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속의 공동선>
나는 지난 호에서 루가 복음 1장 46-55절에 전해지는 마니피캇이 갖고 있는 민중 언어의
성격을 역설하였다. 마리아의 민중 사랑을 매개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꼭 수행해
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부른 저 노래의 전통을 확인하는
일이다. 마리아의 저 노래는 어느 날 갑자기 마리아의 시대에 불려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
었다. 이 노래는 오랜 전통 속에서 익어 나온 것이었다.
성서학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처럼, 저 노래의 모체는 사무엘 상권 첫머리에 전해지
는 ‘한나의 수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문학 유형상의 전통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윗자리에 있던 이들이 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을 해쳤을 때, 바로 그들을 뽑
으셨던 하느님에 의하여 그들이 어떻게 끌어내려지는가를 증언할 줄 아는 전통을 말하려
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자 한나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잉태한 아이가 사무엘
이었는데,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맥락은 당대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 엘리
가문의 몰락과 연계되어 있다. 엘리 집안의 몰락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의 부족
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그 자신에 의하여 직접 유발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들들
의 죄과를 바로잡지 못한 잘못, 이것이 그 이유였다.
엘리의 아들들은 망나니들로서 야훼를 몰라보고 사람을 대하는 사제의 규정도 무시하였
다. 사제의 시종은, 누가 제사를 드릴 때 고기를 삶고 있으면 삼지창을 들고 다니며 가마
솥이나 노구솥이나 뚝배기나 남비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휘저어서 삼지창에 꽂혀 나오
는 것은 모두 가져갔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로에 와서 제사를 드릴 때마다 그렇
게 하였다. 사제의 시종은 그뿐 아니라 기름을 태워 바치기 전에도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
에게 와서 “사제님은 삶은 것은 받지 않으시고 날것만 받으시니, 사제님께 구워 드릴 고기
를 내놓아라” 하고 생떼를 썼다. 그 사람이, 기름을 먼저 태워 바친 다음에 마음대로 가져
가라고 해도 “그건 안 된다. 지금 내지 않으면 강제로 빼앗아 가겠다” 하면서 을러메었
다.
이렇게 그들이 시종들을 시켜 저지른 잘못은 야훼께서 보시기에 너무나 심하였다. 그들
은 야훼께 바치는 제물을 이처럼 모독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사람 하나가 엘리에게 와서 말을 전하였다. “야훼의 말씀이니 들으시오. ‘너도
알다시피 네 조상이 식구들을 데리고 에집트에서 파라오에게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나
는 그들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였다. 나는 이스라엘 온 지파 가운데서 네 조상을 선택하
여 나를 섬기는 사제로 삼아 내 제단의 층계를 오르내리며 내 앞에서 제물을 살라 바치고
에봇을 입게 하였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내가 정해 준 제물과 곡식예물을 멸시하여 소
홀히 다루느냐? 그리고 나보다도 네 자식들을 더 소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바치
는
온갖 예물 가운데서 알맹이만 내주어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이에 이스라엘의 하느님 나
야훼가 말한다. 내가 일찌기 네 집과 네 가문이 영원히 나를 섬기리라고 했지만 이제 분명
히 말해 두거니와 나는 그 약속을 철회한다. 나를 존대하는 자는 소중히 여겨 주겠지만,
나를 멸시하는 자는 천대하리라. 나 야훼의 말이다. 내가 네 기운, 네 가문의 기운을 꺾으
리니 이제 네 집안에 늙은이 하나 남지 못할 날이 오리라. 그 날이 오면 너는 내가 이스라
엘에게 주는 번영을 보고 속이 뒤틀릴 것이다. 그러나 네 집안에서는 두 번 다시 늙은이
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네 후손 가운데서 하나만 남겨 내 제단 일을 보게 하겠지만, 그도
기운이 다하고 그의 후손마저 모두 사람들의 칼에 맞아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홈니와 비느
하스가 한 날에 죽거든, 그것이 이런 일이 일어날 조짐인 줄 알아라. 나는 충성스러운 사
제를 세워 그로 하여금 내 마음 내 뜻을 그대로 이루게 하리라. 그의 가문을 일으켜 내가
기름부어 세운 왕 앞에서 길이길이 나를 섬기게 하리라. 그러면 네 집안에서 살아남은 자
는 그에게 가서 밥벌이할 일자리를 얻으려고 굽실거리며, 제발 사제직에 붙여 주어 빵부
스러기라도 얻어먹게 해 달라고 애걸하게 될 것이다.’”(사무엘 상 2장)
예언자 신분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당대 최고의 지도자 엘리에게 ‘하느님의 사람’
이 나타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느님의 이런 계획을 누구라서 막을 수 있겠는
가? 엘리가 그 사람의 전언을 거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엘리가 엘리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처럼 하느님의 사람의 말을 수락하는 진정한 순명 때문이다. 자기
의 예언자 직분의 숭고함과 이스라엘 내에서 누려온 권위에 근거해서 그의 말을 거부하였
다면, 그가 무슨 수로 하느님의 백성의 역사 속에서 바른 예언자로 기억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교회에서는, 이 사회에서는 과연 지도자들이 엘리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에 자기
를 열어 놓고 있는가? 이 질문을 제기할 줄 모르는 한, 엘리 이야기는 죽은 이야기로 묻
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공동체의 생명력을 훼손하거나 훼손하는 사람들을 멈
추게 하지 못하는 어떤 지도자도, 엘리를 외면한 채 오히려 하느님의 사람을 억압하여 하
느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어떤 지도자도 야훼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심판
은 곧 이로 하여 상처받았던 그 신앙 공동체, 그 하느님의 백성에게 생명으로, 사랑으로,
위로로 생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세우기도 하시고 뿌리 뽑기도 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
을. 당신이 뽑은 예언자를 당신이 꺾으실 만큼 그분은 자유로우시다. 이것을 가로막는 그
어떤 세력도 이미 하느님의 사람일 수 없다. 그분은 한결같으시다. 그분이 세우시는 것은
사랑에서이고, 그분이 뿌리 뽑으시는 것도 사랑에서이다. 뽑히는 이에게는 그것이 분노
로, 심판으로 체험되겠지만, 그 뽑혀야 하는 이들에게서 고난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랑으로, 생명으로 체험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분은 언제나 한결같으시
다. 그분의 분노는 그분의 사랑의 다른 면이라는 것을 고백할 줄 아는 그 영성적 정직함으
로만이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직분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의 다스림이 춤출 수 있는 길을
열어가게 될 것이다.
마리아의 찬가는 실로 이것을 열어 갈 사람들의 자기 결단이자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에
게 제기한 도전이다. 또한 그것은 엘리의 아들들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고통당하며 신음
하는 사람들에게 저들을 하느님의 다스림으로 돌아오게 할 것을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간
절한 호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찬가가 한나의 노래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매
우 의미가 깊다. 마리아의 노래는 엘리의 아들들 같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스르는 사람
들을 하느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알고 있던 사람들, 한나의 노래와 엘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이름 없는 예언자의 그 메시지를 알고 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자기네가 알
고 있던 그 이야기와 노래들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 줄 알았던 사람들에 의하여 불려졌던
것이다. 이렇게 옛 이야기와 옛 노래를 자기 당대에 살아나게 할 사람들, 이들이 필요하
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런 노래의 현재화를 갈구하고 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것
을 가능하게 매개하는 역할, 이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이제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직접 입에 올려 보게 하자. 생각해 보라. 마
리아의 저 찬가를 누가 입에 올릴 수 있는가를. 불의한 권력자들이 할 수 있겠는가? 악한
권력자들이? 해방을 빙자하여 해방을 파괴하는 미국 전쟁 세력들이? 법을 배워 법을 파괴
하고, 경제를 배워 경제를 파괴하며, 과학을 배워 과학을 파괴하고, 정치를 배워 정치를
파괴하는 저 소위 주류라는 사람들이? 역사의 무대 전면에서 물러난 처지여서 좀 야박스
럽지 않나 싶기는 하지만, 저 퇴임한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이? 저 낙선한 이회창 전 감
사원장의 아들들이?
그런데 이 교회가 이 노래에 담긴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믿음을 직접 살면서 노래할 수
있는 영성적 뱃심과 용기를 길러 주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하지 않는
지도자는 누구를 위한 지도자인가? 이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살면서 말할 수 있게 하라.
그
것이 바로 하느님의 독화살에 맞아서, 그 독에 사로잡혀 독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살지 않
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분의 독화살에 맞아 그분의 뜻에 따라 죽는다
는 것은 그분의 말씀, 그분의 다바르, 그분의 다스림에 닿아 춤춘다는 것을 말한다. 참으
로 하느님의 말씀을 삼킨 예언자 예레미야가 그 말씀을 자기 안에 가둘 수 없었는데, 우리
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그분의 다스림에 닿아 터져 나오는 노래를 무슨 수로 우리의
이 작은 몸둥아리에 가두어 놓을 수 있겠는가?
한 사제 교수가 말한 적이 있었다. “세례자 요한에 관한 이야기들, 그거 일종의 사기야 이
사람들아” 하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어도 하지 않았었노라고. 이때 내가 말했다. 신부님은
말을 않으셨지만, 학생들, 미래의 사제들은 그런 말을 듣지 못하면서 순치되었고, 나중에
사제가 되어서는 아닌 것을 아닌 것으로 말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하느님의 ‘정의의
독’을 잃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그분은 당연히 아셨다. 우리는 이런 속에서 하느님의 독
을 무력화시켜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연습하게 하라. 살게 하라. 그리고 그것을 말하게 하라. 그들의 생명의 길을 파괴하
는 잘 났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라.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하라. 하
느님의 백성,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진정 하느님의 독에 닿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위
해서다.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서 온통 그분의 정의로 살아갈 그 충만한 미래를 위해서 촛
불처럼 사그러들기 위해서이다. 길을 열고는 없어지자. 교회야, 사제야, 수도자야, 신도
야, 없어지자. 그들이 다 살게 하자. 원의 중심이 없어서 있고, 원의 점들이 그 없는, 보이
지 않는, 중심을 살듯이, 그렇게 예수 안에서 살자, 이 땅의 민중들아, 미국의 시민들아.
황종렬 / 1957년 서울 출생 / 1980년부터 신학공부, 평신도로서 주체적인 한국신학 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