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신학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innovation' (혁신) 입니다. 즉 전례가 없었던 새로운 신학적 해석들과 주장들을 내놓았다는 것이죠. 그는 교의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신학적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사실 경영학이나 공학같은 분야에서 혁신은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입니다. 그래서 경영혁신이나 기술혁신은 사실상 매우 가치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신학분야에서 혁신이라는 것은 사실 가치롭다고 여겨지기 보다는 위험하게 여겨지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2000 년의 성경해석의 역사와 그 역사를 통해 공고해진 정통교리를 대체하는 새로운 혁신적 교리를 내세운다는 것은 잘못하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찍히기 쉬운 일이고, 잘 해도 그 혁신이 받아들여지는데는 엄청난 시간과 갈등의 과정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르트의 신학적 혁신은 한 3분의 1은 성공한 듯 합니다. 하지만 3분의 2는 좀 위험을 노정하고 있습니다. 위험을 노정하고 있는 부분 중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의 신론에 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God is the one who loves in freedom." 하나님은 자유 안에서 사랑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개혁주의 전통에 올곧게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유와 동시에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과도 어울립니다. 하지만 바르트 신관의 근본적 오류는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랑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하나님의 사랑과 대등한 차원에서 이해해 왔으며,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모든 피조물의 사랑과 대비되는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전제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참되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합의였습니다. 가장 극명한 실례가 바로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일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이며, 이 도덕적 탁월성에서 사랑이라는 미덕이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즉 사랑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죠.
바르트는 하나님을 재정의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교의학 2권 1부에서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자유와 사랑에 종속시키고 있습니다. 사랑을 거룩에 우위에 놓음으로써 바르트는 결국 예정론 역시도 만인선택론으로 밀고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개혁신학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신학적 혁신을 단행하였고, 복음적인 개혁신학의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을 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르트는 개혁신학 전통이 강조한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바르게 강조했지만,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적인 거룩하심을 약화시킴으로써 신학적 균형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복음주의권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동등되게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만을 너무 강조하는 듯한 분위기를 설교나 서적들을 통해 많이 접하게 됩니다. 복음주의권이 잘못된 배타성과 비본질적인 문제에까지 관용과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그 반대측면으로 나아가 무분별한 관용과 혼합주의적인 태도를 취함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개신교 목사님이 설교시에 "하나님의 사랑앞에 자아를 온전히 내려놓고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다면 동방정교나 카톨릭이나 기독교나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테레사수녀같이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던질수 있다면 족하지 않습니까...등등 너무 이단이라고 서로를 규정하고 정죄하지 맙시다"
라는 식으로 설교합니다.
설교시에 계속 이런식의 입장을 취한다면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서적중에서는 특히, 필립얀시(이 분의 책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한국개신교인들에게 엄청 인기있고 잘 읽히는 책의 저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가 지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 이 사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저는 좀처럼 느낄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놀랍도록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썩 잘 표현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동등하게 강조되어야 할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모습은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경향성을 율법주의적인 태도라고 약간 우회적으로 비꼬는 태도도 나타남을 느겼습니다. 칼바르트류의 신정통주의적인 신관이나 오늘날의 상대주의적인 경향성이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에게
암암리에 영향을 끼쳐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런 경향성이 있슴은 분명합니다.
정목사님께서는 이런 식의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그리고, 더불어 목사님은 천주교의 구원관이나 신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천주교가 비록 기독교와 유사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본질적인 부분(구원관이나 신관,내세관 등)에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제임스패커같은 분도 카톨릭과 연대하는 면에서 배서인으로까지 참여했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으나 복음주의권의 개신교가 카톨릭과의 이런 에큐메니칼한 연합적인 경향성에 대해서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약화시키는 사람들이 현대에 많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바르트의 신관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쪽으로 기울어져 있지요.
필립 얀시의 은혜에 대한 강조도 이러한 흐름과 추세에 편승한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얀시가 바르트의 은혜론 -- 결국 만인구원에 까지 이르는 -- 에 찬성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얀시와 바르트는 좀 구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얀시가 그의 저술에서 바르트를 인용할 때 상당히 호의적으로 인용하고 있음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우선으로 한 다음에 그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알미니안주의와 웨슬레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고 그 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바르트의 신관은 개혁신학의 하나님 주권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성을 약화시키는 의미에서 웨슬리 신학에 가까이 가 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해도 만인구원론 까지는 나아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르트는 웨슬리 보다도 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쪽으로 나아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단연코 말씀드리건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로우심을 약화시키면서 지나치게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위험한 일입니다. 특히 이러한 강조가 혼합주의와 교리적 무관심을 낳는다면 교회 전체의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는 참 이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가톨릭이 삼위일체론과 예수님의 신인성을 받아들이고 성경적인 윤리를 가르친다는 점 (특히 가정윤리과 성윤리와 생명윤리)에서는 기독교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무류설, 행위칭의론과 연옥설 그리고 마리아 숭배사상, 성인 숭배 등등에 있어서는 비기독교적 요소 즉 이단적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을 완전히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좀 극단적인 판단으로 보여집니다. 저는 가톨릭은 사이비성이 있는 유치한 기독교로 봅니다. 이 말은 가톨릭을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나 몰몬교와 같은 수준에 놓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 보다는 나은 점이 있습니다. 실례로 최근에 가톨릭내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사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가톨릭내에서는 복음적인 가톨릭교도들이 등장해서 개신교 복음주의로부터 배우려는 움직임들이 실재로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와 남미의 가톨릭은 훨씬 더 미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따라서 저는 현재 가톨릭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는 열린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계시록이 말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의 중심을 가톨릭의 교황제도가 차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점에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합니다.
칼 바르트의 신학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innovation' (혁신) 입니다. 즉 전례가 없었던 새로운 신학적 해석들과 주장들을 내놓았다는 것이죠. 그는 교의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신학적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사실 경영학이나 공학같은 분야에서 혁신은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입니다. 그래서 경영혁신이나 기술혁신은 사실상 매우 가치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신학분야에서 혁신이라는 것은 사실 가치롭다고 여겨지기 보다는 위험하게 여겨지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2000 년의 성경해석의 역사와 그 역사를 통해 공고해진 정통교리를 대체하는 새로운 혁신적 교리를 내세운다는 것은 잘못하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찍히기 쉬운 일이고, 잘 해도 그 혁신이 받아들여지는데는 엄청난 시간과 갈등의 과정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르트의 신학적 혁신은 한 3분의 1은 성공한 듯 합니다. 하지만 3분의 2는 좀 위험을 노정하고 있습니다. 위험을 노정하고 있는 부분 중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의 신론에 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God is the one who loves in freedom." 하나님은 자유 안에서 사랑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개혁주의 전통에 올곧게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유와 동시에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과도 어울립니다. 하지만 바르트 신관의 근본적 오류는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랑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하나님의 사랑과 대등한 차원에서 이해해 왔으며,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모든 피조물의 사랑과 대비되는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전제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참되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합의였습니다. 가장 극명한 실례가 바로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일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이며, 이 도덕적 탁월성에서 사랑이라는 미덕이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즉 사랑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죠.
바르트는 하나님을 재정의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교의학 2권 1부에서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자유와 사랑에 종속시키고 있습니다. 사랑을 거룩에 우위에 놓음으로써 바르트는 결국 예정론 역시도 만인선택론으로 밀고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개혁신학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신학적 혁신을 단행하였고, 복음적인 개혁신학의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을 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르트는 개혁신학 전통이 강조한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바르게 강조했지만,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적인 거룩하심을 약화시킴으로써 신학적 균형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복음주의권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동등되게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만을 너무 강조하는 듯한 분위기를 설교나 서적들을 통해 많이 접하게 됩니다. 복음주의권이 잘못된 배타성과 비본질적인 문제에까지 관용과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그 반대측면으로 나아가 무분별한 관용과 혼합주의적인 태도를 취함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개신교 목사님이 설교시에 "하나님의 사랑앞에 자아를 온전히 내려놓고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다면 동방정교나 카톨릭이나 기독교나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테레사수녀같이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던질수 있다면 족하지 않습니까...등등 너무 이단이라고 서로를 규정하고 정죄하지 맙시다"
라는 식으로 설교합니다.
설교시에 계속 이런식의 입장을 취한다면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서적중에서는 특히, 필립얀시(이 분의 책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한국개신교인들에게 엄청 인기있고 잘 읽히는 책의 저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가 지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 이 사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저는 좀처럼 느낄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놀랍도록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썩 잘 표현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동등하게 강조되어야 할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모습은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경향성을 율법주의적인 태도라고 약간 우회적으로 비꼬는 태도도 나타남을 느겼습니다. 칼바르트류의 신정통주의적인 신관이나 오늘날의 상대주의적인 경향성이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에게
암암리에 영향을 끼쳐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런 경향성이 있슴은 분명합니다.
정목사님께서는 이런 식의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그리고, 더불어 목사님은 천주교의 구원관이나 신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천주교가 비록 기독교와 유사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본질적인 부분(구원관이나 신관,내세관 등)에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제임스패커같은 분도 카톨릭과 연대하는 면에서 배서인으로까지 참여했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으나 복음주의권의 개신교가 카톨릭과의 이런 에큐메니칼한 연합적인 경향성에 대해서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약화시키는 사람들이 현대에 많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바르트의 신관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쪽으로 기울어져 있지요.
필립 얀시의 은혜에 대한 강조도 이러한 흐름과 추세에 편승한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얀시가 바르트의 은혜론 -- 결국 만인구원에 까지 이르는 -- 에 찬성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얀시와 바르트는 좀 구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얀시가 그의 저술에서 바르트를 인용할 때 상당히 호의적으로 인용하고 있음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우선으로 한 다음에 그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알미니안주의와 웨슬레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고 그 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바르트의 신관은 개혁신학의 하나님 주권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성을 약화시키는 의미에서 웨슬리 신학에 가까이 가 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해도 만인구원론 까지는 나아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르트는 웨슬리 보다도 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쪽으로 나아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단연코 말씀드리건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로우심을 약화시키면서 지나치게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위험한 일입니다. 특히 이러한 강조가 혼합주의와 교리적 무관심을 낳는다면 교회 전체의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는 참 이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가톨릭이 삼위일체론과 예수님의 신인성을 받아들이고 성경적인 윤리를 가르친다는 점 (특히 가정윤리과 성윤리와 생명윤리)에서는 기독교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무류설, 행위칭의론과 연옥설 그리고 마리아 숭배사상, 성인 숭배 등등에 있어서는 비기독교적 요소 즉 이단적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을 완전히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좀 극단적인 판단으로 보여집니다. 저는 가톨릭은 사이비성이 있는 유치한 기독교로 봅니다. 이 말은 가톨릭을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나 몰몬교와 같은 수준에 놓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 보다는 나은 점이 있습니다. 실례로 최근에 가톨릭내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사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가톨릭내에서는 복음적인 가톨릭교도들이 등장해서 개신교 복음주의로부터 배우려는 움직임들이 실재로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와 남미의 가톨릭은 훨씬 더 미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따라서 저는 현재 가톨릭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는 열린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계시록이 말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의 중심을 가톨릭의 교황제도가 차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점에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