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천부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일 뿐 아니라 유불선과 음양오행, 그리고 주역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우리 민족만의 경전일 뿐 아니라 전체동양의 경전이며, 세계인의 경전이다.
이 천부경은 원래 환인시절부터 있다가 훗날 환웅에게 전해진 삼부인 세 개 중의 하나인 거울(용경)에 새겨졌던 것인데 환웅천황이 백두산 기슭에 신시를 개국한 다음 백두산 동쪽에 큰 비를 세우고 거기에 글로 새겨 훗날 통일신라시대까지 전해져 왔던 것이다.
이 비에 새겨진 천부경은 우리민족의 옛글자(훗날 훈민정음의 모체가 됨)인 가림다로 새겨진 것이어서 후세사람들이 판독치 못하다가 통일신라 시대에 해동공자로 추앙받았던 당대의 세계적 석학인 최치원이 백두산을 찾았다가 이 비석에 세겨진 글을 읽고 한자로 번역해서 전하는 것이 바로 여든한 글자의 천부경이다.
이 여든 한글자로 우주의 법칙 모두를 압축해 담은 번역문을 볼때 에 최치원의 학식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옛 환인천제 시대의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이 천부경을 계송하여 낭독해 왔건마는 단락구분조차 틀리니 이걸 노래로 운률에 맞추어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하나에서 나오고 하나에서 비롯되나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여지기 이전의 하나이며 본래부터 있어 온 하나이다.
하나는 하늘과 땅과 사람 세 갈래로 이루어져 나오지만 그 근본은 변함도 없고 다함도 없다. 하늘의 본체가 첫 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을 바탕으로 땅의 본체가 두 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과 땅을 바탕으로 사람의 본체가 세 번째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변함 없는 하나가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의 순서로 완성되면서 새로운 하나를 이룬다. 이 새로운 하나는 한정도 없고 테두리도 없다.
이 새로운 하나가 바로 형상화된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과 형상화된 하늘 땅 사람이 어울리면서 음과 양, 겉과 속, 안과 밖이 생겨난다.
하늘에는 밤과 낮이 있고 땅에는 물과 뭍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남녀가 있어서 이 둘의 조화를 통해 천지는 운행을 하고 사람과 만물은 성장 발달해 나간다.
이렇듯 하늘과 땅과 사람이 원래 근본 상태, 형상화되기 이전의 상태, 형상화된 상태, 형상화되기 이전과 형상화된 상태가 어울려 작용하는 상태, 이 네 단계를 거쳐 우주만물이 완성되나 우주 만물은 본래 따로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다.
이렇게 하나가 묘하게 피어나 우주 만물이 형성되며 그 쓰임은 무수히 변하나 근본은 다함이 없다.
마음의 근본과 우주 만물의 근본이 하나로 통할 때 일체가 밝아진다.
이렇게 마음을 밝힌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 들어가 있다.
우주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에서 끝이 나지만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의 하나이며 끝이 없는 하나이다.
삼일신고
1.하늘에 대한 가르침
저 파란 창공이 하늘이 아니며 저 까마득한 허공이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얼굴도 바탕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위아래 둘레 사방도 없고, 비어 있는 듯하나 두루 꽉 차 있어서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무엇이나 싸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근본 자리에 계시며, 큰 사랑과 큰 지혜와 큰 힘으로 하늘을 만들고 온누리를 주관하여 만물을 창조하시되 아주 작은 것도 빠진 게 없으며 밝고도 신령하여 감히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언어나 생각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다고 해서 그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통해 하느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너의 그 머리 속에 이미 와 계시리라.
끝없이 널린 저 별들을 보라. 이루 셀 수가 없으며 크기와 밝기가 다 다르다. 하느님께서 온누리를 창조하시고, 우주 전체에 걸쳐 수백 세계를 거느리고 있으니, 너희 눈에는 너희가 살고 있는 땅이 제일 큰 듯하나 한 알의 구슬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온누리를 창조하실 때 중심의 거대한 기운 덩어리가 폭발하여 무수한 별들이 생겨나고 바다와 육지가 이루어져 마침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하느님께서 기운을 불어 넣어 땅속 깊이까지 감싸고 햇빛과 열로 따뜻하게 하여 걷고 날고 허물벗고 헤엄치고 흙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사람과 우주 만물은 다 같이 근본이 되는 하나에서 나왔으며, 이 하나가 세 가지로 표현되는 것을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본성과 생명과 정기이다. 사람은 이 세 가지를 온전하게 받으나 만물은 치우치게 받는다.
참 본성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가장 밝은 지혜上哲 로서 두루 통하여 막힘이 없고, 참 생명은 밝음도 흐림도 없으니 다음 가는 밝은 지혜中哲로서 다 알아 어리석음이 없으며, 참 정기는 두터움도 엷음도 없으니 그 다음 지혜不哲로서 만 가지 기틀을 잘 지켜 이지러짐이 없다. 따라서 누구나 근본이 되는 하나로 돌아가면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뭇 사람들은 미혹된 곳에서 세 가지 망녕됨이 그 뿌리를 내리나니 가로대 심心과 기氣와 신神이라. 마음은 본성에 의지하는 것으로 善惡을 이루나니, 착하면 복이 되고 악하면 화가 미친다. 기운은 생명에 의지하는 것으로 淸濁을 이루나니, 맑으면 오래 살고 흐리면 쉬이 죽는다. 몸은 정기에 의지하는 것으로 厚薄을 이루나니, 두터움은 귀하고 엷음은 천하다.
참됨과 망녕됨이 서로 마주함에 세 갈래 길이 있으니, 가로대 느낌感과 숨쉼息과 부딪힘觸이라. 이 세 가지가 굴러 다시 열여덟 지경을 이루나니, 감정에는 기쁨과 두려움과 슬픔과 성냄과 탐냄과 싫어함이 있고, 숨쉼에는 맑은 기운과 흐린 기운과 찬 기운과 더운 기운과 마른 기운과 젖은 기운이 있으며, 부딪힘에는 소리와 빛깔과 냄새와 맛과 음탕함과 만짐이 있다.
뭇 사람들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넘쳐남과 모자람을 서로 섞어서 이 여러 상태의 길을 마음대로 달리다가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깨달은 이는 느낌을 그치고止感 숨쉼을 고르고調息 부딪힘을 금하여禁觸 오직 한 뜻으로 나아가 허망함을 돌이켜 참에 이르고 마침내 크게 하늘 기운을 펴니, 이것이 바로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다.
참전계경
고구려 고국천왕때 유명한 재상 을파소는 일찍이 묘향산맥중의 백운산중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 국조 단군(檀君) 성신(聖神)으로부터 하늘의 글(天書)을 얻게 되었다한다. 이 천서(天書)를 일러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 하였으니 참전(參佺)이라 함은「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됨을 꾀한다」는 뜻인 것이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조화경(造化經), 교화경(敎化經), 치화경(治化經)이라 하는 삼화경(三化經)이 있는데 단군왕검께서 참전계경 366훈으로 가르쳐 뭇 백성을 치화(治化)하셨던 것이니 참전계경을 치화경이라한다. 참전계경이 팔강령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팔리훈이라고도 한다.
<제 1 조>성(誠):정성이란 속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것이며, 본연의 성품을 지키는 것으로 육체(六體) 사십칠용(四十七用)이 있느니라.
誠者 衷心之所發 血性之所守 有六體四十七用. 성자 충심지소발 혈성지소수 유육체사십칠용.
제1장:성 - 1체:敬神 2體:正心 3體:不忘 4體:不息 5體:至感 6體:大孝
제 1 절 敬 神 (경신)
<제 2 조>경신(敬神):敬이란 지극한 마음을 다함이요, 神은 天神 즉 하느님(한얼님)이라. 해와 달과 별들과 바람과 비와 우레는 모습이 있는 하늘이요, 모든 것을 보지 않음이 없고 소리를 듣지 않음이 없는 것은 모습이 없는 하늘이라. 모습이 없는 하늘을 하늘의 하늘이라 하며, 하늘의 하늘은 곧 天神(하느님,한얼님)이니 사람이 하느님(한얼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하느님(한얼님)도 사람에게 응하지 않아 마치 풀과 나무가 비와 이슬과 서리와 눈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제 3 조>존봉(尊奉):尊이란 숭배함이요 奉이란 진실로 우러러 정성을 다함이라. 사람이 하느님(한얼님)을 우러러 높이 받들면 하느님(한얼님)께서도 사람에게 정기를 내려 주시나니 마치 갓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언 몸에 옷을 입혀 주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만약 정성이 없이 숭배만(모시기만,받들기만) 하면 귀머거리와 소경과 같아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느니라.
<제 4 조>숭덕(崇德):崇이란 하느님(한얼님)을 존경함이요, 德이란 하느님(한얼님)의 은덕이라. 하느님(한얼님)의 은덕은 가문 땅에 단비(넉넉한 비)가 내리고, 그늘진 골짜기에 따스한 봄볕이 드는 것과 같으니라, 잠시라도 하느님(한얼님)의 은덕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될 수 없고, 물건이 물건될 수 없나니, 그러므로 밝은이는 부지런히 힘써 하느님(한얼님)의 은덕을 칭송하느니라.
<제 5 조>도화(導化):導란 가리키어 이끄는 것이요, 化란 하느님(한얼님)의 조화라. 사람이 하느님(한얼님)의 조화를 모르면 하느님(한얼님)과 사람 사이의 이치에 어두워서 나의 타고난 성품이 어디서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며 또 내 몸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느니라. 이를 먼저 깨닫지 못한다면 다른 것을 깨달을 수도 없나니, 그러므로 밝은이는 마땅히 하느님(한얼님)의 조화를 펴서(알려서) 뒤 사람들을 인도해야 하느니라.
<제 6 조>창도(彰道):彰이란 밝힘이요, 道란 하느님(한얼님)의 바른 길(道)이니라. 사람이 이 바른 도를 따르면 요괴(妖怪)가 그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며 사특한 마귀가 그 간사함을 드러내지 못하느니라. 무릇 바른 길이란 중도(中道:중심의 길)(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는 길)이니 중심의 한 길(오직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는 한 길)을 그 표준으로 삼아 나아가면 한얼님의 도가 이내 밝게 나타나느니라.
<제 8 조>숙정(肅靜):肅이란 기운을 세움이요, 靜이란 마음을 정함이라 기운을 세우면 물욕이 일어나지 않으며, 마음을 정하면 하늘의 이치가 저절로 밝아 지나니 마치 햇빛 아래 걸어놓은 거울이 그늘지고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는 듯하느니라. 그러므로 기운을 엄숙히 세우고 마음을 고요히 정하여 하느님(한얼님)을 공경하면 능히 하늘에 계시는 신령(神靈신령)을 볼 것이니라.
<제 9 조>정실(淨室):淨室이란 하느님(한얼님)을 존귀하게 받들어 모신 곳을 말함이라. 높고 깨끗한 때를 가려서 비린내와 더러움을 금하고 시끄럽게 떠들지 말며 번거로운 형식을 갖추지 말아야 하느니라. 쓰는 그릇은 진귀하고 호화로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탕의 정결함이 제일 중요하느니라.
<제 10 조>택제(擇齊):擇(가린다)는 것은 지극한 정성의 행위이요, 齊(재계「齋戒」한다)는 것은 고요히 마음을 경계함(마음을 고요히 하여 조심함)이라. 비록 하느님(한얼님)께 (구하고자 하는 바 있어) 빌더라도 (희.구.애.노.탐.염의 6가지 감정에)칠정에 좌우되어 갑짜기 구한다면 이는 하느님(한얼님)을 모욕함이라. 그러므로 반드시 날을 가리고 마음을 고요히 경계하여 오직 한결같은 정성된 마음이 가슴속에 가득 서린 연후에 빌면 하느님(한얼님)께서 반드시 굽어 살피시느니라.
<제 12 조>정심(正心):正心(바른 마음)이란 본래 타고난 마음(天心)을 바르게 함이라. 마음에는 일곱 구멍이 있어 일곱 가지 감정(七感(七情))에 부림 받으면(휘둘리면), 하늘의 이치(天理)를 구하려 해도 얻을 수 없느니라. 만약 한 줄기 머릿골 영검이 홀로 우뚝 뚜렷이 선다면 밝은 햇빛이 구름과 안개를 걷고 넓은 바다 물결이 먼지(티끌)를 없애 버리듯 七感(칠정(七情))이 사라지느니라.
<제 13조>의식(意植):意(뜻)이란 마음에서 명령을 받음이요, 植 (심는다)은 뿌리를 심어 옮기지 않음이라. 뜻이 천심(天心:머리골 속에 내려와 있는 하느님의 성품)에 의해 명령받지 않고 사람의 가달된 욕심을 좇아 이리 저리 흔들리면, 온 신체가 오리혀 그 천심(天心)의 명령을 어기게 되어, 마침내 아무런 공도 거두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로 말미암아 그 뿌리까지 흔들리는 격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하느님(한얼님)이 주신 본래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뜻을 심을 마음의 밭을 평평히 잘 골라야만 이내 뜻(머리골 속에 내려와 계신 하느님의 성품)이 운행하느니라.
<제 14 조>입신(立身):立은 곧게 함이요, 身은 몸이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뒤에 몸을 곧게 하여 세상에 서야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번뇌와 고민이 연달아 일어나서 정신을 흩어지게 하고 기운을 쇠약해지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밝은이는 순수하고 당당하며 뭇 사람들은 잡되고 굽실(아첨)거리느니라.
<제 15 조>불혹(不惑):不惑이란 사물에 미혹(迷惑)되지 않음이라. 마음이 바르면 밝으므로(마음의 눈이 밝아져) 사물이 밝게 비추어져 그 추함과 아름다움, 섬세함과 엉성함이 저절로 나타나느니라. 내가 분별하기도 전에 스스로 밝음으로 인하여 사물을 먼저 알아내므로 어찌 미혹될 수 있으랴? 마음이 밝지 못하면 마치 겹겹이 쳐놓은 발에 가려있는 것과 같아서, 발 밖에서 달아나고 날아가는 것이 들짐승인지 날짐승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마침내 사물에 대해 의혹이 생기느니라.
<제 16 조>일엄(溢嚴):일(溢:넘친다)은 물이 가득 차서 넘친다는 것이요, 엄(嚴:엄숙하다)은 바르고 큰 기색이라. 하늘이 가을빛을 머금음으로써 숙연한 기운이 온 세상에 차고 넘치며, 사람이 바른 마음을 간직함으로써 엄숙한 기운이 한결같이 일어나서 그 위엄은 신령스러운 용과 같고, 그 모습은 우뚝 치솟은 산과도 같으니라.
<제 17 조>허령(虛靈):허(虛비었다)는 물건이 없음이요, 령(靈:신령하다)은 마음이 영검함을 이름이라. 비어서 영검한 이는 마음에 가리운 것이 없어 얼굴빛이 옥같이 아름답고 빈 가운데에서 이치와 기운이 생겨 크게는 천계(天界)를 두루하고 작게는 티끌에까지 미치나니, 그 이치와 기운은 비고도 신령한 것이니라.
<제 18 조>치지(致知):치지(致知:앎에 이른다)란 알지 못아는 것을 알아 깨달음이라. 마음을 바르게 하기를 끊임이 없이 하면 마음의 신은 앎을 주관하고, 마음의 영은 깨달음을 주관하여 소리를 들으면 신이 통하고 사물이 다가오면 영이 깨달아서 과거와 미래를 그 당시처럼 환히 알 수 있느니라.
<제 19 조>폐물(閉物):폐(閉:닫는다)란 열지 않음이요, 물(物)이란 사물이라. 마음은 일을 간직해 두는 곳간이요, 몸은 일을 행하는 중요한 기구이니라. 마음에 간직하고서 행하지 않으면 어찌 그 일을 이룰 수 있으랴? 마음을 열고 일으킴에 때가 있고 장소가 있나니 열되 때에 맞지 않고 행하되 장소에 맞지 않으면 하늘의 이치가 어두워지고 사람의 도가 뒤짚히느니라(엎어지느니라). 그러므로 밝은이는 사물에 대한 마음을 닫고, 열어서 행함에 신중하느니라.※마지막 문장 검토
<제 20 조>척정(斥情):척(斥:물리친다)이란 버림이요, 정(情)이란 정욕(情欲)이라. 기쁨과 노여움이 있으면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이 있으면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며, 편안함과 즐거움을 구하여도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고, 가난함과 천박함을 싫어해도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나니, 바른 마음을 얻으려면 먼저 정욕을 버려야 하느니라.
<제 21 조>묵안(默安):묵(默:잠잠하다)이란 오래 잠겨있음을 말함이요, 안(安:편안하다)이란 맑게 쉼이라. 오래 잠겨있음으로써 마음이 어지러워지려는 것을 경계하고 맑게 쉼으로써 마음이 번잡해지려는 것을 경계하면 흙탕물이 점점 맑아지듯 심하게 흐린물도 마침내 정화되느니라. 이것이 마음을 맑게하는 근원이니 맑은 마음은 바른 마음의 기초가 되느니라.
<제 22 조>불망(不忘):불망(不忘:잊지 않는다)이란 잊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천연적으로 잊혀지지 않음이라. 정성이란 도를 이루는 전체요, 만사를 이루는 큰 근원이니 천연적으로 잊혀지지 않고 마음 속에 간직한 그 정성이 참 정성이요, 한결같이 어김이 없음은 그 다음이니라.
<제 24 조>자기(自記):자기(自記:스스로 기억한다)란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억됨이라. 기억하려 함은 마음에 의지하여서 하는 것이지만, 저절로 기억됨은 마음에 의지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억됨이라. 도를 닦는 사람은 정성의 이치대로 정성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정성은 이미 머리와 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만 가지 생각이 갈라지더라도 굳게 가진 한결같은 생각은 오직 정성밖에 없느니라.
<제 26 조>재목(在目):재목(在目:눈에 있음)이란, 정성의 있는 곳을 (따로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항상 눈에 정성이 서려 있음이라. 눈으로 사물을 봄에, 물건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나, 다만 정성된 뜻이 눈에 있다면 가까운 물건의 이름은 모를지라도(가까이 사물의 겉모습은 보지 못할지라도) 먼 물건은 그림 보듯 훤하느니라.(깊이 사물의 본질은 훤히 보이느니라)
<제 27 조>뇌허(雷虛):뇌허(雷虛:우레같이 헛되다)란 정성의 마음이 오직 귀로 듣는 데에만 얽매이어 있으면 정성이 일어날 때에 비록 우레소리 같이 크게 일어나더라도 저절로 공허해져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느니라.
雷虛者 誠心 纏于耳聞 誠發之時 以雷聲之大 自虛而不聞也
뇌허자 성심 전우이문 성발지시 이뢰성지대 자허이불문야
<제 28 조>신취(神聚):神이란 정신(精神)이요, 취(聚:모으다)란 합침이라. 사람 몸의 모든 부분은 정신이 각각 지키는데 간이 하는 일에 폐가 참여하지 않고, 위가 하는 일에 콩팥이 참여하지 않느니라. 하지만 정성을 드리는 일에는 모든 정신(精神)들이 다 합쳐지나니 그 중 하나라도 없으면 정성을 이룰 수 없느니라.
<제 29 조>불식(不息):불식(不息:쉬지 않음)이란, 지극한 정성을 쉬지 않음이라. 쉬지 않는다는 것과 쉼이 없다는 것은 각자 다르나니, 그것이 도력(道力)의 떨치고 움츠러듦과 사람 욕심의 사라지고 자람에 있어서는 가는털끝만한 간격의 차이라도 하늘과 땅만큼한 큰 차이가 있느니라.
<제 30 조>면강(勉强):면강(勉强:힘써 굳세어짐,굳세어지는데 힘씀)이란,힘써서 스스로 강해짐을 말함이라. 스스로 강해짐이란, 잔 꾀를 이기고 나아가 갈림길목에서도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마침내 힘들여 이룩해냄이라. 힘써서 강해지면 정성의 뿌리가 깊고 단단해져서 강함을 다스리지 않아도 능히 강해지고, 억지로 어찌하고자 하지 않아도 능히 이루어지느니라.
<제 31 조>원전(圓轉):원전(圓轉:둥굴게 구른다)이란, 정성을 쉬지 않음이 마치 둥근 물건이 평탄한 땅에서 스스로 구르는 것과 같으니라. 멈추려 해도 되지 않고 느리게 하려 해도 되지 않으며, 빠르게 하려 해도 또한 되지 않나니 그저 몸체를 따라 스스로 굴러 나아가 쉬지 않느니라.
<제 32 조>휴산(休算):휴(休)는 쉬는 것이요, 산(算)은 헤아림이라.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 정성을 드리는 사람이 정성이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계산하여 그 동안에 혹 무슨 느낌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은 정성을 드리지 않음과 같으니라. 무릇 정성을 쉬지 않는 사람은 정성이 시작되는 해도 헤아리지 않으며, 또 정성이 끝나는 해도 헤아리지 않느니라.
( 휴 헐야 산 계야 유욕이위성자 첩계자기일 일흘우기시 억미유감여 차 여불성 동 부성지불식자 불산성지기년 우불산성지종년)
<제 33 조>실시(失始):실(失)은 잊음이요, 시(始)는 처음이라. 처음에 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 정성을 시작하여 차츰 깊은 경지로 들어가면 하고자 하는 바는 점점 적어지고 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커지며, 그리고 차츰 참 경지로 들어가면 하고자 하는 바는 없어지고 외직 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느리라.
<제 34 조>진사(塵山):진(塵)이란 티끌이라. 티끌이 바람에 날려 산기슭에 쌓여 해가 오래되면 마침내 한 산을 이루나니, 지극히 적은 흙으로 지극히 큰 언덕을 이루는 것은 바람이 쉼없이 티끌을 모았기 때문이니라. 정성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지극한 정성을 쉬지 않으면 정성의 산을 가히 이룰 수 있느니라.
( 진 진애야 진애수풍 적우산양 연구 내성일산 이지미지토 성지대지구자 시풍지구애불식야 성역여시 지불식칙성산 가성호)
<제 35 조>방운(放運):방(放)은 정성의 뜻을 넓힘이요, 운(運)은 정성의 힘을 움직임이라. 정성의 뜻을 쉬지않고 넓히면 캄캄한 밤에도 밝은 달이 뜨며, 정성의 힘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 한 손으로 만근을 들 수 있느니라. 비록 정성이 그렇다 하나 혹 정성의 뜻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거나, 정성의 힘이 부드러웠다 강했다 하게 되면 그 결과를 알 수 없느니라.
<제 36 조>만타(慢他):만(慢:게으름)은 마음에 있지 않음이요, 타(他:다르다)는 다른 일을 생각함이라. 마음의 일념이 오로지 정성에 있고, 정성의 일념이 오직 쉬지 않음에 있으면 다른 일에 대한 생각이 어찌 싹터 움직이리오. 그러므로 가난하고 천함이 그 정성을 게으르게 할 수 없으며 부유하고 귀함이 그 정성을 어지럽히지 못하느니라.
( 만 부존호심야 타 염외사야 심일념재호성 성일념재호불식칙념외사 안능맹동호 시이 빈천 불능권기성 부귀 불능란기성)
제 5 절 至 感 (지감)
<제 37 조>지감(至感):지감(至感:지극한 느낌)이란 지극한 정성으로 느끼고 응함에 이르름이라. 느끼고 응한다는 것은 하느님(한얼님)이 사람의 정성을 느껴 그것에 응답함이라. 사람이 가히 느낄 수 없는 정성이라면 하느님(한얼님)이 어찌 그 정성을 느끼며 사람이 응답할 수 없는 정성이라면 하느님(한얼님)이 어찌 그 정성에 응답하시랴. 그러므로 정성을 드리되 지극함이 아니면 정성이 없는 것과 같으며, 느끼되 응답함이 없으면 느끼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느니라.
<제 38 조>순천(順天):순천(順天:하늘의 이치에 따른다)이란 이치(天理)에 순응하여 정성을 드림이라. 천리(天理)를 알면서도 거슬러 비는 이가(하늘의 이치를 알면서 이치에 어긋난 것을 비는 이가) 혹 있는가 하면, 천리(天理)를 모르고 성급하게 비는 이(하늘의 이치를 모르고 빨리 응답해 달라고 비는 이)도 있나니, 이는 모두 하느님(한얼님)을 느끼게 하지 못하며, 그 응답을 받지도 못하느니라. 만약 응답을 받고자 한다면 천리(天理)를 따르고 거스르지 않으며 천리(天理)에 따르고 성급하지도 않아야 하느니라.
<제 39 조>응천(應天):응천(應天:天理에 응한다)이란, 하늘의 이치(天理)에 응하여 정성을 기름이라. 하느님(한얼님)께서 고통과 어려움을 주시더라도 달게 받아 정성을 다함에 어김이 없어야 하고 하느님(한얼님)께서 상서로운 복을 내려 주시면 오히려 두려워하여 정성을 다함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환란(患亂)이야 정성이 없는 곳에 돌아가지만 상서로운 복이 어찌 정성 아닌 곳에 속하리오.
<제 40 조>청천(聽天):청천(聽天:천명天命을 듣는다)이란, 하느님(한얼님)의 명령을 듣되 정성으로써 느끼고 응함이 있을 것을 기대하지 않음이라. 나의 정성이 반드시 하느님(한얼님)을 느끼게 함에 이르지 못했는데 어찌 응함이 있을 것인가 생각하여 더욱 오래하고 더욱 맑게하며 더욱 부지런히 하고 더욱 고요히 하며 도리어 정성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해야 하느니라.
<제 41 조>낙천(樂天):낙천(樂天)이란, 하느님(한얼님)의 뜻을 즐거워함이라. 사람에 대한 하느님(한얼님)의 뜻은 지극히 공평하시고 사사로움이 없으시나니, 나의 정성이 깊으면 하느님(한얼님)의 느낌도 깊으시고, 나의 정성이 얕으면 하느님(한얼님)의 느낌도 얕으시나니 스스로 하느님(한얼님)의 느낌의 깊이를 아는 것이 내 정성의 깊고 얕음을 아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점점 더 정성을 다할수록 점점 즐거운 것이니라.
<제 42 조>대천(待天):대천(待天:하느님(한얼님)을 기다린다)이란, 하느님(한얼님)께서 반드시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사람에게 느끼고 응함이 있음을 기다리는 것이라. 하느님(한얼님)의 응함을 기다리는 깊은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한얼님)을 믿는 정성도 없나니, 기다림도 무한하고 정성도 또한 무한해야 하느니라. 비록 하느님(한얼님)께서 느껴 은덕을 내리시더라도 스스로 하느님(한얼님)을 믿는 정성을 멈추지 말아야 하느니라.
<제 43 조>대천(戴天):대천(戴天:하늘을 머리에 인다)이란, 머리 위에 하늘을 이고 있음이라. 물건이 머리 위에 있으면 아주 가벼운 무게라도 느낄 수 있나니 하늘을 머리에 임에 마치 무거운 물건을 인 것처럼 하면 감히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거나 몸을 함부로 추스리지(흩트리지) 못하느니라. 하느님(한얼님)을 이와 같이 공경하여 받들면 그 정성된 뜻이 능히 하느님(한얼님)을 느끼고 응함에 이르게 할 수 있느니라.
<제 44 조>도천(禱天):도천(禱天)이란 하느님(한얼님)께 비는(원도하는) 것이라. 원도할 줄 모르는 이는 어렵다고 하여 어렵게 빌고, 쉽다고 하여 쉽게 빌지만(어렵게만 생각하여 원도를 잘 못하고, 쉽게 생각하여 원도를 가벼이 하지만), 원도할 줄 아는 이는 그렇지 않느니라. 쉽다고 하는 이는 쉽게 빌 줄만 알아서 정성이 자기 한 몸을 꿰뚫지 못하지만, 어렵다고 하는 이는 어렵게 빌 줄을 알므로 정성이 능히 하늘을 꿰뚫느니라. ※검토
<제 45 조>시천(恃天):시(恃)는 의지함이니 아랫 정성은 하느님(한얼님)을 의심하고, 중간 정성은 하느님(한얼님)을 믿으며 큰 정성은 하느님(한얼님)께 의지하느니라. 지극한 정성으로써 세상을 접하면 하느님(한얼님)이 반드시 도와 주시어 자연히 의지하는 바가 있게 되지만, 세상 사람들이 정성을 다함에 달리 험하고 괴이한 것을 행하니 어찌할 것인가?
<제 46 조>강천(講天):강천(講天)이란, 하느님(한얼님)의 도(天道)를 헤아림이라. 사람의 일이 순조로움은 하느님(한얼님)의 도에 화합함이요, 사람의 일이 막힘은 하느님(한얼님)의 도에 거스름이라. 사람 일의 순조롭고 막힘을 알아서 하느님(한얼님)의 이치에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한얼님)의 이치를 헤아려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그리하여 두려워하고 삼가 조심함을 마음 속에서 버리지 않는다면 그 정성된 뜻이 마침내는 하느님(한얼님)을 감동시키게 되느니라.
<제 47 조>대효(大孝):대효(大孝)란 지극한 효도라. 한 사람의 효도가 한 나라의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온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나니, 천하를 감동시킬 만한 지극한 정성이 아니고서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으리오(대효에 이르리요), 사람이 감동하면 하느님(한얼님)도 또한 감동하시느니라.
<제 48 조>안충(安衷):안(安:편안하다)은 화평함이요, 충(衷:속마음)은 마음과 정성이 지극함을 말함이라. 사람의 자제가 되어 부모의 마음을 편안히 하며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부모의 마음을 안정되게 하며 부모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면 곧 상서로운 구름이 방에 가득하고(집을 감싸고),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뻗치느니라.
<제 49 조>쇄우(鎖憂):잠근다 함은 닫음을 말함이요, 근심이란 즐거운 일이 아님이라. 부모가 근심이 있으면 자식은 마땅히 이를 없애서 화평하게 하고, 그 근심이 있은 뒤에 이를 없게 함에는 근심될 말을 부모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하며, 설혹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형세에 따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직 지극한 정성으로 할지니라.
<제 50 조>순지(順志):순(順:순하다)은 화평함이요, 지(志:뜻)란 뜻(의) 기운을 말함이라. 부모의 뜻(의 기운)은 저마다 다르니, 자식이 그 부모의 뜻을 알지 못하면 부모도 뜻을 얻지 못하여, 비록 몸과 집안의 좋고 즐김을 다할지라도 항상 불평(화평하지 못)하는 기운이 있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큰 효도를 하는 자식은 능히 그 부모의 뜻을 순(화평)하게 하느니라.
<제 51 조>양체(養體):양체(養體)란 부모의 몸을 봉양함이라. 부모님의 몸이 건강하다 하더라도 마땅히 봉야해야 하는데 하물며 잔병이 있거나, 중병이 있으심에랴. 잔병이 있으시면 성한 몸처럼 편안하게 해드리고, 중병이 있으시면 남은 증세가 말끔히 없어지도록 해드린 연후에야 사람의 자식으로서 효를 다하는 것이 되느니라.
養體者 養父母之體也. 父母之肢體在健康 猶適宜奉養 況或有殘疾 或有重梯乎. 使殘疾 安如完體 (重梯:안) 無遺術然後 可盡人子之孝矣.(번역된 부분이 원문보다 완전하고 원문이 일부 빠진
<제 52 조>양구(養口):양구(養口)란 부모님의 입에 맞도록 봉야함이라. 부유하여 진수성찬을 드리더라도 남에게 맡겨서 하면 봉양함이 아니니 가난해서 물고기를 잡고 나물을 캐는 수고를 하더라도 손수 봉양해야 하느니라. 그렇지 않으면 부모님의 식성을 모르게 되어 그 즐기시는 것을 버리게 되고 알맞게 조리해 그리는 것을 어기게 되나니, 비록 육지와 바다에서 나는 온갖 음식을 다 드린다해도 잡수시면서 만족하시지 않느니라. 큰 효도를 하는 자는 봉양할 줄을 알아서 다섯 가지 맛을 식성에 맞도록 해드리고 사계절에 제 철이 아닌 음식을 해드림은 실로 하느님(한얼님)께서 감동하시느니라.
<제 53 조>신명(迅命):신(迅)은 빠름이요, 명(命)은 부모님의 명령이라. 부모님의 명령이 계시면 자식은 반드시 받들어 행할 것이라. (그러나 부모님의 명령은 인자하고 자애로운 명령이기에 嚴托督囑) 부모님의 명령이 자애로움이 있는 것 같지 않다하여 선후(先後)를 뒤바꾸거나 완급(緩急)이 적당함을 잃으면 비록 입으로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모님의 마음에는 달리 생각하심이라. 그러므로, 큰 효도를 하는 사람은 부모님의 명령에 따르고 어김없이 행하느니라.
<제 54 조>망형(忘形):망형(忘形)이란 자기 모습을 잊음이라. 자식이 부모님을 섬기되 감히 자기 몸 있음을 생각지 않는 것은 부모님 은혜에 깊이 보답함이니라. 오직 그것을 알아서 자기 몸을 감히 생각하지 말아야 하나니, 자기 몸을 잊지 않는 것은 도리어 자기 몸을 아직 생각하는 것이니라. 큰 효도를 하는 이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언제나 자기 몸을 잊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자기 몸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느니라.
<제 58 조>공렴(公廉):공(公)은 치우치지 않음(공평)이요 렴(廉)은 깨끗함이라. 공으로써 일을 보면 사랑과 미움이 없고 깨끗함(高潔)으로써 물건을 대하면 사사로운 욕심이 없나니, 사랑과 미움이 없으면 사람들이 그 의로움에 순종하고 사욕이 없으면 사람들이 그 깨끗함을 믿느니라.
<제 59 조>석절(惜節):사람에게 의로움이 있다 함은 마치 대나무에 마디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대나무가 불에 타면 마디에서 소리가 나고 몸은 재가 될지라도 마디는 재가 되지 않나니, 의로움이 어찌 이와 다를 수 있으랴. 사람이 절개를 아끼는 것은 절개를 무너뜨림으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잃을까 두려워서이니라.
<제 63 조>허광(虛?):虛?이란 헛된 말로 사람을 속임이라. 바른 사람이 나를 믿으면 나도 그 사람을 믿으며 바른 사람이 나에게 의로우면 나도 또한 그에게 의로워야 하고, 바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나는 마땅히 그 어려움을 구해야 하느니라. 속여서도 아니되고 한갓 헛된 말로써 이룰 수도 없나니 작은 절개를 버리고 신의를 온전히 한다면 밝은이는 나무라지 않으리라.
<제 66 조>약(約):약속이란 믿음의 좋은 매개요, 믿음의 엄한 스승이며, 믿음의 근원이자 믿음의 영혼이니라. 매개체가 없으면 합치지 못하고, 스승이 아니면 꾸짖지 못하며, 물의 근원이 없으면 흐르지 못하고, 영혼이 없으면 (태어날)살 수 없느니라.(정기가 없으면 태어날 수)
<제 69 조>속단(續斷):續斷이란 장차 끊어질 약속을 이음이라. 바르고 큰 약속이 서게 되면, 간사한 이가 이를 막아 농간함으로써 한 쪽으로 의심을 품어 약속이 장차 끊어짐에 이르더라도, 밝은이는 정성과 믿음으로써 의혹을 풀고 깨우쳐 자연스레 처음으로 돌아가 그 약속을 계속 이어 가느니라.
<제 70 조>배망(排忙):排忙이란 바쁨을 물리치고 초연히 약속에 임함이라. 사람이 믿음으로 성품을 지키면 일에 질서가 있고, 이치에 어긋남이 없으므로 스스로 바쁘다고 해서 약속을 어기는 일은 없느니라. 혹 생각에 막힘이 있더라도 마치 달이 지나가는 구름을 꿰뚫는 것과도 같으니 믿음이 적은 사람은 애써 고생한 뒤에라야 약속을 이루느니라.
<제 72 조>천패(天敗):天敗란 사람이 약속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얼님)께서 약속을 무너뜨리는 것이라. 하느님(한얼님)이 무너뜨림으로 인해 약속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면 하느님(한얼님)의 소리를 듣고 그만 둘 것인가 하느님(한얼님)께 아뢰고 다시 할 것인가. 큰 약속은 하느님(한얼님)의 명령을 듣고 따르며, 작은 약속은 하느님(한얼님)께 아뢰어 하느니라.
<제 73 조>재아(在我):약속의 이룸도 나에게 달려 있고 약속의 이루지 못함도 나에게 달려 있느니라. 어찌 남이 권한다고 약속을 이행하며, 남이 좋지 않게 말한다고 그만 두리오.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음도 나에게 달려 있고,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을 곧이 듣지 않음도 또한 나에게 달려 있나니, 그렇게 한 다음에라야 믿음의 힘이 큰 줄을 알게 되느니라.
<제 74 조>촌적(忖適):촌(忖)이란 미루어 헤아림이요, 적(適)은 마땅함이라. 찬 것으로써 더움을 기약할 수 없고, 약함으로써 강함을 기약할 수 없으며, 서먹함으로써 친근함을 기약할 수 없고, 가난함으로써 부유함을 기약할 수 없지만, 비록 차고 약하고 서먹하고 가난하다 할지라도, 능히 따뜻하고 강하고 친근하고 부유한 것에로 온전히 기약할 수 있는 것은 그 믿음과 정성이 서로 알맞음으로 미루어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니라.
<제 75 조>하회(何悔):이로움을 위하여 악속을 어기면 비록 이롭기는 하지만 믿음이 없어지며, 사랑을 꾀하여 약속을 어기면 비록 사랑은 얻을지라도 믿음이 없어지느니라. 이미 믿음이 없으면 이로움도 얻지 못할 수도 있고 사랑도 또한 얻지 못하나니 장차 뉘우치게 되느니라.
<제 76 조>찰합(?合):?合이란 평평하게 깎여진 나무(平木之具)가 서로 합쳐짐이라. 한 사람이 믿음을 높이 받들면 한 나라가 그 믿음을 우러르고(믿음으로 환해지고), 한 사람이 몸을 곧게하여 세상에 서면 천하가 그 믿음을 따르나니, 큰 기약은 마치 평평한 나무가 서로 합쳐짐으로 그 사이에 한 방울의 물도 새어들지 못하고 가는 티끌 하나도 능히 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제 79 조>담중(擔重):擔重이란 중요한 일을 부담함이라.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몸에 맡은 직책으로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을 때 천지의 기운과 돌아가는 운수를 잘 헤아려 순하고 거스르는 이치에 따를 것이며 온 재주와 지혜를 다하여 번성하고 쇠하는 도를 알아 대처해야 하느니라.
<제 80 조>영명(榮命):榮命이란 임금님의 명령을 빛나게 함이라. 외국의 손님을 맞이하여서는 부드럽게 회유하여 교섭하고, 나라밖에 나가서는 잘 분별하여 대처함으로 위기를 막아야 하나니, 충성된 마음이 날로 빛나게 하고, 기운은 서리발과 같이 위엄있게 가져 임금님의 명령을 천하에 널리 떨쳐야 하느니라.
<제 83 조>무신(無身):無身이란 임금님께 몸을 바침으로써 자기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함이라. 임금의 명령이 있으면 괴로운 것이라도 사양하지 말아야 하며, 편안하고 즐거울 때에도 근심있을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마음이 항상 튼튼하여 그 튼튼함이 점차 쇠약해지는 줄을 몰라야 하며 마음이 늙지 않아서 늙음이 장차 오게 됨도 몰라야 하느니라.
<제 84 조>열(烈):烈이란 열부(烈婦) 즉 절개가 굳은 아내이니 열부는 그 남편에게 절개를 지켜 목숨을 잇는 이도 있고 남편의 뒤를 따라 삶을 버리는 이도 있나니라. 혹 초혼이든 혹은 재혼이든(처음에 잘 맞게 가는 이나 혹은 재가하더라도) 그 도는 오직 남편에 대한 믿음에 있나니라.
<제 87 조>사고(嗣孤):嗣孤란 유복자(遺腹子)를 보존하여 남편의 뒤를 잇게 함이라. 인륜은 대(자손)를 잇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신의는 유복자를 보존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사람 일의 윤리와 신의를 지키고 천리(天理)의 바른 법도를 쫓아서 살아야 하느니라.(사람의 윤리 의리를 버리고????? 하늘의 섭리에 따른 올바른 길을 따라야 하느니라)
<제 89 조>닐구(?仇):?仇(원수를 친하게 하다)란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으면 아내는 마땅히 그 원통함을 갚아 씻어 주어야 하나니, 그 일이 오래되지 않아 원수되는 자가 뉘우치고 스스로 찾아와 용서를 구할 때 사랑으로 용서하여 도를 이룬다면 밝은이도 그것을 어여삐 여기느니라.(남편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세상을 떠나면, 아내는 마땅히 그 치욕을 벗겨드려야 하는 것이요, 원수되는 이가 스스로 와서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자세히 밝혀 바른 도를 이룬다면 밝은이도 이를 어여삐 여기리라.)
<제 94 조>덕망(德望):德은 성덕(聖德:성인의 덕)이요, 望은 인망(人望)이라(사람들의 우러름이라). 성인의 덕은 소리가 없으나 미치는 곳마다 사람들의 우러러 봄이 있나니, 이는 하늘의 윤회(섭리)가 소리는 없으나 다하는 곳마다 만물의 모습이 있는 것과 같으니라. 德은 우러러 보지 않음이 없고 윤회(섭리)는 반드시 만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사람의 믿음이 하늘의 믿음과 같음이니라.
<제 95 조>무극(無極):無極이란 두루 돌아서 다시 처음의 원기(元氣)로 되돌아옴을 말함이라. 천체의 움직임이 그치고 쉼이 있다면 하늘의 이치가 이내 멸하리니, 사람이 믿음을 기름도 또한 끊임없이 다시 비롯하는 무극(無極)의 원기(元氣)와도 같아서 만일 털끝만치라도 끊임이 허용된다면 사람의 도가 폐(廢)하리라.
사랑이란 자비한 마음에서 자연히 일어나는 것이며, 어진 성품의 가장 근본적인 성질이 되는 것이니, 이에는 6범(範)과 43위(圍)가 있느니라.
1범 서(恕) 2범 용(容) 3범 시(施) 4범 육(育) 5범 교(敎) 6범 대(待)
제97조 (1범) 서(恕) : 용서함
용서란 사랑하는 마음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자비한 마음에서 일어나며, 어진 마음에서 결정하고, 참지 못하는 마음에서 참는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니라.
1위 유아(幼我) 2위 사시(似是) 3위 기오(旣誤)
4위 장실(將失) 5위 심적(心蹟) 6위 유정(由情)
제98조 유아(幼我) : 남을 나와같이 생각함
유아는 남을 나와 같이 생각함이니, 내가 춥고 더우면, 남도 춥고 더운줄 알고, 내가 배 고프면, 남도 또한 배 고픈줄 알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남도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제99조 사시(似是) : 그러한 것 같음
사시는 옳은 것 같으면서 그르고, 그른 것 같으면서 옳은 것이니, 사랑은 무엇이든 만물을 포용할지언정 만물을 내뱉지는 않나니, 가까운 것은 백가지가 옳고, 먼 것은 쉰가지도 그르다 할때, 가까운 것은 끌어 인도하고, 멀리있는 것은 물리치지 않는 것이 마땅하느니라.
제100조 기오(旣誤) : 이미 잘못을 앎
기오라 함은 잘못을 알고도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이니, 그릇된 길로 달려감을 힘써 돌이키게 하여 처음 자리인 진실한 길에 바로 서게 하면, 그 공이 바다를 헤엄쳐서,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 보다 더 현명하니라.
제101조 장실(將失) : 장래욕심으로 바른이치를 잃음
장실은 장차의 욕심 때문에 바른 이치를 잃음이니, 절름발이가 중간에 머물러, 미치지 못하는 것을 능하지 않다고 하면 옳으나, 내닫는 사람이 지나친 것을, 능하지 않다고 하면 옳지 않나니, 미치지 못하거나 지나침은, 그 잘못이 비록 같다 하겠으나, 중간에서 머무는 사람은 깨우쳐 주어야 하며, 지나치게 내닫는 사람은 손짓하여, 목적한 곳으로 불러야 하느니라.
제102조 심적(心蹟) : 마음의 표적
심적은 겉은 착하고 속은 악하여, 들어내고 숨기는 것이 나타나지 않으나, 밝은이는 오히려 이를 알아보느니, 물은 그 원천을 막으면 넘쳐 흐르고, 풀은 그 뿌리를 끊어 버리면 잎이 떨어지나니, 이것은 자연에서 본받을 용서의 법칙이니라.
제103조 유정(由情) : 정이 울어남
유정은 여러가지 정이 어찌할 수 없이 울어남이니라. 놀라는 것은 뉘우침이며, 슬퍼하는 것은 진정시키는 것이다. 그런줄을 알지 못하다가 알게 되고, 그러함을 알아서 행하게 되는 것에 따라, 용서의 가볍고 무거움이 있느니라.
제104조(2범) 용(容) : 받아들임
용이란 만물을 용납함, 즉 받아 들임이니, 만리의 바다에는 만리의 물이 흘러 들어가고, 천길의 산에는 천길의 흙이 실렸다. 그러므로 바닷물이 넘치는 것도 용납이 아니며, 높은 산이 무너지는 것도 용납(容納)이 아니니라.
고연은 인간의 이치는 늘 불변한 것이니, 자기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은, 하늘 이치에 있어서는 좋은 운을 잃으며, 하늘의 도에 있어서는 바름을 잃는다, 그러므로 잣벌레는 돌 위에 오르지 아니하며, 꿩는 공중을 날지 않으려 하나니, 이것은 자기분수를 알고, 현실을 받아드리는 용납(容納)의 시초이니라.
제106조 정외(情外) : 뜻 밖의 일
정외는 진실로 뜻하지 않은 것이라. 조각배가 회오리 바람을 만나면, 그 누가 판자조각에 의지하지 않으며, 큰 누각에 불이 나면, 그 누가 뛰어 내리지 않으랴. 회오리 바람을 만나고, 불이 나는 것은 뜻밖의 일로서, 판자조각에 의지하거나, 뛰어 내린다는 것은, 인간이 위기를 받아 들임이니라.
제107조 면고(免故) : 죽음을 벗어남
면고는 죽을 일을 행하고, 행하지 않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잘못 인도하고 그릇되게 권고하는 사람은, 한되로 한말의 분량을 채우라는 것과 같으니, 성품이 편협하며, 성품이 허망하며, 성품이 가볍고 조급하여,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진실하다고 하는 사람은, 큰 관용(寬容)하는 마음이 있어야 살아가느니라.
제108조 전매(全昧) : 어둠에 빠짐
전매는 전혀 사람의 천성과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어둠에 빠짐이라. 신령한 성품은 하늘의 이치를 간직하고, 하늘의 이치는 사람의 도리를 간직하고, 사람의 도리는 정욕을 감추었나니, 그러므로 정욕이 심한 사람은 사람의 도리가 무너지며, 하늘의 이치가 잠기고, 신령한 성품이 파괴된다. 편안함을 이루고 혼돈을 막으면, 스스로 용납함을 깨닫느니라.
제109조 반정(半程) : 중도에서 그침
반정은 중도에서 그침이니, 착하고 착하지 않은 사이에서 중립하여, 나아감도 물러감도 없는 사람은, 능히 착한 것도 깨달으며, 착하지 못한 것도 깨달으니, 만물의 이치는 용납할 수 있으되, 성품의 이치는 용납할 수 없나니, 그러나 만물의 이치가 스스로 쇠하는 것을 주의하면, 성품의 이치도 스스로 성대하게 될 것이니, 용납이란 주의함에 있느니라.
제110조 안념(安念) : 생각을 안일하게 함
안념은 안일한 생각을 너무 크게 하면, 성품이 소멸될 것이며, 너무 작으면 능히 뜻이 소멸되나니, 성품과 뜻이 함께 소멸하면, 그 존망(存亡)을 분별하기 어렵게 되느니라. 사람이 이를 깨닫고도 안일한 생각의 크고 작은 마음의 불꽃으로 몸을 태운다면, 그러고도 용납을 바라랴. 그것을 용납할 자는 누구냐.
제111조 완급(緩急) : 급하고 느림
완이란 느린 지경을 말하며, 급이란 급한 지경이니, 급한 지경에서의 재앙은, 사람이 혹 용납할 수 있으되, 느린 지경에서의 재앙은 사람이 용납하지 못하느니라.
제112조 (3범) 시(施) : 베풀다
베품이란 굶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 구조하는 것이 며, 또한 덕을 펴는 것이니, 굶는 사람에게 곡식을 주어 궁핍을 구제하며, 덕을 펴서 성품의 이치를 밝혀야 하느니라.
원희는 사람의 천성이 원래 사람을 사랑하고, 베푸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이니, 인간이 하늘이치에 배반하여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고독하여 지며, 베푸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면 비천하게 되느니라.
제114조 인간(認艱) : 어려움을 인정함
인간이라 함은 남의 어려움을 자기가 당한 것처럼 생각함이니, 남에게 급한 어려움이 있으면 방도를 다하여 정성스러이 구해주어야 한다. 이는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와 같이 하는데 있느니라.
제115조 긍발(矜發)
긍발은 자비로운 마음은 천하고 소원함이 없으며, 또 착하고 악함을 따지지 않고, 다만 불쌍한 것을 보면 일어나는 자비로운 맘을 뜻하니, 이러므로 사나운 짐승이 사람에게 의지하려고 오더라도, 또한 이를 구해 주어야 하느니라.
제116조 공반(公頒)
공반은 온 천하에 바른도리를 널리 베푸는 것이니라. 한번 착함을 펴면 천하가 착한 데로 향하며, 한번 착하지 못한 것을 바로 잡으면 천하가 허물을 고치나니, 한 사람이라도 착하지 않으면, 도가(道家)의 허물이니라.
제117조 편허(偏許)
편허는 위급함은 구원하여 주고, 넉넉함은 돕지 않음이라. 베품이 방술을 겸하면, 사랑 가운데 더 사랑이 있으며, 자비로움 가운데에 더 자비로움이 있고, 어진 가운데에 더 어짐이 있으니, 넓게 통하면 베품이 합당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제118조 균련(均憐)
균련은 멀리 있는 남의 어려움을 들으면, 눈앞에 보듯하고, 모진 곤궁이 아니라도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느니라.
하늘이 비를 곡식에 내림에, 가라지에도 비를 내리지 않을 이치가 있으랴. 고루 베푸는 것도 비에 젖는 것과 같으니라.
제119조 후박(厚薄)
후란 지나치지 않는 것이며, 박이란 부족하지 않음이라. 베품이 적당한 량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잔으로 해갈도 물리치지 못할 것이니, 고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면 반드시 고르게 하고, 간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면 반드시 간략하게 할지니라.
제120조 부혼(付混)
부혼은 남에게 베풀고도 그 갚음을 바라지 않는 것이니, 사랑하는 마음에서 움직이고, 자비로운 마음에서 일어나며, 어진마음에서 결정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베푸는 대로 잊어버려서, 스스로 공덕(功德)으로 여기는 뜻이 없어야 하느니라.
제121조 (4범) 육(育) : 기술을 가르처 기름
육이란 기술을 가르처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 기름이라. 사람은 일정한 기술의 가르침이 없으면, 그물에 벼리를 달지 않은 것과 같으며, 옷에 깃을 달지 않은 것과 같아서, 제각기 자기 주장만을 세워 분잡을 이루나니, 이로 말미암아 일정한 기술을 가르처 자기주장을 삼도록, 사람들을 보호하여, 길러야 하느니라.
업이란 사람이 생활을 유지해 가는 방법을 말함이라. 사람의 타고난 성품의 이치는 비록 같으나, 성품의 질과 기운은 같지 않아서, 억세고 부드럽게, 강하고 약하게, 행하여 가는 길이 각기 다르니, 기술을 가르처 크게 행하게 하면, 성품의 질을 윤택하게 하고, 성품의 기운을 안정되게 하여, 비록 굴속을 처소로 하고, 둥지에 살더라도 스스로 그 직업만은 번영하게 되느니라.
제123조 보산(保産) : 산업을 보호함
보산은 산업을 경영함에 실패하지 않음이라, 마음을 굳게하고, 뜻을 단단히 세워, 함부로 물건을 팔고, 사지 말아야 하며, 한 산업을 오래 계속하면 밝게 통하게 되어, 날로 진흥(進興)하여지며 축소됨이 없으므로, 능히 그 산업을 보전할 것이니라.
제124조 장근(奬勤) : 근면함을 장려함
장근은 사람이 근면하도록 권장하여 길러 나아감이라. 사람은 기술을 가르처 기르면, 기술을 가진 기능자가 되나니, 비유하건대 봄철의 만물이 점점 자라 감과 같고, 먼지 낀 거울을 닦으면 만물이 비추는 것과 같으니라.
가장 오래된 천부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일 뿐 아니라 유불선과 음양오행, 그리고 주역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우리 민족만의 경전일 뿐 아니라 전체동양의 경전이며, 세계인의 경전이다.
이 천부경은 원래 환인시절부터 있다가 훗날 환웅에게 전해진 삼부인 세 개 중의 하나인 거울(용경)에 새겨졌던 것인데 환웅천황이 백두산 기슭에 신시를 개국한 다음 백두산 동쪽에 큰 비를 세우고 거기에 글로 새겨 훗날 통일신라시대까지 전해져 왔던 것이다.
이 비에 새겨진 천부경은 우리민족의 옛글자(훗날 훈민정음의 모체가 됨)인 가림다로 새겨진 것이어서 후세사람들이 판독치 못하다가 통일신라 시대에 해동공자로 추앙받았던 당대의 세계적 석학인 최치원이 백두산을 찾았다가 이 비석에 세겨진 글을 읽고 한자로 번역해서 전하는 것이 바로 여든한 글자의 천부경이다.
이 여든 한글자로 우주의 법칙 모두를 압축해 담은 번역문을 볼때 에 최치원의 학식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옛 환인천제 시대의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이 천부경을 계송하여 낭독해 왔건마는 단락구분조차 틀리니 이걸 노래로 운률에 맞추어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하나에서 나오고 하나에서 비롯되나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여지기 이전의 하나이며 본래부터 있어 온 하나이다.
하나는 하늘과 땅과 사람 세 갈래로 이루어져 나오지만 그 근본은 변함도 없고 다함도 없다. 하늘의 본체가 첫 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을 바탕으로 땅의 본체가 두 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과 땅을 바탕으로 사람의 본체가 세 번째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변함 없는 하나가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의 순서로 완성되면서 새로운 하나를 이룬다. 이 새로운 하나는 한정도 없고 테두리도 없다.
이 새로운 하나가 바로 형상화된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과 형상화된 하늘 땅 사람이 어울리면서 음과 양, 겉과 속, 안과 밖이 생겨난다.
하늘에는 밤과 낮이 있고 땅에는 물과 뭍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남녀가 있어서 이 둘의 조화를 통해 천지는 운행을 하고 사람과 만물은 성장 발달해 나간다.
이렇듯 하늘과 땅과 사람이 원래 근본 상태, 형상화되기 이전의 상태, 형상화된 상태, 형상화되기 이전과 형상화된 상태가 어울려 작용하는 상태, 이 네 단계를 거쳐 우주만물이 완성되나 우주 만물은 본래 따로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다.
이렇게 하나가 묘하게 피어나 우주 만물이 형성되며 그 쓰임은 무수히 변하나 근본은 다함이 없다.
마음의 근본과 우주 만물의 근본이 하나로 통할 때 일체가 밝아진다.
이렇게 마음을 밝힌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 들어가 있다.
우주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에서 끝이 나지만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의 하나이며 끝이 없는 하나이다.
삼일신고
1.하늘에 대한 가르침
저 파란 창공이 하늘이 아니며 저 까마득한 허공이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얼굴도 바탕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위아래 둘레 사방도 없고, 비어 있는 듯하나 두루 꽉 차 있어서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무엇이나 싸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근본 자리에 계시며, 큰 사랑과 큰 지혜와 큰 힘으로 하늘을 만들고 온누리를 주관하여 만물을 창조하시되 아주 작은 것도 빠진 게 없으며 밝고도 신령하여 감히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언어나 생각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다고 해서 그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통해 하느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너의 그 머리 속에 이미 와 계시리라.
끝없이 널린 저 별들을 보라. 이루 셀 수가 없으며 크기와 밝기가 다 다르다. 하느님께서 온누리를 창조하시고, 우주 전체에 걸쳐 수백 세계를 거느리고 있으니, 너희 눈에는 너희가 살고 있는 땅이 제일 큰 듯하나 한 알의 구슬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온누리를 창조하실 때 중심의 거대한 기운 덩어리가 폭발하여 무수한 별들이 생겨나고 바다와 육지가 이루어져 마침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하느님께서 기운을 불어 넣어 땅속 깊이까지 감싸고 햇빛과 열로 따뜻하게 하여 걷고 날고 허물벗고 헤엄치고 흙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사람과 우주 만물은 다 같이 근본이 되는 하나에서 나왔으며, 이 하나가 세 가지로 표현되는 것을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본성과 생명과 정기이다. 사람은 이 세 가지를 온전하게 받으나 만물은 치우치게 받는다.
참 본성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가장 밝은 지혜上哲 로서 두루 통하여 막힘이 없고, 참 생명은 밝음도 흐림도 없으니 다음 가는 밝은 지혜中哲로서 다 알아 어리석음이 없으며, 참 정기는 두터움도 엷음도 없으니 그 다음 지혜不哲로서 만 가지 기틀을 잘 지켜 이지러짐이 없다. 따라서 누구나 근본이 되는 하나로 돌아가면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뭇 사람들은 미혹된 곳에서 세 가지 망녕됨이 그 뿌리를 내리나니 가로대 심心과 기氣와 신神이라. 마음은 본성에 의지하는 것으로 善惡을 이루나니, 착하면 복이 되고 악하면 화가 미친다. 기운은 생명에 의지하는 것으로 淸濁을 이루나니, 맑으면 오래 살고 흐리면 쉬이 죽는다. 몸은 정기에 의지하는 것으로 厚薄을 이루나니, 두터움은 귀하고 엷음은 천하다.
참됨과 망녕됨이 서로 마주함에 세 갈래 길이 있으니, 가로대 느낌感과 숨쉼息과 부딪힘觸이라. 이 세 가지가 굴러 다시 열여덟 지경을 이루나니, 감정에는 기쁨과 두려움과 슬픔과 성냄과 탐냄과 싫어함이 있고, 숨쉼에는 맑은 기운과 흐린 기운과 찬 기운과 더운 기운과 마른 기운과 젖은 기운이 있으며, 부딪힘에는 소리와 빛깔과 냄새와 맛과 음탕함과 만짐이 있다.
뭇 사람들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넘쳐남과 모자람을 서로 섞어서 이 여러 상태의 길을 마음대로 달리다가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깨달은 이는 느낌을 그치고止感 숨쉼을 고르고調息 부딪힘을 금하여禁觸 오직 한 뜻으로 나아가 허망함을 돌이켜 참에 이르고 마침내 크게 하늘 기운을 펴니, 이것이 바로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다.
참전계경
고구려 고국천왕때 유명한 재상 을파소는 일찍이 묘향산맥중의 백운산중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 국조 단군(檀君) 성신(聖神)으로부터 하늘의 글(天書)을 얻게 되었다한다. 이 천서(天書)를 일러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 하였으니 참전(參佺)이라 함은「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됨을 꾀한다」는 뜻인 것이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조화경(造化經), 교화경(敎化經), 치화경(治化經)이라 하는 삼화경(三化經)이 있는데 단군왕검께서 참전계경 366훈으로 가르쳐 뭇 백성을 치화(治化)하셨던 것이니 참전계경을 치화경이라한다. 참전계경이 팔강령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팔리훈이라고도 한다.
<제 1 조>성(誠):정성이란 속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것이며, 본연의 성품을 지키는 것으로 육체(六體) 사십칠용(四十七用)이 있느니라.
誠者 衷心之所發 血性之所守 有六體四十七用. 성자 충심지소발 혈성지소수 유육체사십칠용.
제1장:성 - 1체:敬神 2體:正心 3體:不忘 4體:不息 5體:至感 6體:大孝
제 1 절 敬 神 (경신)
<제 2 조>경신(敬神):敬이란 지극한 마음을 다함이요, 神은 天神 즉 하느님(한얼님)이라. 해와 달과 별들과 바람과 비와 우레는 모습이 있는 하늘이요, 모든 것을 보지 않음이 없고 소리를 듣지 않음이 없는 것은 모습이 없는 하늘이라. 모습이 없는 하늘을 하늘의 하늘이라 하며, 하늘의 하늘은 곧 天神(하느님,한얼님)이니 사람이 하느님(한얼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하느님(한얼님)도 사람에게 응하지 않아 마치 풀과 나무가 비와 이슬과 서리와 눈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제 3 조>존봉(尊奉):尊이란 숭배함이요 奉이란 진실로 우러러 정성을 다함이라. 사람이 하느님(한얼님)을 우러러 높이 받들면 하느님(한얼님)께서도 사람에게 정기를 내려 주시나니 마치 갓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언 몸에 옷을 입혀 주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만약 정성이 없이 숭배만(모시기만,받들기만) 하면 귀머거리와 소경과 같아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느니라.
<제 4 조>숭덕(崇德):崇이란 하느님(한얼님)을 존경함이요, 德이란 하느님(한얼님)의 은덕이라. 하느님(한얼님)의 은덕은 가문 땅에 단비(넉넉한 비)가 내리고, 그늘진 골짜기에 따스한 봄볕이 드는 것과 같으니라, 잠시라도 하느님(한얼님)의 은덕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될 수 없고, 물건이 물건될 수 없나니, 그러므로 밝은이는 부지런히 힘써 하느님(한얼님)의 은덕을 칭송하느니라.
<제 5 조>도화(導化):導란 가리키어 이끄는 것이요, 化란 하느님(한얼님)의 조화라. 사람이 하느님(한얼님)의 조화를 모르면 하느님(한얼님)과 사람 사이의 이치에 어두워서 나의 타고난 성품이 어디서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며 또 내 몸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느니라. 이를 먼저 깨닫지 못한다면 다른 것을 깨달을 수도 없나니, 그러므로 밝은이는 마땅히 하느님(한얼님)의 조화를 펴서(알려서) 뒤 사람들을 인도해야 하느니라.
<제 6 조>창도(彰道):彰이란 밝힘이요, 道란 하느님(한얼님)의 바른 길(道)이니라. 사람이 이 바른 도를 따르면 요괴(妖怪)가 그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며 사특한 마귀가 그 간사함을 드러내지 못하느니라. 무릇 바른 길이란 중도(中道:중심의 길)(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는 길)이니 중심의 한 길(오직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는 한 길)을 그 표준으로 삼아 나아가면 한얼님의 도가 이내 밝게 나타나느니라.
<제 8 조>숙정(肅靜):肅이란 기운을 세움이요, 靜이란 마음을 정함이라 기운을 세우면 물욕이 일어나지 않으며, 마음을 정하면 하늘의 이치가 저절로 밝아 지나니 마치 햇빛 아래 걸어놓은 거울이 그늘지고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는 듯하느니라. 그러므로 기운을 엄숙히 세우고 마음을 고요히 정하여 하느님(한얼님)을 공경하면 능히 하늘에 계시는 신령(神靈신령)을 볼 것이니라.
<제 9 조>정실(淨室):淨室이란 하느님(한얼님)을 존귀하게 받들어 모신 곳을 말함이라. 높고 깨끗한 때를 가려서 비린내와 더러움을 금하고 시끄럽게 떠들지 말며 번거로운 형식을 갖추지 말아야 하느니라. 쓰는 그릇은 진귀하고 호화로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탕의 정결함이 제일 중요하느니라.
<제 10 조>택제(擇齊):擇(가린다)는 것은 지극한 정성의 행위이요, 齊(재계「齋戒」한다)는 것은 고요히 마음을 경계함(마음을 고요히 하여 조심함)이라. 비록 하느님(한얼님)께 (구하고자 하는 바 있어) 빌더라도 (희.구.애.노.탐.염의 6가지 감정에)칠정에 좌우되어 갑짜기 구한다면 이는 하느님(한얼님)을 모욕함이라. 그러므로 반드시 날을 가리고 마음을 고요히 경계하여 오직 한결같은 정성된 마음이 가슴속에 가득 서린 연후에 빌면 하느님(한얼님)께서 반드시 굽어 살피시느니라.
<제 12 조>정심(正心):正心(바른 마음)이란 본래 타고난 마음(天心)을 바르게 함이라. 마음에는 일곱 구멍이 있어 일곱 가지 감정(七感(七情))에 부림 받으면(휘둘리면), 하늘의 이치(天理)를 구하려 해도 얻을 수 없느니라. 만약 한 줄기 머릿골 영검이 홀로 우뚝 뚜렷이 선다면 밝은 햇빛이 구름과 안개를 걷고 넓은 바다 물결이 먼지(티끌)를 없애 버리듯 七感(칠정(七情))이 사라지느니라.
<제 13조>의식(意植):意(뜻)이란 마음에서 명령을 받음이요, 植 (심는다)은 뿌리를 심어 옮기지 않음이라. 뜻이 천심(天心:머리골 속에 내려와 있는 하느님의 성품)에 의해 명령받지 않고 사람의 가달된 욕심을 좇아 이리 저리 흔들리면, 온 신체가 오리혀 그 천심(天心)의 명령을 어기게 되어, 마침내 아무런 공도 거두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로 말미암아 그 뿌리까지 흔들리는 격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하느님(한얼님)이 주신 본래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뜻을 심을 마음의 밭을 평평히 잘 골라야만 이내 뜻(머리골 속에 내려와 계신 하느님의 성품)이 운행하느니라.
<제 14 조>입신(立身):立은 곧게 함이요, 身은 몸이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뒤에 몸을 곧게 하여 세상에 서야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번뇌와 고민이 연달아 일어나서 정신을 흩어지게 하고 기운을 쇠약해지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밝은이는 순수하고 당당하며 뭇 사람들은 잡되고 굽실(아첨)거리느니라.
<제 15 조>불혹(不惑):不惑이란 사물에 미혹(迷惑)되지 않음이라. 마음이 바르면 밝으므로(마음의 눈이 밝아져) 사물이 밝게 비추어져 그 추함과 아름다움, 섬세함과 엉성함이 저절로 나타나느니라. 내가 분별하기도 전에 스스로 밝음으로 인하여 사물을 먼저 알아내므로 어찌 미혹될 수 있으랴? 마음이 밝지 못하면 마치 겹겹이 쳐놓은 발에 가려있는 것과 같아서, 발 밖에서 달아나고 날아가는 것이 들짐승인지 날짐승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마침내 사물에 대해 의혹이 생기느니라.
<제 16 조>일엄(溢嚴):일(溢:넘친다)은 물이 가득 차서 넘친다는 것이요, 엄(嚴:엄숙하다)은 바르고 큰 기색이라. 하늘이 가을빛을 머금음으로써 숙연한 기운이 온 세상에 차고 넘치며, 사람이 바른 마음을 간직함으로써 엄숙한 기운이 한결같이 일어나서 그 위엄은 신령스러운 용과 같고, 그 모습은 우뚝 치솟은 산과도 같으니라.
<제 17 조>허령(虛靈):허(虛비었다)는 물건이 없음이요, 령(靈:신령하다)은 마음이 영검함을 이름이라. 비어서 영검한 이는 마음에 가리운 것이 없어 얼굴빛이 옥같이 아름답고 빈 가운데에서 이치와 기운이 생겨 크게는 천계(天界)를 두루하고 작게는 티끌에까지 미치나니, 그 이치와 기운은 비고도 신령한 것이니라.
<제 18 조>치지(致知):치지(致知:앎에 이른다)란 알지 못아는 것을 알아 깨달음이라. 마음을 바르게 하기를 끊임이 없이 하면 마음의 신은 앎을 주관하고, 마음의 영은 깨달음을 주관하여 소리를 들으면 신이 통하고 사물이 다가오면 영이 깨달아서 과거와 미래를 그 당시처럼 환히 알 수 있느니라.
<제 19 조>폐물(閉物):폐(閉:닫는다)란 열지 않음이요, 물(物)이란 사물이라. 마음은 일을 간직해 두는 곳간이요, 몸은 일을 행하는 중요한 기구이니라. 마음에 간직하고서 행하지 않으면 어찌 그 일을 이룰 수 있으랴? 마음을 열고 일으킴에 때가 있고 장소가 있나니 열되 때에 맞지 않고 행하되 장소에 맞지 않으면 하늘의 이치가 어두워지고 사람의 도가 뒤짚히느니라(엎어지느니라). 그러므로 밝은이는 사물에 대한 마음을 닫고, 열어서 행함에 신중하느니라.※마지막 문장 검토
<제 20 조>척정(斥情):척(斥:물리친다)이란 버림이요, 정(情)이란 정욕(情欲)이라. 기쁨과 노여움이 있으면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이 있으면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며, 편안함과 즐거움을 구하여도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고, 가난함과 천박함을 싫어해도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나니, 바른 마음을 얻으려면 먼저 정욕을 버려야 하느니라.
<제 21 조>묵안(默安):묵(默:잠잠하다)이란 오래 잠겨있음을 말함이요, 안(安:편안하다)이란 맑게 쉼이라. 오래 잠겨있음으로써 마음이 어지러워지려는 것을 경계하고 맑게 쉼으로써 마음이 번잡해지려는 것을 경계하면 흙탕물이 점점 맑아지듯 심하게 흐린물도 마침내 정화되느니라. 이것이 마음을 맑게하는 근원이니 맑은 마음은 바른 마음의 기초가 되느니라.
<제 22 조>불망(不忘):불망(不忘:잊지 않는다)이란 잊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천연적으로 잊혀지지 않음이라. 정성이란 도를 이루는 전체요, 만사를 이루는 큰 근원이니 천연적으로 잊혀지지 않고 마음 속에 간직한 그 정성이 참 정성이요, 한결같이 어김이 없음은 그 다음이니라.
<제 24 조>자기(自記):자기(自記:스스로 기억한다)란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억됨이라. 기억하려 함은 마음에 의지하여서 하는 것이지만, 저절로 기억됨은 마음에 의지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억됨이라. 도를 닦는 사람은 정성의 이치대로 정성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정성은 이미 머리와 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만 가지 생각이 갈라지더라도 굳게 가진 한결같은 생각은 오직 정성밖에 없느니라.
<제 26 조>재목(在目):재목(在目:눈에 있음)이란, 정성의 있는 곳을 (따로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항상 눈에 정성이 서려 있음이라. 눈으로 사물을 봄에, 물건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나, 다만 정성된 뜻이 눈에 있다면 가까운 물건의 이름은 모를지라도(가까이 사물의 겉모습은 보지 못할지라도) 먼 물건은 그림 보듯 훤하느니라.(깊이 사물의 본질은 훤히 보이느니라)
<제 27 조>뇌허(雷虛):뇌허(雷虛:우레같이 헛되다)란 정성의 마음이 오직 귀로 듣는 데에만 얽매이어 있으면 정성이 일어날 때에 비록 우레소리 같이 크게 일어나더라도 저절로 공허해져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느니라.
雷虛者 誠心 纏于耳聞 誠發之時 以雷聲之大 自虛而不聞也
뇌허자 성심 전우이문 성발지시 이뢰성지대 자허이불문야
<제 28 조>신취(神聚):神이란 정신(精神)이요, 취(聚:모으다)란 합침이라. 사람 몸의 모든 부분은 정신이 각각 지키는데 간이 하는 일에 폐가 참여하지 않고, 위가 하는 일에 콩팥이 참여하지 않느니라. 하지만 정성을 드리는 일에는 모든 정신(精神)들이 다 합쳐지나니 그 중 하나라도 없으면 정성을 이룰 수 없느니라.
<제 29 조>불식(不息):불식(不息:쉬지 않음)이란, 지극한 정성을 쉬지 않음이라. 쉬지 않는다는 것과 쉼이 없다는 것은 각자 다르나니, 그것이 도력(道力)의 떨치고 움츠러듦과 사람 욕심의 사라지고 자람에 있어서는 가는털끝만한 간격의 차이라도 하늘과 땅만큼한 큰 차이가 있느니라.
<제 30 조>면강(勉强):면강(勉强:힘써 굳세어짐,굳세어지는데 힘씀)이란,힘써서 스스로 강해짐을 말함이라. 스스로 강해짐이란, 잔 꾀를 이기고 나아가 갈림길목에서도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마침내 힘들여 이룩해냄이라. 힘써서 강해지면 정성의 뿌리가 깊고 단단해져서 강함을 다스리지 않아도 능히 강해지고, 억지로 어찌하고자 하지 않아도 능히 이루어지느니라.
<제 31 조>원전(圓轉):원전(圓轉:둥굴게 구른다)이란, 정성을 쉬지 않음이 마치 둥근 물건이 평탄한 땅에서 스스로 구르는 것과 같으니라. 멈추려 해도 되지 않고 느리게 하려 해도 되지 않으며, 빠르게 하려 해도 또한 되지 않나니 그저 몸체를 따라 스스로 굴러 나아가 쉬지 않느니라.
<제 32 조>휴산(休算):휴(休)는 쉬는 것이요, 산(算)은 헤아림이라.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 정성을 드리는 사람이 정성이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계산하여 그 동안에 혹 무슨 느낌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은 정성을 드리지 않음과 같으니라. 무릇 정성을 쉬지 않는 사람은 정성이 시작되는 해도 헤아리지 않으며, 또 정성이 끝나는 해도 헤아리지 않느니라.
( 휴 헐야 산 계야 유욕이위성자 첩계자기일 일흘우기시 억미유감여 차 여불성 동 부성지불식자 불산성지기년 우불산성지종년)
<제 33 조>실시(失始):실(失)은 잊음이요, 시(始)는 처음이라. 처음에 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 정성을 시작하여 차츰 깊은 경지로 들어가면 하고자 하는 바는 점점 적어지고 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커지며, 그리고 차츰 참 경지로 들어가면 하고자 하는 바는 없어지고 외직 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느리라.
<제 34 조>진사(塵山):진(塵)이란 티끌이라. 티끌이 바람에 날려 산기슭에 쌓여 해가 오래되면 마침내 한 산을 이루나니, 지극히 적은 흙으로 지극히 큰 언덕을 이루는 것은 바람이 쉼없이 티끌을 모았기 때문이니라. 정성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지극한 정성을 쉬지 않으면 정성의 산을 가히 이룰 수 있느니라.
( 진 진애야 진애수풍 적우산양 연구 내성일산 이지미지토 성지대지구자 시풍지구애불식야 성역여시 지불식칙성산 가성호)
<제 35 조>방운(放運):방(放)은 정성의 뜻을 넓힘이요, 운(運)은 정성의 힘을 움직임이라. 정성의 뜻을 쉬지않고 넓히면 캄캄한 밤에도 밝은 달이 뜨며, 정성의 힘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 한 손으로 만근을 들 수 있느니라. 비록 정성이 그렇다 하나 혹 정성의 뜻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거나, 정성의 힘이 부드러웠다 강했다 하게 되면 그 결과를 알 수 없느니라.
<제 36 조>만타(慢他):만(慢:게으름)은 마음에 있지 않음이요, 타(他:다르다)는 다른 일을 생각함이라. 마음의 일념이 오로지 정성에 있고, 정성의 일념이 오직 쉬지 않음에 있으면 다른 일에 대한 생각이 어찌 싹터 움직이리오. 그러므로 가난하고 천함이 그 정성을 게으르게 할 수 없으며 부유하고 귀함이 그 정성을 어지럽히지 못하느니라.
( 만 부존호심야 타 염외사야 심일념재호성 성일념재호불식칙념외사 안능맹동호 시이 빈천 불능권기성 부귀 불능란기성)
제 5 절 至 感 (지감)
<제 37 조>지감(至感):지감(至感:지극한 느낌)이란 지극한 정성으로 느끼고 응함에 이르름이라. 느끼고 응한다는 것은 하느님(한얼님)이 사람의 정성을 느껴 그것에 응답함이라. 사람이 가히 느낄 수 없는 정성이라면 하느님(한얼님)이 어찌 그 정성을 느끼며 사람이 응답할 수 없는 정성이라면 하느님(한얼님)이 어찌 그 정성에 응답하시랴. 그러므로 정성을 드리되 지극함이 아니면 정성이 없는 것과 같으며, 느끼되 응답함이 없으면 느끼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느니라.
<제 38 조>순천(順天):순천(順天:하늘의 이치에 따른다)이란 이치(天理)에 순응하여 정성을 드림이라. 천리(天理)를 알면서도 거슬러 비는 이가(하늘의 이치를 알면서 이치에 어긋난 것을 비는 이가) 혹 있는가 하면, 천리(天理)를 모르고 성급하게 비는 이(하늘의 이치를 모르고 빨리 응답해 달라고 비는 이)도 있나니, 이는 모두 하느님(한얼님)을 느끼게 하지 못하며, 그 응답을 받지도 못하느니라. 만약 응답을 받고자 한다면 천리(天理)를 따르고 거스르지 않으며 천리(天理)에 따르고 성급하지도 않아야 하느니라.
<제 39 조>응천(應天):응천(應天:天理에 응한다)이란, 하늘의 이치(天理)에 응하여 정성을 기름이라. 하느님(한얼님)께서 고통과 어려움을 주시더라도 달게 받아 정성을 다함에 어김이 없어야 하고 하느님(한얼님)께서 상서로운 복을 내려 주시면 오히려 두려워하여 정성을 다함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환란(患亂)이야 정성이 없는 곳에 돌아가지만 상서로운 복이 어찌 정성 아닌 곳에 속하리오.
<제 40 조>청천(聽天):청천(聽天:천명天命을 듣는다)이란, 하느님(한얼님)의 명령을 듣되 정성으로써 느끼고 응함이 있을 것을 기대하지 않음이라. 나의 정성이 반드시 하느님(한얼님)을 느끼게 함에 이르지 못했는데 어찌 응함이 있을 것인가 생각하여 더욱 오래하고 더욱 맑게하며 더욱 부지런히 하고 더욱 고요히 하며 도리어 정성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해야 하느니라.
<제 41 조>낙천(樂天):낙천(樂天)이란, 하느님(한얼님)의 뜻을 즐거워함이라. 사람에 대한 하느님(한얼님)의 뜻은 지극히 공평하시고 사사로움이 없으시나니, 나의 정성이 깊으면 하느님(한얼님)의 느낌도 깊으시고, 나의 정성이 얕으면 하느님(한얼님)의 느낌도 얕으시나니 스스로 하느님(한얼님)의 느낌의 깊이를 아는 것이 내 정성의 깊고 얕음을 아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점점 더 정성을 다할수록 점점 즐거운 것이니라.
<제 42 조>대천(待天):대천(待天:하느님(한얼님)을 기다린다)이란, 하느님(한얼님)께서 반드시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사람에게 느끼고 응함이 있음을 기다리는 것이라. 하느님(한얼님)의 응함을 기다리는 깊은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한얼님)을 믿는 정성도 없나니, 기다림도 무한하고 정성도 또한 무한해야 하느니라. 비록 하느님(한얼님)께서 느껴 은덕을 내리시더라도 스스로 하느님(한얼님)을 믿는 정성을 멈추지 말아야 하느니라.
<제 43 조>대천(戴天):대천(戴天:하늘을 머리에 인다)이란, 머리 위에 하늘을 이고 있음이라. 물건이 머리 위에 있으면 아주 가벼운 무게라도 느낄 수 있나니 하늘을 머리에 임에 마치 무거운 물건을 인 것처럼 하면 감히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거나 몸을 함부로 추스리지(흩트리지) 못하느니라. 하느님(한얼님)을 이와 같이 공경하여 받들면 그 정성된 뜻이 능히 하느님(한얼님)을 느끼고 응함에 이르게 할 수 있느니라.
<제 44 조>도천(禱天):도천(禱天)이란 하느님(한얼님)께 비는(원도하는) 것이라. 원도할 줄 모르는 이는 어렵다고 하여 어렵게 빌고, 쉽다고 하여 쉽게 빌지만(어렵게만 생각하여 원도를 잘 못하고, 쉽게 생각하여 원도를 가벼이 하지만), 원도할 줄 아는 이는 그렇지 않느니라. 쉽다고 하는 이는 쉽게 빌 줄만 알아서 정성이 자기 한 몸을 꿰뚫지 못하지만, 어렵다고 하는 이는 어렵게 빌 줄을 알므로 정성이 능히 하늘을 꿰뚫느니라. ※검토
<제 45 조>시천(恃天):시(恃)는 의지함이니 아랫 정성은 하느님(한얼님)을 의심하고, 중간 정성은 하느님(한얼님)을 믿으며 큰 정성은 하느님(한얼님)께 의지하느니라. 지극한 정성으로써 세상을 접하면 하느님(한얼님)이 반드시 도와 주시어 자연히 의지하는 바가 있게 되지만, 세상 사람들이 정성을 다함에 달리 험하고 괴이한 것을 행하니 어찌할 것인가?
<제 46 조>강천(講天):강천(講天)이란, 하느님(한얼님)의 도(天道)를 헤아림이라. 사람의 일이 순조로움은 하느님(한얼님)의 도에 화합함이요, 사람의 일이 막힘은 하느님(한얼님)의 도에 거스름이라. 사람 일의 순조롭고 막힘을 알아서 하느님(한얼님)의 이치에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한얼님)의 이치를 헤아려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그리하여 두려워하고 삼가 조심함을 마음 속에서 버리지 않는다면 그 정성된 뜻이 마침내는 하느님(한얼님)을 감동시키게 되느니라.
<제 47 조>대효(大孝):대효(大孝)란 지극한 효도라. 한 사람의 효도가 한 나라의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온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나니, 천하를 감동시킬 만한 지극한 정성이 아니고서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으리오(대효에 이르리요), 사람이 감동하면 하느님(한얼님)도 또한 감동하시느니라.
<제 48 조>안충(安衷):안(安:편안하다)은 화평함이요, 충(衷:속마음)은 마음과 정성이 지극함을 말함이라. 사람의 자제가 되어 부모의 마음을 편안히 하며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부모의 마음을 안정되게 하며 부모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면 곧 상서로운 구름이 방에 가득하고(집을 감싸고),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뻗치느니라.
<제 49 조>쇄우(鎖憂):잠근다 함은 닫음을 말함이요, 근심이란 즐거운 일이 아님이라. 부모가 근심이 있으면 자식은 마땅히 이를 없애서 화평하게 하고, 그 근심이 있은 뒤에 이를 없게 함에는 근심될 말을 부모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하며, 설혹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형세에 따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직 지극한 정성으로 할지니라.
<제 50 조>순지(順志):순(順:순하다)은 화평함이요, 지(志:뜻)란 뜻(의) 기운을 말함이라. 부모의 뜻(의 기운)은 저마다 다르니, 자식이 그 부모의 뜻을 알지 못하면 부모도 뜻을 얻지 못하여, 비록 몸과 집안의 좋고 즐김을 다할지라도 항상 불평(화평하지 못)하는 기운이 있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큰 효도를 하는 자식은 능히 그 부모의 뜻을 순(화평)하게 하느니라.
<제 51 조>양체(養體):양체(養體)란 부모의 몸을 봉양함이라. 부모님의 몸이 건강하다 하더라도 마땅히 봉야해야 하는데 하물며 잔병이 있거나, 중병이 있으심에랴. 잔병이 있으시면 성한 몸처럼 편안하게 해드리고, 중병이 있으시면 남은 증세가 말끔히 없어지도록 해드린 연후에야 사람의 자식으로서 효를 다하는 것이 되느니라.
養體者 養父母之體也. 父母之肢體在健康 猶適宜奉養 況或有殘疾 或有重梯乎. 使殘疾 安如完體 (重梯:안) 無遺術然後 可盡人子之孝矣.(번역된 부분이 원문보다 완전하고 원문이 일부 빠진
<제 52 조>양구(養口):양구(養口)란 부모님의 입에 맞도록 봉야함이라. 부유하여 진수성찬을 드리더라도 남에게 맡겨서 하면 봉양함이 아니니 가난해서 물고기를 잡고 나물을 캐는 수고를 하더라도 손수 봉양해야 하느니라. 그렇지 않으면 부모님의 식성을 모르게 되어 그 즐기시는 것을 버리게 되고 알맞게 조리해 그리는 것을 어기게 되나니, 비록 육지와 바다에서 나는 온갖 음식을 다 드린다해도 잡수시면서 만족하시지 않느니라. 큰 효도를 하는 자는 봉양할 줄을 알아서 다섯 가지 맛을 식성에 맞도록 해드리고 사계절에 제 철이 아닌 음식을 해드림은 실로 하느님(한얼님)께서 감동하시느니라.
<제 53 조>신명(迅命):신(迅)은 빠름이요, 명(命)은 부모님의 명령이라. 부모님의 명령이 계시면 자식은 반드시 받들어 행할 것이라. (그러나 부모님의 명령은 인자하고 자애로운 명령이기에 嚴托督囑) 부모님의 명령이 자애로움이 있는 것 같지 않다하여 선후(先後)를 뒤바꾸거나 완급(緩急)이 적당함을 잃으면 비록 입으로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모님의 마음에는 달리 생각하심이라. 그러므로, 큰 효도를 하는 사람은 부모님의 명령에 따르고 어김없이 행하느니라.
<제 54 조>망형(忘形):망형(忘形)이란 자기 모습을 잊음이라. 자식이 부모님을 섬기되 감히 자기 몸 있음을 생각지 않는 것은 부모님 은혜에 깊이 보답함이니라. 오직 그것을 알아서 자기 몸을 감히 생각하지 말아야 하나니, 자기 몸을 잊지 않는 것은 도리어 자기 몸을 아직 생각하는 것이니라. 큰 효도를 하는 이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언제나 자기 몸을 잊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자기 몸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느니라.
<제 58 조>공렴(公廉):공(公)은 치우치지 않음(공평)이요 렴(廉)은 깨끗함이라. 공으로써 일을 보면 사랑과 미움이 없고 깨끗함(高潔)으로써 물건을 대하면 사사로운 욕심이 없나니, 사랑과 미움이 없으면 사람들이 그 의로움에 순종하고 사욕이 없으면 사람들이 그 깨끗함을 믿느니라.
<제 59 조>석절(惜節):사람에게 의로움이 있다 함은 마치 대나무에 마디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대나무가 불에 타면 마디에서 소리가 나고 몸은 재가 될지라도 마디는 재가 되지 않나니, 의로움이 어찌 이와 다를 수 있으랴. 사람이 절개를 아끼는 것은 절개를 무너뜨림으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잃을까 두려워서이니라.
<제 63 조>허광(虛?):虛?이란 헛된 말로 사람을 속임이라. 바른 사람이 나를 믿으면 나도 그 사람을 믿으며 바른 사람이 나에게 의로우면 나도 또한 그에게 의로워야 하고, 바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나는 마땅히 그 어려움을 구해야 하느니라. 속여서도 아니되고 한갓 헛된 말로써 이룰 수도 없나니 작은 절개를 버리고 신의를 온전히 한다면 밝은이는 나무라지 않으리라.
<제 66 조>약(約):약속이란 믿음의 좋은 매개요, 믿음의 엄한 스승이며, 믿음의 근원이자 믿음의 영혼이니라. 매개체가 없으면 합치지 못하고, 스승이 아니면 꾸짖지 못하며, 물의 근원이 없으면 흐르지 못하고, 영혼이 없으면 (태어날)살 수 없느니라.(정기가 없으면 태어날 수)
<제 69 조>속단(續斷):續斷이란 장차 끊어질 약속을 이음이라. 바르고 큰 약속이 서게 되면, 간사한 이가 이를 막아 농간함으로써 한 쪽으로 의심을 품어 약속이 장차 끊어짐에 이르더라도, 밝은이는 정성과 믿음으로써 의혹을 풀고 깨우쳐 자연스레 처음으로 돌아가 그 약속을 계속 이어 가느니라.
<제 70 조>배망(排忙):排忙이란 바쁨을 물리치고 초연히 약속에 임함이라. 사람이 믿음으로 성품을 지키면 일에 질서가 있고, 이치에 어긋남이 없으므로 스스로 바쁘다고 해서 약속을 어기는 일은 없느니라. 혹 생각에 막힘이 있더라도 마치 달이 지나가는 구름을 꿰뚫는 것과도 같으니 믿음이 적은 사람은 애써 고생한 뒤에라야 약속을 이루느니라.
<제 72 조>천패(天敗):天敗란 사람이 약속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얼님)께서 약속을 무너뜨리는 것이라. 하느님(한얼님)이 무너뜨림으로 인해 약속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면 하느님(한얼님)의 소리를 듣고 그만 둘 것인가 하느님(한얼님)께 아뢰고 다시 할 것인가. 큰 약속은 하느님(한얼님)의 명령을 듣고 따르며, 작은 약속은 하느님(한얼님)께 아뢰어 하느니라.
<제 73 조>재아(在我):약속의 이룸도 나에게 달려 있고 약속의 이루지 못함도 나에게 달려 있느니라. 어찌 남이 권한다고 약속을 이행하며, 남이 좋지 않게 말한다고 그만 두리오.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음도 나에게 달려 있고,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을 곧이 듣지 않음도 또한 나에게 달려 있나니, 그렇게 한 다음에라야 믿음의 힘이 큰 줄을 알게 되느니라.
<제 74 조>촌적(忖適):촌(忖)이란 미루어 헤아림이요, 적(適)은 마땅함이라. 찬 것으로써 더움을 기약할 수 없고, 약함으로써 강함을 기약할 수 없으며, 서먹함으로써 친근함을 기약할 수 없고, 가난함으로써 부유함을 기약할 수 없지만, 비록 차고 약하고 서먹하고 가난하다 할지라도, 능히 따뜻하고 강하고 친근하고 부유한 것에로 온전히 기약할 수 있는 것은 그 믿음과 정성이 서로 알맞음으로 미루어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니라.
<제 75 조>하회(何悔):이로움을 위하여 악속을 어기면 비록 이롭기는 하지만 믿음이 없어지며, 사랑을 꾀하여 약속을 어기면 비록 사랑은 얻을지라도 믿음이 없어지느니라. 이미 믿음이 없으면 이로움도 얻지 못할 수도 있고 사랑도 또한 얻지 못하나니 장차 뉘우치게 되느니라.
<제 76 조>찰합(?合):?合이란 평평하게 깎여진 나무(平木之具)가 서로 합쳐짐이라. 한 사람이 믿음을 높이 받들면 한 나라가 그 믿음을 우러르고(믿음으로 환해지고), 한 사람이 몸을 곧게하여 세상에 서면 천하가 그 믿음을 따르나니, 큰 기약은 마치 평평한 나무가 서로 합쳐짐으로 그 사이에 한 방울의 물도 새어들지 못하고 가는 티끌 하나도 능히 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제 79 조>담중(擔重):擔重이란 중요한 일을 부담함이라.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몸에 맡은 직책으로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을 때 천지의 기운과 돌아가는 운수를 잘 헤아려 순하고 거스르는 이치에 따를 것이며 온 재주와 지혜를 다하여 번성하고 쇠하는 도를 알아 대처해야 하느니라.
<제 80 조>영명(榮命):榮命이란 임금님의 명령을 빛나게 함이라. 외국의 손님을 맞이하여서는 부드럽게 회유하여 교섭하고, 나라밖에 나가서는 잘 분별하여 대처함으로 위기를 막아야 하나니, 충성된 마음이 날로 빛나게 하고, 기운은 서리발과 같이 위엄있게 가져 임금님의 명령을 천하에 널리 떨쳐야 하느니라.
<제 83 조>무신(無身):無身이란 임금님께 몸을 바침으로써 자기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함이라. 임금의 명령이 있으면 괴로운 것이라도 사양하지 말아야 하며, 편안하고 즐거울 때에도 근심있을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마음이 항상 튼튼하여 그 튼튼함이 점차 쇠약해지는 줄을 몰라야 하며 마음이 늙지 않아서 늙음이 장차 오게 됨도 몰라야 하느니라.
<제 84 조>열(烈):烈이란 열부(烈婦) 즉 절개가 굳은 아내이니 열부는 그 남편에게 절개를 지켜 목숨을 잇는 이도 있고 남편의 뒤를 따라 삶을 버리는 이도 있나니라. 혹 초혼이든 혹은 재혼이든(처음에 잘 맞게 가는 이나 혹은 재가하더라도) 그 도는 오직 남편에 대한 믿음에 있나니라.
<제 87 조>사고(嗣孤):嗣孤란 유복자(遺腹子)를 보존하여 남편의 뒤를 잇게 함이라. 인륜은 대(자손)를 잇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신의는 유복자를 보존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사람 일의 윤리와 신의를 지키고 천리(天理)의 바른 법도를 쫓아서 살아야 하느니라.(사람의 윤리 의리를 버리고????? 하늘의 섭리에 따른 올바른 길을 따라야 하느니라)
<제 89 조>닐구(?仇):?仇(원수를 친하게 하다)란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으면 아내는 마땅히 그 원통함을 갚아 씻어 주어야 하나니, 그 일이 오래되지 않아 원수되는 자가 뉘우치고 스스로 찾아와 용서를 구할 때 사랑으로 용서하여 도를 이룬다면 밝은이도 그것을 어여삐 여기느니라.(남편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세상을 떠나면, 아내는 마땅히 그 치욕을 벗겨드려야 하는 것이요, 원수되는 이가 스스로 와서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자세히 밝혀 바른 도를 이룬다면 밝은이도 이를 어여삐 여기리라.)
<제 94 조>덕망(德望):德은 성덕(聖德:성인의 덕)이요, 望은 인망(人望)이라(사람들의 우러름이라). 성인의 덕은 소리가 없으나 미치는 곳마다 사람들의 우러러 봄이 있나니, 이는 하늘의 윤회(섭리)가 소리는 없으나 다하는 곳마다 만물의 모습이 있는 것과 같으니라. 德은 우러러 보지 않음이 없고 윤회(섭리)는 반드시 만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사람의 믿음이 하늘의 믿음과 같음이니라.
<제 95 조>무극(無極):無極이란 두루 돌아서 다시 처음의 원기(元氣)로 되돌아옴을 말함이라. 천체의 움직임이 그치고 쉼이 있다면 하늘의 이치가 이내 멸하리니, 사람이 믿음을 기름도 또한 끊임없이 다시 비롯하는 무극(無極)의 원기(元氣)와도 같아서 만일 털끝만치라도 끊임이 허용된다면 사람의 도가 폐(廢)하리라.
사랑이란 자비한 마음에서 자연히 일어나는 것이며, 어진 성품의 가장 근본적인 성질이 되는 것이니, 이에는 6범(範)과 43위(圍)가 있느니라.
1범 서(恕) 2범 용(容) 3범 시(施) 4범 육(育) 5범 교(敎) 6범 대(待)
제97조 (1범) 서(恕) : 용서함
용서란 사랑하는 마음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자비한 마음에서 일어나며, 어진 마음에서 결정하고, 참지 못하는 마음에서 참는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니라.
1위 유아(幼我) 2위 사시(似是) 3위 기오(旣誤)
4위 장실(將失) 5위 심적(心蹟) 6위 유정(由情)
제98조 유아(幼我) : 남을 나와같이 생각함
유아는 남을 나와 같이 생각함이니, 내가 춥고 더우면, 남도 춥고 더운줄 알고, 내가 배 고프면, 남도 또한 배 고픈줄 알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남도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제99조 사시(似是) : 그러한 것 같음
사시는 옳은 것 같으면서 그르고, 그른 것 같으면서 옳은 것이니, 사랑은 무엇이든 만물을 포용할지언정 만물을 내뱉지는 않나니, 가까운 것은 백가지가 옳고, 먼 것은 쉰가지도 그르다 할때, 가까운 것은 끌어 인도하고, 멀리있는 것은 물리치지 않는 것이 마땅하느니라.
제100조 기오(旣誤) : 이미 잘못을 앎
기오라 함은 잘못을 알고도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이니, 그릇된 길로 달려감을 힘써 돌이키게 하여 처음 자리인 진실한 길에 바로 서게 하면, 그 공이 바다를 헤엄쳐서,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 보다 더 현명하니라.
제101조 장실(將失) : 장래욕심으로 바른이치를 잃음
장실은 장차의 욕심 때문에 바른 이치를 잃음이니, 절름발이가 중간에 머물러, 미치지 못하는 것을 능하지 않다고 하면 옳으나, 내닫는 사람이 지나친 것을, 능하지 않다고 하면 옳지 않나니, 미치지 못하거나 지나침은, 그 잘못이 비록 같다 하겠으나, 중간에서 머무는 사람은 깨우쳐 주어야 하며, 지나치게 내닫는 사람은 손짓하여, 목적한 곳으로 불러야 하느니라.
제102조 심적(心蹟) : 마음의 표적
심적은 겉은 착하고 속은 악하여, 들어내고 숨기는 것이 나타나지 않으나, 밝은이는 오히려 이를 알아보느니, 물은 그 원천을 막으면 넘쳐 흐르고, 풀은 그 뿌리를 끊어 버리면 잎이 떨어지나니, 이것은 자연에서 본받을 용서의 법칙이니라.
제103조 유정(由情) : 정이 울어남
유정은 여러가지 정이 어찌할 수 없이 울어남이니라. 놀라는 것은 뉘우침이며, 슬퍼하는 것은 진정시키는 것이다. 그런줄을 알지 못하다가 알게 되고, 그러함을 알아서 행하게 되는 것에 따라, 용서의 가볍고 무거움이 있느니라.
제104조(2범) 용(容) : 받아들임
용이란 만물을 용납함, 즉 받아 들임이니, 만리의 바다에는 만리의 물이 흘러 들어가고, 천길의 산에는 천길의 흙이 실렸다. 그러므로 바닷물이 넘치는 것도 용납이 아니며, 높은 산이 무너지는 것도 용납(容納)이 아니니라.
고연은 인간의 이치는 늘 불변한 것이니, 자기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은, 하늘 이치에 있어서는 좋은 운을 잃으며, 하늘의 도에 있어서는 바름을 잃는다, 그러므로 잣벌레는 돌 위에 오르지 아니하며, 꿩는 공중을 날지 않으려 하나니, 이것은 자기분수를 알고, 현실을 받아드리는 용납(容納)의 시초이니라.
제106조 정외(情外) : 뜻 밖의 일
정외는 진실로 뜻하지 않은 것이라. 조각배가 회오리 바람을 만나면, 그 누가 판자조각에 의지하지 않으며, 큰 누각에 불이 나면, 그 누가 뛰어 내리지 않으랴. 회오리 바람을 만나고, 불이 나는 것은 뜻밖의 일로서, 판자조각에 의지하거나, 뛰어 내린다는 것은, 인간이 위기를 받아 들임이니라.
제107조 면고(免故) : 죽음을 벗어남
면고는 죽을 일을 행하고, 행하지 않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잘못 인도하고 그릇되게 권고하는 사람은, 한되로 한말의 분량을 채우라는 것과 같으니, 성품이 편협하며, 성품이 허망하며, 성품이 가볍고 조급하여,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진실하다고 하는 사람은, 큰 관용(寬容)하는 마음이 있어야 살아가느니라.
제108조 전매(全昧) : 어둠에 빠짐
전매는 전혀 사람의 천성과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어둠에 빠짐이라. 신령한 성품은 하늘의 이치를 간직하고, 하늘의 이치는 사람의 도리를 간직하고, 사람의 도리는 정욕을 감추었나니, 그러므로 정욕이 심한 사람은 사람의 도리가 무너지며, 하늘의 이치가 잠기고, 신령한 성품이 파괴된다. 편안함을 이루고 혼돈을 막으면, 스스로 용납함을 깨닫느니라.
제109조 반정(半程) : 중도에서 그침
반정은 중도에서 그침이니, 착하고 착하지 않은 사이에서 중립하여, 나아감도 물러감도 없는 사람은, 능히 착한 것도 깨달으며, 착하지 못한 것도 깨달으니, 만물의 이치는 용납할 수 있으되, 성품의 이치는 용납할 수 없나니, 그러나 만물의 이치가 스스로 쇠하는 것을 주의하면, 성품의 이치도 스스로 성대하게 될 것이니, 용납이란 주의함에 있느니라.
제110조 안념(安念) : 생각을 안일하게 함
안념은 안일한 생각을 너무 크게 하면, 성품이 소멸될 것이며, 너무 작으면 능히 뜻이 소멸되나니, 성품과 뜻이 함께 소멸하면, 그 존망(存亡)을 분별하기 어렵게 되느니라. 사람이 이를 깨닫고도 안일한 생각의 크고 작은 마음의 불꽃으로 몸을 태운다면, 그러고도 용납을 바라랴. 그것을 용납할 자는 누구냐.
제111조 완급(緩急) : 급하고 느림
완이란 느린 지경을 말하며, 급이란 급한 지경이니, 급한 지경에서의 재앙은, 사람이 혹 용납할 수 있으되, 느린 지경에서의 재앙은 사람이 용납하지 못하느니라.
제112조 (3범) 시(施) : 베풀다
베품이란 굶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 구조하는 것이 며, 또한 덕을 펴는 것이니, 굶는 사람에게 곡식을 주어 궁핍을 구제하며, 덕을 펴서 성품의 이치를 밝혀야 하느니라.
원희는 사람의 천성이 원래 사람을 사랑하고, 베푸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이니, 인간이 하늘이치에 배반하여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고독하여 지며, 베푸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면 비천하게 되느니라.
제114조 인간(認艱) : 어려움을 인정함
인간이라 함은 남의 어려움을 자기가 당한 것처럼 생각함이니, 남에게 급한 어려움이 있으면 방도를 다하여 정성스러이 구해주어야 한다. 이는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와 같이 하는데 있느니라.
제115조 긍발(矜發)
긍발은 자비로운 마음은 천하고 소원함이 없으며, 또 착하고 악함을 따지지 않고, 다만 불쌍한 것을 보면 일어나는 자비로운 맘을 뜻하니, 이러므로 사나운 짐승이 사람에게 의지하려고 오더라도, 또한 이를 구해 주어야 하느니라.
제116조 공반(公頒)
공반은 온 천하에 바른도리를 널리 베푸는 것이니라. 한번 착함을 펴면 천하가 착한 데로 향하며, 한번 착하지 못한 것을 바로 잡으면 천하가 허물을 고치나니, 한 사람이라도 착하지 않으면, 도가(道家)의 허물이니라.
제117조 편허(偏許)
편허는 위급함은 구원하여 주고, 넉넉함은 돕지 않음이라. 베품이 방술을 겸하면, 사랑 가운데 더 사랑이 있으며, 자비로움 가운데에 더 자비로움이 있고, 어진 가운데에 더 어짐이 있으니, 넓게 통하면 베품이 합당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제118조 균련(均憐)
균련은 멀리 있는 남의 어려움을 들으면, 눈앞에 보듯하고, 모진 곤궁이 아니라도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느니라.
하늘이 비를 곡식에 내림에, 가라지에도 비를 내리지 않을 이치가 있으랴. 고루 베푸는 것도 비에 젖는 것과 같으니라.
제119조 후박(厚薄)
후란 지나치지 않는 것이며, 박이란 부족하지 않음이라. 베품이 적당한 량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잔으로 해갈도 물리치지 못할 것이니, 고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면 반드시 고르게 하고, 간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면 반드시 간략하게 할지니라.
제120조 부혼(付混)
부혼은 남에게 베풀고도 그 갚음을 바라지 않는 것이니, 사랑하는 마음에서 움직이고, 자비로운 마음에서 일어나며, 어진마음에서 결정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베푸는 대로 잊어버려서, 스스로 공덕(功德)으로 여기는 뜻이 없어야 하느니라.
제121조 (4범) 육(育) : 기술을 가르처 기름
육이란 기술을 가르처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 기름이라. 사람은 일정한 기술의 가르침이 없으면, 그물에 벼리를 달지 않은 것과 같으며, 옷에 깃을 달지 않은 것과 같아서, 제각기 자기 주장만을 세워 분잡을 이루나니, 이로 말미암아 일정한 기술을 가르처 자기주장을 삼도록, 사람들을 보호하여, 길러야 하느니라.
업이란 사람이 생활을 유지해 가는 방법을 말함이라. 사람의 타고난 성품의 이치는 비록 같으나, 성품의 질과 기운은 같지 않아서, 억세고 부드럽게, 강하고 약하게, 행하여 가는 길이 각기 다르니, 기술을 가르처 크게 행하게 하면, 성품의 질을 윤택하게 하고, 성품의 기운을 안정되게 하여, 비록 굴속을 처소로 하고, 둥지에 살더라도 스스로 그 직업만은 번영하게 되느니라.
제123조 보산(保産) : 산업을 보호함
보산은 산업을 경영함에 실패하지 않음이라, 마음을 굳게하고, 뜻을 단단히 세워, 함부로 물건을 팔고, 사지 말아야 하며, 한 산업을 오래 계속하면 밝게 통하게 되어, 날로 진흥(進興)하여지며 축소됨이 없으므로, 능히 그 산업을 보전할 것이니라.
제124조 장근(奬勤) : 근면함을 장려함
장근은 사람이 근면하도록 권장하여 길러 나아감이라. 사람은 기술을 가르처 기르면, 기술을 가진 기능자가 되나니, 비유하건대 봄철의 만물이 점점 자라 감과 같고, 먼지 낀 거울을 닦으면 만물이 비추는 것과 같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