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불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후략>
세상살이가 팍팍하다 느껴질 때, 마음 속 켜켜이 고인 이야기들을 툭 터놓고 싶은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 우리는 한번쯤 위의 詩(유안진 시인 작/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떠올려 보았을 것이다. 어둡고 울퉁불퉁한 속내를 들켜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친구,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고 돌아와도 언제나 따스한 품을 내어주는 고향과도 같은 사람. 그가 가족이든 친구든 스승이든, 우리는 그런 사람을 한두 명쯤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설령 그런 대상이 지금은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 남은 생애에 그런 버팀목과도 같은 존재가 나타나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우리는 끝내 거두지 못하리라.
등이 휠 것 같은 내 삶의 무게를 기꺼이 대신 나눠 지어줄 수 있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 어린 시절 고향마을을 지키던 우람한 당산나무처럼 언제라도 달려가 뛰어놀 수 있고 기댈 수도 있는 의지의 대상.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에겐 이렇듯 따스한 위로와 조언과 상담역할을 해줄 수 있는 그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렇듯 인생여정에서 ‘든든한 기댐처이자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사람 또는 그러한 주변 환경’을 가리켜 역학에서는 반안살(攀鞍殺)이라 한다.
살(煞·殺)이란 음양오행에서 기인한 신살神殺의 통칭으로 강력한 기운을 뜻하는 말이다. 살은 모두 12가지로 겁살, 재살, 천살, 지살, 연살(도화살), 월살, 망신살, 장성살, 반안살, 역마살, 육해살, 화개살 등이 있다. 여기서 12라는 숫자는 자연과 인간이 맞물려 돌아가는 이치 즉 자연의 순환작용(하루 12시간×2, 1년 12개월)을 아우르는 것으로, 12신살神殺이란 인간의 오욕칠정을 비롯해 한 개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작용하는 감성의 총합이라 하겠다.
대개의 신살神殺이 부정적인 기운이 강한데 반해, 반안살은 장설살과 함께 긍정적인 기운이 강한 길성(吉星)으로 인정되고 있다. 약간의 차이라면, 장성살이 긍정적이나 뭔가 뒤를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반면, 반안살은 마냥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사랑방’과도 같은 최고의 신살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길한 방향을 일러 반안살(攀鞍殺) 방향이라 할 만큼, 행운이 보장되고 비밀 또한 보장되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말하자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살’이라 해서 모두 사람에게 나쁜 것은 아니다. 명리학은 유행학이다. 모든 유행이 동시대에 맞는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하듯이, 이 신살의 해석 또한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번지점프 하는 젊은 남녀들이 아찔한 높이에서 뛰어 내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뛰어내릴 수 있는 용기는 바로 그들의 발목을 묶고 있는 줄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쉽지 않은 인생길 걷다가 무릎이 깨지면 호호 불며 약을 발라주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처럼 엄청난 일(시련)이 닥쳐왔을 땐 안전한 보호대처럼 내 몸을 지켜주고 뒤를 봐주는 든든한 존재. 그런 누군가가 자기 주변에 있다는 것은 분명코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큰 힘과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아니 신앙과도 같은 그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기에 세상살이의 추위와 외로움 따위는 툭툭 털며 이겨낼 수 있으리라.
하여, 언제라도 상대의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부탁하고 요청할 수 있는 기댐처와도 같은 친구를 누군들 갖고 싶지 않겠는가. 한바탕 부부싸움을 한 뒤에 집을 나와 부끄러워하지 않고 찾아가 하룻밤 신세를 져도 전혀 미안하지 않는 그런 사랑방 같은 친구를 누군들 두고 싶지 않겠는가. 아무 조건 없이 나의 이성과 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지란지교를 우리는 간절히 소망한다. 하지만 이런 든든한 의지처가 어찌 노력 없이 거저 생기겠는가. 이런 지란지교는 성실한 삶의 자세 없이 그저 꿈꾼다고 운 좋게 주어지는 로또복권이 아니다.
나의 웬만한 허물이나 잘못쯤은 너끈히 감싸주고 내가 잘한 일에 기꺼이 박수와 응원을 보내주는 엄마의 마음과도 같은, 모든 것을 품는 대지의 여신과도 같은 포근한 에너지로 나를 지지하는 기운. 그리하여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찬사와 인정은 말할 것도 없고 타인으로부터도 절대적 인정과 무한신뢰를 받는 느낌. 반안살은 이처럼 성실하게 살아온 나의 지난 생애에 대한 훈장이나 트로피와 같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대가로 받는 휴가 내지는 보너스 같은 것이 바로 반안살攀鞍殺이다. 문자 그대로 ‘누군가가 나를 말안장에 앉히는’, 아니면 최진사 댁 셋째 딸처럼 땅을 밟지 않는 대우를 주변사람들로부터 받는 것. 그래서 가슴 뭉클하고, ‘더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 다짐하게 만드는 게 이 반안살이 갖는 기운이다. 최선을 다한 명품인생에 붙여지는 이름. 이것이 반안살인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남긴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인 시스티나성당의 천장벽화를 그릴 때 있었던 유명한 일화다. 그가 받침대 위에 올라가 누워서 천장 구석에 인물 하나를 정성스럽게 그려 넣고 있는데, 한 친구가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이보게. 그렇게 구석진 곳에 잘 보이지도 않는 인물 하나를 그려 넣느라 그 고생을 한단 말인가? 그게 제대로 그려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누가 알아본다고…”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그야 내가 알지!”
맞다.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래서 스스로 최선을 다해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직업의 종류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존경심이 생긴다.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이고, 자신의 존재를 소중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의 근실함이 언젠가는 자신을 존귀한 자 앞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정직하며 최선의 삶을 산 역사적 인물 가운데 이덕무라는 사람을 꼽을 수 있겠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는 서얼 출신의 가난한 서생이었다. 그는 출세는커녕 좋아하는 책조차 마음 놓고 보지 못할 만큼 궁색한 세월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독서를 쉬지 않았으며, 밝은 지식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리란 포부를 버리지 않았다.
다행히 39세 되던 해, 그는 정조 임금의 발탁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비록 9품에 불과한 말직이었지만 책을 좋아하는 이덕무에게 왕실도서관의 검서관은 재능을 활짝 꽃피울 수 있는 최적의 자리였다. 그는 혼신을 다해 맡은 일을 꼼꼼히 해냈다. 책을 편집할 때는 오자 하나도 허용치 않았고, 책을 읽을 때는 읽은 대로 실천하고자 최선을 다했으며, 책을 쓸 때는 정확한 표현으로 거짓 없는 내용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책 읽는 자의 도리이며 책무라고 생각하면서. "문밖을 나서면 모두 아름답지 못한 일이고 책을 펴면 부끄러움 아닌 것이 없다"고 탄식하는 이에게, 이덕무는 정말 부끄러운 일은 책을 읽고도 세상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생전의 그를 두고 사람들은 무능한 원칙주의자라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의 글과 삶이 그 이름과 함께 또렷이 빛나는 것은 빈궁 속에서도 읽은 대로 살고자 치열함을 놓치지 않았던 그의 엄격하고도 근실한 삶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타인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는 사람의 삶의 궤적 뒤에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인생이라는 판에 올라서 있다. 그러니 내가 타고난 패를 고려할 여지없이 무작정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다행히 자신의 사주(특히 日支)에 반안살攀鞍殺을 깔고 있으면 한결 수월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래의 故 법정스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