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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소초등학교39회동창생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까끌바우
“야! 이 쉬애끼들 엎드려 뻗쳐”
“동작 봐라! 동작 봐!”
“푸샾 준비”
“구호는 하나에 정신, 둘에 통일이다”
하나~ 정신! 둘~ 통일!..........
목청이 터져라 정신 통일 외치며 100번 푸샾 하고 나면
식사 시간에는 밥숟가락 든 손이 올라 가는게 아니고 입이 숟가락을 따라간다.
이제 막 훈련소에 입소한 모습이다.
훈련소 한 달은 위병소 담 하나가 천리만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모든 게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천 길 낭떠러지에 곤두박질 쳐진 그런 느낌.......
증평에서 4주 교육 마치고,
후반기 4주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춥다는 6사단 철원에서 받았다.
그때의 일화다.
후반기 교육때의 우리 계급은 이등병이다.
동기생 중에 성은 반씨요, 이름은 일병인지라
일석점호 때 관등성명을 대면
“예! 이병 반 일병”
기간병이 일병인지 이병인지 고개를 갸우뚱 하며
“야! 너!” 하면
“예! 이병 반 일병” 핏대가 서도록 소리를 지르면 내무반이 웃음바다가 되었지요.
지금도 그 친구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후반기 교육 중에 중방골 최인규는 사단 수색 중대 운전병으로 뽑혀갔다.
자대 배치는 19연대 1대대 2중대로 받았다.
그때부터 내 군 생활은 완전 후루꾸(요행)이었다.
한 마디로 그 옛날에 군대 생활한 사람 치고 고생 안 한사람이 없고
유격 훈련 두 세 번은 기본이고 정말 고생한 사람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다.
안양준 같은 친구는 유격 훈련을 6번이나 받았다고 한다.
우리 동네 호싱이(권영신)도 향로봉에서 고생깨나 한 모양이었다.
100키로 행군은 분기별로 한 번씩 10키로 구보는 수시로 했다고 한다.
이러한 남들 군 생활한 얘기 들으면 거짓말 같았다.
난 33개월 10일 동안 힘든 훈련은 거의 받지를 안았다.
그러면 땡땡이를 깠냐? 그것도 아니다.
그게 복 인지는 몰라도 그런 힘든 훈련이 있을 때 마다 거의 사정권 밖에 있었다.
78년11월 17일 입대해서 79년1월말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
79년 4월경 G.O.P(전방 철책 경계부대)로 이동 했다.
그 때면 일병을 달았을 시기다.
그러니까 졸병 6개월은 훈련소 동기생들과의 단체 훈련이고
철책으로 이동하기 전에 자대 생활은 태권도 훈련이 전부였다.
밤낮으로 태권도만 했었다. 유단자는 제외였다.
그러면 내가 유단자냐? 그것도 아니다.
태권도에 태자도 몰랐지만 군대의 유단자란 자고로,
태권도 품세 태극 제8장(마지막장)만 폼 나게 하고 겨루기에서 이긴 사람은
무조건 단증을 준다.
그런데 나는 자대 배치 받고 한 달도 안돼서 유단자가 되었다.
겨루기에서 우리소대의 6개월차 고참과 붙었는데 덩치 큰 그 고참
내 앞차기에 다운 된 게 아닌가?
박수 소리와 함께 단증을 수여 받았다.
유단자는 교육 시간 열외다.
그렇게 3~4개월 흘러 철책으로 이동했다.
군인의 이동은 거의 한밤에 이루어진다.
적에게 노출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자정 무렵 전 경계부대(다른 연대)와 임무 교대를 했다.
그때는 정말로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우측 산꼭대기에서 비치는 불빛이 정말로 도깨비불처럼 앞에
철조망을 따라 쫘악 비치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중에 보니 그것이 써치 라이트였다.
앞에 무장공비라도 나타나면 아군이 유리하게 적을 제압 할 수 있도록
대낮처럼 비추어 주는 “제논”이라는 기계였다.
처음 며칠은 정말이지,
칠흑 같은 어둠에 코앞에 북한군과 총부리를 맞대고 있다고 상상해 봐라.
오금이 절여 혼자 화장실은커녕 오줌발도 주눅이 든다.
지루한 추위에 떨며 긴장이 풀릴 쯤 되면
산새들의 지저귐이 먼저 시작 된다.
동이 트는 신호이다.
그러면 곧 경계 초소에서 철수해서 식사 하고 취침에 들어간다.
정오에 기상해서 식사하고 두세 시간 태권도 하고 쉬다가
저녁 먹고 땅거미가 내리면 또다시 경계근무에 들어간다.
처음 한 달은 겁나고 긴장되어서 심한 변비에 치질까지 생겼는데 시간이 지나니
일상이 되어서 북한군 G.P에서 농구 하는 소리가 동네 애들 떠드는 소리로 들리고,
그 시끄럽던 대남 방송은 자장가로 들린다.
(그놈들은 7.4공동성명 약속을 깨고 악랄한 대남 방송을 했지만
우리는 대북 방송 대신 팝송이나 가요를 내보냈슴)
재미난 것은 내무생활(반지하벙커)도 취사도 소대 단위이다.
그 시절만 해도 후방에는 시커먼 보리쌀이 6대4로 많았는데
전방에는 반대로 쌀이 많았다.
평범하고 지루한 생활이지만 국방부 시계만 빨리 가면 그뿐 아닌가.
거기서도 운이 억세게 좋아 소대에서 2명 뽑는
주간 근무자에 발탁 되었다.
야간 초소는 4~50미터 마다 있지만 주간 초소는 500미터, 훤히 트인 곳은
1키로 정도나 떨어져 있다.
그러니 내가 근무 할 때는 다른 사병들은 취침 시간이니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초소 마다 짱 박혀 있는 도색잡지가 홍수인데 한 달만 지나면 시큰둥하다.
낮에 움직이는 병력이라곤 G.P(남한 철책과 북쪽 철책 사이의 우리초소)로
들어가는 수색 중대장 찦차 뿐이다.
그 괴팍스런 수색 중대장은 우리가 철책 문을 따면
(철책문은 소대장 입회하에 주간 근무자가 무지막지한 큰 자물통 두 개를 딴다.)
쏜살같이 G.P로 들어가다 말고 노루가 보이면
바로 차 세우고 M16으로 따다당 갈긴다.
그양반 실력이 실력인지라 총알은 맨땅에 헤딩이지요.
근데 이 노루란 놈은 총소리가 나면 조질라게 도망가다가 100여m만 가면
꼭! 아니! 반듯이! 급제동을 해서 긴 모가지로 뒤돌아보네.
명 재촉 하느라고.
이번에도 명중 못 시키면 수색 중대장 때려치워야지.
그 차의 운전병과 통신병은 쓰러진 노루를 주으러 가질 않는다.
왜냐. 철책 안쪽은 거의가 지뢰밭이기 때문이다.
그놈들은 겁나서 그 노루를 가져가지 못하고
그날 밤 매복 들어가는 수색대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새벽에 가지고 나온다.
그래서 사단 수색대 애들은 어느 병사들 보다 힘들고 고달픈 줄 안다.
철책 주변에는 삐라가 널려 있다.
어떤 날 새벽에는 그거 쓰는게 일이다.
북쪽에서 오는 삐라는 흔이 있는
쫄따구 생활 힘들면 북으로 와라, 아니면 사상 교육 책자가 대부분이다.
남한에서도 삐라를 보낸다.
내용은 이렇다.
남한 라디오 쉽게 청취 하는 방법.
북한 라디오는 구조적으로 남한 방송을 못 듣게 되어 있다 한다..
또, 년말에는 손바닥만한 미니달력 12장으로
김창숙 원미경등 스타들 수영복 입은 좀 야한 달력.
더 대단한 것은 X-mas 때 내복하고 담배(거북선)까지 넣어서 보내 준다.
이걸 우리가 볼 수 있는건 전방 모 미군기지에서 풍선에 넣어서 보내는데
역풍을 맞아 우리쪽에 꽤많이 떨어진다.
우리는 주우면 담배만 빼고 소대장한테 반납한다.
취사를 소대별로 하니 버너불로 가마솥에 밥을 한다.
당연히 누룽지가 많이 나온다.
취사병은 소대장 방에 누룽지를 한 반합 갖다 놓는다.
그러면 소대장은 주간 근무자인 나에게 심심할 때 먹으라고 던져준다.
그런 여유로움 속에서 한가지의 고민은 있었다.
신의 시샘 이었을까?
내가 특혜 받은 것처럼 일이 잘 풀리니까 그걸 시기하는 고참이 있었으니
나에게 지혜와 용기가 필요 했다.
그 시련을 극복 하리라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 했다.
그 고참한테는 소대장이 나를 이뻐 하는게 눈에 가시였다.
태권도 승단시험 겨루기 할 때 나한테 넉다운 된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조 병덕이란 자다.
키도 훤칠하고 외모가 준수한 고참인데 마음 씀씀이는 밴댕이 소갈딱지다.
심뽀 또한 남의 호박에 말뚝 박기 좋아하는 노란 놀부 심뽀다.
“서 일병!”
“네! 조 일병님”
“이 식기 세 개만 닦아다 줄래?”
“예, 알겠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그것도 카레라이스 아니면 양고기 나오는 날에만 시킨다.
얼음처럼 찬물에 플라스틱 식기의 덕지덕지 낀 기름기가 제대로 닦일 리가 없죠.
그러면 두 번 세 번 계속 시키는 식이다. 이러면서.
“서일병!” “네!”
“사회에서 뭘 하다 왔길래 식기 하나도 제대로 오사마리(마무리)를 못 짓나?”
“시정 하겠습니다! 조일병님!”
은근히 골탕을 먹이는 것이다.
식기가 세 개인 이유는 그 위 고참 상병들이 조일병한테 시킨 것을
제 놈 것까지 보태서 나한테 시킨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전방에서는 구타금지를 지시했었고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하는 올바른 군인상을 덕목으로 훈시했다.
그런데 이 좃뺑대기(조병덕을 고참들이 부르는 별칭)는 예외였다.
우리 소대에서는 알아주는 뺀질이에다 똥개도 안 물어갈 후레자식이다.
고참들한테는 납작 업드려 꼬랑지 살랑살랑 흔들고
졸병한테는 감언이설로 빵쪼가리나 탐내는 전형적인 악질군바리이다.
이 인사가 바로 위의 내 고참이다 보니
진짜 나의 밑에 후배들 보기도 민망하고 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떠올리게 되었다.
어느 날 부터인가 뺑대기 놈에게 한번쯤 폭력을 가하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초여름에 교통호 작업을 하는데 나보고 제 총을 가져 오라는게 아닌가?
전방에서는 사소한 작업을 해도 만약을 대비해서
두 명이 무장된 총을 들고 경계를 서야만 했다.
특히나 다른 병사의 개인화기(총)를 함부로 만지는 것은 금기시 되어 있다.
안전사고가 빈번하게 나기 때문에 책임 규명 차원에서
다른 병사의 보급품이나 관물대를 만지면 안 되는 것이다.
말없이 개인 화기를 갖다 주고 돌아서니까
소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병덕 일병! 창고에 가서 낫 좀 하나 들고 와라”
그 소리 듣자마자 조 일병
“서 일병 가서 낫 좀 갖고 와라”
창고로 들어가서 낫을 갖고 뛰어 나오며 20여m 남짓에서
“야이 씨발놈아 낫 받아라”
하며 낫을 던졌는데 아뿔싸!!!
총들고 경계 서고 있는 뺑대기 그놈 총뿌리에 낫이 걸려 뒤로 빗겨 나갔다.
그놈은 그 자리에 까무라쳐서 털썩 주저앉았다.
20센티만 가까이 맞았으면 난 감방에서 콩밥 신세였을게다.
그 순간을 목격한 병사는 10여명에 소대장과
전망대의 주간 근무자인 왕고참도 다보고 있었다.
소대가 발칵 뒤집어졌다.
내가 순식간에 이성을 잃은듯 싶었다.
그 정도 까지 위해를 가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겁만 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그 사건후 조일병은 고문관이 되다시피 고참들 눈 밖에 났고
나는 고참들은 물론 후배 병사들한테도 신망이 두터워졌다.
뺑대기 고문관은 설자리가 없어졌다.
개밥에 도토리가 따로 없었다.
내무반에서의 내 위상이 높아졌다.
그래도 나는 그 사람을 전역 할 때까지 깍듯이 고참대우 해 주었다.
79년 8월 2일이다.
오랜만에 야간 경계 조에 편성되었다.
이틀 전부터 장대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새벽4시 다른 초소들은 다 철수했다.
대공 초소와 기관총(M60)초소만 철수를 늦추고 있었다.
그날은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서 철수가 늦어지고 있었다.
내 초소는 졸병과 함께 지키는 기관총 초소였다.
둘이 기지개를 켜는 순간 전방에서 총소리가 따당 하고 연발로 들렸다.
기관총 초소에는 벨 없는 찌릭찌릭 누르는 상황 보고용
전화기가 소대 상황실에 연결 되어 있었다.
나아가 중대 상황실 멀리 대대 상황실까지 연결되는 군용 전화이다.
교육 받은대로 조그만 소리로
“통신보안! 60초소 서일병입니다”
“어 그래, 말하라”
“전방200메터 지점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들렸습니다”
간단하게 보고를 마치고 대수롭지 않게 30여분을 대기 했다.
그시간 중대 O.P(지휘소) 상황실
내 옆의 대공초소에서의 보고는
“전방에서 총소리”로 보고 되었다.
잠시 뒤 옆의 대공 초소에서 흥분하여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손들어!”
“쏜다!”
“너 누구냐?”
나한테는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극심한 안개에 보이질 않았고
목소리만 접수해서 중대 상황실에 중대장하고 통화하는 격이 되었다.
100여M전방에서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누군가 손에 힌 천을 들고 슬슬 걸어 나오고 있는 거 같았다.
그 대공 초소에서는 당황해서 상황실에 보고도 않고 흥분해서
그쪽 소대장이 철책문을 따고 꽁꽁 묶어 놨습디다.
“송 경호 하사”라는 귀순자였습니다.
전날 비 쫄딱 맞고 북쪽에서 밤10시경에 출발해서 지뢰도 용케 피해가며
이 시간을 기다렸다가
총 두발을 신호로 표시하고 넘어 왔단다.
나는 상황 보고 잘했다고
사단장(오자복)이 업어주고 푸짐한 상품은 물론 포상 휴가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뒷말이 무성 했었지요.
넘어오는 순간 내 초소의 화력을 다쓰면 이렇다.
1. 기관총에 200발의 실탄이 장착되어 있다. 예비탄통(200발)
2. 개인화기에는15발 실탄 장착. 예비탄창 7개.
3. 수류탄,4발
4. 크레모아격발기,3~4개, 크레모아는 한번 누르면 200~400개의 파편이 날아간다.
5. 조명탄 2개
이런 화력이면 눈감고 당겼어도 간첩 잡은 겁니다.
말이야 되지요. 다 철수하고 내 초소만 남아 있었으니까.
이 말은 내가 제대 할 때까지
소대장 중대장 선임 하사들한테 수시로 듣던 이야기였습니다.
그자가 살았으니 귀순이고 내 총 맞아 죽었으면 무장공비가 된다는 뜻이죠.
국방부에 보고 하기 나름이던 시절이니까.
그 당시 공비를 잡으면 무슨 혜택이 있냐?
로렉스 시계를 손목에서 팔뚝까지 걸치고 사단장 헬기 타고 6개월 휴가래요.
두 계급 특진은 물론 말뚝을 박아도 준위까지는 승승장구란다.
그런데 그 사람(송경호 하사)을 보니
총알도 피할 정도로 대꼬치처럼 삐쩍 말랐더라구.
그런 불쌍한 사람이 배고프고 죽지 못해 목숨 걸고 귀순을 했는데
총질이 말이나 되는가?
생사람 잡아 팔자를 고친다고?
나를 뭘로 보고 까불고들 있어?
비무장지대 안은 풀이나 잡목도 별로 없다.
봄에는 화공 작전이라 해서 철조망 안에 불을 지른다.
아군이나 북한군이나 비슷한 시기에 거의 동시에 말이다.
또 여름에는 초소앞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제초 작업을 한다.
지뢰가 많이 깔려 있기 때문에 제초 작업하다 안전사고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옆 소대에서 제초 작업 하다 풀 베던 병사가 아니라 경계 서던
3소대 내무반장이(제대 3주 남겨 놓고) 지뢰를 밟아 헬기로 후송 됐습니다.
또 안전사고 한건 하나.
우리 중학교 한해 후배인데 살천리인가? 미산인가 그쪽...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잘 모르겠네.
우리 군대 동기인 것은 확실하고 3대대소속이다...
3대대 경계지역은 6사단 서쪽으로 철원 평야 지대이다.
그쪽은 무슨 댐 처럼 절벽 뚝을 쌓아서
공비가 못 넘어오게 되어있는 지역이다.
그 뚝방 위에서 근무 서던 후배 동기가
태권도를 너무 못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을쯤 그녀석도 후임자를 받아 졸병 하고 같이 경계근무를 서게 됐는데
마침 그 졸병이 태권도를 잘했다네요.
그래 이놈은 경계 서다말고 졸병한테 태권도를 사사받게 된 거지요.
몇날 며칠을 배워서 태권도를 잘 하게 됐는지는 몰라도
그게 미안 했던지 하루는 이 친구가 졸병한테
“야 너 수류탄 까서 던지는 법 아냐?”
“예 제대로 모릅니다.”
“내가 가르쳐 줄 테니 똑바로 봐라.”
이렇게 시작된 수류탄 까는 교육이 급기야 안전핀까지 뽑고 말았던 것이다.
“야! 이렇게 해서 던지기만 하면 되는 거야”
하는 순간 왼손에 든 안전핀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대로 끼워 놔야만 하는 그 중요한 안전핀을 컴컴한 초소 안에서 잃어 버렸다는 것다.
졸병도 라이터 불을 켜고 찾았을 것 아닌가베,
수류탄을 꼭 쥐고 있던 이 동기는 사색이 되었겠죠.
일회용 라이터는 3~4분만 계속 해서 켜고 있으면 열 받아서 터지고 만다.
라이터마저 폭발 하니까 이 친구 엉겁결에 사대위에 수류탄을 놓고 말았죠.
밑에 앉아서 졸병하고 같이 안전핀을 찾으려고 말이죠.
앉으려는 순간 수류탄은 사정없이 터졌죠.
그 친구의 상체는 거의 수습이 안됐다고 합디다.
사대 밑에서 안전핀을 찾던 졸병은 상처 하나 없이 살았지요.
그 후배 동기는 불행 중 다행으로
후임병 교육 중 장렬히 사망했다 하여 국립묘지에 안장 되었습니다.
우리 중대 경계구역 동쪽으로는 1중대(신명교 친구도 동기) 구역이다.
이 지역은 그 유명한 철원 땅굴이 위치해 있다.
원래 1중대O.P(지휘소)는
땅굴 발견 전에는 우리측G.P(비무장지대 안의 우리관측소)였다.
그런데 땅굴 발견 지점이 철책과 G.P 사이였기에 철책을 G.P로 앞당겼던 것이다.
74년에 발견한 땅굴이니까 4년전에 철책을 앞으로 당길 때 북측과
총격전도 심심치 않게 한 모양이다.
적G.P와는 7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지금은 1중대 O.P 후방으로 땅굴 견학을 한다.
땅굴견학은 그때도 공무원이나 학생들에게 허용 되었다.
그 땅굴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나라 국도의 터널 정도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하갱도는 수직으로 지하 70 m에 완성되어 있다.
넓이는2M50정도이고 높이는 2M정도이다.
그러니까 무지 비좁고 졸렬하게 만들어졌다.
4열종대로 어깨동무하고 나올 정도이다.
내가 볼 때는 김일성이가 미친 지랄 한 거 같다.
페바(철책후방)지역 에서는 대대 취사라 잔밥통은 근처 농장에서
수거 해갑니다만 이곳에서는 민간인이 들어 올 수 없으므로
큰 구덩이를 파서 그곳에 잔밥을 버리고 어느 정도 차면 매몰 시킨다.
그런데 종종 그곳에 고라니가 와서 잔밥을 먹다가 빠지는 사태가 발생 한다.
웬만큼 빠져도 대부분 다시 도망가는데 한 놈이 허우적거리다 걸려들었다.
고라니 전문 고참이 도복끈으로 모가지를 묶어서
다섯 명을 동원 취사장으로 끌고 가
수도꼭지에 끼우는 호스를 모가지에 박아서 그 피를 빨아 쳐 먹고
얼굴에 피범벅을 해 가지고 나한테도 빨으라고????
거참 환장 하것네
내가 저걸 빨아서 키가 20cm가 커진다 해도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으이구 소름끼쳐......난 못해.......
오!!!!! 진짜루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아!!!!! 글쎄......그런 일 있은 후
3일후에 10월 26일 박대통령 시해 사건이 난 것 아니유...
그때 후방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완전 전투태세에 방어 진지로 밤새도록 뺑이 깠다는 거 맞지요?
우리부대는 어디 앞으로 더 갈데가 있어야지.
특별한 사항은 철모를 쓰고 이동하라 정도였습니다.
12.12 5.18 이런 숫자 다들 기억 하시지요?
어수선한 시절 우리 친구들은 군 복무에 충실 했을 겁니다.
물론 방위 생활한 친구들은 복 받은 거지요.
2007년1월 서진석씀
너무 길어져서 여기까지 1부로 마감하고
2부는 페바(철책 후방)지역 중심으로 역어보겠습니다.
여자 친구들은 군대 용어를 잘 몰라 재미가 반감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첫댓글 시골친구의 군대이야기 입니다. 정말 글을 잘써요! 학교다닐때도 이빨을 잘깠지!! 한번 읽어보세요. 재미있어요!!
지 정영 의 군생활시절을 한눈에 표현 했구만~
재 개띠 맞어?