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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용연초등학교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15회) 김용석
그리운 내 고향 - 세죽
중구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 윤대헌
원고 청탁을 받고 보니 잊고 있었던 고향이 불현듯 생각이 나고 유년의 추억이 영화의 필름처럼 돌아가면서 한 장면씩 눈앞에 떠오른다. 어느 문학인의 글이 생각난다. 고향은 어머니 품같이 포근하다고……. 그러고 보니 내가 고향을 떠난 지도 10년이 넘었다. 고향을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공해 이주민이라는 향기롭지 못한 문패를 달고 고향을 등졌다. 내가 살던 고향은 황성동 세죽마을로 대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으로 외황강이 흐르고 강 중간에는 신라 향가 중의 한 수이고 삼국유사 중의 처용의 전설이 알알이 맺혀 있는 처용암이 큰 배 한 척이 바다에 떠 있는 것처럼 자리하고 있다. 마을 뒤로는 야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논밭들이 형성돼 있었던 반농반어촌이었다.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울산읍내 장에 내다 팔아야 했는데, 버스가 없던 시절 아낙네들은 이고 지고 여천고개를 거쳐 3,40리 길을 걸어서 장에 가곤 했다. 1960년대 초에 용잠행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다녔는데, 도로는 지금의 도로가 아니고 상치미에서 마을로 관통하는 도로로 신작로라고 하였다. 이 버스도 천정이 높은 대형버스가 아니라 속칭 마이크로버스라 하여 천정이 낮아 앉지 못한 사람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고역을 치렀다.
이때 장꾼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차가 있었다. 이른바 장차라 하여 지금의 스리쿼터로 새벽에 이들과 물건을 함께 싣고 장으로 떠났는데, 장꾼들은 일찌감치 집에서 새벽밥을 먹고 차를 타러 나오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가족들이 가져다주는 밥을 차에서 먹는 진풍경도 연출되었다.
지금의 부곡과 성암동 경계인 진실고개에서 성암동으로 향하면 300m쯤 지나면 도로 왼쪽으로 성진지오텍까지 산이 길게 이어져 있다. 그 중간쯤에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를 도둑골이라 하는데, 해안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소를 계비고개에 있었던 우시장에 내다팔고 오다가 여기에서 몽땅 털려 지명이 그렇게 불리어졌다.
세죽마을하면 잘피, 꼬시래기, 횟집, 목도섬, 선착장을 빼 놓을 수 없다. 잘피는 일명 몰 또는 몰캐라고도 불렀는데, 외황강에 지천으로 널려 노와 스크루에 감겨 선박이 항해가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이것으로 논밭에 거름으로도 사용하였다. 마을에서는 해안선을 나누어 마을 주민에게 추첨을 통하여 배정했는데, 파도에 떠내려 오는 잘피는 개인 소유로하였다. 또한 전마선을 이용하여 긴 대 2개를 강 깊숙이 넣어 잘피 사이에 끼워 뽑아 올리면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일부는 거름으로 일부는 손질하여 식용으로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잘피 속에는 주민들이 이른바 ‘집싱기’라고 부르던 털게가 많았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그랬던 잘피도 1960년대 공단이 형성되면서 종적을 감추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안가에 살면 덤으로 누리는 재미가 또 하나 있었는데, 이른바‘ 훼바리’다. 밤에 헝겊뭉치를 철사에 꽁꽁 묶고 한 끝은 꼬챙이에 달아 기름을 묻히고 불을 붙여 환해지면 얕은 강가에 서식하는 각종 어패류를 잡아먹는 재미도 대단했다.
보통 사람들은 가을이면 추어탕을 먼저 떠올리지만 나는 꼬시래기를 낚는 손 맛, 회 맛, 구이 맛을 잊지 못한다. 일명 문주리, 문절이, 망둥어 등으로 불리는 이 고기는 낚을 때 별도의 낚싯대가 필요가 없고 마을에 허다한 대나무를 이용하고 낚싯줄은 바느질하는 실로, 추는 작은 돌을 묶어 사용하면 되었다. 낚시하러 갈 때 술과 노란 배추 속과 된장, 고추장을 준비하면 신선이 부럽지 않다. 구운 꼬시래기가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세죽하면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린 회 맛과 초장 맛이다. KBS 1에 방영된 ‘꽃피는 팔도강산’의 촬영지이기도 한 이곳에 철거 전까지만 해도 13집의 횟집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오죽 손님이 많았으면 견공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했을까.
당시 울산에는 시민의 휴식 공간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여기로 몰릴 수밖에 더 있는가. 더구나 동백이 만발하는 봄에는 상춘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황성호와 세죽호라는 두 척의 여객선이 종일 실어 날라도 못다 실어 나를 정도였으니 그때가 세죽의 전성시대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상춘객들이 섬으로 들어갈 때는 멀쩡한데 나올 때는 술에 취해 갈짓자걸음에 인사불성이 되어 나왔다. 이제 고향에 두고 온 유년의 추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목도에는 술집이 많아 고기를 잡아 회를 팔았는데, 섬 가운데 우물이 있어 물이 짜지 않아 회를 이곳에서 씻고 식수로도 사용했다. 여름철 울산 시내가 더워도 이곳은 바닷바람이 시원하여 많은 시민들이 찾는데, 이곳에서 약주 한 잔하면 신선이 부럽지 않은데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곤드레만드레에다 갈짓자걸음이 다반사다.
어른들을 따라 배를 타고 선수마을 맞은편에 있었던 소금마채에 소금사러 갔던 일, 산에 소 먹이러 갔다 소가 남의 농작물을 망쳐 주인에게 꾸중 듣던 일, 처용암에 헤엄쳐 건너가 더위를 식히고 게와 고기를 낚고 그곳에 있었던 부처를 만져 보던 일들이 영화의 필름처럼 돌아가건만 그 추억 속으로 다시 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이제는 고향 속에 묻혀 있는 우리 문화를 캐는 일에 주력하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