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종묘/창경궁
2009.11.6
지난 5월 경복궁 문화유적답사에 이어 서울의 종묘와 그리고 인접한 창경궁 답사의 기회가 있 었다. 작금이 고궁의 단풍이 한창인 때라 가슴을 설레게 한다. 종로3가 종묘의 정문 앞에는 10시 모임시간이 되기도 전에 강남논어반 수강생들이 야외복장 차림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침에 한줄기 소나기가 퍼부은 다음이라 은근히 비 걱정을 했지만 햇빛이 비치며 도리어 먼
지도 나지 않고 산책에 알맞은 날씨였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데도 좀처럼 기회가 없어 가 보지 못한 종묘- 더구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와 종묘제례행사에 늘 관심은 있었지만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어 대단히 기대가 컸다.
이날 답사는 아침 10시부터 12시40분까지 2시간40분간 이어졌다.
관람코스를 따라가면서 문화재 건축물 마다 해박한 노대홍 선생의 해설을 들었다.
사진을 중심으로 종묘와 창경궁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해본다.
1. 종묘(宗廟)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셔 제사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드라마를 보면 대신들이 임금에게 종묘사직을 보존해 달라며 상소를 올리는 모습을
곧잘 보게된다.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
당이며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으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도 의식을 행하였다
종묘는 1395년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그리고 서쪽에 사진단을 둔다는 유교예법에 따른 것이다. 지금 종묘는 임진
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한 것으로 건립후 모시는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
물 규모를 늘려 현재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이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
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34위의 신위를 모셨다. 왕위에서 쫒겨
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이곳에 모시지 않고 대신 왕위에서 쫓져났다가 숙종 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셨다.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으로는
정전,영녕전,공신당,칠사당이 있다. 그리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재궁,향대청,악공청,
전사청 등이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묘제
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본전과 영녕전은 평상시에는 개방이 되지 않는다. 정전과 영녕전 내부의 모습은 홍보관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제례와 제례악을 재현하는 영상물을 홍보관에서 볼 수 있었다.
종묘 정문
외대문(外大門)은 종묘의 정문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단정
하면서 위엄을 과시했으나 문앞은 흙이 쌓여 바닥이 높아지면서 계단이 있던 흔적만 있다.종묘는 다른 궁궐
처럼 5색단청이 아닌 3색으로 화려함을 피하고 있다. 그리고 건물에는 현판이 없다.
야외수업을 위해 대기중
세계문화유산(유네스코) 종묘전도(건물 위치도)
종묘 전체의 전경
1663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현재 종묘 시민공원에 있다. 태종이 종묘와 궁궐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존경의 표시로 가마나 말에서 내리도록 정하고 종묘 정문 앞 오른쪽에 새워둔 나무 푯말을 현종 때 돌로 된
하마비로 세웠다.
문화재 외에도 단풍구경도 볼만--
홍보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종묘제례
조선시대의 종묘제례는 왕이 친히 행하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서 밤중에 지냈으며,
왕을 비롯한 왕세자, 여러 제관, 문무백관 등이 참가하였다. 종묘제례는 정전에서는 네계절
첫달 정해진 날과 섣달그믐을 합쳐 1년에 다섯번, 영녕전에서는 봄,가을 정해진 날 두번을 봉
행하였다. 지금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낮시간에 봉행하고 있다. 종묘제례는 길사(吉事)여서
의례도 길례(吉禮)로 받들었다.
<제례순서> 종묘제례는 정성과 엄격한 격식을 갖춰 치러졌다. 제례는 제관이 정해진 자리에 나가 각자 맡
은 역할을 할 준비를 하면서 시작된다(就位).다음으로 혼을 맞기 위해 향을 피우고 바닥의 관
지에 울창주(술)를 부어 혼백을 불러들여 신에게 흰색 모시를 바친다(晨관禮). 제사에 사용할
희생의 털과 피,약한 내장들을 올리고 기름바른 간 및 기장,피,쑥 등을 숯불화로에서 태운다
(薦俎禮). 신이 즐기도록 왕이 첫술잔을 올리고 두번째 잔과 세번째 잔은 왕세자와 영의정이
올린다(獻爵禮). 왕이 대표로 술과 고기를 먹음으로써 조상이 주는 복을 받는다(飮福受조禮),
제사에 올렸던 축문과 폐백을 모두 모아 예강에 가서 태우는 것으로 제사는 끝난다(望燎禮).
종묘제례악은 악기,노래,춤을 갖추고 종묘제례 의식에 맞추어 연행하는 음악이다. 종묘제례
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제례 때 줄을 지어 추는 춤을 일무(佾舞)라
하는데 조선은 제후국으로 6일무(36인이 춘다)였으나 고종이 황위에 오른 이후 8일무(64인)
를 추었다.
제1전시실(신실 내부 재현)
향대청(香大廳)일원
향대청은 향청과 집사청으로 구성된 건물이다. 향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제사 예물을 보관하던 곳이고,집사청은 제사에 나갈 집사자들
이 대기하면서 재계를 하는 곳이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잡고 있고 두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져 있다. 향대청 남쪽으로 망묘루(望廟樓)가 있고 그 뒷쪽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 망묘루(望廟樓)는 제례 때 임금이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제향 때 왕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면서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임시 종묘자료실로 사용되고 있는 망묘루
향로(香路)/향대청 내의 종묘제례 때 향과 축문을 모시는 길이라는 의미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서 강의에 여념이 없다.
빨갛게 익은 감이 탐스럽게 메달려 있다.
재궁(齋宮)일원
재궁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으로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한다. 마당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
이 있고 담으로 둘러져 있다. 왕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
을 정재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협문으로 나와서 정전과 영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정전 신실의 수를 늘리기 위해 증축할 때마다 재궁은 동쪽으로 옮겨 다시 지
어졌다.
재궁(齋宮)일원
재궁(齎宮) 어재실과 세자재실
판위대(版位臺)/종묘 제례를 행하는 제관은 맨 처음 헌작(獻爵)하는 초헌관, 두 번째로 헌작하는 아헌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헌작하는 종헌관등으로 구분된다. 왕이 몸소 제사를 올리는 친제(親祭) 때는 왕이 초헌관, 왕세자가 아헌관, 영의정이 종헌관이 된다. 제례 때 제관인 왕과 왕세자는 어숙실 에서 재계(齋戒)를 한 후, 어숙실에서 정전과 영녕전 동문으로 난 어로를 따라 묘정에 들어와 각각 정해진 자리인 전하판위(殿下版位)와 세자판위(世子版位)에 이르러 제사를 올릴 예를 갖춘다
드므/옛사람들은 불 귀신이 아주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드므에 물을 가득 채워 놓으면 불 귀신 이 드므를 지나가다 물에 비친 자시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도망치도록 만든 것이다. 불 귀신을 쫓기 위해
겨울에도 드므에 있는 물이 얼지 않도록 살폈다고 한다.
노대홍선생의 열강
정전(正殿)일원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후 궁궐에서 3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부묘) 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곳으로 남문은 신문
(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은 제례 대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은 악공,춤을 추는
일무원,종사원이 출입한다. 정전의 19칸의 신실(神室,감실(龕室)이라고도함)에는 태조를 비
롯한 왕과 왕비 49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정전의 월대 아래 동쪽에는 공신당(功臣堂),서쪽에는 칠사당(七祀堂)이 있다. 공신당은 역대
왕들의 공신들 83위를 모시고 있고 칠사당은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진 사당이다.
정전 신위 봉안도
정전과 영녕전의 각실별 봉안 왕
정 전(正 殿)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를 비롯 역대 왕중에서 특히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좌)정전 신실의 판문은 제례가 있을 때만 열리며 판문 앞의 툇간에 제상이 차려진다. 판문을 옆에서 보면
사이가 벌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혼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일부러 문을 조금씩
틀어지게 만든 것이다.
(우)정전의 신실에는 큰 업적을 남긴 19위의 왕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신실 한 칸에는 한분의 왕과 그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총 35칸의 긴 일자형(一) 건물로 조선 역대 왕과 왕비 49위(位) 신주를 19실에 봉안하고 있다.
박석이 깔린 정전 앞마당/ 뒷쪽에 공신당이 보인다.
하월대/하월대는 동·서월랑 양끝에서부터 남쪽 신문 앞까지
정전 울타리 안을 가득 메운다. 크기가 동서 109m 남북이 69m로 단일 월대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
지붕에는 잡상(어처구니)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 7개가 서 있다.
칠사당
망료제를 지내고 소지하는 망료단
영녕전(永寧殿)일원
세종21년에 정종의 신위를 정전에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위
를 다른 곳으로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이다. 영녕전은 신위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
에서 조묘라고도 한다. 정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좀 친근감이 있게 지어졌다. 이중으로 된 월
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남,서 세곳에 문을 두었다. 현재 영녕전에는 가운데 4개의 방을
양쪽 옆에 딸린 방들보다 높게 꾸미고, 각 방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와 왕비
들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서쪽 5번째 방부터 16번째 방까지 각각 정종과 왕비, 문종과
왕비, 단종과 왕비, 덕종과 왕비, 예종과 왕비, 인종과 왕비, 명종과 왕비, 원종과 왕비, 경종과
왕비, 진종과 왕비, 장조와 왕비,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태자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중앙 본실인 4감실과 서협실과 동협실을 합쳐 모두 34위의 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보물 제821호 영녕전
영녕전 신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다.
궁궐 지붕의 잡상은 3,5,7,9 홀수인데 이곳은 4개(음수)인 것이 특이하다.
행사때 천막을 치는데 사용한 천막고리
전사청(典祀廳)일원
전사청은 제례를 치를 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집기들을 보관
하였다. 네모난 마당 둘레에 'ㅁ'자 모양의 건물이 있고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
이 남아 있다. 정전 동문 옆의 수복방(守僕房)은 종묘를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하엿고 그 앞에
찬막단(饌幕壇)과 성생위(省牲位)가 있다. 전사청 동쪽에 우물인 제정(祭井)이 있다.
전사청/ 전사청은 종묘대제 때 쓰는 제물, 제기 외에 여러 가지 기구와 운반구를 보관하던 곳이다
수복방/정전의 동문 옆에는 있는 수복방은 종묘를 지키고 제사를 돕는 낮은 계급의 관리나 노비가 지내던 곳이다. 수복방의 앞에는 제사 때 음식 차림을 하기 전에 제물을 심사하던 찬막단이 있다.
찬막단(饌幕壇)은 제례 전에 준비한 제삿상을 올려놓는 곳이다
제정/전사청 옆에는 제사에 쓰이는 정결한 우물인 제정이 있다.
제정은 우물을 낮은 담장으로 둘러 싸고 남쪽에 문을 내어 출입하게 하였다.
다음은 창경궁 관람순서이다. 종묘에서 도로 위 다리를 건너서 창경궁으로 가게 되어 있
었다. 옛날에는 창덕궁, 창경궁, 종묘가 모두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시절 도시개발
에 따라 도로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2. 창경궁(昌慶宮)
창경궁은 조선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1484년완공)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궁과
경계없이 사용하였고 두 궁궐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칭하였다. 세종시 상왕 태종을 위해 수강궁
을 세웠는데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면서 이궁(離宮)으로서 활용빈도가 높아졌다.
다른 궁궐이 모두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남북으로 건물을 배치한데 비해 창경궁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창경궁은 자연지형을 고려하고 기능과 용도에 따라 생활의 편
의를 추구하였기에 친근감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궁궐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다른 궁궐과 같이 불에 탔다가 1616년(광해8)에 재건되었다. 이 때 재건된
명정전(明政殿)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 건물이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일제의 훼손에 의해 그 존엄성이 깡그리 없어지고 1907년부터
창경궁 안 건물 대부분이 헐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일반에 공개하였고 1911년에는 이름마
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종묘에서 창경궁으로 연결되는구름 다리 밑 도로에는 많은 차량이 다닌다.
창경원 경내로 들어와 정문인 홍화문으로 가고 있다.
낙엽이 떨어진 고궁에는 추색이 완연하다.
빨간 핏빛으로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가을을 감상한다.
모처럼 야외나들이는 즐겁기만 하다.
홍화문(弘化門)일원
창경궁의 중심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보물 제384호)도 동쪽에 세워졌다.
1484년(성종15)에 창건, 임란으로 소실된 후 1616년(광해8)에 재건되었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
로 좌우에 한쌍의 십자각을 세워 품격 높은 대문 형식을 갖추었다. 홍화문을 통과하면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500년도 더 된 옥천교(玉川橋)가 놓여 있다. 옥천교 다리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보물 제3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현세자/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9년만에 돌아왔다. 이 때 백성
들은 지금 마포에서 이곳 홍화문까지 가득 길을 메우고 눈물을 흘리며 맞았다.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훌륭한 외
교관으로 역할을 한 소현세자가 새로운 변혁을 구상하던 중 귀국 두달만에 병이들고 누운지 3일만에 병사하였
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청나라의 신임을 받았던 세자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대두됨은 당연한 일--
동향 2층누각인 창경궁 정문 홍화문
금천과 옥천교
명전전(明政殿)일원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신하들의 하례,과거시험,궁중연회 등의 공식적인 행사
를 치루었던 정전(正殿)이다. 1484년(성종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
해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며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전은 단층의 단아한 규모이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
다. 앞쪽 마당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
의 격식을 갖추었다. 명정문(보물 제385호)과 행각이 조정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은 국보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전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명정문을 통과해야 한다.
노대홍 선생의 해설에 경청하고 있다.
명전전 앞마당 조정에는 박석이 깔려있고 중앙에 삼도가 있다.
답도/ 명정전 오르는 계단 답도에 봉황문양을 새긴 사각의 큰 돌이 놓여 있다.
2단의 답도 옆에서 지키고 있는 해태상
꽃과 구름 문양이 아름답다.
용상(옥좌) 뒤로 일월오악(오봉)도 병풍이 둘러쳐저 있다.
천정에는 암수 봉황이 그려져 있다/임금의 상징이다.
창살은 국화 문양이다
드므/소화용이라기 보다 불예방용 /불귀신이 처마로부터 내려오다 거울에 자기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난단다.
문정전(文政殿)일원
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
정전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 찾아보기 힘든다.
편전이지만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 강점기에
흘렸다가 1986년에 문정문,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다.
사도세자의 비극
1762년 윤5월13일 문정전 앞뜰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은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하였다. 당시 노론이었던 세자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도 합세하
였고 이날 생모 영빈 이씨가 유언비어를 고하여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에 이른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갇혀 더위와 허기로 신음하던 세자는 28세의 짧은 생을 비참히 마친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
후 그를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정전
숭문당(崇文堂)과 涵仁亭)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
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경사진 면을 교묘히 이용하여 뒤에
는 낮은 주초석을 사용하고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었다. 영조의 친필 현판이
남아 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숭문당
숭문당 옆의 편전
함인정은 사방이 뚤려 있고 네곳에 편액이 걸려있다.
유명한 도연명(陶 淵 明 호:陶潛)의 사계절 시 현판이 네곳에 걸려 있다.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봄이면 못에 물이 가득 차고
夏雲多奇峯 하운다기봉 여름의 구름은 기묘한 봉우리를 만든다.
秋月揚明輝 추월양명휘 가을에 뜨는 달은 유난히 밝게 빛나고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겨울철 산마루의 외로운 소나무는 푸르구나
경춘전(景春殿)과 환경전(歡慶殿)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진다.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
은 대비의 침전이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했고 많은 왕후들이 여기서 승하한 것
으로 보아, 대비뿐만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 하다.
이에 비해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이라고 친히 현판을 걸기도 했다.
환경전에서 중종을 진료한 대장금
조선시대 의녀들 둥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이가 대장금이다. 대장금은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자순대비의 병을 치료한 후 이 공으로 중종의 병을 전담하게 된다. 신하의 반대에도 불
구하고 중종은 의원보다 대장금을 끝까지 신뢰하여 진료를 맡겼다. 중종은 오랜 풍증과 합병증으로 1544년 환경
전에서 승하하였다.
경춘전과 환경전 위치도
경춘전에서 정조가 태어났다.
환경전
높은 당장에 문이 있다. 창덕궁 담이다.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가 연결된다.
통명전(通明殿)과 양화당(養和堂)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
적한 박석을 깔았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엿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
용된 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양화당은 내전의 접대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다.
지금의 통명전과 양화당은 1834년에 재건한 것이다. 통명전은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어 있다.
통명전과 장희빈의 저주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왕자 균을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숙종대는 당파의 정쟁이 심하였고 왕은 자신의 여자들을 이용해 왕권강화를 꾀했다. 균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
에서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켰다. 왕비까지 되었다가 다시 강등된 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
와 동물의 시체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어 두었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으니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채
4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통명전과 양화당 위치도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이므로 양화당과는 달리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양화당은 용마루가 있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양화당 동쪽에 자리한 영춘헌 일원에는 주로 후궁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향인 영춘헌
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
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하기도 했다.
영춘헌과 정조 독살설
영춘헌은 왕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믿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어서 정조의 검약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정조는 등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49세로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뛰어난 의학 실력을 갖춘 정조는 의원과 직
접 의논하고 약방문을 지슨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진찰을 시작한지 15일만에 죽음을 맞게 된다. 마지막 남긴 말
이 정순왕후의 거처인 '수정전'이었기에 독살설이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집복헌과 영춘원
집복헌 안마당
태실과 성종대왕태실비
궁궐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3~7일 사이에 길한 날을 잡아 태와 태반을 깨끗이 씻고 술로 갈무
리해 태항아리에 넣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밀봉된 태항아리는 수개월 내에 태실을 신전에 봉안
했다. 성종 태실이 창경궁에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이왕가박물관의 진열품으로 사용
하기 위해 옮겨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단을 따라 후원으로 오른다
자경전 가는길- 엄청나게 큰 바위(반석)를 지난다.
바람의 방향을 재는 보물 제846호 풍기대
성종대왕 태실비
춘당지(春塘池)일원
춘당지는 현재 두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 왕조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면적이 넓은 앞쪽 큰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었다.
이 곳에서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려 논을 가는 시범을 임으로서 풍년을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놀이를 하는 유원지로 만들었다.
연못 가운데 섬은 1986년에 조성하였다.
대춘당지/예전에는 논이었다.
춘당지 속에 가을의 파란 하늘이-
창경궁내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8호
성종원년(1470년)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인 1911년 창경궁에 이왕가박물관을 건립할 때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세운 탑으로 8각 평면 위에 7층 탑신을 세운 석탑이다.
고궁의 단풍
단체사진
춘당지에서 단체사진을 남기고 오늘 야외수업을 모두 마쳤다.
만추의 가을 단풍진 고궁인 종묘와 창경궁에서 문화유적을 관람하면서 가진 야외수업은 뜻 깊고
유익한 즐거운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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