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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기억’으로서의 서정
—강인한의 시세계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1.
강인한(姜寅翰) 시인의 열 번째 시집 <튤립이 보내온 것들>(시학, 2017)은, 등단 반세기를 맞은 우리 시단의 대표 중진(重鎭)이 정성스레 새겨놓은 미학적 기념비이다. 두루 알려진 것처럼 강인한은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그 스스로 말했듯이 “시는 언어의 보석이다./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이다.”(「시인의 말」)라는 신념을 균질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지켜온 시인이다. 그 이름에서 풍기는 ‘강인한’ 이미지와 함께 그는 다양한 실험으로 독자적인 “언어의 보석”을 일관되게 캐왔고, “그 속에서 빛나는” 심미적 섬광의 극점을 선명하게 형상화해왔다. 이번 신작시집은 이러한 언어적 결정(結晶)으로서의 “시인의 영혼”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예술적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심하게 읽어보면 금세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번 시집은 삶 혹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접근이나 이념적 입장 표명 같은 것에 전혀 중심축을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시인은 철저하게 내면에 축적된 시간의 깊이를 바라보고 표현하는 데 시적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번 시집을 읽는 것은 시간의 깊이를 들려주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와 흔연하게 만나는 일과 같다. 결국 강인한 시인은 ‘거울’과 ‘창(窓)’으로서의 이중 역할을 이번 시집에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다양한 경험과 기억과 전언(傳言)을 모으되 그것을 역동적인 하나의 화폭으로 구성해가는 원리로 삼고 있다.
일찍이 프랑스 문호 위고(V. Hugo)는 <세기의 전설> 서(序)에서 “모자이크 안에서처럼, 개개의 돌멩이는 자신의 고유한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전체는 하나의 형상을 하고 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다양한 개별성들이 느슨하나마 하나의 통합적 전언을 욕망하면서 결속된 것이 자신의 작품임을 강조한 것이다. 강인한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도 이러한 모자이크 원리를 닮아 있다. 말하자면 그의 시집은 수미일관한 원리에 의해 규율되어 있지 않고, 그때그때 활성화된 역동적 상상력이 플래시처럼 터져 나오는 빛을 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률적 동어반복이 아니라 시편 하나하나가 다양한 주제와 정조(情調)를 견지하고 있고, 통일된 화두나 주제로 명료하게 개괄할 수 없는 것이 시집의 요체이자 장점인 셈이다. 여기에 ‘기록하는 기억’을 향한 그의 오랜 적공(積功)이 배어 있음은 췌언의 여지가 있을 리 없을 것이다.
2.
이러한 원리에 의해 씌어진 강인한의 시에는 감정 과잉의 ‘감상(感傷)’이나 모조(模造) 행위인 ‘포즈’가 전혀 찾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세계의 모순을 이루고 있는 많은 현상들을 비선택적으로 모두 흡수해 들이면서, 가파르게 세상과 대결하고 나아가 자신만의 ‘희망’의 원리를 창안해내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인간의 존재 형식이 기억과 현실 사이에 있음을, 그리고 시는 낭만적 우수와 현실 감각이라는 이중 장치에 의해 씌어지는 것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 안에는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경험적 격정의 세계가 수반되며, 강인한은 시를 향한 순연한 열망으로 그 격정을 치환해간다. 그 점에서 강인한의 시는 낮은 목소리에 의해 단아하게 씌어지는 ‘단형 서정시’나, 말랑말랑한 감각을 돋우어내는 ‘감상적 회고시’와 거의 대척점에 있다.
바람들이 차갑게 또는 서늘하게
길 위에서 서로 다른 체온을 비비며
색실처럼 넘나드는 아침 여섯 시의 공기.
길바닥에
지렁이들 나와 죽어있다.
어제는 얼마나 먼 길 찾아나서 땡볕에
말라 죽었느냐, 느린 걸음으로
울며 가는 달팽이들.
갈대숲 푸른 덤불을 감고
길 가는 미루나무 새 잎을 향해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나팔꽃 넝쿨손.
강아지랑 고양이
식구들 유모차에 다 태우고
한강공원 산책 나선 할머니.
강변북로 아래 굴다리 지나
튤립 꽃은 가고 없네. 공원관리사무소 옆
돌돌거리는 유모차에 쫑긋쫑긋 귀를 버리고.
― 「튤립이 보내온 것들」 전문
시인은 아침 일찍 강변북로 아래서 튤립 꽃이 지고 난 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가령 이곳에는 땡볕에 말라 죽은 “지렁이들”이나, 느린 걸음으로 울며 가는 “달팽이들” 그리고 갈대숲이나 미루나무 잎을 향해 넘실거리는 “나팔꽃 넝쿨손” 등이 있다. 어떤 것은 죽어 있고, 어떤 것은 울며 움직이고, 또 어떤 것은 생명의 몸짓으로 부산하다. 그리고 거기에 “강아지랑 고양이/식구들 유모차에 다 태우고/한강공원 산책 나선 할머니”의 풍경이 부가적으로 얹힌다. 어쩌면 반려동물들을 태우고 노경(老境)의 한순간을 지나가는 할머니의 형상이야말로 사라져버린 ‘튤립 꽃’의 마지막 잔상(殘像)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사라져버린 ‘튤립 꽃’이 만들어내는 이 같은 다양하고 무심한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튤립이 보내온 것들’이 죽거나 울거나 낡아감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튤립이 피어 있을 때의 활력을 역설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시인은 “어둠 속에 빛나는 가슴”(「그림에서 빠져나온 마하」)을 열어 다양한 풍경이 내비치는 순간의 극점을 기다리고 또 현상해간다. 그렇다면 ‘튤립’은 ‘시(詩)’의 은유적 등가일 수도 있을 것이고, ‘튤립이 보내온 것들’은 시가 담아낼 수 있는 ‘죽음’과 ‘울음’과 ‘생명’의 형상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강인한은 ‘시와 ‘시인’에 관해 상상하고 그 내질(內質)을 메타적으로 구축해가는 시인이다.
지휘봉 하나에 칠십 개의 시선이
자장 안의 쇠붙이처럼 모여든다.
치켜든 지휘봉에 수은의 정적이 맺혀 반짝 빛나는
한순간, 봄의 기병대가 뛰쳐나가고
여름의 악장이 강물처럼 넘실넘실 흐르다
섭씨 삼십육 도와 사십일 간의
지글거리는 폭염을 끌고 프레스토로 이어져 갔다.
모든 악기들이 땀을 들이고
지휘봉을 든 여자 앞에 한 남자가 앉는다. 종이를 끼우고
천천히 타자기를 치는 남자.
—토드락 탁 토드락탁탁 톡탁 타르륵
탁탁 토르르르 탁 톡톡
배롱나무 태양처럼 붉은 꽃들, 하르르 지고
배롱나무 흰 꽃들, 붉은 꽃들 사이사이 흩어지는 소리.
타자를 다 마친 남자가 일어서서
종이를 꺼내 지휘자에게 두 손으로 바친다.
접힌 종이를 편다. 백지에 핑크 하트!
― 「타자기를 연주하는 남자」 전문
두루 알다시피 지휘자는 연주자들의 시선을 “자장 안의 쇠붙이처럼” 빨려들게 하는 존재이다. 지휘봉은 “수은의 정적이 맺혀 반짝 빛나는/한순간”을 잡아내는데, 이때 지휘자가 만들어내는 ‘여름의 악장’은 넘실넘실 폭염을 끌고 빠른 템포로 흘러간다. 그런데 그렇게 악기들로 하여금 땀을 들이게 한 “지휘봉을 든 여자” 앞으로 “천천히 타자기를 치는 남자”가 와 앉는다. 그는 “배롱나무 태양처럼 붉은 꽃들, 하르르 지고/배롱나무 흰 꽃들, 붉은 꽃들 사이사이 흩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타자를 완성하여 지휘자에게 바치는데, 접혀진 종이에는 “백지에 핑크 하트!”가 그려져 있다. 지휘봉 하나로 수십 개 시선을 모으는 지휘자에게 ‘봄의 기병대’와 ‘여름의 악장’을 듬뿍 담아 배롱나무 꽃들이 하염없이 이울고 지고 사라져가는 그 순간을 백지에 담아낸 남자의 심미적 작업이야말로 ‘시작(詩作)’의 은유가 아닐 것인가? 그래서 시인은 타자기를 ‘연주(演奏)’한다고 했을 것이고, 그 ‘타자 연주자’는 바로 ‘시인(詩人)’의 은유적 형상이 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짧지만 정확한 절도”(「맥(貘)」)를 가진 순간의 미학을 격정의 언어로 담아내는 강인한의 감각과 사유가 그 특유의 빛을 발한다. 이처럼 강인한 시의 일차적 외관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정신주의적 견고함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미학적 극점의 순간을 환기하는 계열체적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인상은 강인한 시인이 삶의 깊은 이법(理法)에 대한 견결한 태도를 단호한 형상 안에 담아두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강인한은 ‘시’(튤립)와 ‘시인’(남자)의 초상을 통해 자신만의 심미적 입상(立像)을 도모해간다.
3.
그런가 하면 강인한 시편은, 대개의 서정시가 그러하듯이, 재귀적(再歸的) 원리를 통해 ‘역진(逆進)’의 기억을 향해 가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시는 기억과 현실을 통합하면서 주체가 대상을 통해 겪는 순간적 경험에 관심을 두루 가진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주체의 정서적 반응에 직접적 자기 근거를 마련해간다. 이때 주체는 대상으로부터 결코 초월하지 않고 삶의 순간적 파악을 통해 그 대상에 개입해간다. 존재론적 결핍을 기억의 원리에 의해서 견디고 그것을 심화해가는 강인한의 예각성은 이 부분에서 단연 빛난다. 다음 시편들을 읽어보자.
어느 여름이었을까,
땀 뻘뻘 흘리며 잠을 자다 꿈을 꾸었지.
꿈속에서 길을 찾다 불타고 허물어진 마을 어귀에서
당신이 나를 부르는데 그 먼 꿈밖으로
나가는 길을 나는 찾지 못해
해 지도록 울며불며 헤매기만 하였네.
서른 살 풋내기 교사, 내 젊은 날은 꿈에 갇혀 못 나오고
꺼멓게 타고 남은 교실 층계 뒤로 돌아가며 멀리서
수업 시작 종소리는 울리기 시작하였지.
까마귀처럼 웃는 아이들 유리창마다
기웃기웃 어떡하나,
꿈밖으로 나가는 길을 나는 아직도 모르는데.
― 「손금에 갇힌 새」 전문
여름 밤 꿈속에서 ‘새’가 되어, 시인은 불타고 허물어진 마을 어귀에서 ‘당신’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 새는 멀고먼 꿈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해 울며 헤맬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꿈의 기억에서 들리던 소리는 흡사 젊은 날의 “서른 살 풋내기 교사” 때 꺼멓게 타고 남은 교실 층계 뒤로 듣던 수업 종소리를 환기해준다. “까마귀처럼 웃는 아이들 유리창마다/기웃기웃” 하는 것을 교사로서 어떡하나 하던 기억 앞에서 여전히 시인은 “꿈밖으로 나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손금에 갇힌 새”는 시인의 성장사(成長史)를 발화하는 분신이기도 하고, 여전히 “겹겹 두려움을 껴입은 어둠 속에서”(「스벵갈리 앞에 선 여인」) 살아가는 자신을 반성하는 분신이기도 하다.
이처럼 강인한의 시는 일견 회귀성으로, 일견 반성적 사유로 갈무리되어간다. 그 세계는 자신이 경험해온 순간들에 대한 의미론적 해석과 함께 그것을 자신의 삶과 등가적 원리로 결합하려는 은유적 속성을 곧잘 불러온다. 이렇게 강인한 시에서 사물과 주체의 긴밀한 조응 과정을 주체의 시선으로 수렴하고 해석하는 원리는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주체의 시선으로 사물의 고유함을 발견해내고 그 힘으로 다시 자신의 삶을 성찰해가는 강인한 시의 원리는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그 점, 강인한 시력(詩歷) 반세기를 웅변해주는 중요한 시적 원리가 아닐 수 없는데, 그러한 원리는 다음과 같은 집단 기억으로 확장되어가기도 한다.
찔레 덤불 아래 꽃뱀이 지나가자
참새 떼 화르르 깃을 털고
가문 하늘 두류산 놀빛에 재두루미 날아오는 곳,
사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 60년.
전란 3년 동안 남북 4백 50만 생목숨
이 땅에서 흙이 되었다.
슬픈 전설처럼
매지구름 비껴 흐르는 저기 비무장지대.
원통히 허리 잘린 우리 반도 아니라
동서로 나뉜 베를린처럼, 대동아전쟁의 일본 열도
니이가타에서 센다이까지 징벌의 삼팔선은
거기 있어야만 했는데…….
한라에서 백두까지 진달래 꽃걸음으로 오르는 길은
백두에서 한라까지 단풍치마 내려오는 길,
참게가 구멍 뚫는 임진 강둑에
녹슨 지뢰는 가물치처럼 지느러미가 돋는다.
― 「녹슨 지뢰와 가물치」 전문
시인의 기억은 “사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적막 60년”의 공간을 향하고 있다. “가문 하늘 두류산 놀빛”에 재두루미 날아오는 그곳은, 전쟁 때 수백만의 생목숨이 사라져간 이 땅의 “슬픈 전설”을 담고 있는 제유적 형상을 하고 있다. 시인은 “저기 비무장지대”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이러한 형상이 “대동아전쟁의 일본 열도”에 “징벌의 삼팔선”처럼 있어야만 했다고 상상해본다. 하지만 시인의 역동적 상상력은 “한라에서 백두까지 진달래 꽃걸음으로 오르는 길”과 “백두에서 한라까지 단풍치마 내려오는 길”을 넘어 “참게가 구멍 뚫는 임진 강둑에/녹슨 지뢰는 가물치처럼 지느러미가 돋는” 그날을 열망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시원(始原)의 형상을 탈환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시인은 “녹슨 지뢰”가 “가물치처럼 지느러미가” 돋아 마치 “거푸집의 몸에서 천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빠져나간 다음”(「복원」)의 형상을 구성하는 순간을 열망해보는 것이다.
이렇듯 강인한 시에 나타난 기억들은, 지나가버린 과거를 딛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현재화해가는 과정에서 완성되어간다. 그 존재론적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거리를 적절하게 확보해줌으로써 과거의 직접 체험을 현재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구성적 계기가 되어준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의 존재론을 이번 시집은 단호하고도 결연한 형상 속에 담아내고 있다. 이 점, 매우 중요한 이번 시집의 성취일 것이다. 결국 이번 시집은 현실의 단호한 응시를 택하는 동시에 견고한 형상을 삶의 태도로 삼는 목소리를 줄곧 들려줌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섬세한 반응까지 고요한 격렬함으로 구성해내고 있다. 그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사물의 존재론을 한없이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깊고 깊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러한 시선이 하염없이 이월해가는 시편들을 읽어볼 차례와 맞닥뜨린다.
4.
최근 시단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날 수 있는 시적 현상은 자연으로의 맹목적 침잠과 동화, 사적(私的) 기억이나 미시적 감각으로의 현저한 경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근대적 과제들이 산적한 우리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서 볼 때 현실성(reality)을 결여한 불구적 형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향은 주체가 현실과의 치열한 응전을 택한 결과라기보다는 자연, 기억, 감각 등의 새로운 권역들을 적극적으로 시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현실을 일정하게 비껴간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강렬한 ‘희망의 원리’를 꿈꾸었던 지난 시대에 대하여 뚜렷한 반(反)명제적 흐름을 보여주는 실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우리 시가 지향해가야 할 이념적 지표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러한 내성(內省) 편향이 삶의 전체적 차원을 모두 포괄할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성과 보편성을 통합하는 현실 지향의 시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청과 불가피하게 맞닥뜨리게 되는데, 강인한의 시는 이러한 시사적 요청의 전면적 승인과 함께, 그 스스로 굴신(屈身)을 모르는 비타협의 정신적 표지를 힘있게 구축해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알게 모르게 평형수를 줄이고
귀신의 숟가락 귀신의 보따리만 챙기는 나라
태어나지 마라, 이런 나라에.
건강을 위하여 아암, 시민들의 상쾌한 건강을 위하여
담뱃값을 올리고
다이어트를 위하여 지나친 포식을 자제하기 위하여
친절하게 밥값을 올려주는 나라
태어나지 마라, 이런 나라에.
금수강산 배달민족 그런 말 지금도 사전에 있느냐.
금수처럼, 짐승처럼, 그래그래 치킨을
피자를 배달시켜 먹고 국물 많은, 짐승처럼
짬뽕을 배달시켜 먹는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고말고.
금모래 은모래 반짝이는
이 강 저 강 파헤치는 배달민족
보를 쌓고 댐을 쌓아 홍수를 막았느니 재앙을 막았느니
녹조라테 넘실, 큰빗이끼벌레 너도 늠실,
저것도 먹으면 틀림없이 몸에 좋을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져가 연구해 보라고 해봐.
태어나지 마라, 이런 나라에.
골목골목 CCTV만 설치하면 근심걱정 그걸로 끝—
어두운 새벽 밤길에 잡은 처녀를 토막 내고
노파도 토막 내서 가방에 담고,
바다 속에 삼백 명을 눈앞에서 수장시키고도
그래도 그게 교통사고 사망자보담 적은 수 아니냐고.
떼죽음 생방송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팔짱 끼고 바라만 보고 바라만 보는 나라
태어나지 마라, 이런 나라에.
1박 2일로 숭례문이 불타고, 완벽하게 불탈 때까지 바라만 보고
그때 진작 알아봤지, 아암 두 손 놓고 불구경에
넋을 놓아버렸을 때
이 나라 망해버린 것 진작 알아봤어야 했지.
망해버린 자궁에 더 이상 들어서지 마라,
삼신할미가 점지해준 아이들아.
― 「태어나지 않은 이름은 슬프다」 전문
현실 해석과 판단과 비판의 정신이 풍자의 방법론을 수반하면서 펼쳐진 말의 난장(亂場)이 참으로 곡진하다. 시인은 후렴처럼 “태어나지 마라, 이런 나라에.”를 반복하면서 ‘이런 나라’의 적폐와 모순을 하나 하나 격파해간다. ‘이런 나라’는 평형수를 줄이면서 속이거나, 거짓 명분으로 담뱃값과 밥값을 올리거나, “금모래 은모래 반짝이는/이 강 저 강 파헤치는” 폭력을 행사하는 장치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시인은 이른바 ‘4대강 사업’의 결과를 두고 “보를 쌓고 댐을 쌓아 홍수를 막았느니 재앙을 막았느니” 하는 거짓 명분을 들이대는 정부를 향한 날선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나아가 “바다 속에 삼백 명을 눈앞에서 수장시키고도/그래도 그게 교통사고 사망자보담 적은 수 아니냐고” 강변하는 이들에 대한 서글픈 비판도 내놓는다. 그 “떼죽음 생방송”을 팔짱 끼고 바라만 보는 나라는 여지없이 지금도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게끔 한다. “1박 2일로 숭례문이 불타고, 완벽하게 불탈 때” 이미 나라는 망해버린 것이라고, 그래서 “삼신할미가 점지해준 아이들”은 망해버린 자궁에 들어서지 말라고, 시인은 힘주어 권면한다. 이렇게 ‘태어나지 않은 이름’들을 향해 내지르는 시인의 목소리는 더없는 슬픔을 촉발하고, 과거 기억을 찾아가면서 진실을 구축하려는 시인의 의지는 더없는 단호함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것을 ‘이런 나라’에 대한 역설적 ‘희망’이라 부르면 안 될까?
물론 여기서 ‘희망’이란 시인이 본래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삶에 대한 따뜻한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터이다. 가령 시인은 사회적 소수자나 주변부로 밀려난 타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연민을 통해, 시대의 주류로부터 일정하게 원심력을 부여받은 존재자들을 한결같이 옹호해간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기억에 남은 상처나 그리움의 표지를 열정적으로 기록해가면서, 단순한 휴머니즘이나 내면 탐구에 머물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따스한 희망의 가능성을 유추하게끔 하고 있다. 강인한 시편을 읽어나가는 중층적 기쁨이 바로 이러한 희망의 원리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다음은 어떠한가?
요르단 암만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
늙은 가로수들 한결같이
쓰러질 듯 서쪽으로 기울었다.
북쪽 국경 너머는 시리아
신전 돌사자 깨부수고 인질의 목을 베는
검은 옷자락.
어쩌다 페트라 암벽에
뿌리박은 무화과나무는, 일 년 내내 부는 바람과
천년 물길의 붉은 얼룩을 보며 목이 타고
시리아를 떠나와
낯선 해변 모래톱에 얼굴을 묻은 아기
아일란 쿠르디는 세 살이라 했다.
― 「기우는 바람」 전문
이 작품은 시리아 난민이었던 세 살배기 아이의 비극을 노래하고 있다. 시리아를 떠나 “낯선 해변 모래톱에 얼굴을 묻은 아기”인 “아일란 쿠르디”는 그야말로 곤히 잠든 것처럼 바다에 폭 안겨 있는 사진으로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이러한 비극을 방관해오던 우리는 이 시편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하고 시인은 묻는다. “신전 돌사자 깨부수고 인질의 목을 베는/검은 옷자락”의 나라를 떠나왔지만, 난민들은 어디서도 ‘기우는 바람’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국제적 집단 기억에 참여하면서 강인한 시인은 “낙타가 없어도/내가 낙타가 되어서 가야 하지 않겠느냐.”(「붉은 사막을 건너는 달」) 하고 재차 스스로에게 묻는다. “신화 속에서 끄집어낸 시간의 비늘들”(「리아스식 해안의 검은 겨울」)을 발가벗기며 인간의 잔혹성과 그에 반비례하는 희망의 원리를 탐색해가는 것이다.
이처럼 강인한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현실 탐색의 리얼리티를 회복해간다. 이때 우리는 실제 현실과 시적 현실이 일정하게 다르다는 점을 폭 넓게 승인하면서, 우리의 사유와 감각으로 파악 가능한 현실이 일정한 물질성과 구조적 복합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보통 실제 현실은 어떤 특정한 사회적 모순으로 불거져 우리 삶의 불편한 징후로 작동하거나, 우리의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하지만 강인한의 시가 파악하고 형상화하는 현실은 어떤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장면에서 유추되는 ‘시적 현실’이다. 이는 정치적 현실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상징적 풍경으로 그것을 번역하고 간접화해간다. 그래서 잘 씌어진 강인한 시편에서 ‘현실’이란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화하면서도, 구체적 시대상을 암유(暗喩)하는 이중 효과를 띠게 된다. 그것은 보편적 공감의 여지를 커다랗게 가지면서, 한 시대의 분위기와 인간 조건에 대한 심미적 통찰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일러 ‘기록하는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우리는 우수한 서정시를 통해 그간 대립적으로 인지되어온 지표들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하곤 한다. 가령 그것은 한동안 대립적 의미를 가지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한 몸으로 결속되어 있는 것임을 통렬하게 증명해낸다. 그래서 우리는 선형적 도식이나 구도(構圖)가 차츰 소멸하면서 다양한 타자들이 한데 어울리는 풍경을 그 안에서 목도하게 된다. 가령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진화와 퇴행 같은 것들이 선명한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한 몸으로 묶여서 사물과 운동을 규율하는 양면 속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시를 통한 이러한 상상적 전회(轉回)는 감각의 창신과 인지의 충격을 선사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하는데, 강인한의 좋은 시편들이야말로 이러한 감각의 창신과 인지의 충격을 우리에게 암시해주는 뜻 깊은 실례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시 안에서 우리는 삶이라는 것이 분절적 질서에 의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대립적이기까지 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채 흘러가는 것이고, 서정시가 자기 충실성을 벗어나 타자들의 삶에 대한 관심까지 확장되는 것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면모를 귀납하여 씌어진 다음 시편은 이번 시집을 종합하는 절창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물살 빠르게 휘도는 골짜기
맹골수로 저 아래에 모로 누운 거대한 여객선은
우리들의 성당이어요.
여기 따뜻한 슬픔의 휴게실은 우리들의 주소이고요.
머리카락에 붙은 부연 소문들
날마다 시린 무릎에는 퍼런 전기가 흐르지만
착하고 고운 지영 언니
당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요.
거짓말을 감추려 또 거짓말을
입술에 검게 칠하고 늑대들과 사는 여자는 참 불쌍해요.
한라산에 철쭉은 어디만큼 왔나
나비 앞장 세워 찾아가는 길,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천천히 종탑의 층계를 오르는 동안
은빛 갈치 살같이 달려가는 그 골짜기로 봄이 오겠지요.
기다리던 답장이 오고,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져
끝없이 소라고둥처럼 내려가는 단조의 층계
야자나무 잎사귀에서 호두나무 가지로 통통 건너가는
별 하나, 별 둘,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있어요.
눈 감고 가만히 기다리는 다영이, 수찬이, 차웅이
손 내밀어 봐, 별 모양 귀여운 불가사릴 줄게.
오라고,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볼우물 예쁜 최샘,
집게발 높이 들고 옆걸음 치는 꽃게들, 뽀글뽀글 피워 올리는
물방울 카네이션은 엄마한테 우리가 띄워 보내는 사랑이에요.
아, 우릴 부르는 저녁 종소리……
엄마 이제는 가셔요, 울지 말고 이제는 집에 가셔요.
― 「가라앉은 성당」 전문
‘가라앉은 성당(La cathédrale engloutie)’은 드뷔시의 피아노 ‘전주곡집’ 1집의 제10번이다. 바다 안개 속에서 살며시 울리는 성당 종소리로 시작되는 이 곡은, 바다 물결이 무언가를 힘있게 삼켜버리는 이미지를 담아가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형상과 의미를 저 역사의 비극에 비유적으로 가져간다. “2014년 4월 16일/저기 저 눈앞에서 어처구니없이 침몰하는 세월”(「분노는 파도처럼」)을 향한 뛰어난 착상과 응용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물살 빠르게 휘도는 골짜기/맹골수로 저 아래에 모로 누운 거대한 여객선”을 “우리들의 성당”이라고 명명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착하고 고운 지영 언니”와 거짓말을 감추려 또 거짓말을 하는 “늑대들과 사는 여자”의 뚜렷한 대조가 이 사건의 역사성을 상징적으로 부각시켜준다. 시인의 생각에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천천히 종탑의 층계를 오르는 동안” 아마도 봄이 오고 기다리던 답장이 오고 하늘에서 “빗발쳐 쏟아지는”(「폭탄을 두른 리본」) 별빛이 다가올 것이다. 그때 “물방울 카네이션은 엄마한테 우리가 띄워 보내는 사랑”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시인이 궁극적으로 듣는 “우릴 부르는 저녁 종소리”는 “내가 당신의 안으로 들어가고/당신이 또한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그걸 사랑이라고 번역”(「테셀레이션」)해가는 기억의 힘을 선명한 심상으로 기록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강인한 시인이 평생 지향해온 ‘언어의 보석’이 무엇이었을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것은 시대적 현실을 암시하면서 현실성을 강렬하고 핍진하게 드러내는 정신적 결기와 윤기를 함께 아우르는 것일 터이다. 또한 그것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한 시대의 단면을 선명하게 이해시키는 데 유력한 방법이 되어주면서, 뭇 사물에 대한 섬세한 시선이 사회적 현상과 유추적 접점을 형성하며 진실의 실재를 강렬하게 시사해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때 시인이 실천하는 서정의 원리는, 주체의 감정 표백이 아니라, 대상을 기록하면서도 그 안에 오랜 흔적으로 담긴 시간을 놓치지 않는 안목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강인한 시편은 사실적 기록과 서사적 충전(充電)이 ‘충만한 현재형’ 속에 잘 결합된 사례들을 다양하게 보여주면서, 정치적 직접성을 벗어나 현실의 풍부한 형상을 통해 인간의 존재 조건과 삶의 형식을 간접화하는 데 줄곧 기여한다. 또한 우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을 암시하는 강인한 시의 풍부하고 복합적인 형상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현실 감각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록하는 기억’으로서의 서정, 그것이 강인한 시력 50년의 더없이 빛나는 미학적 모뉴멘트(monument)인 것이다. (*)
—강인한 시집『튤립이 보내온 것들』(2017, 시학)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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