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다.
많은 예비신자가 교회를 두드리는 이유이다.
사교클럽에 가입하듯이 입교하는 신자도 있다.
좋은 이미지를 준다.
최근 대통령 후보로 나오는 분 중에는 가톨릭신자가 많다.
술, 담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제사 지낼 수 있고,
익명성을 유지한 채 남의 간섭 받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이 가톨릭이라는
생각이 일반인들에게 주입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이것이 가톨릭신앙의 전부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답을 도보성지순례에서 찾고 싶었다.
9월 22일 토요일은 추석연휴가 시작되는 날이다.
명절 전에는 어릴 적처럼 기분이 붕 뜨고 마음은 분주하다.
자매님들은 명절 음식 준비로 몸까지 분주하다.
당초 15명이상이 참석하겠다고 의사를 밝혔으나
실제 참석은 6명만 한 이유일 것이다.
주최한 40기에서는 이건육 시몬 동기회장님과최영길 안토니오형제님
김종숙 페브로니아자매님, 고광환 야고보 4명이 참석하였고
43기로 기억하는 박원배 시메온형제님과
김득원 가브리엘 형제님이 참석하였다.
박원배 시메온 형제님은 7월12일 도보성지순례에도 참석하셨고,
김득원 가브리엘 형제님은 순교자현양회에서 활동하신 적이 있고
현재 동문카페에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를 현대말로 고치고
맞춤법을 맞추어 거의 새 번역 수준으로 올리고 계시는 분이시다.
명동성당에 9시 20분경 집결한 후 성모동산에서
기도를 바친 후 출발하였다.

<출발전 기도 - 순례지마다 기도를 드렸다-안내문 및 기도문은 이건육 시몬회장님이 준비>

<순례지마다 가브리엘 형제님이 책에서 볼 수 없는 살아있는 강의를 함>
명동성당은 지하성당에 앵베르 범주교, 샤스탕 정신부, 모방 나 신부, 김성우 안토니오,
최경환 프란치스코님등 다섯 분의 성인과 순교자 네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당을 지을 때 경향 각지에서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공사를 도왔다는 사실을 김득원 가브리엘 형제님이 들려준다.

<부식된 벽돌을 떼어내고 보수공사가 한창인 명동성당>
9시 40분경 명동성당을 출발하여 서소문성지로 향하였다. 총 길이 약 14.7km거리에 이르는
순례의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 앞에서>
서소문은 이 자리에서 순교한 98분의 순교자 중 44위가 성인품에 오름으로써 가장 많은
순교성인들이 탄생한 거룩한 성지가 되었다..
서소문 성지는 정확한 자리에 장소를 확보하지 못하던 중 서소문 공원 안에 순교자 현양탑을
마련하고 기념하고 있다. 서소문 성지에서 가장 기억나는 성인은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다.
아마 평신도로서 가장 큰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리라.
그는 어려운 시기에 아홉 차례 북경을 방문하여 성직자 영입운동을 하여 성사시켰고,
한국 천주교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를 저술하였으며, 앵베르 범주교에게 뽑혀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성품을 받지 못하고 순교하였다.

<현양탑 앞에는 헌화가 끊이지 않는다>
현재 서소문공원은 순교자현양탑이 있어 과거의 순교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나
공원은 노숙자들의 쉼터가 되어 노숙자들이 낮잠 자고, 소일하고 있어서
안타깝게 느껴진다.
서소문 성지를 떠나 중림동(약현)성당에 도착한 시간이 10시 40분이다.
중림동성당은 서소문성지를 관할하는 성당인데 한국에서 첫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가브리엘 형제님의 설명에 따르면 꼬스트 신부가 명동성당을 대규모를 신축하기에 앞서
그 축소판인 약현성당을 지어보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중림동성당 - 도심속에 고즈넉한 환경을 보전하고 있다>
중림동성당은 1998년에 술에 만취한 행려객의 방화로 전소되었다가
1년 6개월만에 복원되어 불에 타기전보다 더 원형에 충실해졌다고 한다.
중림동성당에 얽힌 나의 추억을 보면 1980년경 동료직원이 이곳에서 결혼을 하는데
성가대의 성가가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다. 그때 나는 신자가 아니었는데 결혼한다면 반드시
성당에서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염원대로 혼배미사를 홍제동성당에서 드렸다.

< 중림동성당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 - 아름다움과 기품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중림동성당은 도심 속에 아담하고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어 그냥 둘러봐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곳인데, 서소문순교자 기념관과 성인의 유해 유물 등 각종 보물을
간직한 곳이다.
중림동성당을 떠나 당고개성지를 향해 출발한 시각이 11시 10분경이다.
12시 당고개성지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성지주변은 재개발이 진행중인 듯 건물들에 페인트로 철거라는 글씨가
크게 쓰인 집이 많았다. 많은 집이 이사간 듯 을씨년스러웠다.

<당고개 성지 찾아가는 길- 이주가 진행되고있는 골목을 지나가야 한다>
성지 성당에 들어서니 단장의 미아리고개 곡이 풍금으로 반주되고 있었다.
미사전인데 성가연습을 하지 않고 대중가요를 연주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미사 중에 이 곡은 당고개순교자찬가곡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행중 최영길 안토니오 형제님 아버님이 6.25 때 북한군에 의해 끌려가다
처형당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음악의 사연이 아프게 다가왔다.
이곳 당고개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10 분이 순교한 곳인데 아홉 분이 성인품에
오르셨고, 최양업신부님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만이 젖먹이 때문에
일시 배교했다 순교하였다고 하여,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당고개 성지 전경>

<당고개 성지 전경 - 엄숙히 기도하는 순례자 앞에서 숙연해진다>

<당고개 성지 성당 입구 - 성당 위에 성지가 있다>
이 당고개 순교성지에서 순교사실은 최양업신부님이 정리하여 보고하는데,
최양업신부님은 자기 어머니에게는 일체의 사사로운 정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보고하였다.
시복시성 과정만을 본다면 천주교는 인정하고는 거리가 먼 듯이 느껴진다.
이곳 당고개 성지에서 김밥 한 줄씩으로 요기를 하고
다음 목적인 새남터성지로 향했다.(하편에 계속)
새남터성당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반경이다.

<새남터 성당 전경>
"새남터는 한국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분 중 11분이 순교하였으며
이 11분 중 8분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분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 순교성지이다.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주교 앵베르 성인, ‘기해일기’ 의 현석문 가를로 성인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9분의 성인유해가 새남터에 모셔져 있다."(새남터성당 홈페이지에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성모자상>
이곳 성지성당은 88올림픽을 맞아 외국인들에게 한국적인 건축양식을 선보이기 위하여
명지대 박태연교수가 설계하여 순 한국식으로 한국산 건축자재만을 사용하여
1987년도에 완공하였다. 건물 안팎으로는 한국적인 성화와 성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절두산성당을 향하여 출발할 차례다.시간은 2시 50분경이다.
절두산성지까지는 약 7km의 거리로 상당한 거리이지만
한강시민공원을 통해 걷기 때문에 순례도중 가장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한강변에는 낚시꾼을 흔히 볼 수 있다. 커다란 잉어를 잡고 기뻐하고 있다>

<63빌딩과 여의도 일대의 빌딩군>
순례길 주변에는 낚시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또한 얼마 전까지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63빌딩도 볼 수 있다.

<순례의 종착지 절두산성지가 보인다. 자전거도로에는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즐긴다.>
1시간 반정도 걷다 보니 절두산성지에 이르게 되었다. 도착한 시간은 4시 10분경이었다.
“절두산성지는 경치가 수려하여 풍류를 즐기던 명승지였습니다.
그러나 고종 때 프랑스 함대가 이곳까지 침입하자,
대원군은 그 책임을 물어 이 자리에서 천주교인들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참수한 후
한강 물에 던짐으로써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당과 기념관을 건축하였고,
기념관은 건물 3층과 종탑 성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 2,3층은 교회사관련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고,
순례자 성당 지하 성해실에는
성인 28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명동성당 순례기에서)

<한강시민공원에서 절두산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김대건 신부님상 앞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고 잘 정비된 야외정원이나 박물관 등 볼거리와
전철이나 자가용 등 접근성까지 좋아서인지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우리도 순례의 종착점에서 김대건신부님상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성당과 박물관을 순례하였다.
성당 입구에 있는 ‘우리는 죽었지만 살았습니다’ 라는 대형 글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도보성지순례를 통해 얻고자 하던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나는 한가지 사건이 머리에 떠올랐다. 은행에 다니고 있었던 1996년에
나는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본점의 특검, 수사기관의 수사, 재판을 받게 되고 지방신문 사회면에도 대서특필되었다.
나는 세상에서 외면을 받은 것 같았다. 교우들도 차가운 시선을 보이는 것 같았다.
오직 내 편이 되어준 사람은 아내뿐이었다.
실추된 명예와 암담해 보이는 미래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그 때 나에게 손을 내민 분이 예수님이셨다.
지친 나에게 힘을 주시고, 절망한 나를 위로해주시고, 용기를 주셨다.
담담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시고 수사기관에서도 담대하게 사건을 진술하게 하셨다.
그때 나는 주님이 함께 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결국 모든 혐의는 무혐의로 밝혀지고 재판은 승소하였다.
그 때의 체험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절두산성지의 예수님은 십자가 대신 큰 칼을 쓰고 계신다>
평범한 나에게도 이러한 사랑을 주셨는데,
하물며 순교자들에게는 그 분이 얼마나 더 큰 사랑을 주셨을까?
세상에서는 버림받은 듯이 보이고,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내어놓게 되었지만,
그 분들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셨을 것이다.
함께 하시면서, 사랑에 찬 위로(필리 2,1)를 주시고,
힘과 용기(신명 31,6)를 주시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평화(요한 20,19)와 기쁨(시편 68,4)을
맛보게 했으리라.
또한 그분들은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을 미리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 생명의 화관(묵시 2,10)을 받았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혜서 3,2)
그분들은 영원한 생명(요한 17,2)을 얻고 의로움의 화관(2티모 4,8)을 쓰고서,
주님 곁에서 날마다 천상잔치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박물관에는 혜화동성당의 103위 성인도의 복사본이 전시되고 있다>
느슨해진 신앙을 바로잡으라고 그 분들이 말씀하신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티모 6,12)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몸은 노곤하지만, 기쁨이 잔잔히 밀려왔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