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사람이다. 그의 생애는 오랫동안 김대건 신부의 활약과 순교에 묻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앙을 증거한 관점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전형적인 피의 증거이고,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은 모범적인 땀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1.출생-유학-입국 
최양업 신부는 1821년충청도의 홍주 다락골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모두 뒷날 순교로 일생을 마쳤다. 최양업의 집안은 이미 그의 증조부인 최한일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이래 대대로 신앙을 이어왔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최양업의 아버지는 홍주 다락골에서 한양으로, 다시 한양에서 과천의 수리산으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최양업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세 때인 1836년 당시 조선에서 선교하던 프랑스 신부 모방에 의해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면서 이듬해인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신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838년 11월에는 최방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1839년 4월에는 중국에서 일어난 민란을 피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했다가 반년 후인 11월에 마카오로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1842년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시 김대건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마카오를 떠났으며, 최양업은 김대건이 떠난 지 5개월 후에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최양 업은 조선에 입국할 때까지 한시도 안정이 없는 떠돌이와 같은 생활을 7년이 넘게 계속하였다. 최양업은 잠시 상해에 머문 후 같은 해 10월에 요동에 당도하였으며, 외몽고인 소팔가자로 가서 중단되었던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1844년 12월경 최양업과 김대건은 삭발례와 부제품을 연달아 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는 만주와 요동과 외몽고 일대를 헤매면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1845년 1월 김대건이 의주를 통해 입국에 성공하자, 이듬해 1월에 최양업도 두만강을 건너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 경비병에 체포되어 입국에 실패하고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와야 했다. 같은해 12월 말 조선에서 온 밀사를 만나 입국을 꾀하기 위해 만주의 심양으로 갔으나, 바로 그해에 조선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박해에 관한 소식만을 듣고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남겨두었다.
지금까지 나는 내 포교지 밖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나도 답답하고, 듣는 신부님도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발길은 달리고 뛰고 있으나 얼굴은 무겁게 수그러집니다. 이는 나의 죄악과 빈곤과 허약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풍부한 자비심에 희망을 갖고 하느님의 섭리에 나 전체를 맡깁니다. 그리고 "너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라.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말할지 일러주실 것이다."라고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말한다는 것은 비단 설교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하는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 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심양에서, 1846.12.22, 르그레주아 신부께)
1846년 말, 다시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조선 국경 변문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그는 김대건 신부와 교우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국경 감시가 더욱 심해져서 해로를 통해 입국하기로 하고, 홍콩에 머물며 순교자 현석문이 쓰고 페레올주교가 불어로 번역한 순교자 일기인 [기해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1847년에는 고군산도 쪽으로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배가 난파하여 실패하였고, 1849년에는 백령도 부근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이때에도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에 사제서품을 받게 되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의 나이 28세 였다. 그는 다시 요동으로 떠났으며 그해 12월초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통해 입국할 수가 있었다. 그가 입국을 시도한지 실로 7년 반 만의 일이었다.
2. 사목활동-죽음
최양업은 1850년부터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계속되는 박해를 피해 깊은산골에 숨어사는 신자들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국땅에 들어온 그는 서울에서 하루를 머물고 충청도에 있는 페레올 주교를 만난 다음 여독이 풀리지도 않은채 다음날 전라도에서부터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6개월 동안 5개도 5천리를 순회하는 가운데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신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다. 건강이 악화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대신하여 더 많은 공소를 돌보아야 했기에 피로와 궁핍을 감수하면서 교우촌을 돌았다. 순회를 하지 않을 때에는 절골(충북 배티의 한 교우촌)에서 동생들로부터 부모의 순교에 관한 증언자료와 여러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였다.
1853년 2월초까지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최양업 신부는 그들을 간호해야 했고, 전국 각처에 있는 12,000여 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어야 했으므로 본국인이면서도 병들지 않고 신자들을 다 찾아다니기에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최양업 신부는 1852년부터 1854년 사이의 사목활동에서 체포의 위기, 공소의 습격 등의 잦은 박해로 선교사들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 한편 그는 교우촌을 방문하던 중 가짜 교우 때문에 한겨울 강추위와 능욕에 고통을 당하여 기진맥진한 상태로 한밤중에 공소를 떠나야 하는 수난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사업을 위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러기에 거리가 먼 지방과 중요하면서도 전교하기 힘든 지방의 성무 집행은 최양업 신부가 맡아 매년 7,000리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했다. 그의 관할지역은 5개 도에 두루 산재해 있었고 공소만도 100개가 넘었다. 수시로 일어나는 사적인 박해는 최양업 신부의 전교여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동네에서 추방되고 고발되는 등 도처에서 중대한 위험을 겪어야 했다.
이같이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개종과 용감한 입교자들로 말미암아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길의 사나이'로 불릴 정도로 인생의 대부분을 객지에서 보내며 그 얼굴이 햇볕에 그을어 새까맣게 타서 갓끈자국만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녔다.
최양업 신부는 12년간 온갖 고난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목한 덕분에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때인 1861년 6월 15일, 영남지방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활동 상황을 보고하려고 상경하던 도중 경상도 문경에서 갑자기 쓰러져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와 친하게 지낸 페롱 신부는 '최 신부의 복사가 내게 와서 최 신부의 사인(死因)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가 사망한 것은 과로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작년의 소란으로 인해 그의 성사집전이 아주 어려워졌고, 그래서 하루에 80 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다.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한 달 동안 나흘 밤밖에 잘 수 없었다.'고 하였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여러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시신은 신학교 뒷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3. 최양업 신부의 사목자로서의 성격
땀과 끈기로 이어지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은 멀고 험악한 공소등 전교가 어려운 지역의 전교를 맡아야 했으므로 해마다 5개 도에 걸쳐 있는 100개가 넘는 광활한 전교 지역을 돌아야 했기에 7,000리를 걸어야 했으며, 한 마리의 양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사목 정신은 신자가 둘이나 셋밖에 없는 공소도 마다하지 않고 방문하였고, 다섯 가구의 신자집을 방문하기 위해 사흘길을 걷기도 하였다.
그는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 특히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사람들을 찾아 다녔고 위험한 구석에 혼자 있더라도 침착한 마음으로 고요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중에서도 자기 자신이 받는 고통은 잊었고, 신자들의 처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신자들은 최양업 신부를 얼마나 은혜롭게 생각하며 따랐는지 마치 목마른 양떼들과 착한 목자의 정경을 연상케 한다. 선교사들은 은근한 우월주의적 자세와 병약과 언어문제로 인해 사목활동에 제한적이고 광범위하지 못했으며, 그들은 비교적 어렵지 않은 전교 지역을 맡았었다. 그래서 조선에 대한 이해와 판단은 단편적이고 부정확할 수밖에 없었으며 선교 지역의 문화 순응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함께 사목했던 최 신부는 조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선교사들에게 선교 지역의 특성에 맞는 사목자의 자세를 지니도록 노력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방인신부로서 오는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페레올 주교 사건'과 '사본문답에 대한 불합리한 주교의 처사' 등 선교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고뇌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들에게 헌신적인 뒷바라지는 물론 선교사들의 약화된 건강이 자신의 부덕(不德)에 기인한다고 할 정도로 뿌리깊은 형제애와 겸손된 삶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전교의 어려움과 선교사들과의 갈등 속에서도 순교자들의 자료 수집, 교리서 편찬, 천주가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 하였고 착한 목자로서 살아 있는 신앙을 전한 사목자였다.
4. 최양업 신부의 저술활동
서간 최양업 신부는 서양 학문을 정식으로 익힌 첫 조선인으로서 최고의 지성인답게 그 당시의 조선 왕국의 국가정세와 교회 사정 및 민생 상태에 관하여 예리하게 관찰하였다. 최 신부는 1842년부터 1860년까지 거의 매년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들에게 보고하였다.
그 19통의 서한의 원본과 사본은 파리 외방 선교회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중에 9 번째 편지는 분실되었다. 그리고 최 신부가 직접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에 보낸 신학생들에게도 여러 번 편지를 보냈으나 이 편지들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주교가 남아 있는 편지들을 완역하여 [너는 주추놓고, 나는 세우고](바오로딸)를 펴냈다.
천주가사(天主歌詞) 천주가사는 천주교 교리와 신앙의 교훈을 전달할 목적으로 운문(韻文) 형식에 곡조 없이 송영된 조선 후기의 대중가사 형식인 4·4조이며 가사의 구성이 훈계, 호소, 권면, 설명조로 되어 있는데, 박해 중에 당면한 신앙서적 보급의 부족과 신앙교육의 난관을 해결하는 수단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피난과 유랑생활, 생활의 궁핍으로 교리에 대한 지식이 낮았으므로 이들이 교리를 대단히 쉽고도 진지하게 배울 수 있으며, 노래를 불러 즐겁게 되고 또 물질적 비천함을 잊으며 마음을 위로 향하여 종교적인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천주가사는 영신 지도서일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영적 양식이 되어 삶의 활력소 역할을 하였고, 또한 신앙의 합리성이나 천주교 교리의 필요성을 명쾌한 논리로 전개시켜 신앙이 없는 비신자들에게 신앙을 전파했던 것이다.
현재 최양업 신부의 작품으로 알려진 천주가사로는 사향가, 천당강론, 지옥강론, 십계강론,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삼세대의, 신덕가, 망덕가, 애덕가, 칠성사가(영세, 견진, 고해, 성체, 종부, 신품, 혼배) 칠극, 제성, 선행 등이 있다.
 사향가(思鄕歌) 어화우리 벗님네야 우리본향 찾아가세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본향인고 복지로나 가자하니 모세성인 못들었고 지당으로 가자하니 아담원조 내쳤구나
부귀영화 얻었은들 몇해까지 즐기오며 빈궁재화 많다한들 몇해까지 근심하랴 이렇듯한 풍진세계 안거할곳 아니로세 인간영복 다얻어도 죽어지면 허사되고 세상고난 다받아도 죽어지면 고만이라
기타 저술들 조선순교자전 - 이 전기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들의 행적에 관하여 현석문(가롤 로)과 이재의(토마스)사 수집한 '기해일기'를 1845년 말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가 입수하여 보관하던 중에 1846년 병오박해를 만나 8명의 순교자를 첨가하여 불어로 편집한 것이다. 페 레올 주교는 순교자들의 시복수속을 촉진시키고자 그것을 로마로 보내기 위해 최양업 부제로 하여금 라틴어로 옮기게 하였던 것이다.
라틴어 작문 - 마카오 유학 시절 초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 작문의 첫 편은 사자와 인간의 은혜에 대한 것이고, 둘째 편은 수도자와 평신도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원수를 사랑하고 서로 용서해야 함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기도서와 교리서의 번역- 최양업 신부는 더위, 장마, 농사일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한여 름 동안 보다 완전하고 정확한 교리문답의 출판을 준비하였고, 주요 기도서의 번역도 하고 있었다. 이것이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조선교회가 최초의 공식 교리로서 채택한 [성 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이었을 것이고, 또한 번역한 주요 기도서는 같은 해에 간행된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公課)]였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순교사적을 위시하여 많은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를 수집하여 다블뤼 주교에게 주었고, 그는 그것을 그의 비망기(備忘記)에 수록하였으며, 달레는 그것은 그의 한 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하였다. 또한 입국 후 스승신부에게 보낸 그의 서한은 거의가 순교자들을 비롯한 훌륭한 교우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성지
1. 배티성지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471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이자 순교자들의 본향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배티 인근의 교우촌으로는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이나 된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배티 고개 길을 따라 900미터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무명의 숨은 꽃’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이곳은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가 안장되어 있다. 이 외에도 배티 성재골에 무명 순교자 6인의 묘가 있고, 인근 교우촌에도 순교자 무덤 7기가 더 있다.
청주교구는 이처럼 유서 깊은 배티 성지를 성역화하고 한국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사제 서품 150주년을 맞은 1999년 양업 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우선적으로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신앙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현양 활동과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2. 배론성지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큼 풍성한 신앙의 유산을 지닌 배론은 우선 그 경관이 수려하다. 배론 입구에 위치한, 경치 좋기로 유명한 원주 - 제천 간의 탁사정(濯사亭)은 배론이 자랑하는 절경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수려한 자연도 배론이 안고 있는 신앙의 유산에 견준다면 그 빛을 잃는다.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는 명주 자락에 1만 3천 3백 11자로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가 쓰여졌고, 바로 옆의 초가에서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섰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이곳 배론에 묻혀 있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방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12년간 조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최 신부는 피로와 무리한 활동에 지쳐 쓰러져 이곳 배론의 신학당 뒷산에 묻힌 것이다.
배론 성지는 1999년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을 기념하고 시복 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을 건립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한다. 또한 대성당과 소성당 두 동으로 건립된 기념성당은 성지 주변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하여 '배론'이라 불려온 지명과 어울리도록 배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3. 청양 다락골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651
조선 시대에는 홍주(지금의 홍성)골에 속했으나 지금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라는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고 있는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다락골은 최씨 문중이 오랫동안 살아온 곳으로 최 신부의 조부 최인주가 신해박해(1791년) 때 피난해 정착함으로써 유서 깊은 교우촌이 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던 최씨 문중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 생활을 해야만 했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경환의 집안은 원래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오던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와 결혼한 뒤 가족들과 상의해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주한다.
청양 다락골에서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으로 옮겨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4. 수리산 성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 1151-6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부 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수리산은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된 성소의 터전으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을 탄생시킨 곳이었고, 성인의 시신이 묻혀있던 성지이다. 1970년대까지도 그 앞으로는 수리산 자락의 뒤뜸이 마을과 좁은 입구로 가려진 병목 안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개발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수리산 교우촌의 중심지인 뒤뜸이는 본래 아무도 살지 않던 곳이었는데, 신자들이 새 마을을 이루면서 신촌(새말)이라 불리게 되었고, 담배 농사를 지으며 생활한 탓에 담배촌으로도 불리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차기진, 사목, 1998년 6월호]
* 굿뉴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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