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의 삶과 세상 이야기] ⑥ 무심천변에 두고 온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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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중학교에서 입학식을 치른 나는 전학생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전학생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같은 반 또래들은 모두 그곳 청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올라온 토박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다시 그들에게 내 존재를 알리고 그들 속으로 파고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했다.
그 노력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야구였다.
당시 청주중학교에는 정식 야구부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학년만으로 이루어진 학교대표 야구부
였고, 저학년에는 야구부가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아이들은 야구라는 게 어떤 게임인지 익숙하지
못했고 게임 규칙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같은 반의 친구들을 부추겨서 야구를 같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쉽사리 야구에 매료되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야구는 신체의 여러가지 기능들을 자극하고 개발시켜 주는 재미있는 운동
이니까. 그래서 얼마 후 우리반 아이들은 매일처럼 방과후엔 야구를 하게 되었고, 덕분에 나는 외로운
신세를 면하고 그곳에 쉽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항상 이렇게 친구들과 어울려 요란스럽게 지냈던 것은 아니다. 그 시절, 나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다.
청주에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무심천이라는 개울이 있었다. 당시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는데,
개울 양쪽으로 재방이 쌓여있었고, 그 제방 위에는 벚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봄이 오고 제방 위의 벚나무들이 하옇게 꽃을 피워 올릴 적이면 무심천변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였다. 나는 그곳을 무척 좋아했다. 학교에서와 달리 무심천변에서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마다, 혼자서 그곳으로 나가곤 했다.
늦은 밤 하얗게 흐드러진 벚꽃을 따라 한없이 제방길을 걷기도 하고, 종이와 연필을 들고 나가 풍경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틈나는 대로 무심천변을 거닐던 습관 때문에 특별히 감수성이 예민해져 있었는지,
그 시절의 여름엔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나는 매일처럼 일기장을 들고 무심천변으로 나갔다.
개울가에 넋놓고 앉아 있노라면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들이 가슴속으로 스쳐갔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불쑥 떠오르기도 했고, 근원을 알 수 없는 깊은 회의나 우울함에
젖어들기도 했다. 나는 그것들을 가슴속에 떠오르는 대로 솔직하게 옮겨 적었다. 아마도 그때 나는
금쪽같이 소중한 열세 살 사춘기 소년의 시간을 쪼개어 알뜰히도 외로움을 즐기고 있지 않았나 싶다.
방학이 끝나고 일기장은 담임 선생님께 제출되었다. 다른 학생들의 일기장과 함께였다.
그리고 며칠 후 검사를 마친 선생님은 한권 한권의 일기장을 들어 주인의 이름을 부르며 돌려주셨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이름이 불려지지 않았다. 나는 불안해졌다. 사실은 그 일기장을 제출할 때
부터 내심 불안했다. 그때까지 나는 한번도 그런 식으로 일기를 써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런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준다는 일 따위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마도 선생님께서 그처럼 감상적이고 나약한 생각들을 일기랍시고 늘어놓은 나를 단단히 야단
치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의 일기장을 모두 돌려준 선생님은 마침내 내 일기장을
들더니 어느 날의 일기를 읽으셨다. 그리고는 일기장을 덮으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아, 일기라는 건 이렇게 쓰는 거야."
내 얼굴은 그만 빨갛게 변했다.
정말로, 그 글 속엔 남에게 내놓고 자랑할 만한 어떤 아름다운 표현도, 수식어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마음 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그대로 적었을 뿐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글로써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때 첫 번째로
꼽아야 할 원칙은 솔직함이라는 사실이었다.
청주 생활은 1년 만에 끝났다. 내가 2학년이 되던 해인 1948년 봄, 아버지는 서울로 전근발령을 받으
셨고, 우리 가족은 또 짐을 꾸려 그 도시를 떠나야 했다.
경기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나는 방학이면 꼭 청주를 방문하곤 했다. 특별히 찾아갈 만한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기차를 타고 그곳으로 가곤 했다. 그래서 매일처럼 티격티격했던 옛 친구
들을 만나기도 하고, 물론 벚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무심천변을 한가로이 산책하는 일도 잊지 않았
다. 그곳엔 나의 가장 빛나던 사춘기 시절이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무심천변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야릇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