시 시작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思欲奉覲文殊(사욕봉근문수)한대, 다시 문수보살을 奉覲 = 받들어 친견.
뵐 覲자나 볼 見자나 뜻이 같습니다. 받들어서 모시려고 하고, 하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 생각을 문수보살이 알고
於是(어시)에, 이에 文殊遙伸右手(문수요신우수)하고,
문수보살이 멀리 오른쪽 손을 펼쳐서
過一百一十由旬(과일백일십유순)하야, 아까는 一百一十城했습니다.
여기는 一百一十由旬입니다. 이런 것들도 우리가 눈여겨 봐둘 필요가 있습니다. 왜? 城이라고 했다가 由旬이라고 했는가? 이것은 다 의미가 있는 것이지 一百一十城이니, 一百一十由旬이니 그것은 어떤 邪想(사상)적으로ㆍ邪面(사면)으로 보면 안 되는 것이지요.
一百一十由旬을 지나서
按善財頂曰(안선재정왈), 선재동자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善哉善哉(선재선재)라. 훌륭하고 훌륭하다. 善男子(선남자)야,
若離信根(약리신근)이런들, 만약 그대가 믿음 = 信根.
믿음의 뿌리를 떠나 버렸더라면ㆍ믿음이 없었더라면, 하~~ 철두철미한 믿음. 우리가 믿음의 뿌리까지 생겨야 됩니다. 뿌리까지 생겼는가 모르겠어요. 그래야 信根이 되는 것이지 그냥 믿기만 하면 뿌리 없는 믿음이 돼가지고 여차하면 흔들려요. 그것도 또 뿌리가 깊어야 됩니다. 信자 옆에다 根자 붙여놓은 것이 그냥 붙인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붙인 것이 아니라고요. 信은 뿌리가 있어야 돼요.
그래야 어지간히 바람이 불어도, 어떤 사상적인 바람, 기타 등등 우리가 살면서 세속적인 바람, 그런 바람이 불어도 뿌리가 깊기 때문에 조금 흔들리기만 하지요. 약간 흔들릴 수는 있습니다. 세속적인 바람이 불면 좀 흔들릴 수는 있어도 그래도 결국은 그 바람은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니까 내 뿌리는 어쩌면 더 견고해질 수 있지요. 그 때는 뿌리가 사실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땅 속으로 더 깊이 뿌리내릴 수가 있습니다.
아~ 信자 옆에다 根자 붙여놓은 것이 근사한 겁니다. 이것이 보통 의미가 아닙니다. 信根. 또 선근이라는 말도 있지요. 善根. 다 같은 뜻입니다.
만약 信根이 없었던들 心劣憂悔(심열우회)하야, 마음은 용렬할 劣자,
憂悔. 근심하고 또 뉘우치기도 해서 功行(공행)이 不具(불구)하고,
功行. 이것은 공덕과 행. 그러니까 그동안 쌓아온 공부 공자는 아니지만, 역시 공부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행입니다. 功行하면 수행에 의한 어떤 공덕입니다. 공행이 갖춰지지 않고
退失精勤(퇴실정근)하야, 精勤. 기도할 때 “정근 한다.” 그러지요?
그 기도하는 마음. 거기에서 退失하지 않고 정근해서
於一善根(어일선근)에, 작은 하나의 선근에서
心生住着(심생주착)하며, 마음에 住着. 거기에 머물러 버리는 것을 내는
於少功德(어소공덕)에, 작은 공덕에
便以爲足(변이위족)하야, 곧 만족을 삼아서 便以爲足 = 곧 만족을 삼아서
不能善巧(불능선교)로 發起行願(발기행원)하며,
善巧로써, 능히 행원을 發起못할 것이며, 善巧. 이것은 자주 나오는 말인데, 아주 좋은 능력. 좋은 능력을 선교라고 합니다. 좋은 능력에서 行願. 보현행원이라고 할까요? 그런 원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며, 또
不爲善知識之所攝護(불위선지식지소섭호)하며,
선지식들의 攝護. 거둬들여서 보호해 주는 것. 그것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乃至不能了知如是法性(내지불능료지여시법성)과,
선재동자가 얻은, 말하자면 그 내용을, 깨달음의 내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을 낱낱이 자세히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如是法性과, 如是理趣(여시이취)와, 理趣, 또
如是法門(여시법문)과, 이와 같은 법문. 선재동자가 그 동안 공부한 내용들입니다. 또 如是所行(여시소행)과, 행하는 바 또
如是境界(여시경계)하리며, 이런 것을 了知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선재동자의 공부는 너무 대단한 공부입니다.
그래서 여기 法性ㆍ理趣ㆍ法門ㆍ所行ㆍ境界. 이렇게 하고 또
若周徧知(약주변지)와, 두루두루 아는 것.
若種種知(약종종지)와, 가지가지를 아는 것. 여기서 知자는 지혜라고 봐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알 知자지만 지혜와 동격입니다.
若盡源底(약진원저)와, 저~ 근원 끝까지. 그리고
若解了(약해료)와, 解了 = 그냥 이해하는 것.
若趣入(약취입)과, 나아가서 들어가는 것. 또
若解說(약해설)과 若分別(약분별)과
若證知(약증지)와, 증득해서 아는 것.
若獲得(약획득)을, 바로 얻는 것.
皆悉不能(개실불능)일러니라.
이러한 것들을 전부 다 能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若자는 만약 若자가 아닙니다. 같은 동격의 내용을 나열할 때, 예를 들어 周遍知라거나ㆍ種種知라거나ㆍ盡源底라거나ㆍ解了라거나, 이렇게 해석하면 됩니다. 절대 여기서 만약이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러한 같은 동격의 내용을 나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같은 것들을 皆悉 = 다 모두ㆍ모두 能히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이 없었더라면요? 信根이 없었더라면요. 믿음의 뿌리가 없었더라면 마음이 憂悔하고 功行도 갖추지 않고 정근에서 물러나가지고, 조그마한 것 하나 얻어놓고는 거기에 머물러가지고, 조그마한 공부로써 그것을 만족을 삼아가지고서 제대로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첫댓글 _()()()_
病瘥藥除하면 依前只是舊時人이라...병도 낫고 약도 제거됐어요. 옛날 그대로 그 사람이다.._()()()_
一言之下에 頓亡生死하고 梧證無上正等菩提하야 續佛慧命하야 以報諸佛莫大之恩....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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依前只是舊時人...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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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아서 도통을 하고, 큰 진리를 터득했다 손 치더라도 뭐 달라지는 것 있나요? 달라지는 것이 없지요.. 그냥 그대로 일상생활 하는 것][已過者는 不須怖畏하고 亦不必思量이니 思量怖畏하면 卽障道矣리라...이미 지나버린 일들은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또한 思量하지도 말지니 思量하고 怖畏하는 일이 도를 장애할 것이다]..釋대원성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공부 과정에 머물러 있었던 궁금증이 해결 되어서 감사합니다. _()()()_
信根...! 고맙습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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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옮겨갑니다. 성불하십시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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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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