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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설 연휴가 이제 곧 시작되네요.
그야말로 새로운 한 해의 출발을 알리는
큰 명절이다보니
이맘 때 쯤이 되면 몸도 마음도 조금 바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구정이후부터는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하는
다짐 같은 것도 하게 될 것이고,
발원이나 소망 같은 것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가을 겨울 성지순례도 다녀온 터고,
다녀와서 광주로 거처를 옮기고 이제 좀
도량이 정리가 되고,
제 마음도 이 곳 관음사와 일치를 이루고 있다보니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발원과 정진의
밝은 한 해를 시작해야 겠구나 하는 그런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2월부터는
관음사에서도 불교강의와 경전강의, 참선법회가 새롭게 시작되고,
목탁소리 또한 새로운 포교당 겸 법우님들의 지대방인
목탁소리 다음 카페를 개설하였으며,
영문 홈페이지 또한 조금씩 준비를 하는 중에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변화와 새롭게 시작되는 일들은
제 개인적인 원력이거나 발원이기 보다는
그렇게 인연이 무르익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다르게 이야기 하면 우주법계의 도우심과 큰 계획 속에서
자연스럽게 저질러 행하게 되는
그런 ‘더 큰 질서’의 일환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직관적인 법신의 나툼에 대해
이런 저런 판단함이 없이 그저 저질러 행하되
함이 없이 함으로써, 집착 없이 함으로써
우리가 이 생에 온 이유와 목적을 완성시키고 가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 모든 것은 어쨌든
‘나의 일’이거나, 내가 계획한 일이 아니라
‘더 큰 질서’ ‘더 깊은 법신부처님의 일’이라고 맡겨두고
그것이 무거운 일이 되었든,
그것이 바쁘거나 힘겨운 일이 되었든,
아니면 그것이 영광스럽고도 기쁜 일이 되었든
그 모든 일과 일에 대한 결과 또한 다 맡겨두고
그 진행되는 일에 ‘나’라는 것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은 채
그저 ‘머무는 바 없이’ 행하기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함이 없이 전부를 행하는
수행자의 무위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나의 수행이 그렇게 법계와 일치를 이루기에는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그 또한 모두 다 부처님께, 진리의 법계에 모두 맡겨버리고,
그저 ‘되든 안 되든 다 되고 있는 것’이라는
완전한 맡김과 허용과 열려있음으로
매 순간 순간을 살아나가야 겠다는 발원을 찰나로 해 봅니다.
이렇게 무언가의 일이 시작될 때,
혹은 한 해가 시작되거나,
새롭고 혹은 바쁜 일들이 생겨났을 때,
큰 일을 기획할 때,
무언가 삶의 변화를 모색할 때 등
일상적인 것에 그 어떤 변화가 찾아올 때는
더욱 예민하게 깨어있을 것이 요구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일이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아상’을 강화시키며 ‘아집’을 키우는 일로 전락함으로써
일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거나,
개인의 이익이나 아상이 개입되어
진리의 도도한 물줄기에 맡기고 흐르는 일이 아니라
흐름을 거스르고, 진리를 거스르는
삿된 일로 바뀌기 쉽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음의 수행이
그 사람이라는 존재 위에
향기처럼, 흐름처럼,
끊임없이 피어나고 흐를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은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 아니라
진리의 일이요, 우주법계의 일로써 전환되며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로 회향되게 됩니다.
거기에 ‘나’는 없으며,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라
우주적인 진리의 계획에 일치하고 부합하는
것으로 에너지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사실 우리 삶의 사사로운 모든 행동과 행위들은
깨어있지 못할 때
아상과 아집을 키우는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으로 전락하지만,
분명히 깨어있을 때는
우주가 그 모든 일에서 나를 돕기 시작하며
붓다가 벌이는 진리의 계획의 일부로
눈부신 전환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언제나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있을 때
나라는 사사로운 아상에서 벗어나
진리의 길 위를 자연스럽게 걷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주 구정 설 연휴가 지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이 시점이
어쩌면 우리가
가장 깨어있어야 하며,
깨어있음의 수행을 통해
나를 닦아가야 할 때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 자신과 법우님들 모두를 위해,
목탁소리라는 이 부처님 일을 대행하기 위해 인연따라 만들어진
아름다운 승가, 아름다운 법의 모임에서
새로운 깨어있음의 에너지를 모으고 회향하자는 의미로
2월 4일 입춘날부터 49일 간
‘호흡관찰 49일 수행정진’의 집중 기도수행을 제안합니다.
왜 호흡관찰인가?
호흡관찰이야말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 생에를 통해 누누이 밝히시고, 설하시고,
제자들에게 실천하기를 당부하신
가장 기본이며, 기초이자 곧 궁극의 수행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부처님의 시대로 되돌아 가 봅니다.
붓다 당시, 이교도의 수행자들이
‘벗들이여, 수행승 고타마는 어떤 수행을 닦아 익히며 안거를 보냅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벗들이여, 부처님께서는 우안거에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의 수행을 하고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의 집중을 익힌다”
부처님께서 언제나 매 순간순간 닦아익히셨으며,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도
언제나 호흡관찰수행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잡아함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호흡관찰수행은 성자의 세계, 신들의 세계,
청정의 세계, 배움의 세계,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세계,
삶 이 자체가 최상인 세계, 여래의 세계이다”
초기불교 대표적인 수행법인
팔정도나 사념처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호흡관찰 수행’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방편 수행법들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동안 목탁소리에서는
많은 백일정진수행 등을 통해
대비주 백일정진수행, 금강경 독송 백일정진수행,
절 수행 백일기도 등 다양한 수행을 방편으로
공부를 지어왔습니다.
그러한 수행법들은 차별을 둘 것도 없이
모두가 수승한 것이며, 아름다운 방편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수행방법이 있지만,
목탁소리에서도, 또 승가의 불교집안에서도
수많은 스님들도,
모두가 다 똑같은 수행을 하지 않고
다양한 방편수행을 모두 인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뜻 보기에는
한 가지 수행만을 하면 복잡하지도 않고 좋을텐데
왜 저렇게 다양한 수행법을 다 인정해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을까 싶지만,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모든 방편은 사실 모두가
단 하나의 ‘본질적인 수행법’으로 귀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수행법이 다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근본에 ‘하나’의 본질적인 수행법을
모두 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어요?
그것이 바로 ‘지관(止觀)’입니다.
즉 ‘마음을 비우고 관찰하는 수행’이요,
‘생각을 그치고 바라보는 수행’입니다.
그런데 누누이 반복하지만,
지(止)의 수행은
관(觀)의 수행에 포함됩니다.
관, 관찰, 알아차림이 분명하면
저절로 마음이 비워지고 번뇌망상과 욕심이 놓여집니다.
결국 모든 수행의 핵심은
‘관(觀)’에 있다는 귀결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한결같은 말씀입니다.
관(觀)이란
관찰, 관조, 바라봄, 알아차림, 깨어있음, 통찰, 비춰봄 등
다양한 용어로 바꾸어 쓸 수도 있고,
그렇게 혼용되며 쓰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조금 더 세심하게 분류를 함으로써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분류를 행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말해 염불을 하든, 독경을 하든, 다라니나 주문을 염송하든,
절 수행을 하든, 사경을 하든,
나아가 길을 걷든, 밥을 먹든, 휴식을 취하든
언제나 ‘관’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과 수많은 선지식들이 걸어 간
아름다운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목탁소리에서도 앞선 다양한 방편의 백일정진수행을 통해
염불, 독경, 다라니, 절 수행이라는 방편을 행해 왔지만
항상 그 근본에 ‘바라봄’의 관 수행을 강조하여왔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렇게 경전을 선택해 독경을 하든,
신묘장구대다라니(대비주)를 선택해 염송하든,
절 수행을 하든, 염불을 하든,
어떤 한 가지 방편을 선택하여 한 이유는
그냥 단순히 ‘관하라’고만 하면
너무 어려워하거나,
‘수행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없기 때문에,
즉 ‘성취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수행이 계속되고 진척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매 순간순간
단지 ‘관’할 수 있다면
그런 방편을 애써 빌릴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심불자들은 아직 그렇게
관 수행이 저절로 매 순간 되는 정도까지는 아니다보니
다양한 수행의 방편을 행함으로써
조금 더 쉽게 ‘관 수행’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잘 맞는 수행방법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떤 분은 대비주 독송이 편하고 잘 맞는 것을 느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금강경 독송이 맞다고 느낄 것이며,
어떤 분은 절 수행이 더 잘 맞다고 느낄 지 모릅니다.
그것이 그 수행법과 자신의 근기와 일치하는 것이니,
바로 그것을 꾸준히 지어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정진해 가다 보면
어느 순간 공부가 깊어가면서,
이제 그런 방편을 빌리지 않더라도,
또 수행하겠다고 좌복을 펴고 앉거나,
절에 가거나, 조용한 시간을 찾지 않더라도
매 순간순간 직장에서, 가정에서, 길 위에서
언제라도 ‘관’ 수행을 하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는 그동안 해오던 방편수행법에도
집착할 것 없이
그저 ‘관’ 수행만 해 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즉,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의 도움을 받을지라도
달을 이제 어디 있는지 알았고,
달을 직접 보기 시작했다면
그 이후부터는 손가락을 놓아버려도 된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관 수행이야말로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수행방편들은
결국 ‘관 수행’이라는 깨어있음이
일상의 모든 순간에까지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아주 좋은 도구였던 것입니다.
이제 조금씩 그 거친 도구들을
놓아버리고,
직접 ‘관 수행’에 뛰어들기 위한
작업에 조금씩 다가서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관 수행’ 49일 정진수행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 수행’의 대상은 몇몇가지 혹은 수많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무엇을’ 관찰하느냐 할 때,
다양한 종류의 관찰대상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지요.
근본불교 아함경이나 니카야 같은 곳에서는
그 관찰대상을 크게 4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신수심법, 즉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인데요,
자세한 것은 다음에 근본불교 강의에서 이어가기로 하고요,
이러한 큰 네 가지 관찰대상과
각각의 대상별로 또다시 세부적인 관찰대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관찰 대상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직접적이며,
우리가 실천하기 가장 좋은 몇몇가지 대상을 선택하여
이번 49일 정진수행에 함께 닦아보자는 것입니다.
그 모든 관찰대상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호흡’입니다.
왜냐하면 호흡이야말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좌선하고 앉아서 삼매에 듦으로써
나를 잊은 순간에도
여전히 호흡은 들어오고 나갑니다.
호흡이 끊어진다는 것은
내 삶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 수행은 아시다시피
언제나 ‘과거나 미래’가 그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관 수행의 대상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관이라는 말 자체가 ‘지금 여기를 관찰’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내 생명이 있는 한 결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바로
‘호흡’인 것입니다.
호흡이 안정되고 고르다는 것은
곧 내 삶이 평화롭고 안정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호흡이 불안정하고 거칠다는 것은
곧 내 현재의 삶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가 날 때, 남들의 집중을 받을 때, 욕심이 올라올 때 등
다양한 평상심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우리의 호흡은 거칠어집니다.
정리해 보자면,
관 수행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핵심인데,
또한 관 수행을 지어가는데
가장 근본이 되고, 또한 궁극이 되는 핵심중의 핵심이 바로
‘호흡관찰수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49일간의 ‘호흡관찰수행 49일 정진기도’의 기간 동안에는
주로 호흡에 대한 관찰을 지어가며
보다 직접적인 수행으로 나아가 보자는 것입니다.
그럼 그 방법을 조금 더 쉽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길을 걷거나 움직이거나
언제라도 이 수행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루 중 언제라도
호흡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이 수행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흡을 단지 관찰하라고 하면
이 또한 조금 어렵거나, 공부의 진척을 살필 수 없다보니,
막연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관찰수행에도
약간의 방편을 도입하여 정진하는 것이
오랜 불가의 수행법의 방식이 되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호흡에 숫자를 붙이는 방법입니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한 번 호흡이 들어오고 나간 뒤에
‘하나’
하고 숫자를 붙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둘’하고 숫자를 붙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호흡에 숫자를 붙여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숫자를 붙이는 방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 방법을 통일해서 쓰기로 합니다.
그래서 숫자는 10번 단위로
헤아림으로써 함께 공부를 지어나가 보는 것입니다.
즉, 시간이 별로 없을 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호흡관찰수행을 지어가고,
조금 시간이 있을 때는
하나부터 20까지, 혹은 30, 50까지
숫자를 붙이며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호흡관찰수행을 닦아가다 보면
하나부터 시작하여 잡념 없이 100까지
혹은 그 이상까지도 순일하게 호흡을 관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루에 100번도 좋고, 200번, 300번, 500번, 1000번도 좋습니다.
우선 첫 주에는 하루에 200번 정도를
우리 모두의 공통 수행의 재료로 정하여
공부를 지어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200번 호흡을 들이쉬고 내 쉴 때
지켜본다는 것이
어찌 생각해 보면 어려울 것 같지만,
이게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사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일 열정과 원력이 있다면
하루에 1000번, 2000번 이상씩
호흡을 관찰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많이 버거울지 모르니,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만큼만 시작하시면 됩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1부터 10까지 세는데도
온갖 잡념이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3이나 5까지 세는 것조차 힘겨울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하나의 약속을 더 해야 합니다.
그것은 1부터 숫자를 세어 나가되,
10까지 세기도 전에 잡념, 망상, 분별, 생각, 기억들이 올라오면
다시 1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3도 못가거, 혹은 5까지도 못 가서
온갖 잡념과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은 나쁜 소식이 아니라 좋은 소식입니다.
그 전에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념과 분별과 생각들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가 이렇게 수행의 때를 맞아
분명히 바라보았다는 소식이니
그것처럼 좋은 수행의 결과가 어디있겠습니까?
잡념이 올라올 때
거기에 시비를 걸지 말고,
잘못 된 것이라거나, 나는 왜 이렇게 잡념이 많지라거나,
하는 등의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짜증섞인 생각이나 판단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것 또한 관찰하고 알아차리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200번 호흡을 관하자고 약속을 정하였지만,
이것을 전혀 못 넘겨도 상관 없고,
오히려 넘기지 못하면서
1부터 숫자를 세다가 중간에 10까지도 못가
올라온 잡념을 보고 다시 1로 되돌아 간
그 숫자가 200번을 넘어도 좋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1부터 숫자를 세다가 3까지 가서 올라온 잡념을 보고
다시 1로 되돌아 가고,
또 5까지 세다가 다시 잡념을 보고
1로 되돌아 가고,
그런 식으로 되돌아가기를 10번, 20번, 100번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수행을 10번, 20번, 100번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 되는 것도 되는 것이고,
되는 것도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를 많이 세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하루에 정해진 200이라는 목표달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관찰하다가 올라오는 잡념과 생각들을
관찰하는 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호흡을 관찰하여 200번을 넘거나,
호흡 관찰 중에 올라온 잡념을 200번 넘게 관찰하거나,
그 두 가지를 합쳐 200번을 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즉, 200이라는 숫자는 방편이라는 말입니다.
너무 적은 숫자를 정해 놓으면
하루 중에 깨어있는 시간이 너무 적어서
수행의 효과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법우님들에 따라, 근기에 따라
어떤 분은 하루에 300번, 500번, 1000번, 2000번도
쉽게 관찰해 나갈 수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숫자의 개수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오히려 잡념이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려 보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수행을 해 나가시되,
언제 어디서나 하셔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 이 수행이야말로 언제 어디서든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내면에서 행할 수 있는 ‘생활참선’의 전형입니다.
지하철 안에서 출근하면서 호흡을 100회 할 수도 있고,
지하철에서 회사까지 걸어가면서 호흡을 50회 할 수도 있으며,
잠깐 쉬는 시간 10분 중에 짬을 내어 호흡을 30회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더 짧은 시간에도 이 수행은 가능합니다.
직장 상사에게 보고서를 가져가 결재하기 전에
사무실 앞에서 호흡을 10회 관찰하고 들어갈 수도 있으며,
아내에게 남편에게 화가 올라올 때
화를 내기 직전에 호흡을 10회 관찰할 수도 있으며,
유치원에 다녀오는 아이를 기다리면서
호흡을 10회 관찰할 수도 있고,
친구와의 대화 중에 말이 많아지거나,
내 자랑이나 남 험담이 많아지는 것을 보고
잠시 내면에서 호흡을 10회 관찰한 뒤에
다시 대화를 이어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더 짧은 찰라 찰라의 경계에 닥쳐서는
호흡을 3회, 5회, 7회씩 끊어서 관찰하는 것도 좋습니다.
사실 호흡관찰 수행은
하지 않고 지내는 하루 일과에 비한다면,
하루에 1회만 진지하게 관찰하더라도 큰 공덕이 있습니다.
그럴진데 커피뽑는 시간에 3회 호흡관찰,
밥을 입에 넣고 씹어 넘기는 시간에 5회 관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전에 7회 관찰 등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 내면에서는
엄청난 변화와 붓다의 후광과도 같은 밝은 광명이
내 안에 깃드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호흡관찰 수행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절 수행이나, 다라니 수행이나, 경전독송 수행등에 비해
‘수행하는 느낌’이 더 적어서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외적으로 느껴지는 수행의 진척과
내면에서 벌어지는 수행의 결과 내지,
법계에 저장되는 공부의 에너지는 전혀 다릅니다.
호흡을 단 3회, 10회만 관찰하더라도
우리의 내면에서는
‘무한한 공덕이 깃들며 하염없이 업장이 소멸되는’
그런 정도의 공덕이 쌓이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법계에서는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에서는 감로가 샘솟는’
그런 정도의 무량한 수행공덕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써 법계에 기록되어질 것입니다.
이 말을 기억하세요.
호흡관찰수행을 지어가는 동안에
그 단 한 번의 호흡관찰 수행은
고스란히 법계에 기록되고 저장되어 나갑니다.
아주 큰 욕심과 마음의 에너지가 있어야지
어떤 한 가지 일을 이루어 내지만,
수행은 반대로 아주 작은 단 한 번의 수행일지라도
그것이 진정성이 있고, 깨어있음이 깃든다면
단 한 번의 호흡관찰수행이
이루 다 셀 수 없는 공덕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의 공덕입니다.
수행은 아무리 작아 보일지라도
무량한 빛과 광명을 놓기에
몇 배가 되어 법계에 기록되고
나에게 그 공덕이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일단 49일 호흡관찰수행을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법우님들께서 수행하시며
수행일기를 쓰시는 것을 보면서,
다시 궁금증이나 그때그때 의문들에 답하고
주 1회씩 수행에 대한 설법을 또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먼저 번과 동일합니다.
첫째, 호흡관찰수행 200회 이상,
둘째, 매일 수행일기 쓰기,
셋째, 보시 실천하기,
이 세 가지의 수행을 해 나가시면 됩니다.
첫째는 위에 설명한 그대로이며,
둘째 수행일기 쓰기는
누차 설명드린대로 나 자신의 호흡관찰에 대해
스스로 분명하게 본 것을 씀으로써
보다 관찰수행이 선명하게 나타나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뿐만아니라 관수행을 도반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도반들의 나태와 게으름에 경책이 되어 줄 수도 있고,
나처럼 다른 도반들도 함께 어렵구나 하는
동사섭의 마음을 심어줄 수도 있으며,
도반의 수행을 보고 더 힘내어 정진해야겠다 하는
분발심을 일깨워 줄 수도 있는 등,
많은 수행공덕, 포교공덕, 교화공덕이 한꺼번에 쌓이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도반들이 부처님께 수행재료를 받아들고
저마다의 장소, 숲, 나무 아래 등에서 정진을 하다가
모여 자신의 법담을 나누고,
나누다가 답이 안 나오면 부처님께 여쭙고 설법을 듣는
그것이 수행의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인터넷 시대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붓다시대의 1,250인의 수행회상을
이 곳에서, 수행일기와 수행설법을 통해
대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일기에는 호흡관찰수행을 몇 회를 하였는지도 함께 적어 주시고,
잡념이 올라오는 것, 언제 수행을 하였는지 등
다양한 수행의 이야기를 올려 주시되,
숫자를 너무 연연하지 말고
대충 이 정도 숫자인것 같다 정도만 적어 주셔도 좋습니다.
너무 정확히 호흡관찰 숫자를 파악하려면
그것으로 인해 또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 보시는 나중에 49일이 끝나면
그 때가서 그냥 한꺼번에 보시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보시함을 만들어 매일 매일 조금이라도
보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꺼번에 큰 돈을 보시하면
그것이 한 번의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연습하고 마는 것이지만,
49일 동안 49번 보시를 하면
매일 매일 우리 안에 보시에 따른
풍요로움과 부유함이 연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보시의 연습에서
우리 안에 복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 보시를 하는 순간의 풍요로운 느낌, 나눔의 느낌,
거기에 바로 복이 깃드는 것입니다.
또한 그 나눔과 보시의 풍요로운 마음을 매일 연습하면
우주법계는 그 연습한 풍요로운 나눔의 마음을 보고
그 연습한 것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작용을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무언가를 바라는 기도, 기복적인 기도는
지금은 무언가가 결핍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들지만,
수행을 하며 끊임없이 나누면
나눈다는 그 부유하고도 풍요로운 마음이 연습되기 때문에
우주법계에서도 그 연습한대로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
사실은 그렇게 관한다는 것과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나누고 보시할 때의 그 느낌,
그 느낌에 집중하여 관찰하면
그 관찰이 풍요로움으로 우주법계에 입력이 되어
우주에서는 그 사람의 나눔을 고맙게 여기게 되고
그로인해 우주는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우주적인 나눔의 역할을 맡기기 위해
부유함과 경제력 등을 그 사람에게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누고 보시하면 할수록
가난해 지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베풀수록 부자가 되는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니 보시할 때는 한꺼번에 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매일매일 하시고,
예를 들어 하루 1000원을 하시더라도
아침에 500원, 저녁에 500원 하시는 것이 더 좋다는 뜻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요,
2009년 한 해의 시작을 맞이하며,
우리의 수행의 향기가
목탁소리를 넘고,
각각 법우님들의 가정과 회사를 넘어,
이 우주법계로 향처럼 번져나갈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수행에 동참하실 법우님들께서는
아래에 댓글로 동참의사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동참해 주시는 법우님들께서는
주소, 가족성함, 발원(원하는 분만) 을 적어서
아래 댓글에 함께 적어주시거나,
buda1109@hanmail.net 로 보내 주시거나,
‘목탁소리(www.moktaksori.org)’ 카페의
(http://cafe.daum.net/truenature)
‘백일기도 수행일기’ 게시판에 올려진 축원카드 양식대로
축원카드를 적어보내주시면,
매일 관음사 새벽기도 때
마음을 다해 정성스레 축원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행일기는
예전처럼 목탁소리의 ‘수행일기’ 방에 올려주셔도 좋고,
목탁소리 카페의 ‘백일기도 수행일기’ 방에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두 곳 중 한 곳에만 올려주시면 되겠습니다.
전에 보니까 20여 분이 넘는 법우님들께서
목탁소리의 ‘수행일기’ 방 한 곳에 수행일기를 적어주시다 보니,
너무 많아서 한 화면에 다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요,
물론 댓글을 달아주기도 버거울 정도라고 하시데요,
그러니 이렇게 두 곳의 게시판에 분산하여
수행일기를 올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법우님들께서도 어느 한 곳에서 공부를 하시면 되겠고,
다른 더 많은 법우님들이 수행일기를 보고 싶으실 때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보셔도 좋겠습니다.
조만간 목탁소리에 ‘목탁소리 카페 배너’를 달아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법우님들 설 연휴 잘 보내시고요,
연휴가 끝난 뒤에
기쁜 마음으로, 밝은 마음으로
함께 정진하도록 합시다.
첫댓글 스님 ()() 감사합니다. 정진하겠습니다. 지금 부터 종이에 적어서 실천하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밝은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_()_
그렇지 않아도 작년 108배 수행 후 법우님들과 다시금 수행하고 싶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동참합니다~!
`하늘에는 꽃비가 내리고 땅에서는 감로수가 샘솟는' 무량수행공덕이 법계에 쌓이는 호흡관찰수행에 기쁜마음으로 동참하겠습니다...!!! 지금 여기 행주좌와간에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기축년 새해를 시작하겠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아주 손놓아버린(?) 수행의 묘미를 스님께서 다시 시작하게 해주시는군요....감사합니다..()()()
동참 하겠습니다~`수행을 제대로 한적이 없었는데 고맙습니다...그리고 노력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태양공심을 만들어 내가 시방의 주인임을 여실히 깨닫아 가겠나이다.()()()
스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수행정진 하겠습니다
예 스님 열심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놓아버렸든 기도의 끈 다시 잡아 보렵니다._()()()_
열심히 하겠습니다_()()()_
법우님들께서, 호흡관찰수행이 익숙하지 않으시니, 이 수행법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을 함께 댓글로 올려주세요. 그러면 수행에 들어가기 전이나, 수행을 계속 해 나가면서 하나씩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렇게 호흡관찰수행은 공동수행으로 해 나가되, 개인이 행하던 수행은 함께 해 나가셔도 좋습니다. 예를들어 108배를 추가로 더 한다거나, 금강경 독송, 대비주 등을 추가로 개인수행으로 더 해 나간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동참하겠습니다. _()_
어제 퇴근길에 집에서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길에 해 보았습니다. 처음이라 그런지 10번도 안되어서 끊기고 ,,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호흡관찰을 통해서,, "아하~~ 내가 이렇게 호흡과 함께 순간 순간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숙달이 안되어서 그런지,,,, 호흡을 의식하다 보니 무언가 불편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호흡하다가.. 이놈을 알아차리려고 하니... 여간 부자연 스럽고 ,, 숨결도.. 일정하지 않은 것 같고 ,,, 마치 잠잘때의 호흡 같기도 하고,,,불편함을 통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순간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에 조금은 불편할 것 같습니다.)
동참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예... 법우님들 연습한다고 생각하시고, 호흡관찰수행일기 게시판이나, 100일기도 수행일기 방, 혹은 3.7일 수행일기 방에 조금씩 연습해 보시고 수행일기를 올려주세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여 하나둘셋..이렇게 세다가 마음을 따라가니 세는 것 조차 잃어 버립디다. 시작은 비록 미약하나.....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수행 동참합니다^^
'호흡관찰'을 정식으로 해보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해 보겠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_()()()_
호읍이 짧게 어떤때는 길게느껴집니다. 순간순간 다른 생각이 들지 말아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듭니다
호흡관찰수행 동참합니다_()_
호흡관찰수행 동참하겠습니다. ...()...
호흡관찰수행에 동참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호흡관찰 수행 동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
스님 감사합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저도 동참하겠습니다._()_
스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도 해보겠습니다. _()_
저도 할게요.
질문드립니다. 호흡을 관찰하며 세어가는 중에도 다른 생각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심지어 들이쉬고 내쉬는 순간에도 호흡도 보고 동시에 다른 생각도 함께 합니다. 그렇게 계속해도 숫자는 놓치지 않게 되는데 어찌해야하나요?
호홉관찰 수행 동참합니다. _()_
호흡관찰 수행 동참하겠습니다_()_ 고맙습니다...()...
호흡관찰 수행 동참합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좋은 길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흡관찰수행 동참합니다_()_
저의 일상에서 느끼는 부족함을 잔잔한 글로 마음을 내게하는 스님의 공덕에 감복하여 미천하마다 조금씩 점짐적으로 수행하여 보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