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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 때의 화랑.
진골 출신으로 내물마립간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급찬(級飡) 구리지(仇梨知)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생김새가 깨끗하고 뜻이 곧아 사람들이 화랑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신라에 기울어 있던 대가야가 백제와 가까워지자 562년(진흥왕 23) 왕은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정벌을 명령했다. 이때 사다함이 15~16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하자, 왕이 처음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가 태도가 간절하고 뜻이 확고하여 마침내 허락했다. 그가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출정하자 따르는 낭도가 많았다. 먼저 국경 근처에 이른 그는 장군의 허락을 받아 기병 5,000명을 이끌고 기습공격하여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포로로 잡은 가야인 300명(200명이라고도 함)을 받았으나 곧 놓아주어 양인(良人)이 되게 했다. 또 토지를 주었으나 사양하는 것을 왕이 강권하자 알천(閼川)가의 불모지를 받았다(또는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도 함). 일찍이 무관랑(武官郞)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는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는데, 그가 병으로 죽자 매우 슬퍼해 7일 만에 자신도 17세의 나이로 죽었다.
미실이 사다함의 매화를 받았다면
사다함이 죽을 때, 미실은 적어도 15세 정도는 되었을 것
그러면 미실은 진흥왕 8년(서기 547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칠숙의 난이 일어난 때는 진평왕 때 (서기 631년)이다
따라서 칠숙의 난 때, 미실의 나이는 84세 정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