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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로 육군보병학교가 창설 55주년을 맞았다. 보병학교 창설의 의미는 여러 면에서 찾을 수 있으나 1950년부터 69년까지 보병학교를 통해 임관한 갑종장교들에게는 남다른 면이 있다.
보병학교는 4만5424명의 갑종장교가 ‘배우며 자란’ 모교인 것이다. 창군 이후 우리 군의 기틀을 확립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왔으나 이제는 그 양성 체계의 맥이 끊긴 갑종장교들의 발자취를 조명해 본다.
■ 갑종장교의 역사와 의미
갑종장교는 창군 이후 우리 군 체계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초급장교들을 확보하기 위해 실시한 장교 양성 제도 중 하나의 방안으로 육성되기 시작했다. 갑종이란 첫 번째로 시작되는 장교 양성 과정 또는 으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1949년 육군보병학교가 경기도 시흥에서 창설된 후 50년 1월27일 1기생으로 입교, 교육받기 시작했다. 이 교육 과정에서 6·25전쟁이 발발, 갑종장교들은 초창기부터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1기와 2기들은 이때 장교 계급 대신 사관후보생의 한자 ‘士’자 표지를 단 채 참전했다. 세계 전사에서 후보생 신분으로 전투에 참가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1기생 363명은 7월15일 소위 계급을 부여받았으나 전체가 한자리에서 임관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영향으로 보병학교가 50년 8월10일 부산 동래로 이동하면서 육군사관학교와 합병, 육군제병학교로 개칭됨에 따라 2기는 9월10일 제병학교(동래)에서 육군종합학교 1기(50년 10월15일 임관)보다 선임장교로 임관했다.
50년 9월7일 육군제병학교가 육군종합학교로, 다시 51년 2월16일 육군보병학교로 개칭(부산 동래)되고 51년 10월27일 육군보병학교가 부산 동래에서 광주 상무대로 이동했다.
이에 따라 부산에서 교육받고 있던 5기부터 17기는 같은 해 10월27일 광주 상무대로 이동,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임관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학교 이름이 바뀌는 가운데 69년 8월30일까지 230개 기수, 4만5424명의 갑종장교가 육성됐다.
갑종장교는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 국내 대간첩 작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군인의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 3명(최범섭 중령·송서규 중령·임동춘 대위)을 비롯해 무공훈장 5343명, 보국훈장 2863명, 보국포장 1803명 등 1만9명의 국가유공자를 배출하며 목숨 바쳐 조국을 수호하고 국위를 선양했다.〈표 1 참조〉
▲6·25전쟁: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던 6·25전쟁의 와중에서 배출된 1기부터 전쟁 막바지인 53년 7월18일 임관한 49기까지 1만508명은 최전방 사단의 소총소대장, 관측장교, 공병소대장, 통신소대장, 탄약작업 소대장 등 최일선에서 주도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다가 808명이 전사했다.
전쟁이 일어난 37개월간 매월 20여 명 넘게 전사한 셈이다. 이처럼 갑종장교는 숭고한 희생을 치르면서 북한의 남침을 막아냈다.
▲베트남 전쟁:64년 7월18일부터 73년 3월23일까지 8년 8개월간 32만여 명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에서 갑종장교는 전 장교단의 65.7%에 해당하는 1만4712명이 참전했다. 소대장·대장 등 초급 지휘관(자)은 갑종출신 장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크고 작은 전과를 올리는 가운데 8000여 명의 갑종장교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한 각종 무공·보국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전투 중 174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갑종장교는 전후 우리 군이 정비되고 확장 발전하는 단계를 맞아 보병·포병·군수·통신 등 각 분야에서 기반을 다지고 현대화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핵심 간부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동시에 크고 작은 각종 전투에서 축적한 귀중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군 전투력 향상과 국가 안보의 확고한 기틀을 다졌다.
200명이 장군 반열에 올랐으며 군 최고 계급인 대장도 4명이 나왔다.〈표 2 참조〉
첫 장성의 영예는 1기 하소곤(河小坤·예비역 소장)장군이었으며 3기 오자복(吳滋福)장군은 갑종 출신으로 첫 번째 4성 장군과 첫 합참의장, 그리고 첫 국방부장관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5기 정호근(鄭鎬根)장군은 1야전군사령관을 거쳐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172기 조영길(曺永吉)장군은 2군사령관·합참의장을 거쳐 참여정부의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의 군 복무 시절 대대장이었던 노무식(盧武植·20기·예비역 소장)장군, 국방부차관을 지낸 신치구(申致求·22기·예비역 중장)장군, 현 전쟁기념관장 김석원(金石元·166기·예비역 중장)장군 등도 갑종장교 출신이다.
69년 230기를 마지막으로 배출된 만큼 갑종장교들은 현역에서 대부분 물러나 있는 상태. 현재 1야전군사령관 정수성(鄭壽星·202기)대장과 국방대학교 총장 권영기(權泳基·222기)중장 단 2명만이 현역으로 군을 이끌고 있다.
■ 갑종장교 기념사업 추진현황
갑종장교단의 기념 사업은 현재 1, 2단계로 진행되고 있다.
1단계는 육군보병학교의 기존 건물 동춘관을 이용해 갑종장교의 역사와 6·25전쟁, 베트남 전쟁, 대간첩작전에서의 공로를 기억할 수 있도록 기념관으로 만드는 것. 지난해 7월29일 완공식을 가졌다.
2단계로는 갑종장교의 명예 선양과 전몰 전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상징 조형물인 호국탑을 건립하고 갑종장교에 대한 체계적 연구와 함께 정리가 미흡한 분야를 재조명하기 위해 1997년 간행된 바 있는 ‘갑종장교단 약사’를 새롭게 재발간하는 것.
호국탑은 한자의 ‘甲’자와 보병학교 마크를 조합해 전체 모양을 평화·안정·자유·발전의 상징인 4각 조형물(6×2.5×6.25m)로 구성한 조각품. 오는 10월 완공 예정이다.
이와 병행, 마지막 230기 장교로 베트남 전쟁 때 안케 패스 전투의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추서받은 고(故) 임동춘 대위 동상도 호국탑 좌측 광장으로 이전 작업 중에 있다.
갑종의 역사를 담은 책자 발간은 전후 세대에게 안보 의식 고취와 애국심 함양에 기여할 수 있도록 참전용사의 증언과 기록물을 검토·재정리해 10월까지 발간할 계획이다.
■ 인터뷰-김영갑 갑종장교단중앙회 기념사업회 기획위원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갑종장교의 공적과 명예를 기리며 장렬히 산화한 전사자의 영령을 추모하고 그 가족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시함은 물론 육군의 역사 보존과 전통을 계승하고 전후세대에게 국가관 확립과 안보의식을 고취하자는 것이 이번 기념 사업의 목적입니다.”
김영갑(金榮甲·170기·예비역 소장)갑종장교단중앙회 기념사업회 기획위원은 “2002년 6월부터 시작한 기념 사업이 오는 10월 마무리된다”면서 “회원의 대다수가 60~70대로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이제야 겨우 한시름 놓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장군은 이번 기념 사업을 크게 세 가지에 중점을 두고 추진해 왔다. 갑종장교란 누구인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는가, 그리고 갑종장교의 정신과 얼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
이 같은 방침에 따라 갑종장교단은 사업을 1·2단계로 구분해 기념관 설치, 호국탑 건립, 책자(略史) 발간 등 3개 분야로 계획된 목표를 순조롭게 진행해 왔다. 또 소요 예산도 회원들의 적극적인 성금 모금과 정부 등 후원 기관의 지원금으로 충분히 확보했다.
6·25전쟁이 벌써 지난날의 역사로 잊혀져 가고 있는 세태를 생각하면 오히려 이러한 사업이 더욱 필요하고 장려돼야 한다는 것이 김장군의 지론.
따라서 김장군은 “앞으로도 갑종장교단은 전후 세대에게 국가 안보와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깊이 인식시키고 나아가 전쟁의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가 안보를 다지는 데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갑종장교 출신으로 많은 분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현재 1만3000여 명의 주소만 파악되고 있다”는 김장군은 기념 사업 추진과 함께 “나머지 인원에 대한 연락처를 파악하고 있다”면서 “전 장교단이 군과 국가 발전을 위해 더 기여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